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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님의 금강경강좌
제13강 지경공덕분 제15:持經功德分 第十五
須菩提야 若有善男子善女人이 初日分에 以恒河沙等身으로 布施하며 中日分에 復以恒河沙等身으로
수보리야 약유선남자선여인이 초일분에 이항하사등신으로 보시하며 중일분에 부이항하사등신으로
布施하며 後日分에 亦以恒河沙等身으로 布施하야 如是無量百千萬億劫을 以身布施하고 若復有人이
보시하며 후일분에 역이항하사등신으로 보시하야 여시무량백천만억겁을 이신보시하고 약부유인이
聞此經典하고 信心不逆하면 其福이 勝彼하리니 何況書寫受持讀誦하야 爲人解說이리오
문차경전하고 신심불역하면 기복이 승피하리니 하황서사수지독송하야 위인해설이리오
須菩提야 以要言之컨댄 是經은 有不可思議不可稱量無邊功德하니 如來가 爲發大乘者說이며 爲發最上乘者說이니라
수보리야 이요언지컨댄 시경은 유불가사의불가칭량무변공덕하니 여래가 위발대승자설이며 위발최상승자설이니라
若有人이 能 受持讀誦하야 廣爲人說하면 如來가 悉知是人하며 悉見是人하야 皆得成就不可量不可稱無有邊不可思議功德하리니
약유인이 능수지독송하야 광위인설하면 여래가 실지시인하며 실견시인하야 개득성취불가량불가칭무유변불가사의공덕하리니
如是人等은 卽爲荷擔如來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라
여시인등은 즉위하담여래아뇩다라삼먁삼보리니라
何以故오 須菩提야 若樂小法者는 着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일새 則於此經에 不能聽受讀誦하야 爲人解說하리라
하이고오 수보리야 약요소법자는 착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일새 즉어차경에 불능청수독송하야 위인해설하리라
須菩提야 在在處處에 若有此經하면 一切世間天人阿修羅의 所應供養이니 當知此處는 卽爲是塔이라 皆應恭敬作禮圍繞하야 以諸華香으로 而散其處하리라
수보리야 재재처처에 약유차경하면 일체세간천인아수라의 소응공양이니 당지차처는 즉위시탑이라 개응공경작례위요하야 이제화향으로 이산기처하리라
제15, 경을 지니는 공덕[持經功德分]
“수보리야,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오전의 항하강의 모래 수와 같은 많은 몸으로 보시하고, 낮에 또 항하강의 모래 수와 같은 몸으로 보시하며, 저녁때에 또한 항하강의 모래 수와 같은 많은 몸으로 보시해서, 이렇게 하기를 한량없는 백 천 만 억겁동안 몸으로써 보시하더라도, 만약 다시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듣고 믿는 마음이 거슬리지 아니하면, 그 복은 앞의 복보다 훨씬 뛰어나느니라.
그런데 하물며 이 경전을 쓰고 출판하여,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서, 널리 여러 사람들에게 해설하여 주는 일이겠는가?
수보리야, 요점만을 말한다면, 이 경은 상상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고, 끝도 없는 공덕이 있느니라.
여래가 대승(大乘)의 마음을 낸 사람들을 위하여 이 경을 설하며, 최상승(最上乘 )의 마음을 낸 사람을 위하여 이 경을 설하느니라.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널리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설명한다면, 여래는 이 사람이 헤아릴 수 없고, 일컬을 수 없고, 끝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공덕을 성취하였음을 모두 알고 모두 보노라.
이러한 사람들은 곧 여래의 최상의 깨달음을 온 몸으로 짊어진 것이 된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약 작은 법을 좋아하는 사람은 나라는 소견, 남이라는 소견 ,중생이라는 소견, 수명에 대한 소견에 집착하여 곧 이 경을 듣고, 받아들이거나 읽고 외우지 못하며,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설명하여 주지도 못할 것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어떤 곳이든 만약 이 경전만 있으면 일체 세간의 천신들과 사람들과 아수라가 반듯이 공양하여야 한다.
마땅히 알라.
