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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이해할 수 있는 속성들(communicable attributes)이란 하나님의 속성들 가운데 인간이 깨닫고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을 말한다. 오늘날 우리는 “나눔”(sharing)과 “대화”(communicating)에 대해 자주 듣게 된다. 그런데 이런 말을 잘 사용하는 사람들을 보면 애석하게도 자신들은 하나님과 의사소통을 하지 않고 하나님도 그들과 대화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1)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하나님의 거룩하시다. 우리는 죄인이며 전혀 하나님과 닮은 데가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민족들과 사람들을 다루시는 것과 죄를 다루시는 것을 공부함으로써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거룩함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을 이해하는 데 있어 성경이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꼭 성경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벧전 1:16)고 말씀하시며 출애굽기 34:14에는 『그 이름이 질투인 주는 질투하는 하나님임이니라.』고 말씀한다. 출애굽기 15:11을 주목하라 『오 주여, 신들 가운데 누가 주와 같으리이까? 누가 주와 같이 거룩함이 영화로우며 찬양받을 만큼 두려우며 이적들을 행하리이까?』 이사야 6:3도 주목하라. 『그리고 서로 소리쳐 말하기를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만군의 주여, 온 땅이 그의 영광으로 충만하도다.” 하였더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의 외모를 존중하지 않으시며 하나님께서는 죄를 다루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 이런 성경 구절들을 꼭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어떤 사람이 말했듯이 “전쟁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 내리는 심판이며 지옥은 저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 내리는 심판”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눈을 제대로 뜨고 병원, 감옥, 정신병원, 가정법원 등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바라본다면 그는 하나님은 죄를 참지 못하시는 분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너무 많은 교육을 받은 사람은 “모든 것은 상대적으로 여러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에 꼭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며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 심판하셨기보다는 우연히 발생한 사건이나 불의의 사고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둘러대면서 빠져나갈 구멍을 찾을 것이다. 그러나 글씨를 제대로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교육받은 자들이 만들어 낸 “혼전성교”(premarital sex)라는 말은 음행(fornication)을 저지를 자들이 둘러대기 위해 만들어낸 용어라는 사실임을 다 알 수 있다. S와 Z를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은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들이 양심 앞에 정직하다면 도덕적인 선과 악도 인간으로서 지극히 쉽게 구분이 가는 것임을 부인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2)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다. 시편 116:5은 『주께서는 은혜로우시고 의로우시니 정녕, 우리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에스라 9:15도 『오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이여, 주께서는 의로우시나니 이는 우리가 남아 피한 것이 오늘과 같음이니이다. 보소서, 우리가 주 앞에 범죄하였사오니, 우리가 이로 인하여 주 앞에 서지 못하겠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의로움에 관해 많이 다루고 있는 로마서 10:3-4은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들의 의를 세우려 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모든 사람에게 의가 되시고자 율법의 끝이 되셨느니라.』고 말씀한다. 로마서 9:14은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고 말씀한다. 로마서 8:10도 『성령은 의로 인한 생명이니라』고 말씀한다. 의로움 바로 이것이 로마서의 위대한 주제이다. 『의의 종이 되었음이라』(롬6:18) 『너희가 죄의 종이었을 때에는 의로부터는 자유로웠느니라』(롬 6:20). 로마서에서는 이 밖에도 계속해서 의로움을 여기저기에서 다루고 있다.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은혜도 의를 통하여 군림하여』(롬 5:21). 『의인을 위하여 죽으려는 사람이 거의 없고』(롬 5:7). 『곧 이때에 자기의 의를 선포하심은』(롬 3:26) 『그러나 이제는 율법 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롬 3:21)
하나님의 의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원치 않는 것인데 인간이 원하는 바는 자기 자신의 의로움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에 대해 이사야 64:6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걸레 같으며』 어느 한 인간이 구원을 받아 성도가 된 이후라 할지라도 성경이 “성도들의 의”라고 부르는 “세마포”를 얻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한다.
