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7,18-25ㄱ; 루카 12,54-59
+ 찬미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비가 오겠다고 말하고 그대로 된다’고 말씀하시는데요, 이스라엘 서쪽은 지중해이기 때문에,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면 비가 왔습니다. 또한 남풍이 불면 더워지는 것도 당연했습니다.
사람들은 이처럼 구름과 바람을 보고 날씨를 예측했는데, 예수님께서는 “왜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풀이할 줄 모르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왜 이 시대는 풀이할 줄 모를까요? 시대의 징조를 알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알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대의 징조를 알면 회개하고 새롭게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을 알지 못하는 것과 알려 하지 않는 것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알지 못하는 것을 나무라시는 것이 아니라 알려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나무라십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묵상 나눔 시간에 어떤 선배가 이런 나눔을 했는데요, 신학생들끼리 산으로 소풍을 갔는데 절에서 틀어 놓은 카세트 테잎의 불경 내용이 마음에 와 닿았다고 합니다. 왜 절을 지나가면 “욕심을 채우려는 사람은 많지만 욕심을 근심하는 사람은 적다.”뭐 이런 거 나오잖아요.
그래서 그 테잎을 사려했는데 옆에 있던 신학생이 “야, 니가 저 말을 몰라서 저렇게 못 사는 거냐?”하고 묻더랍니다. 그 순간 망치로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다고 하는데요, 결국 테잎을 사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제게도 많이 와 닿았습니다. 정말 그 말을 몰라서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인지.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왜 이 시대는 살피지 않느냐”고 물으시는데, 우리가 이 시대에 대하여 정말로 모르는 것인지 모르는 척하면서 살고 있는 것인지 되묻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만다”고 탄식하시는데요,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도 “변신이야기”에서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나는 더 좋은 것을 보고 그에 동의한다. 그러나 더 나쁜 것을 따라간다.”(Video meliora proboque; deteriora sequor)
그러나 자신의 비참함에 대한 한탄이 바오로 사도의 결론은 아닙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자신의 비참함보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이 더 크다는 것이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오늘 독서 말씀의 앞부분은 잘 기억하고 인용하는데 그 결론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이토록 비참한 나를 하느님께서 구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합의를 보도록 힘쓰라”고 말씀하시는데요, 이는 ‘내가 이 세상에 왔고,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있기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빨리 너의 삶의 방향을 정하라’는 의미입니다.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