이곳은 곧 부처님의 탑을 모신 곳이 된다.
모두들 반드시 공경하고 예배를 드리며, 주위를 돌면서 여러 가지 꽃과 향으로 그곳을 장엄하여야 하느니라.”
금강경 하권
제15분 지경공덕분부터는 금강경 하권에 해당됩니다. 경전의 양에 따라서 한 발 정도의 두루마리를 말은 것을 권이라고 하고, 금강경은 상, 하 두 권으로 이루어졌다고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하권을 시작하면서 다시 한 번 금강경의 제목과 대의를 상기해 보겠습니다.
경의 제목과 대지
이 경의 제목인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은 ‘다이아몬드와 같이 견고하고 빛나고 날카로운 깨달음의 지혜로써 우리 인간사 세상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금강은 다이아몬드, 반야는 지혜, 바라밀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길, 이런 뜻이지요.
금강경의 대지(大旨)는 ‘파이집현삼공(破二執 顯三空)’입니다. 두 가지 집착을 깨뜨리고 세 가지 공의 이치를 나타낸다는 뜻입니다. 두 가지 집착이란 나라고 하는 집착인 아집(我執)과 나 이외의 다른 객관에 대한 집착인 법집(法執)입니다. 세 가지 공은 아공(我空) 법공(法空) 구공(俱空)인데 나도 공하고 대상도 공하고 나와 대상이 함께 공하다는 뜻이지요. 뜻은 그렇지만 이름이 세 가지 공일 뿐입니다.
두 가지 집착만 없으면 세 가지 공은 저절로 드러납니다. 마치 하늘에 구름이 걷히면 푸른 하늘과 태양이 저절로 드러나는 것과 같습니다. 늘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름을 걷게 하는 일이 중요하지요. 태양을 어딘가에서 갖다 놓거나 푸른 하늘을 갖다 놓거나 하는 일은 아예 없습니다.
이 두 가지 집착을 깨뜨리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합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으로 태어난 가장 훌륭한 보람과 의무도 충분히 다 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이란 ‘인간으로 태어난 소중한 기회를 한껏 누리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가르침이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경을 수지하는 공덕
지경공덕분(持經功德分), ‘경을 가지는 공덕에 대한 이야기’ 라는 뜻이지요. 부처님 경전은 무수히 많습니다. 금강경은 특히 대한불교 조계종의 소의경전이지요. 그만치 중요한 경전이고 우리 삶에 훌륭한 교훈을 주는 가르침입니다.
경전을 가지고 다니고, 읽고, 외우고, 사경하고, 위인해설하는 것을 경을 통한 다섯가지 수행법이라고 하고, 법화경에서는 5종법사라고 표현하는데 여기서 지경(持經)이라고 할 때 경을 가진다는 것은 단순하게 경전을 가지고 다니는 것 뿐만 아니라 마음속에 깊이 아로새기는 것을 말합니다. 또 경을 읽고 외우고 쓰고 남을 위해 설명하는 것이 모두 포함됩니다.
그렇게 할 때 그에 따르는 공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는 것이지요.
