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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드온 찬양대 귀한 찬양 감사합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1년 6개월 사역을 마친 후에 자신을 파송해 준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오늘은 고린도에서 수리아로 돌아가기 시작하는 그 여정에 대한 말씀입니다.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고린도를 떠날 때 바울과 특별히 함께한 고린도에서 합류한 두 인물이 나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18절에 바울은 더 여러 날 유하다가 형제들을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 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있더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고린도에서 만난 동역자입니다. 아굴라는 본도 출신 유대인이었고, 브리스길라는 로마 귀족 가정에 속한 사람입니다. 황제 클라우디오가 유대인을 다 몰아내라 명령을 하자 이 사람들이 로마에 머물 수 없어서 고린도로 왔습니다. 사실은 추방당한 거예요. 쫓겨난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원치 않는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로마에서 안정된 삶을 살고 있었어요. 누가 거기를 떠나겠습니까? 떠나길 원하겠어요 그런데 갑작스러운 이 정치적 소용들이에 휘말려서 떠나야만 됐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었어요. 그들이 고린도의 난민처럼 감으로 거기서 사도바울을 만난 것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처음에는 누가가 아굴라를 먼저 소개합니다. 그리고 브리스길라를 이야기합니다. 그게 일반적인 일이에요. 남편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그러나 우리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이렇게 이게 귀에 익습니다. 그것은 바로 누가가 오늘 본문부터 이름을 바꿔 쓰기 때문이에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로 표기를 했습니다. 이 역사가들이 글을 쓸 때 이름 하나 넣는 거, 그리고 이름 순서 하나 어느 순서에 들어가느냐가 굉장한 메시지가 있는 것입니다. 바나바와 바울을 쓸 때도 처음에는 바나바와 바울 이렇게 쓰다가 갑자기 바울과 바나바로 이름이 바뀌어요.
그럴 때는 리더십의 변화가 왔다는 것을 우리가 직감합니다. 이제부터는 바나바가 아니라 후배로 출발했지만 바울이 선교의 리더십을 가지고 진행하고 있구나.
이 부부 간에도 그런 일이 있었던 것 같아요. 1년 6개월 동안 고린도에서 사역을 하면서 바울의 동역자가 됐는데 누가가 가만히 살펴보니까 모든 그 주도권을 그 리더십을 브리스길라가 가지고 있는 거예요. 브리스 길러가 훨씬 더 좋은 동역자로 바울을 돕고 있는 것을 본 것입니다. 여성의 역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교회에서 감당하는 여성의 역할이 이 초대교회부터 적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바울이 고린도를 떠날 때 이 부부가 따라 나섰어요. 그들은 바울의 평생의 동역자가 됩니다. 잠시 에베소에 머물렀다가 나중에는 로마로 복귀합니다. 정세가 좋아지자 다시 로마로 들어가게 돼요.
그런데 바울에게 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어떤 사람들이었느냐 나중에 3차 전도여행 때 바울이 고린도에 머물면서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글을 씁니다. 그게 로마서죠. 로마서 말미에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 목이라도 내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브리스길라 아굴라가 어떤 사람들이었느냐? 바울에게 있어서 바울을 위해서는 목숨이라도 내놓을 수 있는 그런 아마 2차 3차 전도 여행 사이에 그런 위급한 일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브리스길라와 아골라가 바울을 대신해서 죽기를 자청했다는 거예요.
놀라운 동역자입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을 하거나 아니면 여러분이 여러분 인생을 살아갈 때 성가시게 하는 사람도 있어요. 사도행전에 나온 유대인들처럼 극렬 유대인처럼 계속해 사역을 따라다니면서 방해하고 사단의 세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같은 신실한 동역자들도 준비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가운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같은 분들이 많이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대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겠다고 결단합니다.
