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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씀 : 박 찬 덕 선교사
어제는 우리가 아가서 1장 12절 말씀 “왕께서 자신의 상에 앉아 계실 때에 내 나드 향유가 그것의 향내를 풍기는구나. ” 나드 향유의 향긋한 향료 곧 요한복음 12장 3절에 나사로의 누이였던 그리스도를 사랑하였던 자 사랑하는 자 또한 솔로몬 왕으로 예표 되고 있는
사랑하는 자 사랑하시는 자가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 보여
줌으로 말미암아 마리아가 그 달콤한 사랑의 매력에 매혹되어서 점점 더 깊은 사랑에
도취되고 적셔진 바 되어서 그 마리아 또한 사랑하는 자가 되어서 그리스도와 마리아가
하나가 됨으로 말미암아 순수한 나드 향유 한 근을 그리스도의 발에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바르는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한 그런 영적 의미를 가진 그리스도의 장사를 기념하기 위해서 부었을 때 오히려 이 종교 지도자들과 그리고 제자 중 하나였던 가룟 유다는 그 값진 향유 한 근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더라면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엄청난 금액을 허비하고 낭비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이렇게 묻게 되는 것에 대한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 마리아는 자신을 지극히 사랑하는 자가 되신 그분의 사랑의 그 향을 맡은 다음에 주체할 수 없어서 너무나 큰 사랑에 감동되고 도취되고 적셔진 바 되고 어찌할 수 없는 그 그리스도를 향한 자신의 어찌 할 수 없는 그 넘치는 그 사랑에 자신은 그 나드 한근을 드림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그렇게 표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어떤 깊은 주님을 향한 마리아의 사랑을 이렇게 내보이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그릇된 생각을 얘기하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그 마리아에 계속되어지는 그 친교 교통 교제함을 통하여서 그를 조성하시고 변화시키셔서 자신의 사랑을 그에게 부어 주셨던 것입니다.
마치 이 술람미 시골 처녀가 예루살렘의 왕의 궁전에 계셨던 그가 자신이 있는 곳에 찾아와 사랑을 고백하고 또 구애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랑의 아주 묘한 달콤함을 맛보고 도취되어서 마치 이렇게 자신이 그 사랑에 감복하여 이 나드 향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을 어제 우리가 교제를 나누었는데요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온전한 그리스도 그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온전해지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말미암아 거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사랑의 달콤한 향 달콤한 그
사랑에 매혹되는 일 거기에서 멈춰서는 안된다 라는 것입니다.
더욱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됨으로 말미암아 바로 십자가를 상징하고 있는 아가서
2장 14절에 “오 바위틈과 계단의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내가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목소리를 듣게 하라. 네 목소리가 달콤하며 네 얼굴이 아름답도다. ”
이 십자가는 바로 아주 은밀하고 깊이 감추어진 곳에 있다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감춰진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숨겨진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바위틈과 낭떨어지 은밀한 곳이라고 이렇게 얘기함으로 말미암아 그 바위로
이렇게 울퉁불퉁하게 조성된 그런 깊은 보이지 아니하는 은밀한 곳에 위치함으로
말미암아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 바위틈과 계단의 은밀한 곳인 그런 낭떨어지 은밀한 곳에 숨겨져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가 됨으로 말미암아 깊이 있는 그리스도의 그 사랑을 체험하지
않으면 올라 갈수가 없는데요 올라가게 하는 것은 부활의 능력을 지니신 예수님의 영에
의하여 도움을 받고 힘입어 후원을 받고 기운을 차려서 바로 암사슴이 되고 숫사슴이 되고 노루가 되고 이 산양과 산염소가 될 때 우리는 그 가파르고 높은 위치에 있는 낭떠러지
깊은 바위틈에 위치하고 있는 그 십자가에 은밀히 숨겨져 있는 그곳에 이렇게 들어가서
보게 됨으로 말미암아 깊은 사랑을 더욱더 체험함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와 하나가 되어서 우리가 이 사랑하는 자에 의해서 사랑을 받은 그 마리아처럼 정말 주님의 크신 사랑에
감동되어서 그리스도를 향한 자신의 전체적인 자기 존재의 모든 것인 나드 향을 드리는
사랑의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를 통하여 깊이 있는 사랑의 체험을 하지 않으면 마태복음 16장 22절 23절 24절에 있는 것처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주님은 그리스도이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이렇게 정말 신령한 빛의 계시를 받아 그런 신령한 고백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잠시 후에
마태복음16:15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나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매 16:17 예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그것을 네게 계시한 이는 살과 피가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이 반석 위에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 지옥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하리라. 16:19 내가 하늘의 왕국의 열쇠들을 네게 주리니 무엇이든지 네가 땅에서 묶으면 그것이 하늘에서 묶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네가 땅에서 풀면 그것이 하늘에서 풀리리라, 하시고 16:20 그때에 자기 제자들에게 명하사 자기가 그리스도 예수인 것을 그들이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게 하시니라. 16:21 그때부터 예수님께서 자기가 반드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장로들과 수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일들로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며 셋째 날 다시 일으켜질 것을 자기 제자들에게 보이기 시작하시니 16:22 그때에 베드로가 그분을 붙잡고 꾸짖기 시작하여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이 일이 결코 주께 임하지 아니하리이다, 하거늘 16:23 그분께서 돌이키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너는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내게 실족거리니라. 네가 하나님에게서 난 일들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사람들에게서 난 일들을 좋아하는도다, 하시니라.
주님 무슨 말씀인가요? 주님께서 이러한 고난과 고통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다니
이러한 얘기를 드리면서 주님이 하고자 하는 일을 막고자 하는 베드로와 같은 삶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때 이 옛 사람 혼 안에 해결하지 못한 청산하지 못한 그 첫사람 아담에 속한 그 자아
그 혼 속에 내재되어 있는 그 사탄적인 죄악된 본성에 의해서 이 베드로가 사탄과 하나가 되어 바로 그런 얘기를 했을 때 주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꾸짖으시며 오히려 사단아
나의 뒤로 물러가라 자신의 뒤로 물러가게 하고 그 베드로와 그리스도를 이렇게 마주보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마주보게 하여 하나가 되는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그 베드로의 자아가 이 사탄과 하나가 되어서 사탄의 생각과 뜻과 사단의 정신을 가지고 바로 예수님이 가고자 하는 길을 막고자 했던 그 베드로의 자아를 그 옛 사람을 사라지게 하는 부인
하게 하는 일을 하신 것이 바로 마태복음 16장 24절 말씀 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지니라.
그렇습니다. 베드로의 자아는 그때 당시 사단적인 인성을 가진 옛사람 안에서 표출한
것이기 때문에 그의 말은 올바른 것 같아도 틀린 말입니다. 이 선과악을 알게하는 지식의 나무의 열매는 옳아 보이는 것 같은데 사망의 길로 가게 하는 독소가 가득 차 있는 이 사단의 그러한 죄를 소유하게 하는 일이 되어진 것입니다.
