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말씀
선지식(善知識)에 대한 어서말씀을 통해 진정한 의미의 선지식(善知識)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작성자:세계광선유포
작성시간:2023.07.15 조회수: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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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선지식(善知識)에 대한 어서말씀을 통해 진정한 의미의 선지식(善知識)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 선지식(善知識)이란
사람을 이롭게 하고 불도(佛道)에 인도하는 유덕(有德)의 선우(善友)를 말합니다.
"선지식(善知識)이라 함은 오로지 스승도 아니고 오로지 제자(弟子)도 아닌 것이니라." (어서 208쪽)
"재세멸후(在世滅後)의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진실한 선지식(善知識)은 법화경(法華經) 이것이니라." (어서 68쪽)
"만약 불법(佛法)의 진위(眞僞)를 아는 자가 있으면 찾아 스승으로 삼고 구(求)하여 받드리라." (어서 478쪽)
불법(佛法)의 진위(眞僞)를 아는 자 = 니치렌(日蓮) = 불법(佛法)의 스승으로 삼고 구(求)하여 받드려드려야 함
"선지식(善知識)이라고 함은 니치렌(日蓮) ,등(等)의 동류(同類)를 가리키느니라. 통틀어 지식(知識)에 있어서 층층(層層)이 있으니 외호(外護)의 지식(知識)·동행(同行)의 지식(知識)·실상(實相)의 지식(知識)이 이것이니라. 결국(結局) 실상(實相)의 지식(知識)이란 소위(所謂)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이것이니라."(어서 824쪽)
※ 악지식 (惡知識)이란
불도수행을 방해하거나, 악법(惡法) 사법(邪法)을 설하여 중생을 미혹케하는 자를 말합니다.
법화경비유품 제삼(,法華經譬喩品 第三)등에 있습니다.
선지식(善知識)의 대어(對語). 또는 이름이 알려진 악인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지식(知識)이란 사물의 인식(認識) 숙지(熟知)가 아니라, 널리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는 의(義)를 가지며, 우인(友人) 지인(知人)등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악지식(惡知識)은 악우(惡友) 악사(惡師)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악지식(惡知識)일지라도 그것을 계기로 하여 자기의 신심(信心)을 강성히 한다면 선지식(善知識)으로 됩니다.
박해를 되풀이 했던 제바달다(提婆達多)가 석존(釋尊)에 있어서는 제일의 선지식(善知識)이라고 말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 본문어서말씀들 》
선지식(善知識)이라고 함은 니치렌(日蓮) ,등(等)의 동류(同類)를 가리키느니라. 통틀어 지식(知識)에 있어서 층층(層層)이 있으니 외호(外護)의 지식(知識)·동행(同行)의 지식(知識)·실상(實相)의 지식(知識)이 이것이니라. 결국(結局) 실상(實相)의 지식(知識)이란 소위(所謂)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이것이니라. 지식(知識)이란 형체(形體)를 알고 마음을 아는 것을 말하느니라. 이는 즉(卽) 색심(色心)의 이법(二法)이니라, 방법(謗法)의 색심(色心)을 버리고 법화경(法華經)의 묘경(妙境)·묘지(妙智)의 색심(色心)을 현현(顯現)해야 할 것이니라. 악우(惡友)는 방법(謗法)하는 사람들이며, 선우(善友)는 니치렌(日蓮) 등(等)의 동류(同類)이니라. (어서 823~4쪽)
선지식(善知識)이라 함은 오로지 스승도 아니고 오로지 제자(弟子)도 아닌 것이니라. (어서 208쪽)
선지식(善知識)의 연(緣)을 만나지 않는다면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고, 나타나지 않으며, 선지식(善知識)의 연(緣)을 만나면 반드시 나타나는 고(故)로 연(緣)이라고 하느니라.(어서 574쪽)
말대(末代)에 있어서 진실(眞實)한 선지식(善知識)이 있으니 소위(所謂) 법화(法華) 열반(涅槃)이 이것이니라. (어서 66쪽)
재세멸후(在世滅後)의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진실한 선지식(善知識)은 법화경(法華經) 이것이니라. (어서 68쪽)
