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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도 시험쳐서 들어가던 시절
1960년대 당시 국민학교 6학년 학생들은 ‘국6병’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치열한 중학입시에 시달렸다. 중학교 평준화가 이뤄지기 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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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부산중,경남중,개성중 등 소위 명문중학교에 가기 위한 입시경쟁은 요즘 고3 수험생들의 입시전쟁을 방불케 했다. 경남중,부산중 입학은 경남고,부산고를 거쳐 서울대로 이어지는 ‘엘리트 코스’의 출발점이었다. 그 당시는 부산대학 등 지방의 국립대학을 서울의 사립대학인 연,고대 보다 더 쳐주던 시절이라 자기지방의 국립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도 좋은 중학교 합격이 꼭 필요했다. 부산중,경남중은 워낙 우수한 학생들만 지원하고 어중간한 아이들은 포기하니까 지원율이 2~3대1이었고 개성중은 그보다 약간 떨어지는 아이들이 많이 오니까 지원율이 보통 5~6대1 이었다.
전기(1차)시험 학교중 일류는 경남중,부산중이고 개성중은 1.5류, 동래중은 전기시험 학교지만 후기(2차)시험 학교중 성적이 좋은 학생들이 들어가는 대신중,동아중,서중,중앙중과 같이 이류 학교라 하였다. 그렇지만 경남중,부산중,개성중,동래중 등 전기시험에 불합격한 학생중에 성적이 좋은 학생들이 지원하는 대신중,동아중,서중,중앙중에도 합격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후기 시험 학교지만 그 학교 출신들은 자기학교도 1.5류 라고 생각한다.
후기시험 학교 중 학교 인식이 안좋아 지원자가 적어 정원 미달인 학교들이 몇 학교가 있었는데 그런 학교들을 줄만 서면 들어 갈 수 있다고 3류학교라 하였다..그리고 후기시험의 다른 중학교에 떨어진 학생들도 정원 미달인 그 학교에 다시 지원을 하면 정원 한도내 에서 그냥 들어 갈 수 있었다.
1966년 12월 입학 시험때 부터 동래중학교도 동문들의 입김으로 후기시험 학교로 전환하였다. 전기의 경남,부산,개성중에 아슬아슬하게 떨어진 좋은 성적의 학생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였다. 하지만 먼 통학거리와 교통 불편 등으로 기대한 만큼의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이듬해 전기 시험 학교로 다시 전환하였다.
전기시험의 경남중,부산중,개성중에 낙방한 학생들이나 후기의 좋은 중학교에 낙방한 학생들 중 일부는 요즘 고3학생들이 하는 것 처럼 재수를 하였다, 주로 부모님이 교육 계통에 인맥이 있거나 다른 연고가 있는 아이들로 자기가 다니던 학교나 일류 중학진학 합격율이 좋은 초등학교에서 6학년을 한번 더 하였다..그 당시에는 재수 학원이 없었기 때문에 집에서 독학을 하며 재수를 하는 학생들도 더물었지만 있었다. 그렇지만 재수하여도 성공률은 별로 였다. 그 당시 주위를 둘러보면 일류학교에 또 떨어져서 후기 학교로 들어가는 학생들이 더 많았다.
'60년대 중학교 입시제도는 수시로 바뀌었다.
'60년대 초반에는 중학교 입시도 국가고사로 치루었다.
지금의 수능시험처럼 전국의 중학 입시생들이 같은 시간에 같은
문제(문교부 중앙고시위원회가 출제한 문제)로 시험을 쳤으며
1961년도 5.16군사혁명으로 체력장 시험도 따로 생겼다.
그전까지는 7과목 시험치다가 '63년 12월 입학시험시에는 국어,산수 2과목만 시험쳤는데
박근혜 전대통령 중학입학시험 치는 년도라 2과목으로 줄였다는 설이 있었다.
'64년도 12월7일 입학시험에는 7과목으로 원복되었으며 시도별 공동출제제를 실시하였는데
서울지역 공동출제 자연과목 시험 문제중 1문제 정답을 단일 정답이 아닌
복수 정답으로 인정해 달라는 이른바 "무즙파동"이 있었다. 그래서 였던지
'65년 12월초 내가 중학입학시험 칠때에는 학교별 개별출제제로 바뀌었었다.
본교시를 치르고 나면 체력장 시험이 따로 있었다.