그런데 구체적이지 않습니다. 마음은 있는데 어떻게 해야 될지 이 목사가 돼야 되나 선교사가 돼야 되나 그런 부담감을 가지게 돼요. 그래서 지레 포기하기도 합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처럼 하면 됩니다. 자기 생업을 가지고 자기가 하는 일에서 또 자기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는 거예요. 주님의 사람들과 동역하면 되는 것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블라처럼 오늘 브리스길라와 아골라는 평생을 바울을 따르며 그를 도왔습니다.
바울이 혼자 뛰어난 게 아니에요. 세상에 혼자 뛰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그 뒤에 보면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는 거예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그 사역을 도왔던 사람들, 그 사람들 때문에 바울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바울이 위대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이름 없이 뒤에서 도운 사람들이 또 위대한 거예요. 하나님이 계산하실 때는 눈에 드러난 바울이 아니라 보이지 않게 사역을 감당한 그 사람들의 그 수고와 눈물을 하나도 빼지 않고 생명록에 기록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 오셔서 1시부터 와가지고 예배 준비하고 누가 보든 안 보든 한 사람이라도 빵꾸내면 예배를 드릴 수 없잖아요. 그런데 1년 2년 제가 보니까 10년 21년 동안 그렇게 헌신하는 사람들이 이어져 왔어요. 그분들의 수고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같은 수고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지고 우리가 예배를 드릴 수 있고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은 그 하나하나를 하나도 잊지 아니하시고 생명록에 기록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선교지를 가거나 어디 집회를 가거나 아니면 해외 선교 여행을 하다 보면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하나 보게 돼요. 코로나 이후에 한국교회가 어려워졌다. 더 여러 리더십들이 사고를 내고 교회의 평판이 좋아지지 않고 또 교인들도 마찬가지고 크리스천들이 안 믿는 사람보다 더 못한 그런 삶을 통해서 교회가 욕을 먹고 이제 내리막길로 간다 그런 위기가 있어요.
그리고 실제로 그런 모습도 있어요. 그래서 희망을 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희망적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니까 하나님이 붙들어주시니까 하나님이 정화하시니까.
그리고 또 한 가지 보는 것은 곳곳에 보통 다른 선진국 교회들에는 별로 찾아보기가 힘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같은 성도들이 있어요. 미국에 가도 있고 한국에 가도 있고 야 어떻게 이런 사람들이 있을까 어떻게 이렇게 신실하게 하나님의 일에 헌신돼 있을까 사육자들보다도 그 마음이 더 헌신돼 있고 삶이 더 헌신돼 있어요.
그런 걸 보면 우리가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어떤 일 때문에 교회에 절망을 얘기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서 역사하실 것이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오늘 바울을 따라 나선 이 두 사람은 바울에게는 천군만마와 같은 사람이었어요. 그다음에 이제 바울이 고린도에서 출발해서 쫙 가는데 가다가 도중에 바로 고린도에서 10kg 정도 동쪽으로 떨어진 곳에 한 도시를 들릅니다.
거기는 겐그리아라는 도시예요. 겐그리아 이번에 성지 순례 때 저도 가봤는데 지금은 이제 내륙 이제 바다에서 지중해에서 한참 안으로 들어와서 바다가 보이지 않는 그냥 내륙에 있는 해변으로 정말 아름다운 곳입니다. 그 겐그리아를 통과하게 되는데 여기는 지중해에 여러 도시를 이어주는 교통의 요지 발달한 곳이죠.
