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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여행
스캇 펙
[서문]
삶은 복잡하다. 우리들 각자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길을 개척해야 합니다. 여기엔 자습서도, 공식도, 쉬운 해결책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올바른 길이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잘못된 길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길을 잃었을 때, 나무들의 북쪽 면에서 자라고 있는 이끼를 따라가면 길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고 말해 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메리카삼나무 숲에 들어가면 나무에는 모든 방향으로 이끼가 뒤덮여 있다는 것도 귀띔해 주어야 할 겁니다.
First Step 성장
[1장 의식과 고통의 문제]
고통이란 인간 존재의 일부가 되었고 에덴동산 이레로 줄곧 그래 왔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사과를 따먹자, 인간은 의식을 갖게 되었고 의식을 갖게 되면서 인간은 곧바로 자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신은 인간이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인간은 갑자기 겸손하고 부끄럼을 타게 되었다. 따라서 이 신화를 통해서 우리는 부끄러워하는 인간의 모습을 알게 된다.
인간은 부끄럼을 타게 되어 있다. 에덴동산에서 자의식을 갖게 되면서 우리는 부끄럼을 타게 되었다. 이런 일이 우리에게 생기면서, 우리는 스스로를 분열된 존재로 의식하게 되었다. 우리는 자연과 하나라는 의식, 우주의 dfl부라는 의식을 잃게 되었다. 그리고 삼라만상의 나머지와 하나라는 의식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은 천국에서 우리가 추방되었다는 것으로 상징된다.
-성장의 고통
실제로 우리는 에덴으로 돌아갈 수 없다. 사막을 지나 앞으로 곧장 가야만 한다. 하지만 이 여행은 힘들고 의식은 늘 고통스럽다.
노화란 생물학적 문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노화는 선장을 드러내놓고 거부하는 것이며, 정신적-영적 성장이라고 하는 인생의 패턴을 받아들인다면 누구나 피해갈 수 있는 심리적인 혼란일 수 있다.
인생의 초기에 배우고 성장하기를 그만둔 사람들 그리고 변화하기를 그만두고 고정되어 버린 사람들은 종종 소위 제 2의 유년기에 빠진다. 이 사람들은 불평을 하게 되고 지나친 요구를 하게 되며 매사에 자기중심적이다. 그러나 제2의 유년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겪은 첫 번째 유년기를 벗어나지 못해 의식 아래에 잠재해 있던 감정적인 유아성이 드러나면서 성인기를 가리고 있던 겉치장이 닳아 얇아진 것이다.
-건설적인 고통
비생산적인 고통과 생산적인 고통의 차이는 성장의 고통을 다룰 때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사항이다. 두통 같은 비생산적인 고통은 당장에 제거해야만 하는 것이지만 생산적인 고통은 참아내고 헤쳐 나가야 한다.
나는 신경증적인 고통과 존재론적인 고통이라는 말을 더 즐겨 사용하는데, 여기서는 두 가지를 구분하는 방식을 예로 들겠다.
우리들은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일정한 죄의식이 필요하다. 나는 그것을 존재론적인 죄의식이라고 부른다. 그렇지만 나는 우선 우리의 존재를 북돋아 주는 것 이상으로 너무 지나친 죄의식은 오히려 우리의 존재를 저해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신경증적인 죄의식이다. 이것은 골프가방 안에 골프를 치기에 가장 적당한 14개 정도의 클립을 넣지 않고 87개 정도를 넣고 골프 코스를 돌아다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감정적인 고통이나 괴로움에 대처하기 위한 무식해 보이기는 하지만 아주 단순한 규칙이 있다. ~~이 과정은 3단계로 되어 있다.
먼저, 여러분들이 감정적으로 고통 받고 있을 때, 자신에게 묻는 것이다.
지금 내가 겪는 괴로운 - 걱정이나 죄의식-은 존재론적인가 아니면 신경증적인가? 이 고통은 나의 존재를 강화할 것인가 아니면 제한할 것인가?
지금 약 10% 정도는 정말로 이 물음에 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90% 정도는 이런 질문을 한다고 생각할 수 있으면, 그 답은 매우 명확할 것이다.
예를 들어 이전에 연체료를 과다하게 물게 되어서 제때에 소득세를 정리하는 데 꽤 신경을 쓰게 되었다면, 그때 느끼는 불안감은 존재론적이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한편 지금 겪고 있는 괴로움이 신경증적이고 자신의 존재에 해롭다고 확실하게 되면, 2단계로 넘어가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러한 격정이나 죄의식이 없었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그리고 세 번째 단계는 그랬으면 하는 식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익명의 알코홀 중독자가 가르쳐 준대로, 마치 그런 것처럼 행동 하거나 혹은 제대로 된 것처럼 허세를 부리는 것이다.
인간은 부끄럼을 타게 마련이지만, 우리는 신경증적이거나 존재론적인 방식으로 대처할 수 있다.
유명한 연사의 강연을 듣고 있는 청중들 속에서 나는 이따금 내가 물어봐야 할 질문이나 알려 주고 싶은 정보 혹은 어떤 논평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공개적으로든 연설이 끝난 후 사적인 자리에서든, 하지만 나는 주저하고 만다. 그 이유는 너무 부끄럽거나 거절당할 것이 두렵고 혹은 바보처럼 보일까봐서이다.