그때 당시에 베드로는 사단의 천연적인 자아로부터 나온 자신의 생각의 관념에서 나온
옛사람에 의해서 표출된 주님! 그리하지 마소서 이런 일이 주님에게 미치지 아니할 것입
니다 라는 그런 얘기를 통해서 바로 사단의 생각 사단의 사상에 완전히 사로잡힌 바 되어서 타락한 인성 안에 있는 옛 사람 첫 사람 아담에 속한 그 타락한 인성의 관념 속에서 자신의 어떤 유익을 위해서 자신의 어떤 안위를 위해서 그렇게 말함으로 말미암아
베드로의 보이지 아니하는 감춰진 은근한 이기심을 통하여 사단이 바로 그러한 자임을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께 역심을 가진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이익이 아닌 자신의 안위와 이익을 위한 이기적인 존재자였다 라는 것을 베드로를 통해서도 이렇게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옛사람에 대한 문제로 말미암아 세상에 있었을 때는 옛 사람이 있다 라는
것조차도 우리가 구별을 할 수 없지만 새 사람이 된 후에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신성한 생명의 영을 부어주심으로 말미암아 그 생명의 영에 힘입어 우리가
새로운 출생 거듭나는 삶을 살게 됨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 사람이 그제서야 새 사람이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옛사람과 내 속 사람 안에 있는 새 사람이 부딪히는 문제로 인하여 늘 이러한
나의 생각과 그리고 이 속 사람의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각과 뜻이 같지 않고 계획이
같지 않고 목표가 같지 않고 생각이 같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갈등을 표출하게 되는 것이 우리들의 갈등이고 이 문제로 인하여 기인된 고통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이 혼 안에 감춰져 있는 옛 사람 타락한 사단적인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첫사람 아담의 허리에서 산출된 그 죄악된 본성 그 자체를 가진
상태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옳게 보여도 선하게 보여도 다 그릇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타락한 혼 안에 속해 있는 옛사람은 그리스도의 피의 효력을 통하여 이미 죄가 구속
되고 해결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육신의 몸이 온전히 구속될 때까지는 이 옛 창조 안에 있는 혼 안에 있는 옛 사람은 계속적으로 우리 안에 함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내가 삶을 사는 그러한 인생의 과정 가운데서 얼마나 많이 예수님의 영께서 나를 정말 아주 혹독하게 다루시고 아주 심하게 나를 벗기셔서 이 옛 사람이 제거되기까지
사는 삶의 길이 바로 구원의 길의 여정인 것입니다.
예 이 바울에게도 이러한 육체의 가시 사단의 전달자요 사단의 사자라는 얘기를 통해서
이 육체의 가시를 없이 하게 해달라라고 간절히 간구한 것을 우리가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 선생님도 타락한 인성 안에 있는 그 옛 사람에 속한 그런 것들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 많은 갈등과 많은 고통을 경험 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이 고린도후서 12장 7절의 말씀입니다.
“계시들이 넘침으로 말미암아 내가 분량 이상으로 높여지지 않게 하시려고 주께서 내게
육체 안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사 나를 치게 하셨으니 이것은 내가 분량 이상으로
높여지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들을 이 옛사람 자아 라는 것을 혼 안에 두신 것은 그러한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더욱더 정화되고 더욱더 주님을 의지하고 더욱더 주님을 바라봄으로 말미암아
이 첫 사람 아담의 허리에서 산출되어진 그러한 타락한 본성을 지닌 피와 살을 가진 몸을 가지고 그리스도께서는 사셨으나 이 그리스도께서는 옛 창조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그러한 삶을 사신 분이시기 때문에 바로 우리 혼 안에 옛 창조와 관련된 이 옛 사람이 자라는
것이 있게 함으로 말미암아 더욱더 그리스도와 온전히 같아지기를 그리스도를 쫓아
사는 삶을 갈망함으로 말미암아 옛 창조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옛 사람이 아닌 새 사람
으로서의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과 온전히 하나 되어 움직여 함께 삶을
사신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게 하기 위한 그러한 이유에서 옛 창조 안에 혼 안에 있는
옛 사람을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그 피의 효력을 통하여 완전히 제거시켜
주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죄의 문제는 해결해 주셨을지라도 우리가 세상에 발을 딛고 사는 동안에 옛 창조와 관련된 자가 됨으로 말미암아 왜냐하면 육체가 있기 때문입니다. 육체가 죄라는 것을 통하여 그 죄라는 인격을 가진 그 사단이 죄 속으로 들어와서 또아리를 틀고 좌정 해 있음으로 말미암아 거짓 주인으로 거짓 남편으로 우리 육체를 점령하고 있기 때문에 육체의 이러한 삶을
부인하는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같은 옛 창조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삶을 살게 하고자 주님께서는 우리 육체 안에 이렇게 늘 죄를 통해서 그 사단을 없이 하고자 하는
이 혼의 옛사람의 삶을 제거시키는 삶을 끊임없이 살도록 요청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하나님은 이 술람미 처녀에게 옛 창조의 부분이 그 여인에게 남아 있도록 이렇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 아가서 마지막에서는 그것 때문에 갈등을 하고 고민하고 그러한 마음을 깊은 바위틈과 낭떨어지 은밀한 곳에 있는 계단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러분 계단을 한번 올라가려고 생각해 보세요.
이 울퉁불퉁한 그 바위틈을 올라 간다는 것을 한번 연상해 보세요.
십자가는 바로 그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깊은 십자가를 얘기하는 겁니다.
여러분 계단 3층 4층도 올라가기가 버거워 엘리베이터를 타는 요즘 세상에
이것이 수십 층 50층 100층 이렇게 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그 계단의 은밀함과 가파른 그런 울퉁불퉁한 바위틈에 위치하고 있는 그곳에 가야만
깊은 십자가의 사랑의 체험 그리스도의 깊은 사랑의 체험을 맛볼 수가 있는데 그것이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항력적입니다. 올라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능력을 통하여 이 아가서 14절에 얘기하고 있는 것처럼
아가서 2:14 오 바위틈과 계단의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내가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목소리를 듣게 하라. 네 목소리가 달콤하며 네 얼굴이 아름답도다.
바로 우리에게는 그러한 올라갈 수 있는 힘 울퉁불퉁한 바위 계단 그 백층을 어떻게 올라
갑니까? 엘리베이터가 아니면 어떤 자신의 방법으로는 힘들기 때문에 올라갈 수가 없기
때문에 바로 부활의 능력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베데르 산들 위의 노루나 젊은 사슴
같이 우리를 만듦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것을 뛰어넘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가서2:17 나의 사랑하는 이여, 날이 새고 그림자들이 달아나기 전까지는 돌이키시며
또 당신은 베데르 산들 위의 노루와도 같고 젊은 사슴과도 같이 되시옵소서.