60미터 달리기, 턱걸이(여자는 팔굽혀펴기), 공 던지기, 넓이뛰기 모두 4개 종목 각 5점 만점으로
총 20점 만점이었댜. 기본점수를 8점인가 주었던 것 같고, 추위와 긴장이 겹쳐 만점 받기가 쉽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그때 공던지기는 3점을 받고 다른 3종목은 만점을 받아 총18점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래, 가슴에 수험표를 달고 체력검정 시험을 치르고 있는 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
<체력검정 과목. 던지기 사진만 빠져 있다.>
턱걸이
팔굽혀 펴기
넓이 띄기 : 도움닫기 없이 제자리에서 뛴다.
60미터 달리기
본교시 필기 시험은 12월초에 있었다. 아침 8시 30분까지 집합하여 고사장에 입실하였다. 국민학교와는 다른
책걸상모습이 인상적이었다. 1점당 한 문제이니까 모두150문제를 붙잡고 씨름을 한다. 1교시시험(9:00-10:00)
은 국어(30점)와실과(10점), 2교시시험(10:10-11:10분)은 사회(30점)와 음악(10점), 3교시시험(11:20-12:20)
은 자연(30점)과 미술(10점), 그리고 마지막 4교시 시험(12:30-13:30)은 산수(30점) 과목을 쳤다.
산수는 단답형 주관식 문제가 많았고 다른 과목은 객관식 택일형 문제이었다. 국가고사에서 우리들 시골 출신들
은 음악이니 미술이니 하는 과목들이영 자신이 없었다.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래, 시험장밖 정문 앞이나 담벼락에서 응원하고 있는 가족들 모습
할머니,어머니 들이 손주 꼭 붙으라고 엿을 붙이고 있다.
추운 겨울 녹지도 않는 엿에 침 발라서 부착
아버님들도 응원부대로 등장, 담벼락에 매달려 시험장을 보고 있다
절에서 열심히 불공을 드리고 있는 어머니들, 우리 아이 꼭 붙게 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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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학년 교실의 공부
그 당시 대도시 아이들의 6학년 입시공부는 이렇게 했다고 한다.
수업시간이 시작되면 담임선생님은 그 시간에 배울 단원명을 쓰고 공부할 내용의 핵심적인 것들을 칠판 가득히 썼다. 그러면 학생들은 공책에다가 그대로 필기를 했다. 필기가 끝난 것을 확인한 선생님은 차근차근 설명을 하셨다. 아이들은 선생님이 설명해주시는 내용을 잘 듣고 이해를 하여야 했다. 물론 필요한 부분은 추가로 더 써넣기도 했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은 요령껏 필기를 잘해서 나중에 시험 공부할 때 덕을 보았다.
소위 이러한 수업방식을 주입식 수업방법이라고 한다. 일본이 2차대전에서 패한 후 짧은 기간동안에 인력을 양성해내는데 이 주입식 교육의 효과를 많이 보았다고 하듯이 주입식 교육은 단기간에 많은 지식을 학생들에게 주입시키는데 효과적인 교육방식으로 평가를 받았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6.25 이후 인력양성이 시급한 때라 세계사조에 따라 주입식 교육을 집중적으로 시켰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수업시간에 발표 같은 것을 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어쩌다 선생님이 물어보시는 질문에 답변만을 하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하루 종일 수업시간에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3월이 지나고 4월 중순이 넘어서면 기온이 점차 올라가기 시작하고 교실은 점점 더워지기 시작했다. 밤잠이 부족한데다가 특히 점심시간 이후에는 포만감에 나른함까지 겹치면 아이들이 하나 둘씩 졸기 시작했다. 요즘 초등학생은 수업시간에 조는 아이들이 거의 없지만 당시의 아이들은 집에서의 과다한 공부와 학교에서의 재미없는(?)수업방법 등의 이유로 조는 아이들이 꽤나 있었다.
대개 6학년 아이들의 교과진도는 6월경이면 다 끝났고 입학시험 볼 때까지 나머지 기간동안은 집중적으로 반복 학습과 시험지를 가지고 공부를 하는 단계로 들어갔다. 물론 그 이전에도 매일 같이 공부한 진도에 따라 시험은 보았다. 집중적으로 시험지 풀이단계로 들어가면 각 교실은 매일 2교시 이후부터 매타작 시간이 된다. 틀린 개수 만큼의 매를 맞기도 하였다.
담임선생님은 자기 반에서 명문중학교에 몇 명이나 합격시키는가가 오직 관심사였다. 그것은 곧 자신에 대한 교장선생님과 학부모의 평가였으며 근무성적평정에 반영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 중학교 입학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교사는 아마도 인사발령 등에서도 많은 혜택을 보았으리라 생각된다.