시간이 지난 후에, 나는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다. 너 자신의 부끄러움에 대처하는 방식, 즉 질문하기를 망설이는 그런 방식이 네 자신의 존재를 강화시켜 주는 것인가 아니면 위축하는 것인가? 이런 질문을 던지자마자,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분명히 나의 존재를 위축시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래, 스캇, 네가 그렇게 부끄럼을 타지 않았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네가 영국 여왕이거나 미국의 대통령이라면 어떤 식으로 행동했을까?
답은 자명했다. 난 강연자에게 다가가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내 자신에게 말했다. “좋아, 그렇다면, 앞으로 나가서 그런 식으로 해보는 거야, 잘 하는 척하는 거야. 부끄럽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는 거야.”
나는 이렇게 하는 것이 두려운 일이라고 인정하지만 그럼으로써 용기가 솟아나는 것이다. 나를 끝없이 놀라게 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용기가 뭔지를 아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너무나 극소수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려움이 없는 것은 용기가 아니다. 두려움을 모르는 것은 일종의 뇌상이다. 용기란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혹은 고통을 무릅쓰고 앞으로 전진하는 능력이다.
-의식과 치유
고통을 대하는 태도를 가장 빠르게 변화시키는 방법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우리의 영적 성장을 위해 계획되었다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가 선악과에서 열매를 땀 과 우리에게 의식이 생겨났다. 그러자 우리들은 의식 때문에 고통을 받기도 하고 구원되기도 한다. 구원이란 말은 치료와 동의어이다. 물론 우리가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고통을 느끼지 않으므로 고통을 알게 되는 것은 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적으로 의식 때문에 고통을 알게 된다면, 또 한편으로는 의식으로 인해 구원을 얻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구원이란 점차 의식을 갖게 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구원은 치료의 과정이며 완전하게 되어가는 과정이다.
-사막의 오아시스
의식으로 인해 더 고통스러워질 수도 있지만 더 큰 기쁨을 맞볼 수도 있다.
[2장 비난과 용서]
용서하는 법을 배우게 되면서 우리는 부쩍 성장할 수 있다.
- 무지의 고통
진실은 내가 그것을 원한다는 것이고 내가 치러야 할 대가는 끊임없이 계속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진리와 의지
완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인간에게 성공이나 선함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의지가 약할 때 실패할 가능성이 더 많기 때문에 인간은 그런 식으로 자기 권리를 강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강한 의지를 가졌다는 것은 자기를 주장 할 수 있는 대단한 힘을 가진 것이고 엄청난 축복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모든 축복은 그 안에 저주를 감추고 있으며, 부작용을 수반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강한 의지에서 나타나는 최악의 부작용은 강한 기질, 즉 분노이다.
의지는 자신보다 더 높은 힘에 의해 제어되어야 한다.
-비난 게임
악인들은 매우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자기애 적이고 자아도취에 빠져 있고 자신들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이들이야말로 가장 부적절하고 파괴적인 비난에 탐닉하는 사람들이다.
우리 자신의 죄나 결점을 드러낼 수 있는 증거가 있게 되면, 그리고 그러한 증거 때문에 궁지에 몰리게 되면, 대체로 뭔가 잘못되었고 자기 교정을 해야 한다고 깨닫게 된다. 이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을 나는 거짓의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물론이고 자신에게도 거짓말을 할 수 있고, 자신들의 결점이나 악행을 고집스럽게 모른 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을 이끄는 동기는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어떠한 증거가 이들의 죄나 결점을 드러낸다 하더라도, 항상 자기 자신을 선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자기 교정을 하려고 하지 않고 대신에 종종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면서까지 증거를 없애 버리려고 한다.
프레드릭 뷔흐너(Frederick Buechner)의 <소망하는 사유 :신학적 입문Wishful Thinking : A Theological ABC>
이 책의 시작 부분인 A항목에서, 뷔흐너는 분노를 열거하면서 그것을 뼈를 갉아먹는 것에 비유한다. 여기저기에 힘줄과 골수 그리고 남겨진 작은 조각들이 널려 있고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더 물어 뜯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유일한 문제라면 당신이 갉아먹고 있는 뼈가 바로 당신 자신이라는 데 있다.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은 습관이 된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얼마나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 생각할 때마다 당신들은 결국 계속해서 끊임없이 그 뼈를 물어 뜯고 있는 것이다.
게임을 그만두는 유일한 방법은 멈추는 것이다. 비난 게임을 멈추려면 용서가 필요하다. 바로 용서야말로 비난 게임을 멈추고 끝내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 악의 실재
- 값싼 용서
진정한 용서가 발휘될 수 있는 것은 유죄 평결이 났을 때만이 가능하다.
-비난과 마조히즘
마조히즘은 항상 자기의 모습을 변장해서 나타나는 사디즘이다. 변장한 증오, 변장한 분노.
-용서의 필요성
용서의 과정은 이기적으로 이루어진다.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이유는 그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용서를 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며 자신들의 잘못을 기억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네가 그 일을 꾸며낸 거지라고 말하기 십상이다. 이들은 심지어 무감각할 수도 있다. 우리가 용서를 하는 까닭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이다. 우리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왜냐하면 치료에 도움을 주는 정도를 넘어서 분노에 집착하게 되면, 우리는 성장을 멈추고 영혼은 오그라들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3장 죽음의 의미]
칼 샌드버그의 <특급열차>라는 시가 있다.