그래서 계속 산과 들 얘기가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은밀히 감춰져 있는 숨겨져 있는 그 십자가를 찾아 올라가 추구하고
갈망하고 보게 됨으로 말미암아 깊은 사랑을 맛보게 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랑에 도취되고 적셔진 바 되어서 우리의 옛 사람이 그러한 과정들을 통해서 제거되고 또 벗겨지고 또
잘라지고 쪼개지고 이러한 때려짐을 당함을 통해서 우리가 그러한 옛사람이 제거되고
파쇄되는 파멸이 되는 이 파쇄가 된다는 것은 조금씩 조금씩 잘라져서 점점점점 그 형체
자체가 없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 온전한 그리스도의 변형된 모습으로 우리가 이를 때까지 온전한 우리의 육신의 몸이
온전히 구속될 때까지 옛사람이 파쇄되는 일의 과정을 통하여 바로 주님의 영께서
우리에게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 안에 왜 이러한 것이 있지 왜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왜 이러한 것을
통해서 내가 왜 자꾸 세상의 것을 탐하게 되고 자꾸 하늘의 것인 그리스도의 뜻을 쫓아
살지 않고 왜 그릇된 삶을 자꾸 살게 될까라고 자신을 자꾸 들여다보게 됩니다.
어! 이것은 옳은 것이 아니고 그른 것인데 나는 그른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이 아니라
틀린 것이 아니라 올바른 길을 바른 삶의 길을 가기를 원하는데 왜 내 자신은 이럴까라고 자기를 자세하게 들여다 보고 살피게 될 그때 바로 이 옛 사람이 육체 안에 존재하였던
죄를 통하여 좌정하였던 그 죄라는 것이 옛사람 안에 슬쩍 은밀하게 아주 교묘하게
거짓된 가면을 쓰고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왜 내가 옳은 일을 안 하고 그른 일을 할까라고 자신을 살피는 일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을 살펴서 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선을 이루고 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히브리서 12장 2절을 한번 볼까요.
12:2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분께서는 자기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해 십자가를 견디사 그 수치를 멸시하시더니
이제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
우리 믿음의 창시자 또 완성자이신 예수님만을 바라보자 라고 하는데 왜 그렇습니까?
우리에게 성경은 예수님만을 바라보라고 이 히브리서 저자는 그렇게 강권적으로 권면하고 있는데요. 우리는 왜 내가 이렇게 하나님 보기에 옳은 일이 아니라 왜 그릇된 일을 하지
라고 자기를 살피는 그러한 문제는 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선과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 열매를 통해서 이게 왜 옳은 것이야! 이게 틀린
것이야! 이게 그릇된 것이야! 그러면 이 그릇된 것이 아니라 이게 옳은 것이겠네 라는
그런 것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합니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아서는 절대 이 혼 안에 있는 자아라는 이 죄악된 본성으로
얼룩져서 만들어진 그런 옛 사람을 제거할 수가 없습니다.
나 자신을 살피고 내가 옳지 않은 것을 했다 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 옳지 않은 그릇된
것을 없애려고 하면 할수록 그때 거짓된 가면을 쓰고 이 옛사람이 슬쩍 육체의 오감을
통한 죄라는 것을 통해서 그것이 전염이 되고 얼룩지게 함으로 말미암아 이 옛사람을
새 사람이 되지 못하도록 완전히 그 가는 길을 막고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 자신을 절대 보아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어떤 종교인들을 보면 자기 자신의 깨끗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늘 자기를 때리는 사람 자기 성찰이라는 이러한 단어를 사용하면서 자신을 늘 들여다보고 자신의 나쁜 점
얼룩진 점 어두운 점은 제거하고 올바른 것은 이렇게 받아들이도록 나를 살피라는 자아를 성찰하라는 그러한 것을 요구를 합니다만 그것은 사단이 교묘하게 거짓된 가면을 쓰고
옛사람을 질적으로 양적으로 더욱더 크고 더 많이 만드는 아주 위험한 발상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닌 항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아야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6장 23절에서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이 사단이 베드로의 자아를 통하여서 천연적인 관념 베드로의 생각과 뜻과 정신을
사탄이 사탄과 하나 되게 하여서 그의 천연적인 관념 속에 슬쩍 거짓된 가면을 쓰고
들어와서 마치 그 얘기가 옳은 것처럼 주님!그리하지 마소서 결코 이런 일이 주에게
미쳐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라는 얘기를 통해서 마치 옳은 얘기를 한 것처럼 주님을
위해서 일한 것처럼 하늘나라에 유익이 되는 것처럼 얘기했을 때 주님께서는
바로 이 베드로와 함께하고 있는 그 자아를 통해서 사탄과 하나가 된 베드로의 자아
베드로의 천연적인 그 생각 천연적인 관념을 이렇게 폐쇄시키기 위하여 사단아 나의
뒤로 베드로의 뒤가 아닙니다. 나의 뒤로 물러가라 하고 이 베드로와 사단 그 사이에
바로 예수님께서 가로막아 서 있음으로 말미암아 베드로가 볼 때 사단이 아닌 그리스도
만이 보이게 함으로 말미암아 바로 자신이 아닌 천연적인 관념을 통해서 이 거짓된
가면을 쓰고 들어와서 자아가 두텁게 되고 크게 되는 이 베드로의 자아를 파쇄시키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뒤에 사단을 두고 그리고 베드로가 볼 때는 예수님 자신만을 바라보게 함으로 말미암아 거짓된 가면을 쓰고 베드로의 자아와 하나가 되어서 사탄적인 인성 속에서 고백한 주님 그리하지 마옵소서 라는 베드로가 사단에게 점유되고 사로잡혔을 때 바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자신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자신만을 바라보게 함으로 말미암아 사단에게 점유되고 사로잡힌 그 베드로의 그 자아를
그 옛사람을 혼에 속한 옛 창조 영역 안에 있던 그런 천연적인 관념들을 다 없애기 위해서 자신을 바라보게 하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성 안에 있는 사람은 자기의 천연적인 관념에 따라서 자아의 뜻을
쫓아 그런 고백을 하는데 그런 타락한 인성 안에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만을 관심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베드로의 그 자아를 통해서 사단은 자신의 유익을 취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주님! 주님에게 이런 일이 미치면 안 될 것입니다 라고 마치 주님을 위한 듯
마치 주님의 나라의 유익을 위한 듯 마치 자신의 얘기가 옳은 듯 하였지만 그것은
사실은 사탄 자신의 유익을 위한 일입니다.
베드로 자신의 안위를 추구하고자 한 이기적인 어떤 그런 관념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선과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의 열매는 비록 옳아 보이고 선하게 보인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들은 천연적인 관념 속에서 나온 사망의 길로 가게 하는 그러한
사단적인 관념 속에서 이렇게 보여지는 것들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이 혼 안에 있는 옛 사람 이 타락한 인성을 통하여 점점 크게 자라는 자아는 절대 볼
가치가 없습니다. 그것을 보면 볼수록 은근하게 풍선처럼 부풀어집니다.더 크게 됩니다.
