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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항(崔恒)이 己卯年(1459, 세조 5)의 기복(起復)을 사양(辭讓)한 글
-歷代 名臣, 名文 鑑賞-
최항(崔恒).(1409, 태종 9년~1474, 성종 8년). 자는 정보(貞父). 조선 전기의 문신ㆍ학자. 본관은 삭녕(朔寧). 호는 동량(㠉梁)ㆍ태허정(太虛亭). 판서, 대제학, 우의정 역임 후 영의정을 지냈는데 다시 좌의정으로 봉직하던 중에 서세(逝世)하였다. 훈민정음 창제에 공을 세웠으며 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경국대전≫, ≪동국통감≫을 찬정(撰定)하였다. 저서에 ≪태허정집(太虛亭集)≫, ≪관음현상기(觀音現相記)≫ 따위가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崔恒上書曰: 세조 5년 5월 11일 임진 3번째 기사 1459년 명 천순(天順) 3년
臣恒伏蒙特命起復,仍除職事,駭汗之極,悲感交深.謹卽謝訖,輒訴卑悃,願乞終制,未蒙兪音,不勝壹鬱,復瀆天聰.伏念臣素以庸愚,謬荷眷遇,濫與勳列, 遂側宰聯,補乏絲毫,恩踰覆燾.故乃福過災生,罪積禍臻,數載之間,二艱相繼, 枕塊孑孑,廬墳煢煢.豈意宸想不遺,爵命遄加?何緣不次之恩,遽及無狀之資? 感徹九原,哀激五內.第念起復,非待尋常之士,必其有無能爲輕重.如臣之愚, 有何所關?臣猶知恥,物豈無議?臣重念君臣同一體,忠孝非二道.免懷恩重, 千古如一,事親日短,百歲難再.臣立身無似,爲子有愧.生未致養,歿何盡禮? 唯有三年之制,庶伸寸草之誠,乃今練期尙遙,綸命忽降,纔服衰絰,俄變簪紳, 憯是太甚,孰不駭觀?內纏短喪之慘,外抱冒榮之羞,臣於此日,何以爲心?借曰,“詳定事緊,臣嘗與焉,不得不奪情,”然念憲章,國之經紀,要必材識之明,計慮之長,擬議輒當,獻替惟允者,然後庶可奉承睿裁,纂成《大典》.如臣之愚,初非所堪,動失商搉,徒煩指授,焉有三長,敢贊一辭?曾合斥退,反又甄收. 況今臣年齒已暮,骨肉多喪,雙淚不乾,眼明益晦,百憂交煎,鬢雪漸深.氣血羸消,精神眩瞀,縱欲黽勉而就任,其奈癡鈍而失措?或更增疾,亦祇廢事.旣忘哀而毁禮,又曠職而速辜,臣何擧顔?人且交指.伏望憐臣辭不隨例,諒臣情非徇名,許遂微懇,追寢成命,俾仍苴麻還守松楸,庶幾下不虧事親之終,上無負孝理之風.有懷悶悶,無容默默,敢干天威,冞切震懼.
御書答之曰:“事之重,國所共稱,卿之才,予所獨知,不合全爲一身,正宜廣利萬世.”
