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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18-20)
우리 신앙의 중심에 예수님을 두고,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며 살아야 합니다. 각자 예수님을 누구로 믿고 있는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개인적인 신앙고백은 우리의 신앙을 굳건하게 합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신앙 생활을 해야 합니다.
18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이르시되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19대답하여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살아났다 하나이다 20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18-20)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의 대화로 자신의 정체인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리십니다. 제자들과 대화하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홀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18).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처럼 기도하는 장면은 구원의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을 앞두고 순간마다 언급됩니다. 세례를 받을 때도(3:21), 열두 사도를 선택하실 때도(6:12),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변화산에서 영광스러운 계시를 보여주실 때(9:29), 십자가를 앞두고 기도하십니다(22:41).
본 단락은 오병이어 사건 후 제자들과 따로 모였을 때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전도여행 후 그들과 조용한 곳에서 시간을 보내려 하셨습니다(9:10). 그러나 뒤따라오는 무리 때문에 그렇게 하실 수 없었고, 이제 오병이어 사건 후에 제자들을 이끌고 한적한 곳에 머무십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기도와 이어지는 그의 질문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전도여행과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많은 경험을 하였고, 아마도 무척 흥분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겉으로 드러난 기적 때문에 장작 가르치려 하셨던 것을 놓쳤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단락에서 질문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계시하십니다. 제자들에게 무리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문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신 후, 제자들에게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질문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례 요한, 엘리야, 옛 선지자들 중 한 명이 살아났다고 생각했습니다(19). 예수님의 질문과 제자들의 설명은 헤롯의 질문과 그가 받은 보고와 비슷합니다. 대중은 예수님을 선지자적 인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지자의 역할을 하셨지만, 그것은 메시아 사역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질문하십니다(20). 베드로는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대답합니다. 베드로는 제자들의 대표와 대변인으로서 대답하기 때문에 그의 대답은 제자들의 견해를 반영합니다. 이제까지는 천사들(1:31-35; 2:11), 귀신들(4:41)과 같이 초자연적인 존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언급했으나, 처음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칭하는 말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는 2:26의 ‘주의 그리스도’와 같은 의미의 칭호입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목적을 완수하는 그리스도의 역할을 내포하는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위해 하나님께서 택하고 세우신 그리스도입니다. 변모 사건에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나의 택함을 받은 아들’(9:35)이라고 부르십니다. 23:35에서는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로 묘사됩니다. 예수님의 이런 정체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된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택하신 메시아/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이었지만,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지 못합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택하신 그리스도로 예수님의 정체를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길(21-22)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고 사랑으로 섬겨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고난 속에서도 예수님의 부활을 기억하며, 영원한 생명과 소망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을 굳게 지키고 인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21경고하사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명하시고 22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21-22)
베드로의 대답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21). 당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단순히 정치적-군사적 메시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의 의미가 빠진 그리스도로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가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심으로써 모든 백성의 구원자로 통치하실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향해 그리스도의 정체와 운명을 설명하십니다(22). 인자는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배척당하고 죽임당해야 합니다. 죽은 지 사흘째 살아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해야 한다’를 뜻하는 ‘데이(δεῖ)’를 넣어서 고난과 죽음과 부활이 하나님의 계획에 따른 것임을 강조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나서 하늘에서 들린 음성은 그를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시 2:7)과 하나님의 종(사 42:1)으로 선언했습니다(3:22).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에 예고된 고난 받는 종(예. 사 42, 53장)으로서 고난의 길을 가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의 고난은 많은 사람들의 속죄를 위한 길이므로 그리스도는 반드시 고난과 죽음의 운명을 맞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는 목적은 십자가에 달려 죄를 용서하는 길을 열기 위함입니다.