근데 바울이 거기를 들으면서 두 가지 일이 일어나는데 하나는 거기를 갔더니 괴베라고 하는 한 여성 동역자를 만나게 돼요. 아마 이 사람은 고린도에서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은혜를 받고 거기로 갔을 수도 있고 아니면은 그 현장에서 누군가가 전해준 복음을 듣고 믿고 거기서 섬기는 사람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이 베베라고 하는 사람이 바울의 동역자로 나섭니다. 그리고 신실한 동역자가 돼서 겐그리아 교회를 섬겨요. 나중에 바울은 이 사람을 다시 로마 교회에 추천을 합니다. 바울이 글을 쓰면서 이름을 하나 넣는다는 것은 바울의 심장에 그 사람이 들어와 있다는 거예요. 신실한 동역자였다는 거예요. 로마서 16장 1절 2절에 보면 내가 겐그리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베베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 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천거하고 특별히 부탁을 하는 사람이 왜? 이 베베는 여러 바울과 함께하는 동역자들뿐만 아니라 바울에게 보호자가 됐다.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바울은 가는 곳마다 처음 가는 곳이지만 고린도도 처음 갔잖아요. 겐그리아도 처음 갔잖아요. 빌립보도 처음 갔잖아요. 근데 처음 가는 곳이지만 곳곳에 하나님이 미리 준비해 놓으신 사람들이 있었어요. 빌립보에 루디아가 있었어요. 고린도에 브리스길라 아굴라가 있었다면 겐그리아에 베베라고 하는 자매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를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에요. 우리는 아직 그런 믿음이 없기 때문에 늘 걱정합니다. 저도 여러분도 여러분 제일 큰 걱정이 뭐예요? 미래에 대한 걱정입니다. 내가 청년기에 장년기가 되면 내 인생이 어떻게 될까? 장년기를 보내는 사람들은 야 노후 노후는 어떻게 할까? 야 큰일 났네. 늘 걱정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를 책임지시는 분입니다. 미래로부터 오시는 분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여호와 이래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세요.
저도 지금 이렇게 60평생 오면서 많은 위기들이 있었어요. 야 내가 다음 발을 내딛으면 보니까 시퍼런 강물인데 상황이 그런 거예요.
그런데 이거 뒤로 물러갈 수도 없고 앞으로 내딛어야 되는 순간 얼마나 가슴이 막 쫄깃쫄깃하고 그런지 몰라요. 이거 정말 이러다 거꾸러지는 거 아닌가 컨데 놀라운 것은 그리고 그냥 기도하고 내딛었더니 그때는 보이지 않던 하나님이 예비하신 징검다리가 있는 거예요. 징검돌이 있는 거예요. 또 한 발 또 내딛으니까 그런 그래서 그 일을 반복해서 겪다 보면 뭐가 자라느냐 내 속에서 믿음이 자라. 하나님이 준비하시는구나. 확실히 준비하시는구나. 이건 분명하구나. 그러면서 용기가 생깁니다.
여러분 그게 믿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준비하시는 분이에요. 여러분의 미래를 준비하시고 여러분들이 어디서 언젠가 무슨 일을 할 때 저와 여러분들에게 필요한 사람들을 하나님이 미리 준비하고 계시다. 할렐루야
그것을 믿는 것이 여러분 믿음이에요.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얻지만 예수 믿은 다음에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이 믿음이 필요해요. 하나님이 내 미래를 준비하고 계시다. 겐그리아에서 또 하나 있었던 일은 머리를 깎는 일이었어요. 18절에 바울이 일찍 서원이 있으므로 겐그리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우리도 머리를 깎을 때가 있어요. 멀쩡하던 사람이 머리를 깎을 때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시련을 당했어. 머리를 깎어 또 어떨 때 깎습니까? 원수가 있어 원수 내가 기필코 내가 내가 사람 이 원수를 갚기 전에 내가 눈을 못 감는다. 원수를 갚아야겠다. 머리를 밀고 시작하는 겁니다. 하여튼 인간이 무슨 큰 결단을 할 때는 머리를 깎아요. 내가 이번에 공부 빡시게 해가지고 시험에 합격해야 되겠다. 내 인생을 꼭 성공해야 되겠다. 머리 깎고 막 산으로 들어가 공부하러 들어가는 거예요.
대개 머리 깎을 때는 이 사람의 그런 심경에 변화가 있는데 유대인들이 머리 깎을 때는 하나님 앞에서 나시린 서원을 할 때입니다. 그때 머리를 깎습니다.