▶기복(起復)-유교사회에서 상(喪)을 당해 휴직하던 관원을 상복 기간이 다하기 전에 불러 직무를 수행하도록 하는 것. 세조가 최항을 기복토록 한 해는 세조 4년 1458년 무인 50세 때였음.▶訖-그만둘 흘.▶비곤(卑悃)-자신의 정성을 겸양.▶유음(兪音)-신하의 주품(奏稟)에 대한 임금의 하답(下答).▶일울(壹鬱)-憂思, 悱鬱, 마음이 답답함.▶瀆-더러워질 독, 煩瀆.▶권우(眷遇)-임금이 신하를 특별히 사랑하여 후하게 대우함.▶사호(絲毫) : 매우 적은 수량.▶부도(覆燾)-중용(中庸)에, “비유하면 천지는 실어주고 덮어주지 않는 것이 없다. 辟如天地之無不持載,無不覆幬〕”라 하였음. 도(燾)는 도(幬-덮을 도, 휘장 주)와 통용되면서 즉 '덮는다는 뜻으로 '은혜를 베풀고 보호한다'는 것을 비유한 말. 부재(覆載, 덮을 부, 실을 재)와 같은 말. 만물을 하늘이 덮어 싸고, 땅이 받아 싣는다는 뜻으로, '천지군부(天地君父)의 은덕을 이르는 말, 天之所覆,地之所載.▶孑孑-외롭게 지냄.▶경경(煢煢)-근심하면서 날을 보냄.▶작명(爵命)-관작을 내리는 명령.▶宸想-宸은 대궐 신, 하늘 신. 임금의 뜻.▶遄-빠를 천.▶不次-순서나 상례(常例)에 의하지 않은, 특별한.▶무상(無狀)-착한 행실이나 공적이 없음.▶물기무의(物豈無議)-물(物)은 동류(同類), 동류들의 물의(物議)가 어찌 없겠습니까?▶九原-중국, 춘추(春秋) 시대에 진(晋)나라의 경대부(卿大夫)의 무덤이 있던 지명에 근거함. 무덤. 구원. 저세상. 황천.▶제념(第念)-第는 다만 제(但也).▶무사(無似)-아버지를 닮지 않음.▶연기(練期)-연복으로 바꾸어 입는 기일, 소상(小祥) 뒤 담제(禫祭) 전에 입는 상복.▶綸命-임금의 명령, 유의어 윤언(綸言),윤음(綸音),준명(峻命).▶최질(衰絰)-상중에 입는 삼베옷.▶잠신(簪紳)-예전에 관원들이 관에 꽂는 비녀와 갓의 끈을 이르던 말. 잠영(簪纓), 높은 벼슬아치들을 이르던 말.▶차왈(借曰)-가령(假令) 말하옵건대, 차(借)는 가령 차.▶상정(詳定)-나라의 제도(制度)나 관청에서 쓰는 필요한 물건의 값·세액(稅額)·공물액(貢物額) 등을 심사 결정하여 오랫동안 변경하지 못하게 하던 일.▶탈정(奪情)-상기(喪期)를 채우지 않고 상제의 몸으로 벼슬자리에 나아감. 기복출사(起復出仕).▶의의(擬議)-의정부나 육조(六曹)에서 중신(重臣)들이 모여 관서(官署)에서 보고할 사목(事目)이나 임금이 의논하도록 명한 일에 대하여 그 가부를 의논하던 일. 의논한 내용을 임금에게 보고하면 임금이 이를 근거하여 재결(裁決)하였음.▶헌체(獻替)-착한 일을 하도록 권하고 악한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예재(睿裁)-임금의 재가.▶세 가지 장점 : 재지(才智)·학문·식견(識見).▶상각(商搉)-헤아려 정하다, 각(搉)능 칠 각, 오로지할 각.▶지수(指授)-지시하여 가르쳐 주다.▶견수(甄收)-甄差, 조선 시대, 나이가 많아 벼슬에서 물러난 사람을 다시 불러 벼슬을 맡김.▶이소(羸消)-여위고 사그러짐. 羸는 여윌 리(이).▶현무(眩暓)-어둡고 침침함.▶민면(黽勉)-힘써 노력함.▶간천위(干天威)-임금의 권위를 범(犯)함. 간(干)은 범할 간.▶저마(苴麻)-삼베옷, 상복.▶송추(松楸)-산소 둘레에 심은 나무.▶민민(悶悶)-심히 번민함.▶순명(徇名)-이름을 드러내어 자랑함. 순(徇)은 자랑할 순, 드러낼 순.▶미(冞)-점점 미, 두루다닐 미.
