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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받은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사야 56:1~8
우리는 이사야 53장에서 여호와의 종 그리스도가 고난받음으로써 그의 백성들의 죄를 담당하시고 그의 죽음을 통하여 그의 백성들을 의롭게 하신다는 예언 말씀을 살펴본 바 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자들이 다시 고토로 돌아오게 되는 기적 역시 사실은 여호와의 종의 대속적 고난의 열매로서 이루어지는 은혜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로 바벨론의 포로 생활에서 구원받고 고토로 돌아온 주의 백성들, 여호와의 종의 대속의 고난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제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자기 마음대로 내키는 대로 방탕하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구원받은 은혜에 대하여 응답하는 책임적 삶의 자세가 요구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말씀인 56:1,2 말씀에서 나오는 바 정의와 의의 삶의 삶입니다.
“너희는 정의를 지키고 의를 행하라”
고 하였습니다. ‘정의’ 곧 히브리어 ‘미쉬파트’는 사법적 올곧음, 심판적 정의를 가리킵니다. ‘의’ 히브리어 ‘쯔다카’로서 언약적 의요 자선적 의로움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 된 우리는 율법이 요구하는 계명들을 순종하여 지켜 행해야 할 뿐 아니라 나아가 세상적으로 법적 의무는 짊어지지 아니하였으나 진실한 신앙과 선한 양심에 따라 약하고 뒤처진 자들을 돌아보고 긍휼히 여기고 선을 베풀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기꺼이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열매가 있어야 구원받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입니다. 물론 우리가 행위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요 여호와의 종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고난과 죽음의 수고로 인하여 은혜로 구원받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대로 나무는 그 열매로 보아 안다는 하신 것처럼 하나님 백성다운 삶을 살아가는 자만이 참으로 구원받은 자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 백성다움의 삶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바벨론에서 돌아온 귀환자들은 이제 더 이상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혈통적 우월함을 내세워 배타적인 인종주의적 구원 관념에 잡혀서는 안됩니다. 이제 여호와의 종의 대속적 사역으로 인하여 도래한 새 언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 공동체에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만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이방인이라도, 고자라도 만일 진실하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과 온전하게 붙어 있는 연합한 자라면 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3절로부터 5절까지 읽어봅시다.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그의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하지 말며 고자도 말하기를 나는 마른 나무라 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내가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그들에게 주며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여호와를 진실하게 믿고 그를 딱 달라붙어 목숨처럼 사랑하여 섬기는 이방인은 비록 이방인이라도 하나님 백성 중에서 갈라내어 쫓겨나지 않습니다. 이등 백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전 바깥에서 들어오지 못하는 설움을 받지 않습니다. 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비하하여 ‘나는 마른 나무다’라고 자책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안식실을 거룩히 지키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알고 그 일을 즐거이 행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들을 끝까지 붙들며 기도하며 소망하는 고자라면 그는 하나님의 집과 성 곧 하나님의 궁정에서 아들 딸보다 더 나은 이름을 얻게 되고 결코 그 이름이 끊어지지 않는 존귀한 자로 삼아주실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구약 성경 모세의 율법의 규정을 완전히 뒤집는 말씀입니다. 신명기 23장 1절 이하에 보면 모세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하기를
“고환이 상한 자나 음경이 잘린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신명기 23:1)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 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신명기 23:3)
고 선포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규정들에 의하여 고자와 이방 사람들은 하나님 백성으로 간주되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솔로몬 성전 때에 성전의 바깥 뜰은 하나님께 돌아온 백성 이방 백성들로 하여금 경배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아브라함의 백성들과 차별적인 허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선민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 성민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데 실패했습니다. 오랜 기간의 기회를 주었건만 그들은 계속하여 실패하고 하나님 백성답지 못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포도원을 만들고 애굽에서 좋은 포도나무를 옮겨 심어놓았고 정성을 다 기울여서 가꾸어서 좋은 열매 맺기를 기다렸으나 들포도를 맺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렇게 하나님의 종을 보낼 것과 그 하나님의 종 그리스도를 통하여 혈통적인 폐쇄적인 울타리를 다 거둬버리고 이제 새 언약 시대를 맞이하여 이방인도, 고자도 진실한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며 그 법도를 따라 신실하게 행하는 자는 고자도, 이방인도 지극히 아름다운 하나님의 자녀의 이름을 얻게 해주실 것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에도 몇 가지 예들이 나옵니다. 룻기에 나오는 모압 소녀 룻이 그러한 예입니다. 그는 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자기 모압의 우상을 버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자기 신으로 삼고 아름다운 덕행을 따라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의 메시야 가문의 일원이 되는 복을 주셨습니다. 구약 시대에 유다 왕국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 시대에 왕을 섬기는 구스 사람 곧 아프리카 흑인으로서 궁중 내시였던 에벳멜렉은 고자였지만 그가 하나님을 진실히 섬기고 용감하게 목숨을 내걸고 하나님의 참 선지자 예레미야를 감옥 물웅덩이에서 건져내는 일을 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에벳멜렉에게 약속의 말씀을 개인적으로 예레미야를 통하여 주셨습니다. 예레미야 39장 15절 이하에 이르기를,
