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년 목사
저는 얼마전 고 김수만장로 기념 책 출판 감사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고 김수만 장로님은 경북 안동에서 출생하셔서 40세까지 사업을 하시다가 사고로 한쪽 다리를 절단케 되었고, 하나님께 다리를 주시면 전도자가 되겠다고 서원하자 하나님께서 뒷산나무를 보여주시면서 다리로 쓰라고 하셨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보여주신대로 그렇게 생긴 나무를 발견하고 다리를 만들어 전도자로 나섰습니다.
당시 양반 문화로 복음전도가 힘든 안동에서 목회자도 아닌 평신도가 안동교회 파송 전도인이 되어 온 가족을 60리 밖에 두고 홀로 전도지로 가서 영혼 구원의 열정으로 전도하던 중에 1970년에 소천 하셨습니다.
고인은 제가 시무했던 소호리교회 집사님으로도 봉사하신바가 있으시고, 그분은 한쪽 다리가 없이 절면서 아골 골짜기와 같은 시골을 찾아다니면서 무려 열 교회를 세우신 귀한 분이십니다.
장로님이 고인이 되신지 30년이 넘었으나 아직도 많은 존경 을 받고 계시는 것을 보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느끼고, 또한 많은 감동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2절을 통하여 말씀하시기를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잔치집에서 보다 초상집에서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초상집으로 가는 인생이 참으로 지혜로운 인생입니다. 우리가 초상집으로 갈 때 인생의 많은 유익이 있습니다. 그러면 초상집으로 간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먼저, 하나님은 초상집에 가서 우리 이름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십니다.
본문1절 말씀입니다.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여기서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다” 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기름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재산을 상징하는 말이었습니다. 즉 당시에는 재물이 기름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본능적으로 재물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에게 재물보다 그 사람의 이름이 더 귀하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재물은 죽으면 끝나지만, 이름은 죽어서도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이름은 그의 인격과 그의 존재를 상징합니다. 사람의 이름은 어떤 인격자였는지,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어떤 이름을 남기느냐 하는 것은 그가 얼마나 많은 부귀영화를 누렸느냐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성경에 보면 영원토록 지워지지 않고 남겨진 이름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글씨를 쓰다가 잘못쓰면 지우개나 혹은 화이트로 지우면 깨끗이 지워집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지우개가 없습니다. 우리가 살았던 그대로 기록으로 남습니다.
가인의 이름이 그대로 남아 있고, 사울과 가룟유다의 이름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아벨과 다윗과 베드로와 사도 바울의 이름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 누구도 이름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 어떤 이름으로 남을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노벨상>을 만든 <알프레드 노벨>의 일화가 우리에게 생각지 못한 교훈을 줍니다. 노벨은 <다이너마이트>라는 폭탄을 만들어서 커다란 부자가 되었습니다.
특히 광산을 폭파하는데 다이너마이트가 많이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노벨은 부자가 된 것에 대해서 굉장히 흡족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자신의 친동생이 자신보다 먼저 생을 마감했는데 사람들은 알프레드 노벨이 죽은 것으로 착각하고 많은 기자들과 언론에서 <알프레드 노벨>의 생에 대한 기사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 기사들은 하나같이 노벨이 발명한 다이너마이트가 노벨을 <부자>로 만들기도 했지만 폭탄을 만들게 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었다는 공통적인 보도가 있었습니다.
노벨은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자신이 죽었을 때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이야기 하는지를 우연히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자신이 가지고 있던 부를 사회에 기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생긴 것이 노벨상이었습니다. 자신의 재산으로 재단을 만들어서 <노벨평화상>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위대한 작가 세익스피어는 “내 지갑을 훔치는 것은 내 쓰레기를 훔치는 것이다. 그러나 내 이름을 훔치는 것은 내 목숨을 훔치는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오늘부터 어떤 재물이나 재산보다 우리 이름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하고 이름값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은 초상집에서 눈물의 의미를 깨닫게 하십니다.
본문 3-4절 말씀입니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우리가 초상집에 가보면 눈물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 보면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잔치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웃고 즐기는데서 더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와 반대로 지혜자는 초상집에 마음이 가 있습니다. 잔치는 기본적으로 환상과 망각을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흥겨운 노래를 부르던 중 삶의 목표를 발견한다거나, 산해진미를 먹으면서 인생의 의미를 깨닫기는 어렵습니다.
누구나 놀고 먹고 노래를 부르다 보면 정상적인 사람도 멍청해집니다. 그러나 초상집에 가면 누구나 다 철학자가 됩니다. 초상
집에 가면 누구나 인생의 의미를 찾게 됩니다.
오늘 하나님은 초상집에 가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눈물 속에서 인생을 배웁니다. 눈물 속에서 인생의 의미와 인생의 가치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옛 말에 “인생은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기 전에는 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애 기간에 보면 웃었다는 기록은 한번도 없지만, 울었다는 기사는 세 번씩이나 있습니다.