세조실록 16권, 세조 5년 5월 11일 임진 3번째기사 1459년 명 천순(天順) 3년
최항이 기복을 사양하는 글을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다
최항(崔恒)이 상서(上書)하기를,
"신(臣) 최항(崔恒)은 삼가 특별한 명(命)을 입어 기복(起復)되고 인하여 직사(職事)에 제수되니, 놀라 식은 땀이 나며 비감(悲感)이 번갈아 깊었습니다. 삼가 즉시 허물을 진사(陳謝)하고 문득 저의 정성을 호소하여 상제(喪祭)를 마치기를 원했지마는 유음(兪音)278) 을 받지 못했으므로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여 다시 천총(天聰)을 번독(煩瀆)합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신(臣)은 본래 용렬하고 우매한 자질로써 성상의 은혜를 잘못 입어서 외람되게 훈신(勳臣)의 반열(班列)에 참여하여 마침내 재상(宰相)의 줄에 끼였는데 보필(補弼)은 사호(絲毫)도 없었으나 은혜는 천지(天地)보다 지나쳤습니다. 그러므로 복이 지나쳐서 재앙이 발생하게 되고 죄가 쌓여서 재화(災禍)가 이르게 되어, 두서너 해 사이에 내간(內艱)과 외간(外艱)이 서로 잇달아 흙덩이를 베개삼아 베고 외롭게 지내며 여묘(廬墓)살이를 하며 근심하고 지냈는데, 어찌 성상께서 뜻을 잊지 아니하고 작명(爵命)을 빨리 더하였으니 무슨 인연으로 은혜가 갑자기 무상(無狀) 불차탁용(不次擢用)의 자질에 미치게 될 줄을 생각했겠습니까? 감격은 구원(九原)까지 통하고 슬픔은 오장(五臟)을 격동(激動)시켰습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기복(起復)은 심상(尋常)한 선비를 대우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재능이 있고 없음으로 경중(輕重)을 삼는 것이니, 신(臣)과 같은 어리석은 자는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신(臣)도 오히려 부끄러움을 아는데 세상 사람이 어찌 비난이 없겠습니까? 신(臣)이 거듭 생각하건대, 임금과 신하는 똑같은 한몸이고 충성과 효도는 두 가지 도리(道理)가 아닙니다. 어미의 품을 떠나도 은혜가 무거운 것은 천년 동안 한결 같으며, 어버이를 섬기는 시일이 짧으니 백세(百歲)가 두 번 오기가 어렵겠습니다. 신(臣)은 입신(立身)이 무사(無似)하니 자식된 도리로 부끄럽습니다. 〈어버이가〉 생존하셨을때 지극히 봉양을 하지 못하였으니, 돌아가셨는데 어찌 예절을 다하겠습니까? 다만 3년의 상제(喪制)가 있어서 거의 조금의 정성을 펼 수가 있었으나, 지금 연복(練服) 의 기일도 아직 멀었는데 성상의 명이 갑자기 내려서, 겨우 최질(衰絰)을 입었지만 조금 후에 잠신(蠶神)으로 변하였으니, 참람한 것이 너무 심하여 누가 놀라서 보지 않겠습니까? 마음 속에는 상기(喪期)를 단축(短縮)시킨 슬픔에 쌓여 있고, 겉으로는 영화를 탐낸 수치(羞恥)를 안고 있느니, 신(臣)이 이러한 때 어떠한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까? 가령 말하기를, ‘상정(詳定)하는 사무가 긴급(緊急)한데 신(臣)이 일찍이 참여하였으므로 탈정(奪情)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하지마는, 그러나 생각하건대, 헌장(憲章)은 나라의 기강(紀綱)이니 반드시 재주와 식견이 명민(明敏)하고 계려(計慮)가 우수하여 의의(擬議)에 문득 적당하고 헌체(獻替)에 오직 알맞은 후에야 거의 성상의 재가(裁可)를 받들어 《대전(大典)》을 찬성(纂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臣)과 같이 우매한 자는 처음부터 감당할 바가 아니므로 자칫하면 상각(商搉)에 어긋나서 한갓 지수(指授)에만 번거로울 것인데, 어찌 세 가지 장점 이 있어 감히 하나의 문사(文辭)라도 돕겠습니까? 