“예레미야가 감옥 뜰에 갇혔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가서 구스인 에벳멜렉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에 내가 이 성에 재난을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라 한 나의 말이 그 날에 네 눈앞에 이루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 날에 너를 구원하리니 네가 그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지 아니하리라 내가 반드시 너를 구원할 것인즉 네가 칼에 죽지 아니하고 네가 노략물같이 네 목숨을 얻을 것이니 이는 네가 나를 믿었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예레미야 39:15~18)
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언약 백성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심판하시어 그 나라를 망하게 하고 그 백성들을 다 칼에 넘기고 남은 자들도 다 바벨론의 포로로 끌어가게 하시는 그 진노의 날에 하나님은 한 이방인 그것도 내시 한 사람을 위하여 이렇게 친히 칼에서 지켜주실 것이라고 걱정 말라고 노략물같이 목숨을 선물로 얻을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약속해주시는 큰 친절을 베풀어주십니다. 이렇듯 구약 시대에도 벌써 하나님은 이러한 일들을 실제적으로 이루어보이시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이르시기를,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에게 수많은 과부들이 있었지만 오직 저 이방 지역 시돈의 사렙다 과부에게 엘리야 선지자를 보내어 그 가정에 먹을 것을 공급해주시고 죽은 아이를 살려주시고 그 가정에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셨노라고 말씀해주신 바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에도 이러한 고자의 구원과 이방인의 구원 사건이 종종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때가 찼고 하나님의 아들 여호와의 종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으로 인하여 새 언약 시대가 도래하여 이제는 이러한 모든 제한이 다 풀려지고 고자도 진실한 신앙으로 하나님을 붙들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를 행하며 안식일을 지키며 모든 악을 멀리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런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에 합류한다고 약속해주시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6절로부터 7절도 같은 취지의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여기서 보면, 하나님은 자기와 깊이 연합되어 떨어지지 아니하며 여호와의 이름을 뜨겁게 사랑하여 그 이름을 존귀하게 여기며 하나님을 섬기는 안식일을 더럽히지 아니하고 지극히 거룩하게 준수하며 하나님 백성답게 우상을 멀리하고 잡신 숭배를 물리치고 오직 하나님 한분만을 섬기는 이방인은 그 누구라도 하나님께서도 사랑하여 그를 가까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기의 성산 예루살렘의 성전이 있는 시온 산에 이끌어오며 그의 성전에서 그들을 기쁘시게 하고 그들이 드리는 제사를 기꺼이 받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솔로몬 성전에서는 이방인은 성전 바깥 뜰에만 머물러야 하지, 그 안의 장소인 여인의 뜰 입구로 들어갈 수 없고 그 안쪽에 있는 이스라엘 남자들의 뜰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물을 드린다 해도 그들은 그 예물을 바치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저 깊은 곳 제사장의 안뜰에서 제물을 잡아 드리는 것이니 그들은 자기가 드리는 제사를 보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이방인일지라도 성전에서 그들을 기쁘게 해주며 그들이 드리는 제사를 제단에서 기꺼이 열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집은 곧 기도의 집인데 그 기도의 집인 성전이 이제 ‘만인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일컬어질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만의 성전이 아니라 만민이 다 와서 기도하며 제사를 드리는 만민의 성전이기 때문에, 이방인도 고자도 다 와서 예배 드리게 될 것이라고 약속해줍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전이 만민이 경배하는 성전이 될 것이라는 이러한 개념은 묵시록적인 말씀이 계시되는 이사야 66장에서는 매우 충격적인 말씀으로 진보합니다. 이사야 66:18 이하에 나오는 묵시록적 말씀을 보면
“내가 그들의 행위와 사상을 아노라 때가 이르면 뭇 나라와 언어가 다른 민족들을 모으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볼 것이며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징조를 세워서 그들 가운데에서 도피한 자를 여러 나라 곧 다시스와 뿔과 활을 당기는 룻과 및 두발과 야완과 또 나의 명성을 듣지도 못하고 나의 영광을 보지도 못한 먼 섬들로 보내리니 그들이 나의 영광을 뭇 나라에 전파하리라 ...나는 그 가운데에서 택하여 제사장과 레위인을 삼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이사야 66:18~21)
여기서 보면,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세상의 많은 나라들, 민족들 중 이방인들 중에서 자기의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삼아 자기를 섬기게 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어지는 8절 말씀에서도 혈통주의 인종주의, 민족주의의 제한을 깨뜨리고 하나님 백성의 문을 만민에게 활짝 열어제치는 말씀을 덧붙여 주십니다. 8절을 읽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쫓겨난 자를 모으시는 주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이미 모은 백성 외에 또 모아 그에게 속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이미 모은 백성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이스라엘 중에서 택한 구약 성도를 말한다면, 그 외에 있는 백성들에게서 모아서 한 울타리에 속하게 하시는 백성은 신약 시대에 만민들 중에서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아온 자들을 가리킵니다. 요한복음 10:16 말씀에서도 예수님께서 친히 동일한 말씀을 증거하셨으니,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방인 중에서 택한 양들을 부르기 위하여 베드로를 시발로 하여 빌립 집사, 사도 바울, 사도 요한 등 수많은 일꾼들이 보냄을 받아 주의 백성들을 하나님 백성의 양우리 안으로 이끌어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 중에 함께 있는 양무리인 줄 믿습니다.
