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록(柳綠)에서 초록으로, 선율을 따라 달린 21킬로미터.
유록(柳綠)의 연한 빛과 싱그러운 초록이 다투듯 어우러지다, 끝내 짙은 녹음으로 넘어가는 시절이다.
계절이 한 걸음 더 깊어지는 길목, 이른 아침의 바람 속에는 알싸한 흙냄새와 젖은 잎사귀의 기운이 짙게 배어 있다.
귀에는 이재후 아나운서의 담백한 해설과 레너드 번스타인이 지휘하는 멘델스존의 핑갈의 동굴 을 담고 천천히 나선
길을 달리기 시작한다.
어제 감내했던 격렬한 업힐(Uphill) 훈련의 대가일까, 다리에는 여전히 묵직한 피로가 얹혀 있다.
오늘은 욕심을 내려놓기로 한다. 속도를 접어두고, 그저 몸이 이끄는 느린 조깅의 리듬에 삶을 맡겨본다.
이어폰 너머로 흐르는 선율에 따라 달리기 표정도, 발걸음의 무게도 시시각각 색을 바꾼다.
오펜바흐의 자클린의 눈물이 흐를 때는 나도 모르게 호흡을 가다듬는다.
애절하면서도 장엄한 첼로의 선율을 따라, 몸은 더 낮고 느리게 땅을 딛는다. 고독하지만 단단한 걸음이다.
그러다 테너 엄정행의 목소리로 울밑에 선 봉선화 와 동무생각 이 울려 퍼질 때면,
시간은 순식간에 수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스라한 어릴 적 기억들이 꼬리를 물고,
지난 2월 모진 추위 속에서 숨을 몰아쉬며 지나쳤던 대구마라톤의 청라언덕이 눈앞에 선연히 겹쳐온다.
그리움과 반추의 시간 속에서, 나는 팔을 훠이 훠어이 저으며 휘적휘적 바람을 가른다.
분위기를 반전시키듯 FM 라디오 프로그램 가정음악실의 첫 곡으로 하이든의 현악 4중주 종달새 가 흘러나온다.
경쾌한 바이올린 소리를 듣고 있자니, 푸른 하늘을 향해 곧추세우며 날아올라 날갯짓으로
호버링(Hovering) 하는 노고지리의 역동적인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마법처럼 다리의 피로가 가셔지며 걸음이 폴짝폴짝 가벼워진다. 음악이 주는 힘이란 늘 이렇게 신비롭다.
살충제 살포 작업이 한창인 호수공원의 고약한 냄새를 피해 발길을 돌렸다.
40번 고속도로 주변의 삭막한 길을 몇 차례 오가는 사이, 시간은 묵묵히 흘러간다.
소음과 매연 속에서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다 보니, 어느새 호수공원의 방역 작업도 끝이 나 있다.
다시 공원 안으로 접어들어 깨끗해진 길을 내달려 본다.
처음 출발했던 그 자리에 다시 도착했을 때, 시계는 21km라는 숫자를 선명하게 가리키고 있었다.
하프 코스의 거리다.
힘들다. 그리고 배고프다. 집에 가서 밥이나 먹자.
깊어가는 계절을 온몸으로 통과하고, 가슴속 가득 음악과 추억을 채워 넣은 뒤 찾아오는 지극히 인간적이고도 달콤한
허기. 정직하게 땀 흘린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이 소박한 밥상을 마주하기 위해,
나는 오늘도 길 위에서 가장 찬란한 외로움을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