질적으로 더 단단해지고 풍선처럼 더 커짐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은 나 자신을 살펴서
좋게 되려는 정말 하늘나라에 도움이 되려는 그런 마음을 버려야 됩니다.
그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봐야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산 분이 아닌 하늘 아버지의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시고
그 임무를 완수하시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만을 관심을
갖고 오직 아버지 하나님만을 위해서 사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사단은 하나님 아버지 그 나라를 위해서 사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유익과 자신의
탐욕과 자신의 이기심을 위하여 존재한 자였고 그리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역심을
품고 하늘나라에서 전쟁을 가졌던 자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단은 우리들이 자꾸 우리 자신을 바라보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 자아가 그 옛사람이
질적으로 단단하고 양적으로 커지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 옛 사람이 파쇄되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하여서 새 사람의 기능과 역할을 마비시키고 훼손시키고 망가뜨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주 교묘합니다.
사단은 나를 바라보게 함으로 말미암아 나를 자세하게 들여다보게 하고 왜 그럴까라는
의문을 갖게 함으로 말미암아 거짓된 가면을 쓰고 싹 교묘하게 들어올 그때 예수님께서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라는 그 표현을 꼭 기억하시고 예수님만을 바라보셔야 됩니다.
그 옛 사람 그 자아가 잘못된 관념에서 바로 자기가 말하고 있는 것이 옳은 것인 줄 알기
때문에 아주 강력하게 예수님을 꾸짖으면서까지 결코 예수님에게 이러한 일이 미쳐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라고 그렇게 아주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자신의 생각이
옳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의 열매 뱀의 꾐에 빠져서
그것을 먹었을 때 자기 자신의 생각이 옳아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옳아 보였던 그 생각은 옳은 것이라고는 단 0%도 없는 그냥 완전히 사망의 길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자신의 그 자아 그 옛사람
그 타락한 인성 속에서 갖게 되고 나오게 된 그 자아를 완전히 부인함에 대해서 가르쳐
준 것이 바로 24절 말씀인 것입니다. 이게 혼에 대해서 얘기했죠.
16:24 그 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그리스도만을 바라볼 때 말하는 자기 자신이 아닌 천연적인 관념이 아닌 생명나무의
열매의 영역에 관념해서 이야기하는 것만이 바로 생명을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에 대한 관심 나를 바라보고 나를 들여다보고 나를
살핌으로 말미암아 자꾸 깨끗하고자 하면 할수록 질적으로 너무 단단해지고 양적으로
너무 커지는 옛사람의 문제로 인하여 수 없는 고통과 갈등과 고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계속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서 성찰하면 할수록 깨끗해지려고 하면 할수록 하나님 앞에
올바른 사람이 되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러한 일들을 통해서 주님 앞에 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주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다 라고 생각을 하는데 이것은 이러한 나 자신을 들여다봄으로 말미암아 깨끗해지고자 하는 것은 선과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통해서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의로운 자가 되고자하는 그런 사탄적인 자아에서 나온
것이 바로 나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내 자신을 바라보면서 들여다보면서 살피면서
나 자신이 사함을 얻으려고 하는 의로워지려고 하는 그것이 가인의 제사였던 것입니다.
가인은 자신의 방법으로 자신의 생각 천연적인 관념에서 그러한 제물을 드림으로 곡물에 의한 소출된 것으로 인하여 수고와 땀은 더 많이 흘렸죠. 어떤 면에서 아벨의 제사보다는 훨씬 더 많은 공을 더 드렸을 것입니다.그런데 그것은 사단적인 자아에서 나온 가인 자기 자신의 생각의 발로에서 나온 것이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의도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아벨은 바로 그 하나님의 의도에 따라 드렸기 때문에 자신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를 표현했다 라는 면에서 열납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자신의 의를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신의 의를 드리고자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결코 이러한 일이 주님에게 벌어져서는 아니 되죠 라는 베드로의 이런 고백은 완전한 가인의 자아에서 불법적인 제물을 드린 것처럼 이 베드로의 주님 그리하지 마소서 그러한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라고 강력하게 주장한 그 베드로의 고백은 사단적인 생각 사단과 하나된 그런 생각의 자아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서 나온 생각이 아닌 오직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나온 그 생각이
바로 자아를 파쇄시키고 그리고 속사람인 새 사람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을 따라
움직이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그러한 고백이 나올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것만이 히브리서 12장 2절에 항상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말미암아 곧 지금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바로 이러한 일을 우리에게
이렇게 해결될 수 있도록 우리가 해방될 수 있도록 십자가를 통하여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라봄으로 말미암아 깨끗해지고자 하는 의롭게 되고자 하는
그런 일이 아닌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우리를 구출할 수 있고 구원할 수 있고 해방할
수 있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자기를 살피고 자기를 들여다보고 자기를 깨끗이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가고자 하는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기의 깨끗함을 통해서 가고자 하는 자기의 자아의 성찰을 완전히 버려야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베드로와 같은 그것이 옳아 보이는 것 같은데 결코 옳지 않은
옳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의 목적을 깨부수고자 하는 파괴시키고자 하는
엄청난 실수와 잘못이기 때문에 바로 자아를 통해서 교묘하게 은밀하게 가장되어진 사단을 주님께서 그 정체를 아시고 사단아 내뒤로 당장 물러가라 왜냐하면 베드로의 자아를
통해서 거짓된 가면을 쓰고 베드로의 자아와 이 사탄과 생각이 하나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 사단과 베드로의 생각을 하나가 되게 함으로 말미암아 베드로의 그 고백을 통하여 바로사단의 의도를 드러내고자 했던 것을 예수님께서 모르실 리가 없죠.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세상 삶을 사는 가운데 얼마나 많이 겪게 되는지 모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우리를 이러한 상태에서 이런 천연적인 관념 내 혼에