예레미야 12:1은 『오 주여, 내가 주와 더불어 항변할 때에 주는 의로우시나이다...』 그렇다면 모든 땅의 심판자께서 의를 행하시지 않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적인 다루심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반응에 있어 하나님께서는 의롭지 않으시다는 불평을 종종 보이고 있다. 건강과 음식과 의복과 모든 것이 풍족할 때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실수가 없으시다.”라고 말하는 것과 휠체어에 앉아서 혹은 자식이 불치병에 걸려 있는 상태에서 또는 굶을 지경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분의 의로우심에 감사한다는 것은 다르다. 이 두 가지를 구분할 줄 모른다면 교육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인간이 옳지 않고 하나님이 옳다는 것을 지적하지 못하는 교육은 교육이 아니다. 만약 당신이 다니는 대학교에서 하나님은 옳고 인간은 그르다는 것을 배우지 못한다면 당신은 요나 대학교에 가서 고래뱃속에서 공부하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주께서는 그의 모든 길에서 의로우시며 그의 모든 행사에서 거룩하시도다』(시 145:17). 이것이 바로 욥기의 위대한 주제이다. 즉 어찌해서 의로운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욥을 다루시는 방법이 정당하지 못하신 것은 아닌가? 욥은 의롭고 올바르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기까지 했는데 그런 욥을 하나님께서 잘못 대하신 것은 아닐까? 『실로, 하나님은 참되시나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라』(롬 3:4)
3)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비를 인간에게 보이신다. 시편 103:8을 주목하라 『주는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자비가 풍성하시도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체험하지 않은 사람은 한 분도 없다. 당신이 이 사실을 인정하든 아니하든, 받아들이든 아니하든 상관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비는 당신에게도 베풀어졌기 때문이다. 당신의 생애 동안 당신은 “하나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나님 불쌍히 여기소서.” “하나님 살려주세요.”라는 말을 했던 적이 있을 것이다. 그때 하나님께서 당신을 도와주셨고 당신은 그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당신이 그분의 일들을 거부함으로써 배은망덕하였다면 그것은 당신의 문제이다. 지질학을 공부하면서 창세기 1장을 부인하는 것도 당신의 문제이다. 어쨌든 하나님께서 자비로우시며 그분의 자애로운 자비는 그분이 하시는 모든 일에 동행한다.
시편 86:15도 역시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오 주여, 주께서는 긍휼이 충만하시고 은혜로우시며 오래 참으시고 자비와 진리가 풍성하신 하나님이시니』(그분은 죄인들을 참으시고, 악하고 못된 사람들에게도 자비로우시다). 이에 대해서는 민수기 14:18과 출애굽기 34장에 잘 나와 있다. 『‘주는 오래 참고 자비가 크며, 죄악과 허물을 용서하나, 범법자를 결코 깨끗케 하지 않으며 그 조상들의 죄악을 그 자손들 삼사 대까지 미치게 하느니라.’ 하셨나이다.』(민14:18) 『주께서 그의 앞을 지나시며 선포하시기를 “주로다.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오래 참고, 선함과 진리가 풍성한 주 하나님이로다. 자비를 수천 대까지 간직하며 죄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나 범법자가 결코 깨끗케 되지는 아니하리니 그 조상들의 죄악을 그 자손들과 그 자손들의 자손들 삼사 대까지 미치게 하느니라.” 하시니라.』(출34:6-7)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마태복음 5:45에서 『이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태양을 악인과 선인 위에 떠오르게 하시며,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위에 비를 내리심이라.』고 말씀하신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차 사고나 기타 사고로부터 보호해 주신 것을 두고 영적으로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받아들이신 것으로 생각하지만 구속과 구원이라는 면에서 보면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 하나님께서 코넬료의 기도를 받아들이신 것은 그의 선함을 기억하고 계신 것일 뿐 코넬료가 구원받았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그분의 자비는 영원토록 지속되는 것이 아니며 죽을 때에 당신은 그분의 자비 아래에서 죽든지 아니면 진노 아래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꼭 배워야 한다. 그분의 진노하심은 반드시 있고 당신은 그것을 알 수도 있고 느낄 수도 있다.
