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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속의 빈곤
이첵의 독일어 제목은 '탐욕없는풍요(Reichtum ohne Gier)'dlek. 제목이 암시하듯, 우리는 탐욕을 부리지 않고도 얼마든지 풍요롭게 살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오히려 넘쳐나는 물질과 상품더미 때문에 깔려 죽을 판국이다. 최근에 당국이나 관련 업체들이 비닐이나 플라스틱, 프티로폼 따위를 더이상 수거하지 않겠다고 하자(중국이 이런 재활용 쓰레기를 그만 수입하겠가고 해서인데) 작은 사회적 혼란이 일었던 것만 봐도, 우리가 얼마나 상품과 물질의 홍수 속에 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비교적 편하게 사는 것도 실은 세계 곳곳에서(사람,자연이)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현재 독일 국회의원이자 좌파당의 원내대표를 맡은 자라 바겐크네히트는 동독 출신이다. 그녀는 학창시절 군사훈련을 거부하고 당연히 전체주의에도 반대했기에, 동독체제로부터는 별 혜택을 입지 못했다. 그러나 1990년 독일(재)통일 이후 경제학 박사 공부까지 하고<<현재의 추세에 용감하게 맛서라>>, <<자본주의 대신 자유>>,<<엉터리 방법들,금융파탄과 세계경제>>등을 책을 내며 깊이 있는 사유를 보여주고 있다.
첵 제목들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는 탐욕에 중독된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참된 자유의 삶을 살자고 제안 한다. 그래서 현재의 자본주의 정치경제가 강요하는 각종 추세들에 용감하게 맞서라고 말하며, 2008년'리먼브라더스'파산으로 상징되는 세계 금융자본 맟 초국적 자본의 구조적 병패를 타파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요컨데 바겐크네히트는 전체주의적 사회주의도 거부하지만, 탐욕주의적 자본주의 역시 거부한다. 세계의 평화 공존과 지속가능성을 위해서다.
현재의 기술적인 가능성을 동원하면 (지구 인구 70억을 훨씬 넘는)120억의 세계인들에게 필요한 식량을 공급할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한 우리 지구에서 20억 명의 인류가 영향부족으로 고통을 받고 있고 그들 중 절반은 굶주리고 있다. ...세계의 굶주림과 영양실조를 극복하는데 한 해에 필요한 돈은 겨우 200억 유로[약 25조 원]로, 군비와 전쟁에 소비하는 돈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경제봉건주의와 불량배 경제
.자본주의로부터 우리를 구하는 법'이란 부제가 붙은 <<풍요의 조건>> 역시 자본주의 세계경제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서이다. 비판의 칼날은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학자나 이론가, 기업가, 은행가만이 아니라 '경제봉건주의'에 다름 아닌 현재의 자본주의 그 자체를 향한다. 소수 지배세력들이 독과점이나 특허, 전쟁, 로비, 부정부패, 뇌물, 탈세, 세습 등을 통해 무한 탐욕을 추구하는 오늘날 경제 현실은 그야말로 무책임의 극치를 보여주며, "성과·책임·경쟁에 토대를 진정한 시장경제"와도 거리가 먼 '불량배 경제'이다. 세계의 최상위 부자 1%가 지구 위에 사는 나머지 모든 사랑이 가진 부보다 더 많은 부를 소유하게 된 배경이다. 특히 , 오늘날 금융자본은 95% 이상 실물경제와 유리된 채 투기판을 조장하면서도(카지노 자본주의), 영업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은 채 오히려 뻔뻔하고 무책임하게도 정부를 통해 국민에게서 걷은 세금으로 손실을 보전(구제금융)하는, 일종의 약탈을 수행한다.
그 가운데 중산층(자본주의의 우월성의 증거라던)은 나라마다 사라지고 사회경제 양극화는 심해진다. 불로소득으로 더욱 부자가 되는 극소수 최상위층과 나날이 생계에 허덕이는 대다수 하위층으로 분열된다. 상층에서는 부와 권력이 세습되고 하층에선 빈곤과 절망이 세습된다. 접시닦이가 저축을 하고 자수성가하던 일은 이제 신화임이 분명해졌다. 더이상 개천에서 용 나는 일도 없다. 자녀가 부모 세대보다 좋아진 경우는 드물고 오히려 그 반대다. 한국 역시 단군 이래 처음으로 자녀세대가 부모들보다 빈곤해진다고 하지 않던가. 결국(반)실업자, 노숙자,이주자,난민 그리고 극우세력까지 도처에 증가한다. 이 모든 것은 "강도 귀족과 악덕 기업가들"이 탈규제와 시장만능주의(예, 민영화, 자유무역협정)를 통해 경제와 사회를 과두지배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터넷으로 상징되는 최첨단 기술시스템은 네트위크상의 독점(특허권)을 형성하여 모든 데이타를 이윤증식에 활용한다(정보자본주의), 참된 혁신이 불가능한 배경이다. 또한 유럽연합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유럽의 건설은 그 외형적 이미지와 달리, 2015년 그리스 경제위기에서도 드러났듯, 유럽중앙은행을 통해 유로화라는 단일 통화를 강제한다. 그러나 이건 각국의 전통이나 특수성을 무시하는 자본의 통일 전략에 불과하다. 그 결과(영미나 제3세계, 과거의 소련·동구를 넘어)유럽 전체적으로 노동이 유연화하고 복지는 축소되었으며 공공성은 약해지고 자본은 더 강해졌다. 이렇게 진행된 분열과 배제가 우리 내면에 두려움을 조장한다.