「나는 이 나라의 일류 기차 가운데 하나인 특급열차를 타고 있네.
천 명의 승객을 실은 강철로 만들어진 15개의 객차는 평원을 가로질러 푸른 안개와 검은 공기를 뜷고 간다네.
(모든 객실은 산산이 조각나 녹이 슬 것이고 식당칸과 침대칸에서 웃고 있는 모든 남자와 여자들은 재가 될 것이네.)
나는 흡연실에 있는 남자에게 어디로 가고 있냐고 물었다네. 그는 ‘오마히’라고 대답하네.」
이 시는 죽음을 노래하고 있다.
나는 사물의 이면을 직시하는 습관을 기르게 되었고, 이 습관은 그 이후로 내게 커다란 동무이 되었다. 인간이란 존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게 되면, 내 마음 t고에 떠오르는 첫 번째 대답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 모두는 죽게 마련이다. 이때부터 나는 죽음에 대해서 호의적이었던 것 같다.
성장해 가면서 우리는 모두가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 인정하게 된다. 우리 모두는 폐물이 되어 녹이 슨 재가 될 것이다.
인생은 유한한 것이라는 인식 때문에 우리들 대다수는 허무한 감정에 빠져들게 된다. 마치 지푸라기처럼 우리들은 죽음의 신에게 잘게 잘려질 것이므로, 보잘 것 없는 인간이란 존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w마시동안이라도 자손들을 통해서 삶을 연장할 수도 있겠지만, 몇 세대만 지나가면 우리의 이름조차도 기억에서 사라질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멕베스는 비탄한다.
“인생은 움직이는 그림자에 불과하도다. 인생은 소란스럽고 분노에 차 있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이 바보가 지껄인 이야기이다.”
-죽음의 공포
과연 그럴까? 인생이 그처럼 아무런 의미도 없다면, 죽음이 삶의 의미를앗아가는가? 인생은 헛된 것인가?
나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죽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이다. 죽음이란 의미를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주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죽음에 대해서 호의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던 이유는 죽음을 통해 삶에 대한 의미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죽음은 멋진 연인이다. 만일 당신이 살면서 무의미와 권태감을 겪고 있다면, 왜 사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까?
위대한 사랑과 마찬가지로, 죽음은 신비로움으로 가득하고 상당히 흥미로운 의미가 들어 있다. 왜냐하면, 죽음의 신비로움에 대해 고민하는 동안에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죽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고민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 삶들은 죽음에 대해 생각조차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들의 인식 속에서 죽음을 몰아내기를 원함으로써 자신들의 의식을 제한한다. 그러므로 샌드버그의 시 <특급열차>는 기차에 대해서 언급함은 물론이고 더 큰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 셈이다. 인생은 한정되어 있고 오마하로 가고 있다고 말한 그 사람은 자신의 의식 속에 자신의 진정한 목적지, 즉 죽음에 대해서 제한된 것이다.
-죽을 때를 선택하는 것
전이성 암에 걸린 두 집단의 여자들을 대상으로 연구를 해왔던 스탠포드 대학의 정신의학자, 데이빗 시걸David Siegel은 연구를 통해서 놀라운 결과를 얻어냈다. 첫 번째 집단은 통상적인 치료를 받게 했고, 두 번째 집단은 통상적인 치료에다가 추가적으로 심리치료를 받게 하였다. 당연히 두 번째 집단의 환자들은 불안이나 우울증, 고통을 덜 호소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연구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 단 세 명만이 사망했는데, 심리 치료를 받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두 배 정도 더 오래 살게 되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기적적인 치료
그의 몸을 열었을 때 이미 암투성이가 된 상태였지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암은 이미 치료 불가능한 상태였지요. ~~~기껏해야 그는 6개월 정도 살게 될 겁니다. 그런데 그리고 나서 5년 또는 10년 후에 그 사람은 암의 흔적도 없이 잘 살고 있는 것이다.
오랜 기간 동안 의사들은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고, 연구가 시작된 것은 불과 15년밖에 되지 않았다.
희귀한 사례에 나타나는 유사점들 가운데 하나는 환자의 입장에서 그들의 삶에 매우 심오한 변화를 가져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앞으로 살 수 있는 날이 1년 남았다는 소릴 듣자마자,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 것 같다.
만약 내가 살아남는다면 절대로 IBM에서 일하지 않을 거야. 내가 하고 싶은 일은 가구를 손질하는 거야. 이 일이 난 늘 하고 싶었어. 또는 내가 1년밖에 살지 못한다면, 난 절대로 구닥다리 내 남편과는 살고 싶지 않아. 이런 결정을 내린 후에 그들의 삶에서 그러한 변화가 일어나면, 암은 사라져 버린다.