있는 그 옛사람 자아로 똘똘 뭉쳐진 그 옛사람 첫 사람 아담에게 산출되어진 타락한 인성을 죄악된 본성을 가진 그것은 육체와 항상 손을 잡음으로 말미암아 육체가 하나가 되어
이렇게 협력함으로 말미암아 항상 속 사람의 새 피조물이 된 그 하나님의 영의 뜻을 따른 새 사람의 관념이 아닌 옛 사람의 관념이 선악과를 따먹은 지식의 열매를 취한 그 관념
속에서 얘기하고 생각하고 말하고 관계를 맺고 하는 이런 모든 것들을 통하여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만이 오직 그리스도를 바라 보는 것만이 이런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라는 것을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을 살다가 떠나시면서
주신 우리에게 바로 그 자신의 모든 것이 되시는 십자가와 하나됨으로 말미암아 옛사람에서 실족 당하여 항상 넘어질 수밖에 없는 좌절할 수밖에 없고 이 사망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그 자아에서 구출되도록 항상 우리는 십자가를 추구하여야 되고 십자가로 이끌림
받아야 되고 우리가 그 십자가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아가서2장14절 말씀처럼 바위틈과 계단의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예 정말 통찰력을 가지고 주님의 눈만을 주님만을
오직 갈망하고자 하는 추구하고자 하는 주님만을 바라보고자 하는 그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그 십자가만을 바라볼 때 그런데 이 십자가는 외형적으로 얼핏 보면 달콤한 그리스도의 매혹에 도취되어서 이끌림을 당하지만 실제적으로 그 이끌림을 당하는 그것은 지금 베드로의 이 상태의 문제를 주님 그리하지 마옵소서라는 이런 엉뚱한 천연적인 관념 속에서
자아에서 사단과 하나가 되어서 사단에게 사로잡힌 바 되어서 사단에게 점유된 자가
되어서 사단적인 어떤 인성의 고백을 자아를 통해서 얘기하는 그런 삶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아가서 2장 14절 말씀을 통해서 깊은 십자가에 더 깊이 들어가서 그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시는 정말 말할 수 없는 깊은 사랑의 체험을 함으로 말미암아 바로 그분의 정말 귀한 사랑 존귀한 사랑 말할 수 없는 그러한 사랑에 도취됨으로 말미암아 아가서 1장 12절에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또 요한복음 12장 3절에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마리아를 통해서
그 자신을 향한 그리스도의 그 사랑이 너무나 커서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로 자신을 향한 그분의 사랑이 자신의 온 존재를 바쳐도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나의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그런 존귀한 보배로운 사랑임을 알고 그리스도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이렇게 두 손에
의하여 정말 경배하는 모습으로 경외하는 모습으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 드려지는
모습이 바로 나드 향 일 리트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자신을 변화시키시는 그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어진 상태에서 이러한 드림이 우리들에게 이렇게 교훈으로 보여줘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와 하나될 때 그리스도만을 비둘기의 눈으로 통찰력을 가진 하나의 집중된 눈을 가지고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갈망하고 추구하고자 할 때 바로 우리는그러한 계단 은밀한 곳에 있는 십자가 바로 울퉁불퉁한 그러한 바위 꼭대기에 감춰져 있는 아가서 2장 14절 말씀이죠. 바로 그러한 은밀한 감춰진 숨겨진 십자가 안에 깊이 들어가서 더 깊은
사랑의 체험을 함으로 그 깊이 감춰진 그곳에는 내밀한 그 주님과의 사랑이 있을 것입니다.
마치 솔로몬 왕과 그 시골 처녀의 그 내밀하고 은밀한 사랑 둘 만의 그 연인 간의 사랑이
교감을 나누고 비둘기 같은 눈으로 바로 자신을 사랑하였던 그 솔로몬왕이 자기 자신을
그렇게 비둘기 눈으로 쳐다보는 순수하고 자신만을 의지하고자 하는 그런 복종된 마음의 사랑을 보이고 있는 그를 보시면서 너무나 기쁨으로 감상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숨겨지고 감춰진 십자가와 하나가 될 때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봄으로
말미암아 깊은 십자가의 사랑에 도취되고 완전히 적셔짐을 받을 때 우리는 자아에서 혼
안에 있는 옛사람에게서 첫 사람 아담의 허리에서 산출된 타락한 본성에서의 삶이 벗김으로 말미암아 그 질적으로 단단해지고 양적으로 풍선처럼 커진 그러한 자아라는 그 옛사람이 파쇄될 수 있다는 것을 꼭 기억 하셔야 할 것입니다.
은밀하고 깊은 숨겨지고 감춰진 그 울퉁불퉁한 바위 가운데 아주 높은 바위 틈 가운데 있는 그 속에 들어가서 내밀한 연인의 사랑을 나누고 체험하고 경험한 자만이 자아 에서 구출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그분의 사랑에 매혹되어서 이끌림을 당하여서 주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런데 이 내밀한 연인의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깊은 십자가의 체험은
그 높은 울퉁불퉁한 바위 꼭대기 바로 그 높은 계단의 은밀한 곳 아가서 2장 14절에 있죠. “오 바위틈과 계단의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네 목소리는 달콤하며, 네 얼굴은 아름다우니, 나로 하여금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목소리를 듣게 하라.”
우리가 그 십자가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그 사랑의 달콤한 말할 수 없는 표현할 수 없는
그 사랑을 맛보기 위해서 그분께서 우리의 얼굴을 보기를 원하시는데 우리가 그분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는 높이 울퉁불퉁한 그 산 꼭대기 은밀하고 감춰지고 숨겨진 그곳에 올라가야 하는데 우리 힘으로 안 됩니다. 어떻게 올라가야 될까요?
여러분 아가서 2장 8절에 “ 8 내가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분께서 산들
위로 뛰어 오시며 언덕들을 뛰어넘어 오신다. 9 내가 사랑하는 이는 노루나 젊은 사슴 같
으시니, 보라, 그분께서 우리의 담 밖에 서서, 창문으로 들여다보시며, 격자창을 통해 자신을 보여주신다.“
여러분 이 산에서 달리고 언덕에서 뛰면서 오시는데 여러분 왜 달립니까? 왜 뜁니까?
달리는 것은 그 끝까지 인내하면서 감으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극복한다는 말이고 뛴다
라는 것은 말할 수 없이 앞에 산적되어 있는 크고 작은 방해물들 장애물들이 있기 때문에 어려움과 장애물을 극복하고 초월하고 통과하는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깜깜함과 어두움 가운데 계셨다가 3일 만에 다시 부활
하신 것은 바로 이러한 어려움과 장애 깜깜함과 어두움인 어려움과 장애를 극복하고 초월하고 이기고 통과하여 다시 사신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의 능력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예 아가서:2장8절 말씀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로 구나 그분께서 산들 위로 띄우시며 작은 산을 뛰어 넘어 오신다. 이러한 생명의 부활 생명의 능력을 가지신 그리스도의 후원을 받지 아니하면 도움을
받지 않으면 이끌림을 받지 아니하면 어떻게 그런 높은 울퉁불퉁한 산 꼭대기 그 높은
계단에 아주 숨겨져 있는 높은 계단에 수많은 계단 높은 곳에 위치한 십자가 속으로
우리가 들어갈 수 있습니까 안 됩니다.
그런데 부활 안에 계셨던 그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어려움과 장애를 극복하시고 다시
사신 분이시기 때문에 어려움과 장애를 극복하는 이 길이 있음을 아시고 우리를 도우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나는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얘기함으로 말미암아 바로 부활의 생명 능력을 통하여 우리를 도우시는 그래서 우리의 손을 잡고 이끄실 수가 있는 것이죠.
우리는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그러한 2장 14절에 있는 것처럼 바위틈과 계단의 은밀한 곳 여러분 그 울퉁불퉁한 바위가 무성한 그러한 어떤 지점 그런 위치의 낭떨어지가 심한 그런 곳에 있는 그런 은밀하고 감춰지고 숨겨진 곳에 우리들은 갈 수가 없습니다.