일찍이 물리쳤어야만 합당한데 도리어 또 견차(甄差) 하시었습니다. 하물며 지금 신(臣)은 나이가 이미 많아졌는데 골육(骨肉)을 많이 잃게 되어 두 줄기의 눈물이 마르지 않으며 눈이 더욱 어두워지고 온갖 근심이 번갈아 끓으니 빈설(鬢雪)이 점차 심해집니다. 기혈(氣血)이 파리하고 다하였으며 정신이 미혹하고 어지러워 비록 직임에 나아가서 힘써 일하려고 하지마는 어리석고 노둔해서 실수할 것을 어찌 하겠습니까? 혹시 다시 질병이 더한다면 또한 삼가 사무를 폐하게 될 것입니다. 이미 슬픔을 잊고 예절을 무너뜨렸으며 또 직무를 태만히 하여 죄를 남기었으니 신(臣)이 어찌 얼굴을 들겠습니까? 사람들이 또 번갈아 손가락질을 하고 있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신(臣)의 사양은 전례(前例)에 따르지 않는 것임을 가엾게 여기시고 신(臣)의 마음은 명예(名譽)를 좇는 것이 아님을 살펴서 작은 정성을 이루도록 허가하시어 성명(成命)을 뒤따라 중지시키어서, 상복(喪服)을 그대로 입게 하고 돌아가 〈부모의 산소(山所)를〉 지키게 한다면 거의 아래로는 어버이를 섬기는 마지막에 모자람이 없을 것이며, 위로는 효도로써 다스리는 풍속에 저버림이 없을 것입니다. 답답한 회포가 있어서 묵묵(默默)히 있을 수가 없으므로 감히 천위(天威)를 범하게 되니 더욱 더 떨리며 두렵습니다."하였다.
어서(御書)로 이에 답하기를,
"일의 중대한 것은 나라에서 함께 일컫는 바이고, 경(卿)의 재주는 내가 홀로 아는 바이니, 온전히 한 몸만 위하는 것은 합당하지 아니하다. 마땅히 만세(萬世)에 널리 이익되게 해야 한다." 하였다.
성종실록 41권, 성종 5년 4월 28일 임오 3번째 기사 1474년 명 성화(成化) 10년
좌의정 최항의 졸기
좌의정(左議政) 최항(崔恒)이 졸(卒)하였다. 철조(輟朝)하고 조제(弔祭)하고 예장하기를 전례와 같이 하였다. 최항의 자는 정보(貞父), 삭녕인(朔寧人)으로, 증영의정(贈領議政) 최사유(崔士柔)의 아들이다. 최항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글 읽기를 좋아했다. 선덕(宣德-明나라 선종(宣宗)의 연호) 갑인년(1434, 세종16년)에 세종(世宗)이 관학(館學)에 나아가 학사(學士)에게 책문(策問)을 하고서 제1인(人)으로 발탁(拔擢)을 하고, 선교랑(宣敎郞) 집현전 부수찬(集賢殿副修撰)에 특별히 제수하여, 수찬(修撰)·교리(校理)·직전(直殿)을 역임(歷任)시켰다. 정묘년1447, 세종 29년)에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직제학(直提學)에 승진이 되었다. 경태[景泰, 명(明)나라 대종(代宗)의 연호] 경오년(1450, 세종 32년)에 문종(文宗)이 즉위(卽位)하고선 좌사간대부(左司諫大夫)에 제수(除授)되고, 신미년(1451, 문종 원년)에 부제학(副提學)에 승진되고, 임신년(1452, 문종 2년)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되었다가 이어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전보(轉補)되었다. 계유년(1453, 단종 원년)에 세조(世祖)가 정란(靖亂)을 할 때에 최항이 마침 정원(政院)에 숙직(宿直)을 하였으므로, 공신(功臣)에 참여(參與)하게 되어, 도승지(都承旨)에 승진이 되고, 수충위사협찬정란공신(輸忠衛社協贊靖亂功臣)의 호(號)를 받았다. 갑술년(1454, 단종 2년)에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에다 영성군(寧城君)에 봉(封)해졌고, 을해년(1455, 단종 3년)에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세조가 즉위(卽位)하고서는 좌익 공신(佐翼功臣)의 호가 내려졌다. 