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07. 14.
최근 미국의 자본시장에서 가장 뜨거운 화두로 떠오른 현상이 경제 펀더멘털과 자산 가격, 특히 주가와의 괴리다. 그러나 이러한 괴리는 새로운 현상이라기보다는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지속된 현상의 연장선에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이 부분을 이해하려면 화폐유통속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화폐유통속도는 통화 1단위가 상품 및 서비스를 생산하는 데 몇 번이나 활용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척도로, 상대적으로 호황기에는 속도가 증가하고 불황기에는 감소한다. 그런데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화폐유통속도가 감소하는 추세이다. 미국의 경우 M2 기준으로 화폐유통속도는 1.65~2.2 수준에서 등락을 거듭하다 금융 위기 이후 추락해 올 1분기 현재 1.34로 역대 최저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화폐유통속도가 떨어지는 이유는 양적 완화를 필두로 한 급격한 통화 팽창으로 통화 한 단위의 활용 빈도가 상대적으로 감소하기 때문이다. 금융 위기 이전에도 통화량이 1% 증가할 경우 화폐유통속도는 평균 0.96% 감소했다. 그런데 금융 위기 이후에는 감소 폭이 1.43%로 확대하였다. 즉, 통화 증가 속도보다 화폐유통속도의 감소가 더 커졌다.
통화량 증가 대비 화폐유통속도 감소 폭이 증대한 기저에는 경제에서 금융이 차지하는 비율이 증가하는 금융 심화(financial deepening) 현상이 있다. 즉 중앙은행이 공급한 유동성이 실물경제로 투입되어 거래에 활용되는 비율보다 자산시장에 투자되어 묶여버리는 현상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의 경우 금융 위기 이전에는 화폐유통속도가 1% 감소할 때 나스닥 기준으로 주가 역시 약 0.32% 하락해 정(+)의 관계를 보였다. 그러나 금융 위기 이후에는 화폐유통속도가 1% 감소할 때 오히려 주가는 평균 2.3% 상승했으며 이러한 역(-)의 관계는 통계적으로도 유의했다. 실제 이렇게 미국의 화폐유통속도가 추세적으로 하락하는 동안 나스닥은 2009년 2월 저점에서 현재까지 무려 7.8배나 폭등했다. 주택 가격도 도시 기준으로 51% 상승했다. 돈을 풀어봤자 대부분 주식이나 부동산 등 자산시장에 투입하다 보니 통화정책이 물가나 성장을 견인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바로 이 부분이 금융 위기 이후 관찰된 저성장, 저물가로 대표되는 '뉴 노멀(new normal)'의 핵심 이유 중 하나였다.
미국은 풀린 통화가 주로 주가 상승을 견인했지만 부동산 가격의 상승 폭이 더 큰 나라도 많다. 예를 들어, 독일의 경우 금융 위기 이후 주가는 71% 상승한 데 반해 주택 가격은 도시 기준으로 무려 119% 상승했고, 영국 역시 주가가 72% 상승한 반면 주택 가격은 런던의 경우 92% 상승했다. 우리나라 역시 예외가 아니다. 우리나라 통화유통속도는 2012년까지 M2 기준으로 0.8 수준을 유지하다 2016년 0.75 수준으로 하락한 후 작년엔 0.683까지 떨어졌다. 이러한 추세는 부동산 가격이 본격적으로 폭등한 시점과 궤를 같이한다.
문제는 대부분 국가에서 주식이나 부동산을 전혀 보유하지 않은 국민의 비율이 높다는 점이다. 미국의 경우 자가 주택 보유율은 64%이며 연금을 포함해 주식을 한 주라도 보유한 가구 비율 역시 62%에 불과하다. 이러한 자산시장의 '제한적 참여(limited participation)' 현상으로 인해 국민의 상당수가 주가나 주택 가격 상승에서 소외되는 것이 부의 분배가 악화하는 결정적 요인이다. 우리나라 역시 자가 주택 보급률이 미국과 비슷한 61% 정도로 가구 약 40% 정도가 최근의 주택 가격 상승에서 소외되었다. 이번 정부 들어 최저임금의 급속한 인상을 비롯해 근로소득을 기초로 부의 분배를 개선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분배가 악화한 것에 비하면 족탈불급이다.
이렇게 분배가 악화하여 민심이 돌아설 때 포퓰리즘이 득세한다. 미국이나 영국을 비롯해 이탈리아, 스웨덴 등 선진국에서마저 포퓰리즘 정권이 출현한 시기와 자산 가격 앙등 시기가 묘하게 겹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포퓰리즘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다. 대외적으로 특정 국가와 긴장 관계를 설정하거나, 대내적으로 특정 소수 세력을 비난 대상으로 설정하는 것이다. 특정 소수 세력을 난민이나 이민자 등으로 설정하는 우익 포퓰리즘이나 소수의 부자나 기득권 세력으로 설정하는 좌익 포퓰리즘이나 정치적 기제는 동일하다. 자산 가격과 경제 펀더멘털의 괴리가 경제 영역을 넘어 위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안동현 / 서울대 교수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