그 수많은 언덕들 수많은 산들 수많은 바위투성이가 있는 돌들이 있는 그곳에 우리가어떻게 뛰어넘어 그 사랑의 부활의 생명 능력이 있는 십자가 안으로 우리가 어떻게 들어갈 수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언덕들과
산들이 우리를 그분께 나가지 못하게 어려움이 되고 장애가 되기 때문에 그분께서 산들
위로 뛰어오시며 작은 산들을 뛰어넘어 오시는 부활의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그 경험을 통해서 어려움과 장애를 극복하신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생명의 능력을 통해서 우리 손을 잡고 이끄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죽으셨다가 죽음을 통과하신 후에 다시 사신 부활하신 그분께서는 결코다시
사는 부활하시는 일에 실패하지 않으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실패하지 않으시고 깜깜함과 어둠을 통과하여 3일 동안 장사 지낸 바 되어진 스올이라는 음부의 세계에 계셨던 그분이 결코 수많은 언덕들과 수많은 산들 수많은 장애물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는 계속 달리고 넘으셔서 부활하실 수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부활의 생명 능력 그래서 그분이 여기에 8절에서 그분께서 산들 위로 뛰어오시며 작은
산들을 뛰어넘어오시는도다 어떤 모습으로 노루나 젊은 사슴같이 여러분 우리는 정말
깊은 울퉁불퉁한 기암절벽이 있는 그런 바위 등과 같은 십자가 낭떠러지와 같은 그런
십자가 은밀하고 숨겨지고 감춰진 감춰지고 숨겨진 그런 은밀한 곳이 돼서 보이지
아니하는 그 십자가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이 있는 십자가로 갈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럴 만한 힘이 없어요 우리가 어떻게 그런 경험이 있나요?
그런 체험이 있나요? 없습니다. 그런 체험과 경험이 있어서 결코 실패하지 않으시고
그 산들을 뛰어넘으시고 수많은 언덕들을 건너뛰신 그 죽으셨으나 그 깜깜함과 어두움을 바로 초월하여 통과하여 극복하여 바로 이기신 그분만이 우리를 손을 잡고 이끄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얘기하고 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놀랍지 않습니까 빌립보서 3장 10절 말씀입니다.
“10 이것은 내가 그분의 죽으심과 일치하게 되어 그분과 그분의 부활의 권능과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알고자 함이요,”
그래서 십자가로 우리가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에 의한
것이라고 빌립보서 3장 10절은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요 우리는 울퉁불퉁한 기암절벽과 같은 십자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그러한 힘이나 기술이 없습니다. 낭떨어지 가늠해볼 수 없는 그러한 자칫 잘못했다
가는 떨어지면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러한 그 십자가 낭떠러지 깊은 곳에 우리가 올라갈 수 있는 그런 힘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일을 십자가로 가기까지 우리를 도우시는 그리스도가 계신데 그
그리스도께서는 이 일을 먼저 선제적으로 최초로 하심에 있어서 실패하지 않으셨습니다.부활하기까지 수많은 어려움과 수많은 방해와 수많은 사탄의 공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수많은 장애들을 극복하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달리고 작은 산을 넘어가기까지 얼마나 많은 난관과 어려움과 고통의 과정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부활 안에 계신 그분께서는 부활을 통하여 그런 어려움과 장애를 극복하셨습
니다. 그래서 그분은 길이 되실 수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이 그런 어려움과
수많은 난관과 장애를 이기고 초월하고 극복하고 통과하셨기 때문에 우리들을 이끌어갈 수가 있는 힘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런 힘이 없습니다. 한 번도 체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있을 수도
없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부활의 능력을 통하여 부활의 삶을
통하여 부활 생명 능력이 있음을 자신이 그러한 분이심을 우리에게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십자가 그 험난하고 그 외형적으로 보면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고
그러나 이렇게 잡으려면 너무 높이 달려 있고 또 그분의 그 피의 효력을 맛보기 위해서는 또 뭔가 올라가기가 버겁고 한 그런 것이기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 능력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신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그분을 간절히 갈망하여 그 달콤한 사랑에 매혹되어서 도취한
자들에게 더욱더 이끌림을 받도록 부르시고 잡아당기셔서 더 큰 주님의 깊은 꿀처럼
정말 달콤한 나드 향과 같은 그러한 달콤한 사랑의 향기와 맛에 도취되어 흠뻑 적셔져서
두 분만이 은밀한 사랑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부활 능력으로 우리를 도우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숫사슴들과도 같은 여기 젊은 사슴 나의 사랑하는 이는
노루나 젊은 사슴 같으니라 젊은 사슴 중에서도 숫사슴이 얼마나 잘 뛰겠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시편 22편 제목에 "새벽 암사슴에 맞추어"라는 이러한 다윗의 시에 대한 고백이 있는데요 사슴 그 자체는 수많은 난관과 어려움과 장애물과 방해가 있어도 그것을 극복해 가는 가장 대표적인 짐승이 사슴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러분 간혹 가다가 동물의 왕국을 티브이를 통해서 보게 되면 산양이나 산염소, 가젤을
가끔 볼수가 있는데요 이런 것들은 얼마나 자기 앞에 놓여진 가파른 바위에 울퉁불퉁한
곳 수많은 어려움과 난관 장애가 있는 아주 높은 골짜기로 다니는 것을 볼수가 있습니다. 그 골짜기 밑으로 떨어지면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곳도 아무 겁없이 뛰어넘어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숫사슴이 어려움과 장애를 극복하는 짐승의 대표자로 여기에 써 있을까요?