근데 머리를 깎는데 그냥 이렇게 미용 꼬앞에 하는 게 아니에요. 불어 성경에 보면 하재 면도하듯이 그냥 칼로 다 밀어버리는 거예요. 그런 상태를 유지를 하는 겁니다.
이 나실인 서원을 할 때 이제 머리를 깎는데 나실인 서원은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평생 평생 나실인 삼손 같은 사람. 그래서 이 사람은 죽을 때까지 원래는 머리를 안 깎아야 되는 거예요. 평생 나실인으로 살아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머리 깎았다가 힘이 쫙 빠져버리고 그리고 부끄러움을 당하잖아요. 일시적 나실인이 있어요. 일시적 나실인 어느 일정 기간 우리가 살아가면서 일정 기간 하나님 앞에 결단하고 헌신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나실인 서원 기간이 끝나면 그때 그때까지는 칼을 대면 안 돼요. 그때 내 몸에 있던 털들을 다 잘라서 하나님 재단에 바치면서 감사의 예를 표하는 겁니다. 그게 이제 일시적 나실인 서원인데 아마 사도바울은 이 일시적 나실인 서원을 한 것 같아요.
왜 그랬는지는 몰라요. 그 기간에 무슨 결단을 했는지는 모릅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쨌든 그 기간에 나신인 서원을 하고 그것을 마치면서 자기 몸에서 털을 깎은 거예요. 머리를 자른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감사의 표현을 했습니다. 1년 6개월 동안 고린도에 있으면서 어느 시기에 바울의 마음에 요동치는 뭔가가 있었어 심경에 변화가 있었어요.
이렇게 내가 사역을 하지만 계속 이렇게 달려갈 수는 없다. 뭔가 한 번 그 사역의 사역자로서 사역의 한 시점에서 뭔가 전환점이 있어야 된다. 하나님 앞에 새로 결단해야 된다 그런 시기를 맞이한 거예요. 그래서 이 일시적 나시린 서원을 했습니다. 아마 아테네에서 경험한 것 때문에 너무 힘들어서야 내가 다시는 다시는 사람의 지혜와 사람의 말로 사역을 하지 않겠다. 하나님 말씀과 성령만 의지하겠다 결단을 했는데 또 스물스물 자기 실력이 올라오는 거예요. 자기 실력이 아마 그래서 자기 자신과 이 실력 있는 사람들이 그게 그게 쉽지 않거든요.
실력을 쌓아놓고 나면 공부를 많이 했다든가 어느 분야에 실력이 있으면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자꾸 자기 것을 의지하고 싶어지는 거예요. 그런 욕구와 갈등이 있었을 수도 있어요. 아니면 유대인들이 자기 동족들이 바울이 얼마나 자기 동족을 사랑했어요. 내가 저주를 받더라도 내가 하나님 생명록에서 내가 지어지더라도 내 민족이 예수를 믿는다면 나는 그 길을 택하겠다. 로마서에 그러잖아요. 그럴 정도로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데 가장 괴롭히는 게 누구냐 유대인들인 거예요. 끝까지 쫓아와서 사탄의 가시가 돼서 마귀처럼 역사합니다.
그때 그래서 고린도에서 그게 심하니까 고린도에서 결심을 하잖아요. 내가 이제부터는 진짜 이방인의 사도만 돼야 되겠다. 아마 그런 결심이 있었을까 뭔가 바울의 심경에 매우 중요한 결심이 있었던 거예요. 그 내용은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바울은 바로 마음의 그 어떤 그런 변화의 욕구가 요동칠 때 나실인 서원을 하면서 결심하고 새롭게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결단하고 새롭게 출발을 한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 때문에 3차 전도여행을 할 수 있었고 사람이 오래 하다 보면 지치고 힘들 때가 있거든요. 그런데 이게 추진력이 된 거예요. 그리고 나중에 로마에서 순교를 당할 때까지 거침없이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삶의 어느 지점에서 우리도 이런 전환이 필요합니다. 열심히 살았다고 계속 열심히 살아서 그게 꼭 자라는 건 아니에요. 그게 낭떠러지인지도 모르고 달려가다가 떨어질 수 있어요. 차라리 내가 설렁설렁 걸어올 것. 이렇게 열심히 달려오다가 60대고 70 됐는데 보니까 헛살았어.