須菩提야 若有善男子善女人이 初日分에 以恒河沙等身으로 布施하며 中日分에 復以恒河沙等身으로
布施하며 後日分에 亦以恒河沙等身으로 布施하야 如是無量百千萬億劫을 以身布施하고 若復有人이
聞此經典하고 信心不逆하면 其福이 勝彼하리니 何況書寫受持讀誦하야 爲人解說이리오
수보리야 약유선남자선여인이 초일분에 이항하사등신으로 보시하며 중일분에 부이항하사등신으로 보시하며 후일분에 역이항하사등신으로 보시하야 여시무량백천만억겁을 이신보시하고 약부유인이 문차경전하고 신심불역하면 기복이 승피하리니 하황서사수지독송하야 위인해설이리오
하루 가운데 아침을 초일분, 정오를 전후한 점심을 중일분, 저녁을 후일분이라고 합니다. 몸으로써 보시한다고 하는 것은 일생에 한 번도 어렵지요. 과거에 의협심이 강한 의사들이 간혹 있었고 위법망구(爲法忘軀)라고 해서 부처님의 법을 널리 펴기 위해서 몸을 헌신하는 순교도 있었지만 그런 사례들은 참으로 희귀한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만약에 어떤 선남자 선녀인이 항하강의 모래 같이 많고 많은 몸을 아침 점심 저녁으로 보시하는데 그 보시를 하루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무량백천만억겁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또 만약에 어떤 사람이 있어서 이 금강경의 가르침을 듣고 믿는 마음에 거슬리지 않을 것 같으면 기복이 승피한다고 하였습니다. 마음에 거슬리지 않는 다는 것은 이 경전을 듣고 환희심이 나다는 것이지요. ‘이 경전이 정말 좋다’‘금강경의 가르침이 정말 훌륭하구나’‘소의 경전으로 삼을만하구나’ 하는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금강경을 공부해서 신심을 내고, 기쁜 마음을 갖는 복은 앞에 말한 항하강의 모래숫자와 같은 몸으로 아침 점심 저녁 무량백천만억겁동안 보시한 복보다 훨씬 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이 경을 서사하고 수지하고 독송하여 위인해설하는 것은 어떻겠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여기는 서사가 먼저 나왔는데, 경을 수지, 독, 송, 서사, 위인해설하는 것은 다섯가지 수행방법입니다. 경전마다 순서와 표현이 약간씩 다르지만 상관없습니다.
앞서서 삼천대천 세계만한 금은보화로써 보시한 것 보다 금강경의 가치가 훨씬 크다는 이야기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경공덕분에서는 우리 육신의 가치보다 금강경의 가치가 훨씬 크다고 이야기 합니다. 사실 남산 크기 만한 황금덩어리보다 우리 손가락 하나의 가치가 더 있지요. 육신의 가치는 말할 수 없이 큰 가치입니다. 그런 큰 가치를 가진 몸을 무수히 보시하는 것보다도 금강경을 지니고 읽고 외우고 쓰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설해주는 이 다섯 가지 방법으로써 수행을 하는 가치가 훨씬 크다고 하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정말 금강경의 가르침이 이러한 가치가 있구나’‘위대한 가르침이다’ 하는 느낌이 들고 이러한 가르침이 우리 마음에 와 닿을만큼 우리는 이 경전에 대해 심심을 내고 공부해야 합니다. 마음이 그렇게 열려야 하고 영혼이 그만치 맑아져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과제이지요. 인생을 살면서 또 경전을 공부하면서 경전의 가치를 우리가 그렇게 이해할 때가 있어야겠지요.
꼭 육신을 가지고 보시한다는 구체적인 사실이 문제가 아니라, 부처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경전의 가치야말로 이 육신의 가치보다 훨씬 더 높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느낀다면 정말 공부를 잘 하는 것이 됩니다.
須菩提야 以要言之컨댄 是經은 有不可思議不可稱量無邊功德하니 如來가 爲發大乘者說이며 爲發最上乘者說이니라
수보리야 이요언지컨댄 시경은 유불가사의불가칭량무변공덕하니 여래가 위발대승자설이며 위발최상승자설이니라
여러 가지 가치와 경전의 가치를 비교하였는데 여기서는 ‘요점만 가지고 말해본다’라고 하였습니다.
요점만 가지고 말해본다면 이 경전에는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공덕, 표현할 수 없는 공덕, 가없는 공덕이 있어서 여래께서 이 경전을 아무에게나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고 대승자에게 설하며 최상승자에게 설했다는 것이지요.
대승자나 최상승자라는 말이 나오지만 성문 연각 보살 소승 대승할 때의 교리적인 차별상이 아닙니다. 이 말은 최고의 인격자를 말하는 것이고 영혼이 가장 맑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예요. 세속적인 속된 일에 연연하지 않고, 세속적인 가치에 물들지 않는 고귀한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을 대승자나 최상승자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불자들은 여래 해 불교의 문에 드나들면서, 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강의도 듣고, 기도도 하고 절도 많이 하면서 평소에 ‘불교가 무엇일까’라는 화두를 가지고 있습니다.