모든 질병의 원인은 심리적, 정신적, 사회적, 육체적인 것임이 실제로 나탄나다. 물론 선천적인 장애나 뇌성마비와 같은 에외적인 사례들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조차도, 삶에 대한 의지가 결정적으로 생을 연장하고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
-육체적이고 심신 상관적인 장애들
지난 30년 동안 우리는 이 모든 정신의학적인 장애들에는 깊은 생물학적인 근원, 그 이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우리가 오늘날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정신의학자들이 너무도 생화학에 매혹되어 있어서 아직도 유효한 과거의 심리학적인 지혜들을 모두 망각해 버릴 위험에 처해 있다는 점이다. 정신분열증과 같은 장애들은 단순히 육체적인 장애만은 아니다. 그런 장애들은 역시 심리적-정신적-육체적 장애이다. 그리고 암과 같은 질환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은 다면적인 원인을 가지고 있다. 즉, 육체적이고 심신 상관적인 원인들.
심각하거나 만성적인 질환을 앓고 있다면, 자신을 돌아보고 그런 질병을 겪으면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여부를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이렇게 하려면 아무쪼록 자기 자신에게 너그러워져야 한다. 어떤 면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고, 우리를 지치게 만드는 것이다. 조만간 우리들 모두는 그 뭔지도 모를 빌어먹을 심신 상관적인 장애나 다른 이유로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죽음을 이해하기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죽음과 임종에 관하여>
그녀는 실제로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대담하게 말을 건넸고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가온 죽음에 대해서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물어 보았다.
그녀의 연구는 이 주제에 관한 여러 가지 다른 책이 나오도록 하였다. 그 가운데 레이몬드 무디의 <생 이후의 생>, 죽음과 임사체험의 순간에 대해서 썼던 칼리스 오시스와 얼렌더 해럴드슨의 < 죽음의 시간에>등이 있다.
이들이 발견한 것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과학자이자 정신의학자인 레이몬드 무디는 임사체험을 기억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순서대로 변화를 설명했다고 한다.
첫째,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천장에 있는 것처럼 침대에 누워 있는 자기 몸을 보았고 의사와 간호사들이 자신들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주 정확하게 보았다고 기억한다.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은 -임사체험에서 유일하게 놀라운 부분인데- 어떤 종류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들이 빠르게 휙 날아서 터널을 빠져나오자 하나님이나 혹 예수님으로 인식되는 어떤 빛과 맞닥뜨리게 된다. 이와 같은 빛이라는 존재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회상하게 된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삶이 얼마나 엉망이었는지를, 그러나 그 빛과 같은 존재가 엄청난 사랑과 용서를 베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경향을 보인다. 그리고 나서 그 빛과 같은 존재는 그들에게 돌아가라고 명령하는데 그들은 그 빛에 복종하여 마지못해 되돌아온다.
무디에 따르면, 이런 경험을 했던 사람들이 이전부터 영적이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그런 경험을 한 이후로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면 그들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반드시 믿게 되고 죽는다는 것에 대해 두려움이 훨씬 경감되곤 한다는 것이다.
죽음에 가까이 다가갔다가 살아나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점이 흥미롭지 않은가? 하지만 이것이 위안을 주지는 못한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이것이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인간처럼 유한한 존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배우기 위해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우리들에게 생긴 모든 일은 우리가 배우는 것을 도와준다. 그리고 죽음보다 더 많이 배울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진화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유기체들은 성적으로 번식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단순히 무성생식을 하며 자라기 시작하고 이러한 유전적인 물질은 계속 살아간다. 사실은 이들은 누군가가 우연히 지나가다가 으깨지만 않는다면 죽지도 않는다. 이들은 노화나 자연적인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다. 진화 단계가 어느 정도 충분하게 진행될 때까지도 유성생식이 발견되지 않다가, 유성생식이 발견되는 싲머에 노화나 자연적인 죽음과 같은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최종 기한에 올렸을 때 가장 잘 배운다. 얼마나 놀라운 세상인가! 심리치료를 하면서, 나는 집단을 이루어 진료를 할 때 특별히 효과적이고 유용한 기법을 사용하곤 하였다. 집단의 구성원들이 무한한 시간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으로 보이면, 나는 어느날 갑자기 이렇게 말한다.
“좋아요, 여러분. 이 집단은 시한이 6개월 정도 남았습니다. 나는 6개월 안에 이 집단과의 치료를 끝낼 겁니다. 여러분들에게는 6개월이라는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절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엉덩이만 붙이고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단 최종 기한만 주어지면 얼마나 재빠르게 움직이는지 놀랄 지경이다.
-죽음과 성장의 단계들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일정한 단계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을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가 밝혀냈다. 그 단계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발생한다. ※부인 →분노 →거래 →우울 →수용
하지만 이런 일이 아주 일상적인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름다운 다섯 번째 단계까지 이르지 못한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부인하고 분노하고, 거래를 하거나 우울해하면서 죽는다. 그 이유는 우울증 효과가 너무나 고통스럽고 힘들어서 사람들은 포기를 하고 다시 부인하고 분노하며 거래를 하게 되기 때문이다.
퀴블러-로스는 그 당시에는 이런 것을 인식하지 못했지만, 가장 놀라운 것은 우리가 심리적 영적인 성장의 측면에서 중대한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정확하게 같은 순서대로 같은 단계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막을 가로지르기 위해 커다란 발자국을 남길 때마다 우리들이 내적으로 중대한 발전을 이룰 때마다 우리는 부정, 분노, 거래, 우울, 그리고 수용이라는 과정을 겪게 된다.