선지식(善知識)은 실(實)로 만나기가 어렵다. 혹(或)은 교내(敎內)라 말하고 혹(或)은 교외(敎外)라고 말한다 . 이 사리(事理)를 생각컨대 아직 연저(淵底)를 구명(究明)치 않고·법수(法水)에 임(臨)하는 자(者)는 심연(深淵)하다는 생각을 품고 인사(人師)를 보는 무리는 박빙(薄氷)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이로써 금언(金言)에는 의법불의인(依法不依人)이라 정(定)하고 또 조상토(爪上土)의 비유가 있으니 만약 불법(佛法)의 진위(眞僞)를 아는 자가 있으면 찾아 스승으로 삼고 구(求)하여 받드리라. (어서 478쪽)
법화경(法華經)에 가로되 「 선지식(善知識)은 즉 대인연(大因緣)이며 소위(所謂) 화도(化導)해서 부처를 배견(拜見)하고 아뇩보리(阿耨菩提)를 일으킴을 얻게 함이라 」 등(等) 운운(云云). (어서 1341쪽)
부처가 되는 길은 선지식(善知識)보다 더함은 없느니라. 나의 지혜(智慧)가 무슨 소용(所用)이 있으리요. 다만 뜨겁고 찬것을 알 만한 지혜(智慧)라도 있다면 선지식(善知識)이 소중(所重)하니라. 그런데 선지식(善知識)을 만나는 일이 제일(第一)의 난사(難事)로다 . 그러므로 부처는 선지식(善知識)을 만남을 일안(一眼)의 거북이가 부목(浮木)에 들어가고·범천(梵天)에서 실을 내려서 대지(大地)위의 바늘구멍에 꿰는것에 비유(譬喩)하셨느니라. 그런데 말대(末代) 악세(惡世)에는 악지식(惡知識)은 대지미진(大地微塵)보다도 많고 선지식(善知識)은 조상(爪上)의 흙보다도 적으니라. (어서 1468쪽)
일체(一切)의 법(法)은 모두 이는 불법(佛法)이라고 알고 나면 교훈(敎訓)해야 할 선지식(善知識)도 필요없고 생각하는 마음, 말하는 말, 행(行)하는 행위(行爲), 거동(擧動)이란 거동(擧動), 행주좌와(行住坐臥)의 사위의(四威儀) 소작(所作)은 모두 부처의 마음과 화합(和合)해서 일체(一體)이므로, 죄과(罪過)도 없고, 장애(障碍)도 없는 자재(自在)의 몸이 되는데, 이를 자행(自行)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자재(自在)인 자행(自行)의 행(行)을 버리고 흔적도 없는 무명망상(無明妄想)인 벽사(僻思)의 마음에 주(住)하여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의 교훈(敎訓)을 배반(背反)하므로 어두움에서 어두움으로 들어가, 영구(永久)히 불법(佛法)을 배반(背反)하는 것을 슬퍼하고 슬퍼할지니라. 지금 되돌려서 생각을 바르게 하여 깨달음에 돌아가면 즉신성불(卽身成佛)은 자신(自身) 이외에는 없다고 알았노라. 나의 마음의 거울과 부처의 마음의 거울과는, 오직 일경(一鏡)이라 할지라도 우리들은 이면(裏面)을 향(向)하여 나의 성(性)의 이(理)를 보지 못하므로 무명(無明)이라 하고, 여래(如來)는 표면(表面)을 향(向)하여 나의 성(性)의 이(理)를 보셨느니라. 고(故)로 명(明)과 무명(無明)은 그 체(體)가 오직 一이니라. 거울은 하나의 거울이라 해도 향(向)하는 방법(方法)에 따라 명매(明昧)의 차별(差別)이 있다. 거울은 이면(裏面)이 있다 해도 표면(表面)의 장애(障碍)로 되지 않으며, 다만 향(向)하는 방법(方法)에 의(依)해서 득실(得失)의 둘이 있으니, 상즉융통(相卽融通)하여 일법(一法)의 이의(二義)니라. 화타(化他)의 법문(法門)은 거울의 이면(裏面)을 향(向)함과 같고, 자행(自行)의 관심(觀心)은 거울의 표면(表面)을 향(向)함과 같으니, 화타(化他)의 때의 거울도 자행(自行)의 때의 거울도 나의 심성(心性)의 거울은 오직 하나로서 다름이 없다. 거울을 즉신(卽身)에 비유(譬喩)하고, 표면(表面)을 향(向)함을 성불(成佛)에 비유(譬喩)하며, 이면(裏面)을 향(向)함을 중생(衆生)에 비유(譬喩)함이라. 거울에 이면(裏面)이 있음을 성악(性惡)을 단절(斷絶)하지 않음에 비유(譬喩)하고, 이면(裏面)을 향(向)할 때·표면(表面)의 덕(德)이 없음을 화타(化他)의 공덕(功德)에 비유(譬喩)하며, 중생(衆生)의 불성(佛性)이 나타나지 않음에 비유(譬喩)하느니라. (어서 570쪽)
생애(生涯) 본래(本來)부터 각오(覺悟)하였던 바 지금에 와서 번의(飜意)하지 않으며 게다가 또한 유한(遺恨)도 없노라, 모든 악인(惡人)은 또한 선지식(善知識)이니라, 섭수(攝受)·절복(折伏)의 이의(二義)는 불설(佛說)에 의(依)함이며 결코 사곡(私曲)이 아니로다, 만사(萬事)는 영산정토(靈山淨土)를 기(期)함이라, 공공근언(恐恐謹言). (어서 962쪽)
의법(依法)이라 함은 법화(法華) 열반(涅槃)의 상주(常住)의 법(法)이니라. 불의인(不依人)이란 법화(法華) 열반(涅槃)에 의(依)하지 않는 사람이니라. 설사(設使) 불보살(佛菩薩)이라 해도 법화열반(法華涅槃)에 의(依)하지 않는 불보살(佛菩薩)은 선지식(善知識)이 아니로다 . 하물며 법화(法華) 열반(涅槃)에 의(依)하지 않는 논사(論師)·역자(譯者)·인사(人師)에 있어서랴 (어서 67쪽)
석가여래(釋迦如來)를 위하여는 제바달다(提婆達多)야말로 제일(第一)의 선지식(善知識)이로다 . 지금의 세간(世間)을 보건대 사람을 잘되게 함은 자기편보다도 강적(强敵)이 사람을 잘 되게 하느니라. 안전(眼前)에 보이고 있다. (어서 91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