정전백수자나 간시궐만이 화두가 아니지요.
‘불교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일까’ 가 바로 불자들의 화두입니다. 다양한 가르침속에서 ‘과연 진정한 불법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관심을 놓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 영혼이 남다르고 뛰어나며 고결한 사람이라고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이미 그런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지요. 한마디로 인생을 아주 멋지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 최고의 가치로서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입니다.
若有人이 能受持讀誦하야 廣爲人說하면 如來가 悉知是人하며 悉見是人하야 皆得成就不可量不可稱無有邊不可思議功德하리니 如是人等은 卽爲荷擔如來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라
약유인이 능수지독송하야 광위인설하면 여래가 실지시인하며 실견시인하야 개득성취불가량불가칭무유변불가사의공덕하리니 여시인등은 즉위하담여래아뇩다라삼먁삼보리니라
만약에 어떤 사람이 이 금강경을 수지독송하고 널리 남을 위해서 해설할 것 같으면 여래께서 그 사람은 이미 헤아릴 수 없고 일컬을 수 없고 사유할 수 없는 공덕을 다 성취했다고 하는 사실을 다 알고 다 본다고 하였습니다.
누구나 경전을 가지고 다닐 수가 있습니다. 외우는 것은 조금 어렵겠지만, 읽는 것도 할 수가 있지요. 그런데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남을 위해 일러주는 것입니다. 여기 서사라는 말이 빠졌습니다만 널리 남을 위해 알려주는 것에 서사(書寫)나 사경(寫經)이 다 해당됩니다.
‘도가 같은 사람끼리는 서로 안다[同道可知],동도가지’는 말이 있듯이 우리의 정신이 이러한 수준에 이르렀다면 그 수준은 곧 여래의 수준과 다를 바 없습니다.
여래가 있고 없고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사람들이 이미 여래의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에 ‘여래는 그것을 다 알고 다 본다’는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말이 나오는데 이러한 사람은 ‘여래께서 깨달으신 최상의 깨달음을 다 짊어진 사람들이다[荷擔如來阿耨多羅三藐三菩提 하담여래 아뇩다라 삼먁삼보리]’라는 말입니다. 하담(荷擔)이라는 말은 ‘짐을 지다’라는 말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이 부처님 당신의 짐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우리들은 주머니나 핸드백이나 걸망에 별별 잡동사니를 넣고 다니지만 금강경을 수지독송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일러준다면 이미 마음속에 부처님의 깨달음이 나의 문제, 나의 화두, 나의 과제가 되었습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이 과연 무엇일까’에 자나깨나 늘 마음을 쓰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여래의 깨달음을 다 짊어진 사람입니다. 당연히 그렇습니다.
何以故오 須菩提야 若樂小法者는 着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일새 則於此經에 不能聽受讀誦하야 爲人解說하리라
하이고오 수보리야 약요소법자는 착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일새 즉어차경에 불능청수독송하야 위인해설하리라
왜 이렇게 여래의 수준에까지 금강경을 끌어올려서 이야기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입니다. 소법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에 집착을 해서 이 경을 받아들이고 읽고 외우며 남을 위해서 해설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소법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쉽게 이야기 하면 소인배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예를 들어서 복을 짓고 공덕을 쌓으면 좋은 결과를 얻고 좋은 곳에 태어난다고 믿는 인천인과교 수준의 이야기가 일반 불교에서는 넘쳐나는데 이러한 것들이 소법이고 쩨쩨한 법입니다.
금강경 수준은 깊이와 높이를 이루 말할 수 없는 광대무변의 경지이기 때문에 소법을 가지고 논할 자리가 아니라는 거예요. 만약에 그런 자질구레한 작은 법을 좋아하는 사람은 나라고 하는 자아의식, 남이라고 하는 분별심 차별의식, 부처님과 비교해 봤을 때 나는 못난 사람이라는 열등의식, 나이에 대한 한계의식에 늘 집착해서 이 경전에 대해서 듣고 받아들이고 읽고 외워서 남을 위해 해설할 자격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최소한도 금강경을 수지 독송하고 남을 위해서 해설한다고 하면 이미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이라고 하는 집착에서 떠나려 하고, 떠나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아견이나 인견 못지않게 ‘중생이 뭐 그러면 그렇지’ 하는 타성에 젖어있는 중생견이나 젊은 사람이든 나이든 사람이든 상당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 수자상도 우리들이 많이 가지고 있는 집착입니다.