그럼 어떡할 거예요? 돌이킬 수도 없고 열심히 살았던 사람도 어느 순간은 멈추어 서서 내가 잘 가고 있는지 내가 하나님 앞에 잘 살고 있는지 이대로 20년 30년 후에 후회되지 않을지 누군가는 언젠가 죽어야 되는데 그 죽음 앞에서 내가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 한 번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냥 설렁설렁 살았던 사람도 이렇게 살아서 될는지 한번 인생의 마디마디마다 멈추어 서서 자신을 돌아보고 반추하고 생각하고 좀 생각이 좀 있어야 된다. 그리고 한번 결단하는 그런 삶이 있어야 됩니다. 그렇게 갈 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삶의 소명을 이루며 살아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 겐그리아를 떠나서 안디옥 수리아라고 수리아로 간다 할 때는 수리야는 오늘날의 시리아예요. 전쟁 나는 곳 거기에 있는 안디옥 교회로 간다는 뜻입니다. 19절에서 21절 한번 읽겠습니다. 에베소에 와서 저희를 거기 머물러 두고 자기는 같이 읽겠어요 회당에 들어가서 이렇게 에베소를 떠나 아멘 그냥 이제 가면 되는 거예요.
어디로 안디옥으로 가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가는 길에 꼭 그 에베소가 보이네. 그래서 에베소를 들릅니다. 에베소는 어떤 곳이에요? 2차 선교 여행을 떠날 때 바울이 타겟으로 정한 곳이에요. 이번 2차 선교 여행 때 내가 여기 가서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
딱 에베소를 놓고 기도하고 준비했는데 가까이 갔는데 하나님 막는 거예요. 그래서 비둔이야 여기 아닌가? 그럼 비둔이야 가까운 곳 그래도 소아시아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 저 북쪽으로 비도니아도 또 막는 거예요. 그래서 들어와서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보고 유럽으로 건너갔다가 2차 선교 마치고 이제 돌아가는 복귀하는 길에 아예 처음에 점 찍어뒀던 에베소가 보이는 거예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거기를 가지 못했지만 바울의 마음속에는 계속 에베소가 존재한 거예요. 그 꿈 그 비전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거길을 가야 되는데 그 앞을 지나가다 보니까 이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에베소에 가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집념입니다. 보통 사람은 이렇게 이제 다른 방향으로 틀어놨으면 여기는 아닌가 봐 하고 리스트에서 제낄 수가 있어요. 바울은 처음에 기도하면서 자기가 준비한 이것도 버리지 못한 거예요.
에베소에 가야 되는데 3차 전도 여행 때는 하나님이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에베소에서 3년이라는 기간 동안 목회를 해. 최장 기간 하나님이 충분히 들어주시는 거야. 사역자에게 그리고 누구든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런 집념이 필요해요. 자기가 어떤 세웠던 그 어떤 목표 꿈 비전이 있으면 조금 하다가 하다 보면 하나님께서는 순서상으로 여기보다는 이번에는 로마 유럽이 먼저다. 이렇게 하나님 들으실 수 있어요. 그럼 순종하면 돼요.
그렇다고 이 꿈을 포기할 필요는 없어요. 바울처럼 말이에요. 가지고 있으면 돼요. 그게 잘못된 꿈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이루어 주십니다. 이런 집념이 없고 너무 쉽게 포기하는 사람은 또 큰 일을 이루지 못합니다. 바울은 자기 마음속에 기도한 거 그 꿈에 대한 그 확신을 가지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었어.