☛한번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눈물이 아니라 영혼에 대한 뜨거운 눈물이었습니다. 한 영혼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는 의미있는 눈물이었습니다.
☛또 한번은 예루살렘 성을 보며 우셨습니다.
이것은 장차 멸망할 민족의 장래를 보시고 울었던 눈물입니다. 즉 민족을 향한 뜨거운 눈물입니다. 우리에게도 민족을 위해 예레미야처럼 예수님처럼 흘릴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눈물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지기전에 흘린 눈물입니다. 이 눈물은 사명수행에 대한 눈물입니다. 마지막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흘린 눈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명을 감당하려면 이런 눈물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우리도 간절한 마음으로 이런 찬양을 올립니다.
제목: 십자가의 길 순교자의 삶
내 마음에 주를 향한 사랑이 나 의 말 에 주가 주신 진리로
나의 눈엔 주의 눈물 채워 주소서 내 입술에 찬양의 향기가
두손에는 주를 닮은 섬김이 나의 삶에 주의 흔적 남게 하소서
(후렴)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히 함께 하리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에게
순교자의 삶을 사는 이에게 조롱하는 소리와 세상 유혹속에도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리라 내 생명 주님께 드리리
요즘 중국 난징 시내 한 호텔에 최근 문을 연 ‘쿠바(哭솸)’ 눈물방에는 하루 평균 10명의 손님이 찾아와 속상한 마음이 풀릴 때까지 울고 간다고 합니다.
여성 손님이 특히 많아 손님의 80%가 여성이며, 눈물이 많은 여성 손님은 하루 저녁에 티슈 2통을 비우기도 한다고 난징일보가 전했습니다. 요금은 1시간에 50위안(약 7500원)으로 발 마사지 요금과 비슷합니다.
눈물방에는 고춧가루와 마늘 등 눈물이 나오도록 도와주는 최루 촉진제와 울다가 감정이 격해지면 손님들이 마음대로 던질 수 있는 유리잔이나 인형 등도 비치돼 있습니다.
눈물방은 “울고 싶은데 마땅한 장소가 없어 마음 높고 울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인기”라고 말합니다.
어쨌든 우리가 돈을 주고라도 울고나면 마음이 시원해집니다.
눈물은 우리에게 많은 유익을 가져다 줍니다. 초상집으로 가면 눈물의 의미를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초상집에서 우리 인생의 마지막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게 하십니다.
본문 8절입니다.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우리 인생은 죽을 때가 태어날 때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화려한 궁궐에서 태어나도 죽을 때 비참하게 죽으면 그것은 차라리 다리 밑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죽을 때 이름을 아름답게 남기고 죽는 것이 났다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태어날 때에는 얼마나 비참하게 태어났습니까? 사람이 잠을 자는 방안에서가 아닌 짐승이 잠자는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온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무덤이 열리고 땅이 갈라지고 천지가 개벽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또한 3일만에 무덤에서 살아나셨습니다. 그의 이름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저는 몇 년전에 83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신 고 000성도의 장례식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리고 장례식이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목양칼럼을 다음과 같이 썼던 기억이 있습니다.
오전8시, 신촌세브란스 영안실 1호에서 발인예배가 경건하게 드려졌습니다.
오전8:30분, 벽제 화장터로 이동하였습니다.
오전9시 55분, 드디어 고인의 시신이 화구로 들어가고, 유족과 성도들은 7호실로 배치되었습니다.
오전10:30분, 화장이 진행되는 2시간동안 조문객과 유족은 아침 겸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근처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오전11시 55분, 2시간 동안 진행된 화장이 끝나고, 한되 정도 되는 납골함에 고인의 유해가 담겨서 나왔습니다.
오전12시, 용미리에 있는 납골당으로 이동하여, 000호에 안치하였습니다.
저는 한줌의 가루가 되어 나오는 화장터에서, 그리고 한줌의 가루를 안치하는 납골당에서 내 인생의 마지막을 상상 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의 ‘가상 장례식 시나리오’를 작성해 보았습니다.
0000년 00월 00일 00시 00분에 故 金慶年 牧師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음.
장례일정은 00병원 영안실 0호에서 00월00일00시에 임종예배, 00월00일00시에 입관예배, 00월00일00시에 발인예배가 있음.
00월00일00시에 00화장터에서 하관예배가 있고, 00 납골당으로 모심.
그날 저는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과연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나는 과연 몇 년이나 더 목회를 할 수 있을까?
어떤 교회에서 어떻게 목회를 하다가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설까?
내 아내와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나는 과연 사람들에게 어떤 인물로 평가를 받을까?
그리고
하나님은 나에게 뭐라고 말씀 하실까?
결 론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초상집으로 가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이름은 어떻게 남겨 질까요?
우리가 눈물의 의미를 알고, 태어날 때 보다 죽을 때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마지막 심판자가 되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