이러한 모든 말씀들은 이제 유대인들의 혈통주의를 철저히 깨뜨려버리고 하나님의 주권적 뜻에 의하여 자기 백성들을 만민 중에서 불러들일 것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들이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에게 붙어 있으며 그의 계명을 지키며 그의 언약을 끝까지 붙든다면, 그들을 하나님은 사랑하시고 가까이 성산에 인도하여 그의 기도의 집에서 예배를 받으신다고 여기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성전 바깥뜰에서 장사하여 성전을 소란스럽게 했던 이들에게 분노하여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서 소와 양과 염소들을 내쫓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자들에게 가지고 나가라고 하신 후에,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도다”라고 질투하신 바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와서 기도라도 드리려고 그 먼 이국 땅에서 많은 노잣돈을 들여서 성지 순례를 일생에 한번 온 이방인 성도들이 정작 거룩한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에 와서 성전에 들어와 기도하려고 들어왔더니 경건한 분위기는 온데 간데 없고 오직 시끄러운 시장바닥이 되어서 자기 양을 사라고 실랑이를 하니 모든 은혜를 얻고 고국으로 돌아가겠습니까? 그러니 우리 주님의 거룩한 분노가 폭발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일을 하도록 뒤에서 뇌물을 받고 장사꾼들에게 성전 바깥 뜰을 내어준 대제사장들과 제사장들, 성전 경비대장과 종교 실세였던 산헤드린 공회와 바리새인들이 이권 카르텔을 형성하여 돈을 받고 성전을 내준 것이니, 주님은 그들의 악을 인하여 크게 분노하여 그렇게 무섭게 질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이라는 유대인들의 외적인 조건보다 내적인 진실한 신앙의 마음, 믿음, 언약에 대한 충성됨, 하나님의 계명들을 순수하게 지키려고 몸부림치는 자세를 더 소중하게 여기심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신약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은 이방인 성도들인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서 거저 구원받은 우리에게도 이 구원의 선물을 은혜로 받은 자답게 합당한 신앙적 책임 곧 하나님의 선민다운 아름다운 신앙의 열매를 풍성히 맺어가야 하겠습니다. 공의와 공법을 따라 살아가며, 경건과 사랑, 겸손과 온유, 친절과 사랑, 구제와 나눔, 거룩함과 진실함과 용서함의 열매를 주의 백성답게 맺어가야 하겠습니다. 반면에 방탕과 탐욕과 헛된 자랑, 교만, 시기, 분노, 도둑질, 악함과 비방과 불평 등의 들포도 열매를 일체 맺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와 깊이 연합하여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는 주님과의 깊은 연합의 정신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겠습니다. 나를 통하여 주님의 이름의 영광이 높여지고 절대로 주님의 이름에 해가 되거나 손상되지 않도록 그 이름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합시다. 세상 사람이라면 별 것 아닌 일들도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세상에서 일컬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참으로 행실을 조심하여 우리 때문에 주님 이름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늘 근신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주님의 가르침과 사도들의 경건의 교훈들아 세상의 풍조와 세상의 교훈과 인간의 가르침보다 더 완전하고 영원한 진리라는 점을 잊지 말고 내 인간적인 생각과 세상의 주류의 풍조와 판단을 내려놓고 언제나 주의 계명과 가르침에 순종하기를 결단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 말씀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총회에서 배제되었던 고자들을 이제는 받아들이시고 도리어 진실한 신앙을 가지고 경건과 덕행을 힘써 행하면 도리어 존귀한 이름을 얻게 해주겠다고 말씀해주셨으며, 이등 신자로만 치부되던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은 그의 아들의 찢긴 몸 가운데로 난 열린 길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막힘없이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해주셨으니,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과 그의 거룩한 피를 힘입어서 기쁨으로 하나님의 제단에 아무 제한없이 나아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드리는 이 특권을 감사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주님 제단에 부지런히 나와 경배를 드립시다. 부지런히 성전에 모이기에 힘써서 찬양과 감사로 경배드립시다.
또한 주님께서 친히 이르신 바 성전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셨으니, 기도의 집인 하나님 성전에 기쁨으로 달려나와 늘 간구함으로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께 아뢰어 구하는 바를 다 받아 누리는 복된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