-죽는 법 배우기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나르시시즘
우리는 왜 그토록 지나치게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그 이유는 주로 우리 자신의 나르시시즘 때문이다. 나르시시즘이란 매우 복잡한 현상이다. 이러한 현상은 어느 정도는 인간의 생존본능이라고 하는 심리학적인 측면에서는 필요하다. 그러나 유아기를 지나면서 나르시시즘은 대체로 자기 파괴적으로 변해 버린다. 통제되지 않은 나르시시즘은 심리적이고 영적인 병의 중요한 전조이다.
영적으로 건강한 삶은 나르시시즘으로부터 점차 빠져 나오도록 되어 있다. 물론 나르시시즘으로부터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경우도 매우 흔한 일인데 그런 경우도 매우 파괴적으로 변한다.
정신과 의사들은 자존심이 받는 상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나르시시즘적인 상처라고 부른다. 그리고 나르시시즘적 상처가 심화되면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항상 나르시시즘적인 상처를 조금씩은 받는다. ~~ 나르시시즘적인 상처는 결과적으로 우리를 비참하게 만들거나 성장시킨다. 하지만 죽음은 커다란 문제이다. 우리에게 존재론적인 소멸이 다가오는 것만큼 우리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나르시시즘적인 애착과 자부심을 위협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이러한 두려움에 대처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 -평범한 방법과 현명한 방법-가 있다. 평범한 방법이란 두려움을 마음에 두지 않고 의식하려 하지 않으며,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젊을 때는 이런 방법이 효과적이다.
하지만 더 멀리 떼어버리려고 할수록, 두려움은 더 가까이 온다. 시간이 흐른 후, 주변의 모든 일 때문에 죽음을 상기하게 되기 시작한다. 자녀의 졸업식, 병들어가는 친구들, 삐걱거리는 관절. 즉, 평범한 방법은 아주 현명해 보이지는 않는다. 사실, 우리가 죽음과 대면하기를 미룰수록, 우리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더욱 두려워진다.
현명한 방법이란 가능한 빨리 죽음을 직시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정말로 단순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즉, 우리 자신의 나르시시즘을 극복할 수 있으면-우리가 완전하게 극복할 수는 없겠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 죽음에 대한 관점은 심리적,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 커다란 자극이 된다. 이런 사람들은 “어차피 죽게 되어 있는데 무엇 때문에 어리석고 늙은 내 자신에 집착하겠는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사심 없이 여정을 떠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인간의 나르시시즘이라는 촉수는 민감하고 날카로워서 항상 늘 시시때때로 잘라내야 한다.
우리 자신의 나르시시즘, 자기중심주의, 오만함을 더욱더 줄여 나갈수록 죽음을 덜 두려워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용기를 가지고 살아가게 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사랑을 더 많이 나누게 된다. 더 이상 우리 자신을 보호해야 할 필요가 없어지므로 우리자신으로부터 눈을 돌려 진심으로 다른 사람들을 알아볼 수 있게 된다. 점차 자기 자신을 잊고 더욱더 신을 기억할 수 있게 되면서 우리가 이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지속적이고 근원적인 행복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모든 위대한 종교가 전하는 중요한 메시지이다.
“누구든지 생명을 구하려는 자는(즉, 누구든지 자신의 나르시시즘을 고집 하는자)생명을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해 자기 생명을 잃는 자는 생명을 얻을 것이니라.”
[4장 신비로움에 대한 기호]
우리 모두는 흡연이 폐암의 원인이 된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담배에 입도 대지 않았던 사람들이 폐암에 걸려 사망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나의 할아버지와 같은 분은 92년 생애의 대부분 동안 담배를 엄청나게 피우셨지만 폐암에 걸리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확실히 폐암의 원인에는 흡연 이외의 뭔가가 있다.
이런 상황은 사실상 모든 질병에는 물론이고 그 질병의 치료에도 적용된다.
-연금술로서의 심리학
- 호기심과 무관심
-신비로움과 영적인 여정
현실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닫혀 있는 시계의 구조를 알려고 하는 사람과 다소 비슷해진다.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잘못 가운데 하나는 자신들이 뒷주머니에 신神을 넣고 다닌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영적으로 완전하게 성숙한 사람들은 더 잘 알고 있다. 신과 마찬가지로 현실이란 깔끔하게 작은 지식의 꾸러미 안에 묶어두거나 서류 가방 안에 넣어 가지고 다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Next Step 너 자신을 알라
[5장 자기애와 자만심]
자기애와 자만심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자기애와 자만심의 차이는 항상 혼동된다.
자기애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가 군대에서 정신과 의사로 근무했을 때, 군은 성공한 사람들을 성공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 연구를 위해서 각기 다른 분야에서 이런 사람들 수십 명을 함께 불러 모았다. 이 사람들은 모두 뚜렷하게 성공을 거둔 삼십대 후반에서 사십대 초반의 남자와 여자들로 구성되었다.
이 집단의 과제를 처리하는 방식에서 상당히 주목할 만한 현상이 두 가지 나타났다.
첫 번째는 사람들이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이었다. ~~~주목 할 만한 또 한 가지 사실은 공통적인 관심이 사랑, 신, 나의 가족이 아니라 내 자신 오직 내 자신이었다.
이러한 결과는 자기애를 신중하게 드러낸 것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자기애는 자기에 대한 배려, 존중 그리고 책임과 자기 이해를 함축한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없다. 하지만 자기애와 자기중심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성공한 사람들은 배우자와 부모를 사랑하고 상사를 배려한다.
