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도 구원받았는가 하는 잘잘법 동영상에 대한 논란이 있어 나도 들어보았다. 기독교인들이 빠지기 쉬운 배타주의를 경계하고 비신자들에게 좀 더 온유하고 겸손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김학철 교수의 취지는 공감한다. 그러나 성경해석이나 신학적인 논리는 많이 부실하다. 그런데 거기에 열렬히 호응하는 댓글이 많다.
김교수는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라는 주님의 말씀은 맥락 속에서 누구에게 하신 말씀인지를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말씀은 3년 동안이나 주님과 함께 지내며 예수님을 충분히 알고 경험한 도마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것이다. 지금은 예수님에 대해 잘 알고 믿는 신자에게 적용될 말씀이며 예수님을 잘 모르거나 알아도 그에 대한 충분한 지식과 경험이 없는 비신자에게 적용하여 그들의 구원을 재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해석한다면 요한복음의 말씀 대부분은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없는 말씀이 될 것이다. 주님이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하셨다(요3:18). 이런 말씀도 오직 예수님을 잘 알고 경험한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란 말인가. 그 말씀은 아직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고 믿지 않았던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리고 그를 통해 모든 이에게 적용되어야 할 말씀이다. 바울도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라.“(살1:8)고 했는데 그 말씀도 특정인에게만 제한해야 하는가.
더 심각한 문제는 예수를 믿지 않았으나 좋게 사시다가 죽은 우리 부모나 조부모도 예수를 믿지 않았기에 구원받지 못하느냐는 질문을 구약의 신앙 인물도 예수를 믿지 않았기에 구원받지 못했다고 하는 것과 같은 차원에서 다룬다는 점이다. 김 교수는 신약성경에는 아브라함이나 다윗,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이 구원받았다는 말이 없으며 그런 문제에 대한 논의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핵심 내용이 무엇인가. 하나님께 죄사함 받고 의롭다함 받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복음을 전하며 이렇게 의롭다함 받고 구원받은 모델로 아브라함과 다윗을 제시한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롬4:3). 아브라함이 우리 믿음의 조상이며 우리 구원의 원조인 셈이다. 바울은 아브라함도 우리처럼 구원받았느냐를 말하기보다 우리가 오히려 아브라함을 따라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갈3:9)
또 구약에서부터 구원은 해방이다. 신약성경에서 예수의 구원을 출애굽의 모형으로 이해한다. 바울이 로마서 6장에서 전한 복음, 죄의 지배로부터 해방의 메시지 저변에도 출애급의 모티브가 깔려있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다. 신약성경에도 구약성도들도 이런 포괄적인 의미의 구원을 받았음을 증거하는 말씀이 가득하다. 그들도 아브라함과 다윗처럼 믿음으로 죄사함 받고 의롭다함을 얻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며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이렇게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구약 성도들의 이름이 히브리서에 열거되어있다(히 11장).
바울의 구원론과 교회론, 성령론은 모두 구약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다. 아브라함이 예수를 모르지 않았는가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주님이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8:56). 비록 아브라함이 신약에 사는 우리처럼 예수님에 대해 밝히 알지는 못했지만, 그의 믿음의 핵심은 자신과의 언약을 성취하실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베드로도 그리스도의 영이 구약 선지자들 안에서 예수님을 증거했다고 하였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벧전1:10-11).
구약 성도들 가운데 역사하신 성령도 하나님의 영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영이셨다. 그리스도의 영이 이스라엘의 소망이며 언약의 중보자로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증거하게 한 것이다. 이 영의 감동을 받은 이사야는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고난의 종으로 어떤 고초를 당하실지를 상세하게 예언하였다. 예레미야와 에스겔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언약과 새 창조가 어떻게 성취될 것인지, 그로인해 이스라엘의 불순종의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고 그들 가운데 종말론적인 구원과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인지를 예언하였다(렘31:31-33, 겔 36:25-27). 주님이 다윗도 자신을 주라고 했다고 말씀하셨다. 눅21:44,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라.”