천순[(天順), 명(明)나라 영종(英宗)의 연호] 정축년(1457, 세조 3년)에 가정대부(嘉靖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에서 곧이어 이조참판(吏曹參判)이 되었으며, 무인년(1458, 세조 4년) 에 자헌대부(資憲大夫) 형조판서(刑曹判書)가 되었다가 이어 공조판서(工曹判書)가 되었다. 그 해 겨울에 모친(母親)의 상(喪)을 당하였는데, 기묘년(1459, 세조 5년)에 기복(起復)되어 정헌대부 중추원사(中樞院使)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겸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 되었다. 이는 문형(文衡)을 담당하는 직인데, 최항이 세 번이나 상서(上書)하여 3년상(三年喪)을 마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경진년(1460 세조 6년)에 숭정대부(崇政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올랐으며, 계미년(1463, 세조 9년)에 의정부우참찬(議政府右參贊)에 제수(除授)되고, 이어 좌참찬(左參贊)에 전임(轉任)되었다. 성화[(成化, 명(明)나라 헌종(憲宗)의 연호) 병술년(1466 세조 12년)에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승진이 되어 병조판서(兵曹判書)의 일까지 겸임(兼任)을 하고, 이어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좌찬성(左贊成)에 승진이 되었다. 정해년(1467, 세조 13년)에 대광보국(大匡輔國) 우의정(右議政)에서 영의정(領議政)으로 전임(轉任)이 되었다가 얼마 안가서 또다시 영성군(寧城君)으로 봉해졌다가, 경인년(1470, 성종 원년)에 부원군(府院君)으로 다시 봉해졌다. 신묘년(1471, 성종 2년)에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의 호를 내리고, 다시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에 제수되었으며, 이 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66세이다. 문정(文靖)이라고 시호(諡號)하니 ‘도덕(道德)이 높고 박학다문(博學多聞)한 것을 문(文)이라 하고, 몸가짐을 공손히 하고 말이 적은 것을 정(靖)이라 한다.
최항의 사람됨은 겸손하고 조심성 있고 말이 적은데다가, 비록 한더위라도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하고 무릎을 모으고 꿇어앉아 온종일 게으른 표정이 없었으며, 학문(學問)을 좋아하고 기억력이 좋았다. 문장(文章)으로는 대우(對偶)에 능하여 한 때의 표문(表文)과 전문(箋文)은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그래서 중국(中國) 조정(朝廷)에서까지도 정절(精切-정밀하고 적절함)하다고 평을 하였으며, 세조(世祖)·예종(睿宗)의 《실록(實錄)》과 《무정보감(武定寶鑑)》·《경국대전(經國大典)》은 모두 그가 찬정(撰定)한 것이다. 그의 호(號)는 태허정(太虛亭)이며, 유집(遺集)이 세상에 전(傳)한다. 최항은 어떤 일에 임(臨)해서는 과단성 있게 재결(裁決)함이 적었다. 전조[銓曹-이조(吏曹)와 병조(兵曹)]의 장(長)이 되고 상위(相位)에 있을 때에도, 건백(建白)한 것은 하나도 없고 그대로 의위[依違-가부(可否) 결정을 못하고 우물쭈물함]할 뿐이었다. 세조(世祖)가 일찍이 훈구대신(勳舊大臣)들과 시비(是非)를 논란(論難)하면서 그의 뜻을 관찰하려고, 최항에게 묻기를,
"내가 어떤 일을 하기 위하여 어떤 법을 제정하려 하고, 남쪽과 북쪽도 정벌(征伐)하려고 하는데, 가능한가?"
하니 최항은 옳고 그름과 쉽고 어려움도 계산해 보지 않고서 고개를 숙이고 몸을 움츠리며 조심성 있게 대답하기를,
"옳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두 번 최항에게 물으니, 다시 대답하는 말도,
"옳습니다."