성경은 요한복음 3:36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그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하더라.』 로마서 9:22,23은 『하나님께서 그의 진노를 나타내시고 또 그의 능력을 알게 하시려고 멸하기에 합당한 진노의 그릇들을 심히 오래 참음으로 인내하시며 영광에 이르도록 예비된 자비의 그릇들에게 그의 영광의 풍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다』고 말씀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말할 때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대해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온전하신 존재이시며 균형 잡히신 존재이시다. 그분은 어떤 사람이 오해하는 것처럼 항상 사랑과 평화와 자비와 온유하시기만 하신 분이 아니다. 히브리서 12:29을 잊지 말라. 『우리 하나님은 소멸케 하시는 불이심이라.』
4) 하나님은 질투하신다.
나훔 1:2은 주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말하고 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이 사실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렵다. 사실 고린도전서 2:14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자연인은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일들이 그 사람에게는 어리석게 여겨지기 때문이요, 또 알 수도 없나니 이는 그 일들이 영적으로만이 분별되기 때문이니라.』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질투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모든 속성은 하나님 안에서 1,000만 배 이상으로 확대되어 나타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영적 소경들의 어리석음일 뿐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드셨음을 알고 있다. 따라서 인간에게서 발견되는 속성들은 자연히 인간의 창조주에게서도 발견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시면서 죄 없으신 자신이 죄인들 대신 죄가 되고 저주가 되어 하나님의 진노 아래(고후5:21) 놓이게 된다는 사실 앞에 고뇌하신 그 고뇌를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진노는 잔인하고 성냄은 사나우나, 시기 앞에 누가 설 수 있으리요?』(잠27:4) 질투심이 나쁘고 악하게 될 수도 있으며 또한 질투와 시기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나쁜 감정으로 말할 수 없는 상처를 만들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올바로만 사용된다면 올바르고 거룩하며 참된 성품의 일부가 될 수도 있다. 사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보좌를 탐내도록 부추긴 것은 질투심이었다(사14:10-14). 카인으로 하여금 아벨을 살해하도록 한 것도 질투심이었다.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노예로 팔아 이집트로 보낸 것도 질투심이었다.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에게 반역한 것도,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것도 모두 질투심 때문이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된 동기도 종교 지도자들의 질투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권위와 능력과 지혜를 질투했다. 그들은 백성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질투했다. 그 어떤 것과 연관되어 있지 않은 질투는 중립적이지만 잘못된 질투는 이 세상에서 가장 파괴적이고 마귀적인 힘이다.
그러나 질투는 올바른 것을 지킬 때도 주어졌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1:2에서 자신의 질투심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는 내가 경건한 질투로 너희에게 질투를 느낌이라.』 성경에서 『우리 안에 거하는 영이 시기할 만큼 갈망한다.』(약 4:5)고 말한 것은 성령께서 자신에게 속한 자기 재산(구원받은 성도)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계신다는 뜻이다. 때론 질투가 가족들을 보호해 주기도 한다. 만약 남편이 자신의 아내가 다른 남자에게 관심을 갖는 것을 내버려 두고, 아내가 자신의 남편이 다른 여자에게 관심을 갖는 것을 내버려 둔다면 그 가정은 더 이상 가정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질투하신다. 이것은 성경적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이 세상과 뒤섞이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을 사랑하시며 자녀들이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기를 원하신다. 자식들의 안녕, 복지 및 생활에 질투심을 갖고 있지 않은 부모는 정상적인 부모라고 할 수 없다. 정상적인 부모라면 자식들이 부모가 원하는 방향이 아닌 세상이 원하는 방식으로 자라나는 것을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정상적인 부모라면 가정에서 자기들이 정한 올바른 도덕이 아닌 불경건하고, 세상적이고, 더럽고 육신적이고 사악한 사회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을 싫어할 것이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불이시며 질투하시는 분이시다. 여호수아 24:19을 주목하라.