그러면, 자만심이란 무엇인가?
군대에서 집단 연구를 경험하고 약 8~9년이 지나서, 나는 거짓말하는 사람들을 가까이 접할 기회를 가졌었다.
이들의 자만심은 자신들의 인생에서 유일하게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자만심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언제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무슨 일이든 할 것이다. 무언가가 자신들의 자만심을 위협한다면, 자신들의 불완전함을 드러내는 증거가 있다거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 나쁜 감정을 느끼게 하는 뭔가가 있다면, 이런 증거나 나쁜 감정들을 이용해서 고쳐나가려고 하기보다는 그런 증거를 없애 버리려고 노력할 것이다. 여기에서 나쁜 행동이 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자기애)과 우리 자신에 대해서 항상 좋은 감정을 가져야 한다는 것(지속적으로 자만심을 지켜야 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과는 차이가 있다.
비록 우리 자신을 항상 존중만 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을 사랑하고 소중히 해야 한다.
-죄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점
자기 교정이 필요할 때, 우리 자신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지 않도록 도와주는 장치는 존재론적인 죄의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존재하기 위해서 일정 정도의 죄의식, 일정 정도의 회개가 필요하다. 죄의식이 없다면, 자기 교정이라는 필수적인 심적 기제가 부족하게 된다. 우리가 항상 옳다고 생각하게 되면, 당연히 우리 내부의 좋지 않은 부분을 교정할 수 없게 된다.
- 깨어지는 순간에 얻어지는 은총
우리가 성장하려면, 죄의식을 느끼는 순간들, 회개의 순간들, 자만심을 버리는 순간들, 우리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시련을 견디는 순간들이 반드시 필요하다.
-귀중한 짐
- 준비작업
우리에게 기름을 조금만 나누어 주세요. 우리도 신랑을 맞이하고 싶어요. 당신들의 기름 전부도 아니고 반도 아닌 그저 조금만 나누어 주세요.
하지만 다섯 명의 슬기로운 처녀들은 부탁을 거절하고 문밖으로 나갔다.
이 인색하고 비열하고 불결한 여인들아! 너희들은 어째서 저 가엾고 복 없는 처녀들에게 최소한의 기름도 나누어 주지 않았느냐?
하지만 신랑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실제로 신랑은 이렇게 말했다. 오, 슬기롭고 아름다운 처녀들아, 나는 너희를 사랑하노라. 우리들은 영원히 푸른 초원에서 뛰놀 것이다. 그리고 저 어리석은 처녀들로 말하자면, 그들은 이를 갈며 영원히 지옥에서 말라 죽을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기름이란 준비를 상징한다는 것, 현실주의자인 예수가 우리에게 하고 있는 말은 준비는 나눌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과제를 대신 해줄 수는 없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중요한 존재로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자신에게 책임이 지워질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6장. 신화와 인간의 본성]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화를 진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난 60년 이상 동안 정신의학과 심리학에서 이루어낸 발전 가운데 하나는 -주로 칼 융과 더 최근에는 죠셉 켐벨)과 같은 사람들 덕분에- 신화는 반드시 사실이기 때문에 신화가 된다는 것을 밝혀낸 것이다.
-신화와 동화
-책임과 신화
-성경 속의 신화
성경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성경은 거기에 써 있는 그대로 모두 사실일까? 신화를 모아둔 것일까? 그저 낡아빠진 율법일 뿐일까? 성경이란 무엇인가? 성경은 우리의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 걸까?
성경은 항상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성경의 상당 부분은 은유와 신화로 되어 있고, 매우 복잡해서 종종 역설적으로 해석되기 십상이다.
-선악의 신화
선악과에서 열매를 따 먹기 전까지 인간에게는 진정한 선택권이 없었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갖게 된 것은 바로 의식을 갖게 됨으로써 진리를 따를 것인지 아니면 거짓을 따를 것인지 하는 선택에 직면하게 되면서였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의 이야기는 또한 선과 악의 모든 발생 과정과 상당한 관계가 있다. 선택이 없으면 악도 있을 수 없다. 신이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허락하게 되면서 불가피하게 이 세상 안에 있는 악의 문도 열어 놓은 셈이다.
-영웅의 신화
-해석의 문제
성경에 나온 이야기들을 어떤 식으로 해석해야 할 것인지 수도 없이 선택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봐서 그 자리에서 소금 기둥으로 변해버렸다.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이 이야기는 우리가 받을 벌과 신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인간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암시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7장 영성과 인간의 본성]
-본능과 본성
철새를 연구해 온 과학자들은 새들이 별을 이용해서 이동한다는 것을 실제로 알게 되었다. 이 새들은 유전을 통해서 자기 자신 안에 플로렌스든 알라바마든 매번 정확한 지점에 도착할 수 있게 해주는 천체 항법장치와 같은 복잡한 패턴을 내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갈메기들은 이렇게 말할 수 없다. 이번 겨울은 버뮤다나 바하마 아니면 바르바도스에서 보냈으면 해. 녀석들은 플로렌스나 알라바마가 아니면 어디에도 못간다.