입학시험 준비를 하면서 학생들이 고생한 만큼 담임선생님도 고생을 했을 것은 당연지사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 때 선생님들은 상당수가 과외를 하여 부수입을 올렸다. 당시에는 현직교사의 과외가 불법이 아니었다. 특히 자신의 담임선생님에게 과외를 받는 일은 일종의 특혜였다. 담임선생님에게 과외를 받고 담임선생님이 출제하는 문제로 시험을 보았으니 그 결과를 물어서 무엇하랴. .
하나 재미있는 일은 암기를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했던 때라 어지간히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은 교과서의 내용을 머릿속에 다 암기하고 있었다. 그래서 시험을 볼 때는 마치 필요할 때 교과서를 펼쳐 보면서 시험을 보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다만 차이가 났던 것은 응용문제를 풀 때였다.
따라서 응용문제를 얼마나 잘 푸느냐가 성적에 직결되었다. 이것은 아이들의 지능지수가 성적과 상관관계가 있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다. 왜냐하면 교과서를 다 암기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고 출제위원들이 상당수의 문제를 비비꼬아 응용한 문제를 출제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문제를 많이 풀었는지 수학의 어지간한 문제는 풀어보지 않아도 답의 대강을 알아낼 정도였다. 특히 도형 문제는 유형이 한계가 있었으므로 문제를 다 풀어서 답이 좀 이상하면 반드시 다시 풀어 정답을 맞혔다.
음악 같은 경우는 계이름을 비롯하여 음표와 쉼표까지도 정확히 암기하고 있었다. 미술은 교과서의 그림을 전부 기억하고 있었으니 교과서의 내용을 그대로 시험에 출제하면 아이들은 거의 다 정답을 맞혔다. 참 코메디 같으면서도 힘겨웠던 시절이었었던 것 같다.
중학교 입학시험 보던 날
부산이지만 시골이나 다름없는 우리학교 아이들도 6학년 때는 괴외공부를 했었다. 학교 마치고 집에 가서 저녁먹고 초등학교 옆에 있는 담임선생님 하숙방에 가서 과외공부를 하였고. 집이 먼 아이들은 도시락2개를 싸 가지고와서 학교에서 저녁까지 먹고 선생님 하숙방에 가서 과외공부를 하였다. 과외수업비는 부모님들이 선생님에게 따로 챙겨주셨다. 그러다보니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은 과외수업을 할 수가 없었다. 나도 과외공부를 했었는데, 평소 성적이 좋은 편인데 가정 형편상 과외공부를 못하는 애들은 과외공부하는 애들을 부러워했었다.
그런한편 너무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중학교도 진학 못하는 동기들이 남자는15%,여자는30%정도 되었다.
중학교 입학시험이라니요? 요즘 아이들은 그런 이야기를 하면 눈이 동그래져서 쳐다본다. 하긴 고등학교까지 무시험 진학을 하고 있으니 상상이나 할 수 있으랴. 중학교를 시험 보아서 갔다고 말하면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표정이다. 도시에 따라 다르겠지만 1969년까지 부산에서는 중학교를 입학시험을 치루고 진학을 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초등학교 6학년 전 과정을 11월 말 정도까지 마무리를 하고 12월 초순 무렵에 자기가 지원할 중학교에 응시 원서를 낸 후 직접 가서 시험을 보면 성적순에 의해서 합격자가 가려졌다. 시험은 전기와 후기 두 번까지 볼 수가 있었는데 물론 전기(1차) 중학교는 경쟁이 치열했다.
지금 고3학생들처럼 원서 쓸 무렵이 되면 학부모가 담임교사를 면담하고 자기가 시험 볼 학교를 결정했다. 학교를 결정하는 기준은 일년 동안 수시로 시험을 본 결과에 따른 성적이었다. 성적이 좋은 아이들은 당연히 전기 중에서도 소위 일류학교라고 하는 곳에 응시를 할 수 있었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전기 중에서 다음 서열 학교를 선택해야 했다. 도저히 전기를 갈 수 없는 성적의 아이들은 어쩔 수 없이 후기(2차)중학교에 응시를 해야 했다. 그
리고 전기에서 낙방을 하고 재수를 하지 않으려면 후기시험에 다시 응시를 하여야 했다.