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주를 섬기지 못하리니 이는 그는 거룩한 하나님이시요, 그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너희 허물과 죄들을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5)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요즘 사람들은 사랑의 하나님에 대해 너무도 많이 들어 진력이 날 지경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용납하시는 신”일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매일 죽이신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멸망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며, 오래 참으시기 때문에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에 이르게』(벧후 3:9) 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그 동일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와 함께하는 신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고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건져낼 수 있는 자가 없도다』(신 32:35) 『내 진노중에 불이 붙어서 가장 낮은 지옥까지 사를 것이며』(신 32:22)라고 말씀하셨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들의 것이니라.』(눅 18:16)고 말씀하신 분께서 『너희 뱀들아, 독사들의 세대야, 어떻게 너희가 지옥의 저주에서 피할 수 있겠느냐?』(마 23:33)라고도 말씀하셨다. 『마음이 순결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마 5:8)라고 말씀하신 분께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나와서 너희 아비의 정욕을 행하고자 하는도다』(요 8:44)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말할 때 그리 많은 시간을 보낼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자기가 아무리 마귀같이 살아도 손가락 하나 대지 않을 것으로 착각하고 살지만 주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죽이실 것임을 잊지 말라.
로마서 8:13은 『너희가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나』라고 말하고 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졌음을 잊지 말라. 요한일서 5:16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에게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도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자는 갑자기 패망을 당하리니, 도움이 없으리라』(잠 29:1). 『너는 내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라』(잠 27:1). 아무것도 모르면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울며 회개하면 양팔을 벌리고 너를 맞으시며 용서하실 것이다.”라는 식으로 둘러대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피의 속죄에 근거해서만 당신을 용서하신다. 당신의 피는 타락한 피이고, 그래서 썩어 버린다. 당신의 육신은 잘못됐다. 그래서 노쇠하다가 죽고 썩어서 흙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당신이 아무리 당신의 의를 내세워도 그것이 당신의 운명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8). 그러나 사랑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요한일서 3:16은 요한복음 3:16처럼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loved)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gave)』 시제가 모두 과거임을 주목하라. 『여기에 사랑이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고』(요일 4:10). 여기서도 과거시제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보여 주셔야 할 모든 참된 사랑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온전히 나타내셨다. 로마서 9:16은 『그러므로 원하는 자에 의해서도 아니요, 달리는 자에 의해서도 아니며 오직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에 의해서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거듭나지 못한 세상에게 갈보리에서 자비를 보여 주시기로 정하신 것이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원한다면 당신은 갈보리로 가면 된다. 그곳에서 당신은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께서 흘리신 피를 동시에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 피는 “하나님의 피”라고 성경은 말씀하신다(행 20:28).
사랑과 자비는 하나님의 죄에 대한 진노와 의에 대한 질투심이 나타난 동일한 장소에서 나타났는데 그곳은 고통스럽고, 수치스럽고, 나무로 된, 못에 박힌, 그리고 채찍 자국이 선명한, 피로 물든 십자가였다. 이곳 이외에서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꿈도 꿀 수 없다. 만약 당신이 갈보리 이외의 곳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다면 스스로를 속이는 바보인 것이다. 주님은 “그 누구도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그 누구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라고 명령하셨다. 만약 당신이 이 시대에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요구사항을 만족시킴 없이 얻어질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당신은 사탄에게 속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하는 자에 의해서도 아니요, 달리는 자에 의해서도 아니며 오직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에 의해서니라.』(롬 9:16) 당신은 하나님께서 어떤 자비를 베푸시는가를 결정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어디에서 자비를 베푸셨는가를 이미 보여 주셨다. 당신이 그곳에 올 때까지는 하나님의 진노의 칼이 당신을 계속 겨누고 있음을 결코 잊지 말라. 만약 당신이 이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이 피흘리신 그곳으로 가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겨누신 그 칼을 치우지 않으실 것이다. 만약 내 이야기가 이상하게 들린다면 그것은 당신이 오랫동안 불신자였다는 말이다. 따라서 지금이야말로 당신의 귀를 씻고 내 말에 귀를 기울일 때다.