다른 한편으로, 무한한 자유와 변덕스런 행위야말로 우리 인간을 구분지워 주는 특징이다. 필요한 수단만 충족되면 바하마나 버뮤다. 바르바도스에도 갈 수 있다. ~~변화무쌍하고 겉으로 보기에 이상한 행동을 할 수 있는 극한적인 자유야말로 우리 인간 본성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영적 성장의 단계
변화를 지향하는 독특한 인간의 능력은 인간의 영성(靈性)에도 반영된다. 나이가 들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사려 깊은 사람들을 보면 우리들이 모두 영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같은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영적 성장이나 종교적인 발달 단계들은 저마다 다르다.
에모리 대학 캔들러 신학교 교수인 제임스 파울러 교수는 <신앙의 단계Stages of Faith>라는 책에서 영적인 상장을 여섯 단계로 서술하고 있다.
최초의 1단계는 “혼돈/반사회”라고 명명한 것이다. 이 e나계에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인구의 약 20%정도가 포함된다. 이 단계는 영성이란 것이 부재하고 원칙없이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이 단계를 반사회성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과의 모든 관계에서 자기 이익만을 도모하고 겉으로는 안 그런척하면서도 속으로는 교묘하게 속이면서 진실한 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2단계의 전환은 대체로 급작스럽게 급작스럽고 극적으로 이루어지는데 나는 이 단계를 형식적/제도적이라고 이름 붙였다. ~~~ 이 단게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통제를 제도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감옥도 일종의 제도가 될 수 있다.
2단계의 사람들은 누군가가 형식이나 의식을 바꾸고, 자신들이 쓰던 기도서를 변경하고 새로운 찬송가를 도입하기 시작하면 무척 혼란스러워 한다.
이 단계에 있는 사람들이 종교적인 행위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특징이라면 신을 외적인 존재로 본다는 점이다. 이런 사람들은 신이 얼마쯤은 우리들 안에 깃들어 있다는 것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한다. 이들은 거의 예외 없이 신이란 저 위에 혹은 저 밖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대체로 신을 남성적인 모델에 따라 상상한다. 그리고 신은 사랑을 주는 존재라고 믿는다. 그리고 적절한 시기에 주저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징벌의 힘도 신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신을 마치 하늘에 있는 자비로운 경찰쯤으로 보고 있다.
일단 이렇게 되면 원칙주의자가 된다. 더 이상 자신을 통제하기 위해 외적인 제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 자기 통제가 가능한 존재가 될 것이다.“누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신화나 미신 그리고 낡아빠진 제도를 필요로 한단 말인가?”라고 말하는 시기가 바로, 건강한 인간의 발달 과정에서 청소년기에 해당하는 바로 그 시기인 것이다. 그러고 나서 교회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하고 의구심이 많은 회의론자나 불가지론자가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시점에서 사람들은 내가 회의적/ 개인적이라고 명명한 3단계로 넘어가기 시작한다.
3e나계에 있는 사람들은 비록 일상적인 의미에서 종교를 가지고 있지는 않더라도 2e나계에 있는 사람들보다 영적으로 앞서 있다. 이들은 결코 반사회적이지는 않고 주로 사회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사회적 책무를 위한 의사들의 모임이나 환경운동과 같은 조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면서 헌신적이고 사랑을 베푸는 부모가 된다. 주로 이런 사람들은 과학자들이거나 과학적인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이다.
4단계는 “신비적/공동체적” 단계이다. 이들은 사물의 이면에 달라붙어 잇는 것들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다.
-적개심과 신앙
-겉모습은 속일 수 있다.
부자 동네의 감리교나 장로교 목사들은 신도들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심리학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경우가 더 많다.
신에 대해서 말하지만 신앙심이나 영적인 면이 너무 부족한 사람들도 있다.
4단계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1단계에 있는 사람들이 이런 부류이다.
-인간의 발전과 영적인 성장
-자신의 아성을 점검하라
[8장 중독: 신성한 질병]
-융과 알코올 중독자 협회(AA)
-종교를 갖게 하는 프로그램
Ultimate Step
신을 찾아가는 여러 갈래 길
[9장 영적인 성장에서 종교의 역할]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
선불교에 입문한지 20년이 지나서 내가 직접 선택했던 길은 기독교이다. 하지만 선불교가 아니었더라면 내가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지 의심스럽다. 기독교를 받아들이려면, 누구든지 역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내 인생길에서 내적인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그 일은 C.S. 루이스의 <스크류테잎 편지들>이라고 하는 소설을 읽었던 서른 살쯤에 일어났다. 이 소설은 스크류테잎이라고 하는 고참 악마가 조카 웜우드에게로 보낸 충고의 편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순종이란 정도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C.S. 루이스가 나에게 가르쳐 주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교훈적이다. 하지만 이 년쯤 지나서 비로소 나는 정말로 기독교인으로서 세례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 예수의 실재
- 예수의 재능
-희생으로서의 세례
그렇게 하려면 여러 가지 희생이 뒤따라야 한다고 느꼈다. 한 가지를 예로 들자면, 내 인생을 이끄는 운전석에 내가 있어야 한다는 그런 생각을 포기해야 한다. 만일 내가 기독교인이 된다면 내 일생은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하나님 그리고 신비로운 그리스도의 몸에 속해야만 할 것 같았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생각은 사라져야만 하고 아무래도 내 자신을 희생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결국 나는 1980년 4월 9일에 세례를 받게 되었다. 세례는 노스 캐롤라이나 rakflry 목사님에 의해 일부러 교파를 초월한 뉴욕 성공회에서 거행되었다.
