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내기는 쌀농사의 시작에 불과하다. 모내기 후에도 많은 노력과 땀이 있어야 벼가 제대로 자란다.
모내기가 끝나면, 논에 질소질인 비료를 뿌리고, 농약을 치며, 김매기를 하게 된다. 비료는 농협에 신청하여, 농협 창고에서 운반해 온다. 내가 농사지을 때는 경운기가 귀했다. 17살, 재수하면서 농사지을 때 편도 4킬로 길인 농협에서 비료 4포대를 지고 온 적이 몇 번 있다. 한 포대가 25킬로이니 0.1톤을 지고 십리길을 온 것이다. 어깨가 빠질 듯하고 참으로 힘들었던 기억이다.
비료주기나 농약 살포는 논매기에 비하면 일도 아니다. 논매기는 한창 더운 때에 하는데 그 고역이 말도 못한다. 논 매기란 논 바닥에서 허리를 구부려 논바닥의 잡초를 제거하는 일을 말한다. 보통 수확시까지 2회 정도 매는데 부지런한 사람은 3벌 매기도 한다.
논매기는 기본적으로는 잡초를 제거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밭매는 것과 같다. 주병선은 노래 칠갑산에서 '콩밭 매는 아낙네야 베적삼이 흠뻑 젖는다'라고 했고, 태진아는 '호미자루 벗을 삼아' 김매는 여인들의 애달픔을 노래했다. 밭매는 일은 주로 여자들의 농사일이었고, 논매기는 남자들의 여름철 고달픈 일이었다.
논매기는 맨손 손가락을 갈쿠리 모양으로 꼬부려서 손가락으로 논바닥의 잡초를 뽑아 내고, 그 잡초를 흙 속에 쳐박아서 벼의 퇴비가 되게하는 작업이다. 허리를 구부린 채 일일이 논을 헤집고 다니면서 잡초를 제거했다. 좋은 농군은 혼자서 하루에 세 마지기의 논을 맨다고 했다.
논매기를 하고 나면 밤에 잠을 이룰 수 없다. 벼의 날카로운 끝이 목과 가슴을 찔러 쓰라리기가 표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다. 허리도 끊어질 듯 아프다. 간혹 논매기용 갑바를 사용하기도 했다. 갑바는 군용 삐삐선을 엮어서 솜씨좋은 사람이 흡사 구명동의 모양으로 만든 것이다. 시장에서 팔기도 했다. 그것을 입으면 탄력좋은 철사가 벼의 끝이 앞가슴 부위를 찌르는 것을 상당 부분 막아 준다. 손톱 색깔은 꺼멓게 변하고, 손톱과 피부 사이에는 흡사 흙을 발라 넣은 것 같아진다. 아무리 잘 씻어도 한 달 정도 지나야 원래 색깔로 돌아 온다. 손가락 끝 피부도 군데군데 찔리고 상처가 난다.
가끔 품앗이나 일당으로 논매기를 하기도 했다. 흙탕물이 일어 꼼꼼히 일하지 않은 것인지 당장은 알 수 없었다. 며칠 후 건성건성으로 한 작업이 드러나는데 논 주인과 일꾼 사이에 시비가 붙기도 하는 것이 논매기였다.
내가 고교 재수 시절 농사를 짓기 전까지 우리 집에는 김생원이라고 불리는 60대의 머슴이 있었다. 건성으로 논매기 한 탓으로 할아버지가 그 사람을 혼내는 것도 보았다. 논이래야 겨우 18 마지기였는데 얼마나 일손이 부족했으면 머슴을 썼을까? 요즈음에는 논 600마지기, 즉 30,000 평의 논도 혼자 농사 짓는 걸 흔히 볼 수 있다. 농법의 개선과 좋은 농약의 개발, 그리고 결정적으로 좋은 농기계가 있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어쨌거나 논의 김매기는 쌀농사를 지음에 있어 참으로 인내와 끈기, 아픔이 따르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1971년 통일벼 보급과 함께 논농사용 제초제가 시판되면서 종말을 고했다. 제초제는 농민들에게 어려운 작업 중 하나를 생략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태장군 국태가 다음 주 동해안 종주에 참가하기 위해 대진행 고속버스를 예매하고 사진을 올린다. 뽈장군 창선은 갈 듯 하더니 참가 못한단다. 다음 주의 동해안 종주 잘 다녀 오소.
첫댓글 옥은 완전한 농꾼이었네. 난 어려서 나와 비료주기나 김매기는 해 본적은 없다. 멀찍이 구경만 했지...
오늘 아버지 말씀이 우리 논농사는 잘 된 해에 쌀 열가마였다시네...ㅠ.ㅠ
정말 소농이었네.
논이 다섯 마지기 정도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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