이번에 우리가 올림픽을 보잖아요. 이번에 금메달을 생각보다 많이 땄어요. 슈퍼 컴퓨터가 예상한 게 5개 우리도 그냥 나중에 더 따면 좋으니까 미니멈 맥시멈 잡은 게 5개 그런데 지금 9개 땄어요. 10개 땄나 오늘 양궁에서 했나? 오기 전에 보고 오신 분들 정말 나중에 양궁 같은 경우는 왜 이렇게 우리는 화를 잘 쏘는 겨 양궁 같은 경우는 따뜻해요.
그럼 10개네 이걸 뭐 할렐루야 이렇게 할 수도 있고 하여튼 간 야 참 감사합니다. 저는 이기는 경기만 봅니다. 지는 경기 보고 스트레스 받을 필요 없어. 잘하는 거 봐 하여튼 굉장히 이 자부심도 생기고 그 엉꾸라제가 돼요.
한국인으로서 근데 이제 마지막 끝까지 올라갔다가 끝까지 비기잖아요. 그럼 마지막 슈더프라고 그래서 한 발 가지고 끝내는 거야. 한 발 가지고 한 발 정말 막 피나는 경쟁을 해서 와서 마지막 이제 근데 한 발 근데 우리 일부 예배 끝나고 우리 저기 교인들하고 교육자들하고 잠깐 하나를 보고 왔거든요.
밥 먹으면서 그런데 외국 선수들끼리인가 우리하고 있는 하여튼 요즘은 이렇게 자주 금방 본 것도 잊어버려 누구하고 했던지 하여튼 했는데 슛오프가 됐는데 프랑스하고 독일하고 했구나.
프랑스 젊은 선수가 딱 10점에 거의 약간 정중앙에서 약간 그런데 그다음에 독일 선수가 그보다 더 중앙에 이게 70m 여기서 보이지도 않습니다.
야 그걸 어떻게 갖다 꽂는지 그래가지고 프랑스가 떨어지고 독일이 올라가는 걸 보면서 왔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 한순간 짜릿함을 느끼지만 그걸 생각해 보세요. 그 선수들이 세계 탑이 되기 위해서 그 마지막에 그 하나 거기 하다가 8점 나오면 끝나는 거야. 한 번 한 번 나오면 거기 위에 올라간 상위권에서는 9. 10점 쏟다가 실수로 9점 하나 나오면 혹시 가능성이 있는 거 그런 정도의 그래야 메달을 거는 거예요. 세상에 메달도 그거 보니까 천유로도 안 하대. 거기 들어간 금이 프랑스에서 좀 짜게 해가지고 뭐 600g인가 들어갔대요.
그거 하나 따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하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70m에서 다 갖다 꽂는데 얼마나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많이 들었겠어요. 중간에 수많은 경쟁을 할 때 내면의 위기가 올 때 이게 아닌가 봐 이게 내 일이 아닌가 봐 나는 이게 재능이 없나 봐 그 수많은 그 역경을 이기고 끝까지 간 사람이 메달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그런 거예요. 인생도 그런 거예요. 조금 어렵다고 흔들리고 포기하고 말 한마디에 시험 들고 쓰러지고 그러면 아무 쓸적이 없어 또 일어나서 가고 또 일어나서 가고 바울은 그런 사람이 바울은 그 에베소에 가요. 그냥 가도 될 텐데 지친 몸을 이끌고 가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랬더니 막 역사가 일어나니까 사람들이 계속 남아가지고 사역을 해달라고 그러나 바울은 이 본래 목적이 뭐냐 하면 갔다가 다시 오는 겁니다. 그래서 막 붙들지만 아니라고 지금은 빨리 지금 가서 보고를 해야 된다고 하고는 수리 안디옥으로 계획대로 출발을 합니다.