6)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하여는 신명기 7:9은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주 너의 하나님을 알라. 그분은 하나님이시니,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들에게 언약과 자비를 일천 대까지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며』. 신명기 34:4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한 그 땅이니, ‘내가 그것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였느니라. 내가 그것을 네 눈으로 보게 하였으나 너는 그곳으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관한 위대한 약속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졌다. 고린도전서 1:8-9에 『또한 그분께서 너희를 끝까지 확고하게 지키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게 하시리라. 너희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의 교제 안으로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도다.』 우리는 신실하지 못할지 모르지만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신실하시며 우리를 끝까지 확고하게 지키신다. 빌립보서 1:6을 주목하라. 『우리가 이것을 확신하노니 너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그분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
디모데후서 2:13은 『우리가 믿지 아니하여도 그는 항상 신실하시니, 그는 스스로를 부인하실 수 없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위대한 약속을 보라. 이 약속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아 거듭나면 후에 불가지론자들과 회의론자들의 꾐에 넘어가 그가 자기 구원을 의심하더라고 그의 구원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위의 말씀에 의하면 우리가 믿지 아니하여도 주님은 항상 신실하셔서 스스로를 부인하실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구원받았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고, 만약 당신이 거듭났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당신을 부인하실 수 없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너희가 어디서 온 자들인지 모르노라. 불법을 행하는 모든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눅 13:27)는 말씀을 하실 수 없다. 그분께서 당신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그리스도 안에 넣은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끄집어내서 몸 안에서 나오라고 하실 수는 없다. 왜냐하면 주님은 스스로를 부인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다.
7) 결 론
하나님은 동정심이 많으시다. 열왕기상 8:23은 이렇게 말씀한다. 『말하기를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이여, 주와 같은 하나님은 위로 하늘에도 없고 아래로 땅에도 없사오니 주께서는 주 앞에서 마음을 다하여 행하는 주의 종들과 더불어 언약과 자비를 지키시나이다.』
하나님은 참되시다. 『그러나 주는 참 하나님이시며 그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요, 영원한 왕이시라. 그의 진노하심에 땅이 떨며 민족들이 그의 분노를 감당할 수 없게 되리라.』(렘10:10)
하나님은 썩지 않으신다. 『썩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의 형상과 새들과 네 발 달린 짐승들과 기어다니는 것들과 같은 형상으로 바꾸었도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 『주께서는 은혜로우시고 의로우시니 정녕, 우리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도다.』(시116:5)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신다. 『이제 영원하신 왕, 썩지 아니하시고, 보이지 아니하시고, 홀로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딤전 1:174)
하나님은 정직하시다. 『주는 선하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가 죄인들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라』(시 25:8)
하나님은 온전하시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온전하심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결론적으로 하나님 같으신 분은 없다. 『내가 이번에는 나의 모든 재앙을 네 마음과 네 신하들과 네 백성 위에 보내어 너로 하여금 온 땅에 나 같은 이가 없음을 알게 하리니』(출 9:14) 『여수룬의 하나님과 같으신 분은 아무도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시고 창공에 그의 위엄을 보이시는도다』(신 33:26). 우리 하나님은 위대하신 하나님이요, 만왕의 왕이며 만주의 주이시고 모든 이름들 위에 뛰어난 이름을 갖고 계신 분이며 신들 중의 신이며, 창조주이시고 구속주이시고, 구세주이시므로 우리는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그분을 경배해야 하며 우리는 그분을 두려워해야 하며 그분을 섬겨야 한다. 또한 우리는 그분께 순종해야 한다.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요, 거룩한 이에 대한 지식은 명철이니라.』(잠 9:10)
※출처 : 피터 럭크만의 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