바로 부활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 입으면 우리에게는 그러한 뛰어넘는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없지만 십자가로 가게 할 수 있는 그 깊은 십자가의 사랑의 체험을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품 안으로 들어가게 할 수 있는 분은 유일한 길이 되시는 유일한
생명이 되시는 그분의 부활 능력에 의하여 우리가 인도함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젊은 사슴 같이 이렇게 젊은 사슴이 얼마나 울퉁불퉁한 기암괴석이 있는 바위들을 지나 2m 3m 넘는 곳을 펄쩍펄쩍 뛰어서 이 적들의 위험을 피해서 가고자 하는 목적지를 향해서 가는 그분의 산을 달리고 작은 산들을 뛰어 넘어온다 라는 아가서 2장 8절 9절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이끄시는 그분의 능력 우리를 잡아당기시고 우리를 그 십자가의 깊은 곳으로 가게 하는 능력은 우리 힘이 아니라 우리의 자아 속에서 나온 옛사람이 아니라 속 사람에 있는 예수님의 영이신 부활을 통하여 산출되어진 우리를 변화시켜주시고 우리를 이끄시는 강력한 힘이 되시는 그분의 부활 능력이 바로 어린 사슴과도 같다 라고 얘기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그분을 통하여 극복하게 할 수 있다 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타락한 사람 타락한 인성을 가진 우리를 더욱더 깊은
사랑에 달콤한 그 맛에 매료되어 도취되게 하시고 그리고 도취된 그들을 더 한 차원 높이 이끄셔서 적셔지게 하시고 그래서 깊은 십자가 안으로 더욱더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외형적인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위해서 죄 문제를 구속하신 그리스도께서 그 피의 효력을 통해서 우리의 이 속죄의 문제와 구속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구나 라는것을 통해서 예수님을 쫓게 되고 보게 되고 추구하게 되고 갈망하게 되지만 그것을 넘어
더욱더 깊은 사랑을 통해서 승천의 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 부활의 능력을 우리에게 주셔서 깊은 사랑을 체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술람미 여인에게 이 솔로몬 왕이 그러한 방식의 과정을 통해서 조그마한 사랑을 보여주
시고 그리고 더 깊고 넓은 극진한 사랑으로 이렇게 적셔줌으로 말미암아 땅 아래에 속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무릎 꿇고 그분만을 바라봄으로 사랑의 도취되었던 우리를 주님께서 십자가와 하나가 되게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품어주시고 품어주신 우리를 더욱더 깊은 사랑의 체험을 십자가를 통하여서 체험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부활과 승천 속으로
주님께서 우리를 하늘로 이끌어 주십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휘장 안에 있는 지성소까지 우리를 이끄실 수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라는 십자가를 통해서 십자가와 하나가 되게 함으로 말미암아 타락한 사람을 접촉하게 하시고 더욱더 깊이 사랑의 교통함으로 접촉하게 하셔서 온전한 사랑과 교제를 통해서 온전한 사랑을 교감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우리에게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그런 면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십자가와 어떤 면에서는 너무 많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근데 그 요구하는 것들이 실상 우리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불가능한 것들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친히 십자가의 부활 능력을 통해서 처음에는 피의
효력을 통하여서 사랑을 맛보게 한 다음에 그다음에 피의 효력을 통하여 달콤한 사랑에
매혹되게 하신 다음에는 부활의 능력을 통해서 주님께서 친히 이끄시는 것을 통하여 깊은 연인의 사랑으로 적셔진바 되고 주님의 품에 안긴 바 되어서 승천의 삶을 우리가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닌 상태에서 그분과의 교통을 갖고자 하고 접촉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과 행위들이 실패할 것입니다. 오직 피의 효력을 가지고
오게 한 십자가와 부활 능력을 갖고 오게 한 그러한 부활의 생명 능력을 통해서만
우리가 주님과의 온전한 접촉과 교감을 나눌 수 있다 라는 것을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그래서 14절에보면 바위틈과 계단의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왜 바위틈 낭떨어지 은밀한 곳에 감춰져 있고 숨겨져 있는 은밀한 십자가로
우리를 부르셔서 이끄시고 그리고 내밀한 연인의 사랑을 가지게 할까요?
그것은 바로 그 솔로몬 왕만을 바라보고 추구하고 갈망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녀의
비둘기 같은 눈을 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솔로몬왕은 그 비둘기 같은 눈 14절에 말을
하고 있죠 바위틈과 계단의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내가 내 얼굴을 보게 하라
얼굴을 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마주하는 얼굴 연인이 둘이서 사랑의 교감을 나눌 때 마주 볼 때 그 눈에서는 사랑이
내재되어 있는 생명 가운데서 교감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랑은 이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고귀한 사랑인 것입니다.
바로 솔로몬 왕은 시골 처녀인 술람미 여인의 사랑스러운 자신을 찾아오기까지 그런
어려움과 그런 장애 그런 난관을 다 극복하고 자신의 이끌림을 받아 그곳까지 온 그
순종하고 복종하고자 하는 그 술람미 처녀의 사랑스러운 복종을 통하여서 정말 예쁘게
보이는 얼굴을 보면서 바로 술람미 처녀의 내가 왕을 보기 위하여 사랑하는 연인을
마주하기 위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싶고 당신의 품 안에 있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고백을 듣길 원해서 바로 이 십자가와 하나 되는 삶을 부활의 생명 능력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런 자들을 붙드셔서 이끄셔서 데리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과정이 점점 높아지는 삶 처음에는 땅 안에서의 삶 높이 올라간 삶 더욱더 높이 승천하는 삶 더욱더 그리고 주님에 이끌려서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 우리는 바로 솔로몬 왕을 통해서 그 술람미 처녀에게 어떻게 하나 되는 것을 지금
이 아가서 2장 14절 말씀을 통해서 울퉁불퉁한 바위틈과 낭떨어지 은밀하게 감춰진 그
사랑에 달콤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는 곳까지 가기 위해서 주님의 부활 능력이 우리를
도와야만 된다 라는 말씀을 여러분에게 드립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이러한 십자가의 은밀하고도 내밀한 부분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치 아가서 2장 14절을 보면 바위틈과 계단의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울퉁불퉁한 바위틈 깊은 낭떨어지 은밀한 곳에 감춰져 있고 숨겨져
있는 그 십자가 안에 마주한 성도들 비둘기는 바로 그분만을 바라보고 갈망하고 추구하는 성도들을 말하고 있죠. 예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연인의 사랑인 나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나에게 그 달콤한 사랑의 맛에
도취하게 된 그리스도에게 나는 갈 수가 없습니다. 너무 높아요. 그곳은 너무 울퉁불퉁
하고 가파른 절벽이 있고 정말 많은 장애물과 많은 난관과 많은 어려움이 있기에 나는
결코 갈 수 없어요. 너무 높고 너무 멀고 너무 거칠고 너무 방해가 많고 너무 골짜기도
많아요. 내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는 그곳에 도무지 갈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라고
말할 때 바로 아가서 2장17절에 나의 사랑하는 이여, 날이 새고 그림자들이 달아나기
전까지는 돌이키시며 또 당신은 베데르 산들 위의 노루와도 같고 젊은 사슴과도 같이
되시옵소서 라고 이렇게 갈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연인은 바로 술람미 처녀를 말하고 있는 거죠.
17절 말씀은 바로 성도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나를 정말 많은 장애물과
난관과 방해물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있는 막 펄쩍펄쩍 뛰는 그런 힘이 있는 존재자로
만들어서 그곳에 갈 수 있도록 나의 연인이 있는 그 십자가에 갈 수 있도록 나를 도와주
세요. 나에게 힘을 주세요 라고 얘기를 이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 부활안에서 자신에게 돌아와 주시기를 요청하지만 그 술람미 처녀가 보기에는 바로 이 자신과 그리스도 그 사이에 가로막혀져 있는 그 수많은 방해물들과
어려움들과 그 장애 그 난관들은 오직 그분에 의해서만 솔로몬 왕 곧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고 제거될 수 있다 라는 것을 앎으로 말미암아 나를 가젤이나 노루나 젊은
숫사슴 처럼 되게 해주세요 라고 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자기 자신 사이에 큰 벽이 있다 라는 것이죠.
그것이 아가서 2장 17절에 보면은 베데르 산들이라는 것이 있죠.