계획을 세우고 거침없이 밀고 나가는 바울의 모습. 그러면서 한마디 합니다. 만일 주의 뜻이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바울이 마음속에는 반드시 오겠다. 그렇지만 거기에 하나의 단서가 또 붙어요. 주의 뜻이면 주님이 막으면 마케도니아로 가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이 허락하시면 반드시 오겠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뜻이면 이게 우리 입에 있어야 돼. 주님의 뜻이면 이게 우리 가슴에 있어야 돼요. 주님의 뜻이면 가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고 오기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입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 하리라 할 것이거늘, 주의 뜻이면 우리는 말은 주의 뜻이면 그렇지만 뭘 선택할 때 주의 뜻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개 내가 원하는 거 갖고 싶은 거 이미 소유한 거, 편안한 거 거기에 집착합니다.
그렇죠. 그게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영원한 게 없어요. 내가 이 최고라고 해서 탁 잡고 하나님 뜻이고 뭐고 없어 이거 이제 잡았어. 붙들고 있는데 어느 날 이게 안개처럼 사라지는 거예요. 세상에 있는 것들은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들입니다. 사람과의 만남도 마찬가지예요. 인생 살다 보면 이 사람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고, 이 사람은 막 평생 죽을 때까지 같이 가고 싶은 사람도 있는데 집착할 필요 없어요. 주의 뜻이면 만나기도 하고, 주의 뜻이면 아무리 내가 좋은 사람도 주의 뜻이면 어느 날 헤어지기도 하는 거예요.
영원한 건 없어요. 여기서 지금 하는 일 나는 이거 이 일을 평생 해야 되겠다. 아니면 하나님 뜻이면 놓을 수도 있어요. 하나님 뜻이면 내가 이거 별로 마음에 안 들어도 계속해야 돼요. 그게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거예요.
이 세상의 것 어떤 사람 어떤 거에 더 너무 집착하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집착인 거예요. 집착 그러면 상대도 힘들어. 제일 무서운 게 뭐냐 하면 집착하는 사람이야. 겁나게 힘들어요. 그런 사람이 되지 말기를 바래요.
다 쿨해야 돼. 쿨 그냥 주의 뜻이면 얼마나 좋습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았어요. 그리고 지금 만나는 사람 지금 내가 하는 일, 내가 지금 있는 곳 거기서 최선을 다하면 돼요.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주의 뜻이면 훌쩍 가기도 하는 거고 계속하기도 하는 거고 바울은 이 한마디를 남기고 서둘러서 자기들 자기를 막 붙들고 있는 고린도하고 얼마나 달라요?
고린도에서는 그렇게 끝까지 괴롭히고 속썩이고 나중에 3차 여행 때 보세요. 에베소에 있는 3년 내내 에베소 목회하면서 고린도에 있는 교인들이 속썩여가지고 편지를 네 번이나 보내 두 개는 없어지고 고린도 전전 편지가 있고 고린도 전서가 있고 눈물로 스피서지가 있고 고린도 후서가 있고 그 두 개가 없어졌으니까 다행이지 우리가 성경 공부하려면 겁나게 힘들 뻔했어.
그렇게 막 편지를 보내 애들 막 그렇게 속을 썩이는데 에베소는 막 사람들이 너무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역사가 일어나는 머물고 싶었겠죠. 그러나 바울은 가야 될 길이 있어서 재촉했습니다. 그러면서 비잔틴 사본에 의하면 개혁 성경에는 빠져 있는데 비잔틴 성경 번역본에 의하면 이 부분이 들어 있어요.
나는 예루살렘에서 곧 다가올 절기를 지켜야 된다. 아마 유대인 남자니까 바울도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들렸다가 이제 안디옥으로 갈 생각이었는 모양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오순절이나 또는 유월절을 지켰는지는 본문에 나와 있지 않지만 바울은 그 계획을 따라서 움직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도 이렇게 한번 기도하면서 살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하나님 제게 좋은 동역자를 주시옵소서 사람 만나는 복 달라고 좋은 내가 가는 곳마다 좋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같은 베베 같은.
두 번째로 순간마다 삶을 돌아보면서 새롭게 결단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세 번째로 이 땅의 인연이나 상황에 집착하지 않고 오직 주의 뜻을 따라 쿨하게 사는 인생 되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하겠습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