1966년 늦게 도착하여 중입학시험장으로 열심히 뛰어가는 학생
1960년대 수험표를 가슴에 달고 중학교 입시 시험 치르는 모습
예나 지금이나 시험을 보는 날은 정말 추웠다. 부산상고에서 시험을 쳤다. 아이들은 모두들 해쓱한 얼굴로 수험표 번호대로 정해진 책상에 앉으니 두 분 감독 선생님이 시험지 두루마리를 들고 들어오셨다. 예비종이 울리자 한 분은 시험지를 나눠주시고 한 분은 아이들을 보고 계셨다. 시험지가 다 배부되고 조금 시간이 흐르자 시작종이 울렸다. 아이들은 침묵 속에 문제를 풀었다. 밖에서는 한겨울 모진 바람이 휘잉 소리를 내며 나뭇가지를 흔들어 대고 있었다. 한 시간 또 한시간 그렇게 묵묵히 시험치다 보니 7개 과목 다섯교시 시간이 모두 끝났다.
1964 시험장 인 학교 정문과 담벼락에 대기하면서 응원하고 있는 학부모들
정문앞에 나오니 아버지와 담임선생님께서 기다리고 계셨다.
부산상고 건너편에 있는 중국집에서 아버지께서 선생님과 저에게 따뜻한 우동을 사 주셨다.
며칠후 라디오에서 중학교 별로 합격자 수험번호를 발표해 준다. 그러면 라디오 앞에서 내 수험번호를 불러주나 하고 기다리는데 내 번호 2040번을 불러 준다. 함께 있던 아버님.어머님과 나는 서로 손을 맞잡고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응시한 학교 게시판에도 합격자 번호를 붙여 놓았다. 발표날은 항상 희비가 엇갈렸다. 기뻐하는 아이와 부모들...눈물을 흘리며 무거운 발걸음을 돌리는 아이와 그 아이를 어루만져 주는 부모들....
그 당시 우리학교는 말만 부산이지 부산변두리로 어지간한 시골의 면단위 학교보다 규모가 더적어서 학년당2학급으로 총12학급에 전교생이 700명 정도 되었고 우리동기들은 남자한반,여자한반으로 남50여명,여50여명 정도되었다. .그래서 경남중,부산중 지원자는 없었다. 통학거리도 멀거니와 합격 확률이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음 선택이 개성중학교, 4명이 응시하여 나를 포함 2명이 합격하고 2명은 떨어졌다.
떨어진 친구의 울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떨어진 친구중 1명은 후기 중앙중학교에 입학하고
1명은 재수를 하였는데 그 이듬해에 1차는 또 떨어지고 결국 영도 남중에 진학하였다.
<중학입시 폐지>
중학교 입시에 대한 경쟁이 과열 양상으로 치닫자 정부도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68년 7월15일, 권오병 문교부 장관은 중학교 무시험 입학제를 발표한다. 아동의 정상적 발달 촉진, 초등학교 교육의 정상화, 과열 과외공부의 해소 등을 정책 목표로 한 입시개혁안이었다. 중학교 무시험 입학제는 69년 서울을 시작으로 70년에 부산, 대구, 광주, 인천 등 10대 대도시로 확대됐고, 71년에는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되었다.
시험제 페지로 은행알 추첨하고 있는 초등 6학년생들의 밝게 웃는 모습
은행알 추첨기. 우로 2, 좌로 1바퀴 돌리면 운명의 은행알이 한 개 투하.
첫댓글 가슴아픈 이야기 같습니다
경기중 콩나물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개성중학교는 부산상고를 많이 갔던걸로 기억합니다
홍깨님의 글을 보니 구구절절 공감이 갑니다.
가까이에 있는 부산중학교는 실력이 간당 간당하여 자신이 있을랑 말랑,
안정 지원으로 개성을 선택한 것도 그렇고
경쟁율 심한 개성에 원서 넣었다 면 아이쿠 떨어졌네 하던 그 시절이었고
합격 소식을 듣고 기뻐하던 분들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전차타고 다니면서 졸업했지요
선배님도 중학교 입학 시험칠때 국어 산수 두과목 쳤습니까?
@홍깨 예 두 과목. 해 봐야 두해 선배일 건데요..뭘
개성중학교 동문군요.
입학시험의 기억을 대신 짚어 주셨네요. 68년 입학
옛날 중학교 입학시험 치던 때가 그대로 클로오즙 되네요.
라디오에서 나오던 내 이름을 몇 번이나 확인하곤 좋아했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