이 베데르 산이 바로 벽이 있다는 것입니다. 단절 말할 수 없는 큰 골짜기 나뉘어지게
하는 큰 골짜기가 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바로 처음에 이 여인은 이 벽이 있기 때문에 그분이 자기 자신에게 돌아와 주시기를 이렇게 요청을 하지만 왜냐하면 이 산이 너무나 큰 난관이 있기 때문에 실상
그분에게 요청을 하지만 사실은 그분에 의해서 이 일이 해결될 수 있음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분에 의해서만 이 베데르 큰 골짜기 큰 어떤 낭떠러지 큰 울퉁불퉁한 기암괴석으로
인하여 도무지 불가능하다 라는 사실을 알고 그렇게 간절하게 요청했을 때 그분에
의해서 제거된다 라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또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가 이 바위틈과 낭떨어지 은밀한 정말 감춰지고 숨겨진
이것은 외형적으로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보여주는 전체적인 십자가입니다.
믿는 자들은 모두에게 그 십자가를 바라보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그 달콤한
사랑에 매료되게 하고 도취되게 합니다.
그런데 더욱더 우리가 부활 능력을 통해서 승천하는 그러한 이끌림을 당하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체험과 경험이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바로 이 바위틈과 낭떨어지 감춰지고
숨겨진 그 십자가 안으로 깊이 들어가서 둘 만의 교감을 그 연인의 사랑을 마주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 안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십자가 바깥에서 십자가 나무 아래에서 나를 위해서 피흘리시고 고통당하신
그분을 바라봄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분의 은혜를 맛보게 됩니다.
그 피의 효력 처절하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머리에는 가시면류관 손과 발에는 대못 그리고 옆구리에는 로마 군병에 의해서 창에 찔림받아 흘려진 그 피와 물들 그 피와 물들을 통해서 십자가 아래에서 눈물 흘리고 있는 모습을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를 이끄십니다.
그 은혜에 감격하고 그 사랑에 정말 어찌할 수 없어서 십자가 아래에서 바라보는
우리들에게 십자가 안으로 들어오라고 이끄십니다. 먼저는 바라보게 하여서 그 은혜
그 사랑을 맛보게 하여서 사랑의 맛에 도취되게 하지만 그 도취된 그들에게 거기서
머물지 말고 들어오라고 말합니다. 십자가 안으로 들어가야 됩니다. 십자가 아래는
객관적인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그 십자가를 보고 피의 효력을 통해서
구속의 문제가 해결되는 불의한 자가 의로운 자가 되는 이러한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하나님 앞에 펼쳐진 그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은 십자가 나무 아래입니다.
십자가 아래는 객관적인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보여지는 십자가 이지만
우리는 그 십자가 아래에서 그분을 바라보면서 그 달콤한 사랑에 매혹된 그들을
주님께서 더 한층 높은 곳으로 우리를 이끄시고 계신 겁니다.
그것이 십자가 안으로 들어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안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안으로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그 십자가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도 우리
안으로 들어와서 마주해야 되는 연인들의 사랑이 온전한 사랑의 교제를 정말 돈독한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는 우리가 십자가 안에 들어가서 그 십자가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또한 우리 안으로 들어오므로 말미암아 십자가와 우리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와 우리가 하나되는 것이 우리의 구원인 것입니다. 구원이 뭐라고요?
십자가와 내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 아래에서 그분을 바라보면서 도취되어 사랑의 눈물을 흘리고 감사하며 정말
그 은혜에 감복하는 것을 떠나 그분께서는 더 한 층 우리를 높은 곳으로 이끄시고
십자가 위로 십자가 안으로 우리를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그 함께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이것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우리가 하나가 된 것이 진정한 구원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예 아까 제가 베드로 얘기를 했습니다. 사랑하는 자 주님께서 사랑하는 자 마리아 그리고 그 사랑하는 자에 의해서 또한 사랑하는 자가 됐던 마리아 그 사랑하는 자가 마리아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솔로몬 왕 평강 사랑하는 자란 뜻이에요.
술람미 처녀 사랑하는 자 내가 사랑하는 자 그리스도께서 사랑하는 자 신약 성경에는
이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마리아가 바로 아가서에 나오는 술람미 처녀인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그 값진 나드 향 한근을 드리게 됐죠. 예 그렇습니다.
우리가 베드로처럼 그렇게 자신이 말한 것이 옳다고 여겨서 선과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를 먹으면 옳은 것처럼 보여서 먹었지만 실상은 실족하게 된 것처럼 베드로의 자아
사탄과 하나가 되어 잘못된 얘기를 하는 그런 옛사람에게서 완전히 해방될 수 있는 것은
십자가와 내가 하나 됨을 통하여서 나의 자아인 혼안에서 나의 옛사람에서 구원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십자가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이 얼마나 중요한 말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대충 보면은 우리는 늘 십자가 아래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그 십자가만을 바라보고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에 감복하고 그 피의 효력에 감사하고 정말 그 달콤한 사랑에 이렇게
매혹되어 있는 그런데 여러분 주님께서는 그렇지 않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거기에 머물러 있지 말고 들어오라는 겁니다. 들어와서 마주하고 너의 그 마주하면서
나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는 그 비둘기 같은 눈을 내가 보고 자신도 솔로몬왕의 실체이신그리스도께서도 기뻐하겠다 라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나가 됨으로 말미암아 부활 능력으로
말미암아 승천의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 속으로 들어가야 됩니다.
십자가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하나 됨이 없이는 절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와 하나 됨이 없이는 자아에서 내가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옛 사람에게서 해방될 수 없습니다. 옛 사람에게서 내가 완전히 구출되어서 나의 옛
사람을 파쇄시킬 수 있는 방법은 십자가와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십자가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십자가 안에 들어가면 십자가를 이루신 그리스도께서 내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솔로몬 왕이 이름 모를 술람미 시골 처녀에게 바로 이러한 사랑의 과정을 통해서 십자가 안에서 달콤한 사랑을 맛보았던 그에게 자신의 품 안에 들어오라고 함으로 말미암아 바로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러한 것들을 다 버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것들을 버리지 않으면 부활의 능력 생명의 능력을 맛보아서 십자가 예수님의
품 안에 거할 수가 없기 때문에 바로 자기를 버리라는 얘기가 바로 이 포도원에 대한
얘기입니다. 이게 참 유명한 말씀이죠. 아가서 2장 15절에 그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하고 우리가 마치고 다음 교제 편에서 다시 말씀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여우들 곧 포도나무를 망치는 작은 여우들을 붙잡으라. 우리의 포도
나무에 연한 포도들이 있느니라.”
여러분 여기에 나오는 작은 여우들이 뭘까요?예 그것이 포도나무에 연한 포도들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훼손시키고 망가뜨리지 않기 위해서는 내 안에 있는 포도나무를 망치는
작은 여우들을 붙잡아서 그것을 이렇게 유지하고 보존하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을 다음
편에서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