신구약 성도들은 한 하나님의 언약 안에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로 연결된 하나님의 구원 백성이다. 동일한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이들이다. 시간적으로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구약 성도들에게는 예수님의 중보 사역의 효력이 신약 성도들과는 달리 뒤로 소급되어 적용된다고 볼 수 있다(retroactive act). 그들은 우리처럼 선명한 계시의 빛 가운데 그리스도를 알고 누리지는 못했다. 우리가 누린 영광의 후광을 누린 셈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아니면 그들도 온전함을 이루지 못한다고 했다(히11:40).
그러니 구약 성도들보다 더 밝은 그리스도의 계시와 더 풍성한 구원의 은혜가 주어진 신약시대의 신자들은 이 은혜의 탁월함을 증거해야 할 책임이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는 구원의 실제 내용이 믿는 자 안에 구현되지 않은 채 구원을 예수 믿고 죽어서 지옥형벌을 모면하고 천국 가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다. 구원받았다는 이나 그렇지 않은 이가 삶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구원은 죄와 사망의 권세와 속박에서 해방되는 것이며 새 창조의 능력에 사로잡혀 새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 죄사함과 의롭다 함을 얻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며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살아서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 그 천국의 맛에 길들여진 사람이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구원의 핵심 내용이 빠진 껍데기만을 구원으로 오해하는 이들이 많다. 예수를 믿지 않아도 좀 착하게 사는 이는 구원받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김 교수의 논의도 사실 구원을 죽은 후 천국 가는 문제로 축소한 개념에 기초한 것이다.
물론 궁극적인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 그러니 남의 구원을 쉽게 재단하는 경솔함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주님이 분명히 자신을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말씀하셨다. 김 교수는 누가 구원받고 못 받을 것인지 모르겠다고 한다. 우리는 다른 이의 구원을 쉽게 판단할 수 없을뿐더러 자신의 구원도 속단할 수 없다. 구원받았다는 확신으로 충만한 이가 멸망할 수 있고 확신이 별로 없는 이가 구원받을 수 있다. 오늘날 거짓 구원의 확신을 가진 이들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오만과 자기 기만에 빠지지 않으면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고 감사하며 사는 것은 건강한 신앙의 자세이다. 김 교수는 우리가 얼마나 믿음이 좋아야, 거룩해져야 구원을 받은 것이냐고 반문한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 믿음과 경건을 믿을 수 없다. 그것은 너무도 부족하고 보잘것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겨자씨처럼 미미할지라도 그 믿음으로 바라보는 주님은 광대하시며 그 사랑과 신실하심은 영원무궁하니 그분이 우리 안에 시작하신 구원을 완성하실 것을 신뢰하며 우리도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으로 인해 즐거워하며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우리 입술뿐 아니라 삶으로 체화하여 세상에 증거하고 찬양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니 자랑할 것이 없는 자로서 비신자에게 더 겸손하고 온유하며 지혜롭게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전해야 하리라. 김 교수의 논리대로 라면 비신자에게는 구원의 복음을 열심히 전하지 않는 게 낫다. 복음을 듣고 잘 알면서 믿지 않는 것보다는 복음을 듣지 못하고 잘 알지 못하는 게 더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게 김 교수의 진의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다분하다.
주님의 분명한 말씀을 희석해서 사람들의 환호와 호응을 얻을 수는 있을지 모르나 그것이 오히려 진정한 구원의 길을 막을 수도 있다. 잘잘법 동영상이 그동안 많은 이들에게 유익했던 것으로 아는데 앞으로 많은 논란이 있는 문제를 다룰 때는 좀 더 사려 깊고 책임 있는 자세를 취해주면 좋겠다.
첫댓글 https://m.cafe.daum.net/reformedvillage/D0VS/14564
김교수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