-교회가 저지른 죄
기독교가 그저 그런 종교라든가 종교란 다 거기서 거기다 라고 생각했으면 나는 43살에 기독교인이 되지도 세례를 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기독교 교회가 저지른 가장 큰 죄는 아마도 오만함과 나르시시즘일 것이다. 이러한 오명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신을 독점해서 자기들 뒷주머니에 넣고 다닌다고 생각한다.
교회가 지은 죄로 말미암아 떠안게 된 짐 가운데 하나를 더 들라면 그것은 오해받고 있다는 것이다.
-죽음 이후의 삶
[10장 물질과 영혼]
Epilogue
곤경에 처한 정신의학
정신의학은 영성의 문제를 단지 간과는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그것을 무시해 왔다.
물질주의의 장막 뒤에 보이지 않는 사물의 질서가 틀림없이 존재한다고 나는 믿고 있다.
많은 이들이 보이지 않는 질서를 무시하거나, 적극적으로 부인하거나, 혹은 그것으로부터 힘껏 도망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영적인 존재가 아닌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만 그들이 사실을 회피하려 하고 있다는 의미일 뿐이다. 어떤 이들은 스스로를 무신론자라고 생각하고, 신의 존재를 부인한다.
우리 모두는 영적인 존재이며, 인간을 영적인 존재로 여기지 않는 정신의학은 크게 실패하고 말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Review]
책을 읽으며 문득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라고 한 성서의 구절이 생각났다. 복잡한 삶에 지친 사람이라면 이 말이 위로가 된다. 그만큼 인생이 고달파 때로는 그만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저자는 그런 안이한 생각을 하기 전에 당신은 정말 이 세상에서 삶의 의미를 다 이루었는가 묻고 있다. 무언가 부족한 것이 있다면 당신의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인생은 수학공식이 아니다. 무언가 해답을 얻은듯하지만 또 다른 의문에 빠지게 되기에 누구도 만족한 생을 살다간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 더 높고 수준 높은 삶을 향해 끝없이 달려가야만 한다. 그 길이 고통을 동반한다 할지라도 그렇게 달려가는 것이 인생의 목적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완전함으로 가는 길은 쉬운 길이 아니다. 늘 고통스럽다. 완전함을 지향하면서 행동하는 것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더 어렵다.”(본문)
정신과 의사이자 작가인 스캇 펙은 1978년 <뉴욕타임스>의 최장기 베스트셀러인 “아직도 가야할 길” 의 저자이며, 그 책을 집필한 후 불교도에서 크리스천으로 개종했다. 그 후 1993년 그의 기독교적인 영성을 더 확대시켜 “끝나지 않은 여행”을 출간했다.
이 책은 인생의 과정을 유아성장과 자신의 발견 그리고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는 과정으로 보고 있다. 특히 하나님과 만나는 영성을 다음처럼 구분해서 영적 성숙의 단계를 설명한다.
1단계(혼돈/반사회)
2단계( 형식적/제도적)
3단계(회의적/개인적)
4단계(신비적/공동체적)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는 “300파운드가 넘는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며 예수는 어떤 심정이었을까?”라는 말로 인간 예수의 고통을 이해하려고 했다.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에 대해서도 “예수는 인간이며 신이다. 그것은 50대50으로 나누어진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인간이면서 전적으로 신' 이다. 예수의 신성만을 강조한 것은 가현설로 기독교 초기에 나타났던 이단의 주장이다. 그렇다고 인성만을 강조하는 이단도 있다.” 라는 말로 이해하였으며,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는 “내재론과 초월론도 혼란스럽다. 내재론에서는 인간존재 안에 내재하는 신성, 성령의 하나님 혹은 퀘이커교도들이 말하는 '내적인 빛'에 초점을 맞춘다. 반면에 초월론에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혹은 하늘에 계신 힘센 경찰처럼 인간에게서 외재하는 신성에 초점을 맞춘다. 이 두 가지 관점이 모두 필요만 치우칠 때 혼란에 빠진다.”라고 했다.
이단에 빠지지 않으려면 우리의 신앙이 “이단에서 벗어나려면 우리는 역설을 받아들여야 한다. 통합적인 사고란 역설적인 사고를 말한다.” (본문)
성화의 단계에 대하여 “예수가 인간이면서 동시에 신이라는 역설적인 현실을 받아들이면서도 우리는 아직도 99%는 신이고 1%는 인간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인간 스스로 예수처럼 행동 할 수 없다는 구실을 갖게 만든다. 우리는 예수와 동일시해야하고 예수처럼 행동해야 하고 예수처럼 되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기독교가 해야 할 일 즉,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다.”라고 했다.
험한 인생의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길을 가는 동안 우리에게는 수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우리가 외롭지 않으려면 신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
“이 세상이 생각보다 위험하지 않으며 적어도 외롭게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의 은혜를 통해서 보호받을 수 있는 곳이라는 관점이 필요하다” (본문)
“오늘날까지도 나는 계속해서 내 일생을 신의 소유로 인정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본문).
이 고백을 하기 위해 저자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있고 그 길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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