제자의 길(23-27)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길은 세상에서의 성공과 이익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 나라를 위한 헌신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삶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님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믿음을 고백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교훈들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참된 제자로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며,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23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4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25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26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27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23-27)
신앙은 단순히 지식으로 꿑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제자의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운명과 그의 제자들에게 제자로서의 삶인 제자도를 연결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삶은 세 가지로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 예수님을 따름’으로 너무나 중요한 제자도의 핵심입니다.
(1) 자기 부인(23)
첫째,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여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23). 자기 부정은 자신의 욕망이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과정에 따라오는 고난입니다. 자기 부정과 자기 십자가는 예수님을 따르는 모습입니다. 로마의 배경에서 십자가형을 선고받은 죄수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처형장까지 가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해 가셨기에, 그를 따르는 제자도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2) 자기 십자가(24-25)
둘째, 자기 목숨을 구하는 자는 잃게 될 것이지만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잃는 자는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24-25). ‘목숨’(프쉬케)은 그 사람의 생명 전체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여정에서 예수님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는 일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26절처럼 예수님 때문에 수치를 겪어야 하는 어려움이 닥칠 수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생기는 고난을 피함으로써 자기의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자는 목숨을 잃게 됩니다. 고난을 피하는 행위는 제자가 아님을 입증합니다. 반대로 예수님 때문에 닥쳐오는 고난을 인내하는 과정에서 목숨을 잃게 될지라도 결국은 목숨을 얻게 됩니다. 땅의 관점에서는 예수님 때문에 생기는 위기로부터 일시적으로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현명하고 목숨을 잃는 것이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계산법에 따라 이윤을 따져보면 정반대입니다. 온 천하를 얻고도 자신을 잃거나 빼앗기면 어떤 유익도 없고 온 세상을 얻었으나 자신의 목숨을 잃어버리면 아무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25). 세상을 얻고 목숨을 잃는다는 표현은 소유나 상업적 이미지와 관련됩니다. ‘얻다’를 뜻하는 ‘케르다이노’는 상업 용어로서 노력이나 투자를 통해서 무엇을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빼앗기다’를 뜻하는 ‘제미오오’도 돈과 관련된 용어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세상을 다 살 만큼 돈이 있다고 해도 목숨을 잃으면 얻는 것이 없어집니다. 24-25절에 반복되는 동사는 ‘잃다’입니다. 이 동사들의 용례를 고려하면, 예수님 때문에 고난과 수치를 당하게 될 때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는 것이 경제적으로 유익하고 현실적으로 현명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자신의 계획과 미래와 유익을 잃게 될 줄로 생각하면 예수님을 따르지 않거나 십자가를 제외한 방식으로 따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는 무엇이 유익이고 현명한 선택인지 두려운 마음으로 판단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3) 예수님을 따름(26-27)
셋째, 예수님과 그의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실 것입니다(26). 26절은 재림과 연결해서 23-25절의 경고를 강화합니다. 인자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오는 때는 재림입니다(12:40,17:22,24,26,30; 18:8; 21:27,36).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21:27). 12:8-9은 마지막 재판의 상황을 인자와 하나님의 천사들을 사용해 묘사합니다. 예수님과 그의 말을 부끄러워하는 태도는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23) 자기 목숨을 구하는(24-25) 행동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살면 수치를 겪을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인자가 올 때 심판대 앞에 서서 삶을 반드시 평가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함께 있는 사람들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다고 약속하십니다(27).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오심과 사역으로 이 땅에 왔습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된 나라로 시작될 것입니다. 몇 명의 제자들이 재림 때의 하나님 나라를 미리 볼 수 있는 사건은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를 목격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9:28-37). 변모 사건은 고난의 길을 가는 예수님의 영광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길을 가는 제자들의 미래도 영광스럽게 될 것을 약속하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는 생명을 얻고, 하나님 앞에서 신원 받게 될 미래를 바라보면서 오늘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합니다.
십자가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십자가 없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고,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는 예수님은 메시아가 아닙니다. 메시아의 나라는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생명의 주를 선택한 제자들의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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