라고만 하였다. 이보다 앞서서는 문형(文衡)을 맡은 자로서 의정(議政)에 제수(除授)가 되면 반드시 사양을 하였었는데, 최항은 의정에 제수되었을 때에 그대로 받으면서 사양을 하지 않으니, 그 당시의 여론이 그러한 점을 비난하였다. 그의 아내는 서씨(徐氏)인데, 성질이 사나왔으며, 가정일은 모두가 서씨가 하자는 대로 했고,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최항은 딸이 많았는데, 사위를 선택함에 있어서, 부자 사람만 취택하고 인품(人品)은 논(論)하지 않았으므로 대다수가 어리석은 자들이었다. 최항이 일찍이 탄식하기를,
"우리 집은 활인원(活人院)이다."
하였는데, 그것은 병신만 모였다는 뜻이었다. 기채(奇采)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최항의 친구의 사위인, 이배륜(李培倫)이란 자의 사위였다. 그 기채에겐 딸만 하나 있었다. 그 딸이 정효상(鄭孝常)의 집안으로 시집을 갔는데, 부유(富裕)하게 잘살자 최항은 그 부(富)를 탐하여 근족(近族)임도 혐의하지 않고 그의 딸을 데려다가 아들 최영호(崔永灝)의 아내를 삼으니, 온 조정(朝廷)에서 비난을 하였다. 최항의 아들은 최영린(崔永潾)과 최영호(崔永灝)인데, 최영린은 과거에 급제하여 형조참의(刑曹參議)가 되었다. 그런데 성품이 잔악하고 혹독하여 비록 처로(妻孥)들이라도 형편없이 학대하였다.
【태백산사고본】 6책 41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9책 106면
○左議政崔恒卒.輟朝、弔祭、禮葬如例。恒字貞父,朔寧人,贈領議政士柔之子。 恒幼聰明,好讀書,宣德甲寅,世宗幸學策士,遂擢第一人,特授宣敎郞集賢殿副修撰, 歷修撰、校理、直殿。丁卯中重試,陞直提學。景泰庚午,文宗卽位,授左司諫大夫, 辛未陞副提學,壬申拜同副承旨,轉左副承旨。癸酉世祖靖亂,恒適直政院,與有功, 陞都承旨,賜輸忠衛社協賛靖亂功臣之號。甲戌嘉善吏曹參判封寧城君,乙亥遷大司憲。世祖卽位,賜佐翼功臣號。天順丁丑,嘉靖戶曹參判,尋移吏曹,戊寅資憲刑曹判書,俄移工曹。是年冬,丁母憂,己卯起復,加正憲爲中樞院使藝文館大提學兼成均館大司成。主文衡也,恒三上書請終制,不許。庚辰加崇政吏曹判書,癸未拜議政府右參贊,轉左參贊。成化丙戌,陞崇祿兼判兵曹事,尋陞輔國崇祿左贊成,丁亥大匡輔國右議政,轉至領議政,未幾,還封寧城君,庚寅改封府院君。辛卯賜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號,復拜議政府左議政,至是卒,年六十六。諡文靖;道德博聞文,恭己鮮言靖。爲人謙謹寡言,雖盛暑整衣冠,斂膝危坐,終日無惰容,耽學强記。爲文章,長於對偶,一時表箋,皆出其手。中朝稱精切,世祖、睿宗《實錄》、《武定寶鑑》、《經國大典》皆其所撰定也。號太虛亭,有集行于世。恒臨事,少裁決。長銓曹居相位,一無建白,依違而已。世祖嘗與勛舊,論難是非,以觀其志,問恒曰:"吾欲爲某事,欲立某法,欲征南伐北,可乎?" 恒不度是非,不計難易,俛首竦身,謹對曰:"唯。" 上再問,恒復曰:"唯唯。"前此典文衡者,拜議政則必辭,恒拜議政,猶帶不辭,時議譏之。妻徐氏性悍,家政一聽於徐,不得自由。恒多女,擇壻惟取富饒,不論人器,率多癡騃。嘗自嘆曰:"吾家乃活人院",言病人聚也。有奇采者,恒友壻李培倫女壻也。 采只有一女,適鄭孝常家,饒於財,恒利其富,不嫌近族,取其女爲子永灝妻,朝議譏之。恒子永潾、永灝。永潾登第,爲刑曹參議。性殘酷,雖妻孥間,毒虐無狀。
【태백산사고본】 6책 41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9책 106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인물(人物)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