설사 이러한 집착해서는 안 될 집착에서 아직 못 떠났다 하더라도 ‘아 이것은 아니다’하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직까지 우리가 부족한 것은 어찌할 수 없지요. 하지만 ‘아니다’ 라고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그렇게 자의의식이 강하고 남이라고 하는 차별의식이 강하고 중생중생 해서 열등의식이 있고, 또 나이에 관한 관념이 너무 깊지만 이것은 아니다. 이런 생각에 젖어 있을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거예요. 그런 사람은 소법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언젠가는 벗어날 기회가 온다는 것입니다.
또 한편, 소법을 좋아하는 사람은 금강경을 제대로 좋아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으니까 읽지도 않을 것이고, 남을 위해서 해설해주는 기회도 없을 것이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須菩提야 在在處處에 若有此經하면 一切世間天人阿修羅의 所應供養이니 當知此處는 卽爲是塔이라 皆應恭敬作禮圍繞하야 以諸華香으로 而散其處하리라
수보리야 재재처처에 약유차경하면 일체세간천인아수라의 소응공양이니 당지차처는 즉위시탑이라 개응공경작례위요하야 이제화향으로 이산기처하리라
재재처처는 ‘어디에 있든지 간에’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있는 곳이 화장실이든 침실이든 교실이든 식당이든 공원이든 어디든지 간에 만약에 내가 있는 그곳에 금강경이 있을 것 같으면 일체 세상 사람과 천신과 사람과 아수라들의 응당히 공양할 바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금강경은 너무 수준이 높은 경전이니까 어디에 있든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 경이 있는 곳은 무조건 공양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마땅히 알아라 이 경이 있는 곳은 곧 불탑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부처님이 열반하신 이후에는 불탑신앙이 발달하였습니다. 탑 속에는 부처님의 사리가 들어있기 때문에 부처님을 모시듯이 탑을 모시고 공경하고 꽃을 공양 올리는 것이지요. 그런데 부처님 사리는 한계가 있어서 열반하신 후에 주변 나라에만 전해졌을 뿐입니다. 우리나라 라든지 중국 같은 나라에는 탑안에 사리대신 경전을 넣었습니다. 불상 속에도 경전을 넣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과 똑같은 이 경전은 부처님 사리와도 같고, 사리가 모셔진 불탑이나 같아서 이 경이 있는 곳은 곧 불탑과 똑같은 곳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금강경을 보고 있다면 전부 부처님 사리탑을 하나씩 다 모시고 있는 것이고, 금강경이 열 권 스무 권 있다면 부처님 사리탑을 열 개 스무 개 모시고 있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부처님의 의미는 진리의 가르침, 위대한 가르침입니다. 그 외에 다른 의미는 아무 것도 없어요. 불상이든 탑이든 그 속에 부처님의 위대한 가르침이 모셔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 응당히 공경하고 예를 짓고 탑을 돌기도 합니다. 요불요탑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부처님을 모셔놓은 불탑이나 불상을 도는 것인데 하나의 공경의 표시입니다.
그리고 그 탑에 여러 가지 꽃과 향을 뿌립니다. 이것은 다 탑을 공경하고 공양할 때 하는 의식인데 경전에 대해서도 탑에 공경공양하는 마음자세로 모시고 받들며 섬겨야 된다는 뜻입니다.
지경공덕분에서는 경을 가지는 공덕을 몸을 보시하는 공덕과 비교를 했고, ‘이 경전이 그대로 불탑이다, 바로 부처님이다’ 라고 하는 표현까지 하였습니다. 경전의 중요성과 부처님 가르침의 중요성을 이런 데서 우리가 깊이 마음에 새겨야 할 줄 믿습니다.
출처 : 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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