21세기가 시작된 지금도 최고 부자 1%가 중요한 경제적 자원을 그들의 손아귀에 장악하고 마음대로 사용한다. (18세기와)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은 토지와 부동산 외에 산업시설,기술 노하우, 디지털 혹은 다른 연결망, 서버, 소프트웨어, 특허 그리고 여타 다른 많은 것들 또한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국의 문호 셰익스피어가 1601년에 쓴 <햄릿>은 '분열로 얼룩진 낡은 시대'에 대한 문제의식의 산물이다("이 시대는 분열로 얼룩져 치욕과 비탄이 넘쳐난다. 나는 다시 건설해야 할 세계에 온 것이로구나!"). 오늘의 우리 역시 '낡은 문명'앞에 서 있다. 전쟁과 내전이 글하고 폭력과 테러가 그러하다.
원자재와 판매시장 이득과 지정학적 전략, 파이프라인 통로, 세력다툼등이(그들의)주요 관심사다. ...세계적으로 약 6,0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그러한 갈등 때문에 고향을 잃어버렸고 도망 길에 올랐다. ...금융거품, 경제위기, 실업, 죽어가는 산업지역, 황폐해지는 주거지, 생계조차 유지하기 어려운 일자리, 노후 빈곤, 불안전 등이 우리의 일상을 덮고 있으며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역시 분열과 배제가 우리에게 두려움을 부른다. 그러나 낡은 시대는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미래로의 진전을 통해 극복돼야 한다. 더이상 "대홍수가 밀려온들 우리와 무슨 상관이야?"라고 말해선 안된다. 그래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
기술·금융·소유에 대한 대안
이런 면에서 이책은 비판서를 넘어선 대안서이기도 하다. 그것은 이 책이 현실 자본주의를 냉철하게 비판할 뿐 아니라 그에 대한 현실적 대안들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저자는 기술이나 특허, 화폐, 나아가 기업마저 공공재로 파악할 것을 제안한다. 기존의 소유권 관념을 자본주의식으로 지나치게 사적인 재산권으로 편협하게 해석하진 말자는 것이다. 예컨대, '아이폰'으로 유명한 '애플'이 채택한 12가지 핵심 기술들은, 따지고 보면 모두 공적 자금으로 개발된 것이다. '구글'이나 제약회사들도 마찬가지다. 자본이 자기 힘으로 기술을 개발한 것이 아니라, 공적 자금으로 개발된 기술을 (특허권이나 지적재산권을 활용해)자본이 사유화한 것이 사태의 진실이다. 그러니 기술을 공공재로 보자는 그녀의 제안은 지극히 정당하다.
화폐는 어떤가? 원래 화페는 가치 측정과 거래 수단으로 탄생했다. 화폐가 화폐다운 경우는 지역공동체 경제를 살릴 때다. 그러나 오늘날 이것은 이윤 축적과 투기 수단으로 변형됬다. 그 결과 지역공동체는 물론 세계공동체가 초국적 자본이나 세계 금융자본에 의해 체계적으로 죽임을 당한다. 대표적인 예가 세계 곳곳의 기반시설(예, 지하철 9호선)이나 도시 재생사업에 발 빠르게 뛰어드는 '맥퀴리'자본이다. 'Jp모건'이나 ''골드만삭스'등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조직화한 돈의 지배는 조직범죄에 의한 지배만큼 위험하다.' (F.루스벨트,1936)이런 면에서 화폐를 원래 자리로 돌려놓는 것이 저자의 대안이다. "지역민주주의에 토대를 둔 새로운 금융경제의 건설."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원래적 의미의 농협이나 신협, 상호신용금고 같은 것이다. 이는 원래 협동이나 호혜, 연대의 정신이 기본이었다. 불행히도, 이 모두 원래 의미를 잃고 무한 이윤을 추구하는 일반 금융자본과 별다를 바 없게 되었다.
바겐네히트가 제시한 대안의 백미는 역시 기업 세계를 혁신하기 위한 대안이다. 그것은 현재의 주식회사를 민주주의 관점에서 근본 혁신을 하는 것인데, 한마디로 '소유권의 재구성'이다. 오늘날 주식회사는 무한 이윤을 추구하면서도 투자 자본만큼만 책임진다. 따라서 그 규모를 넘는 손실이나 사회적 폐해(미세먼지나 수질·토질 오염 등 회부효과)에 대해 전혀 무관심하다. 그러니 주식회사라는 존재 그 자체가 이미 무책임하다. 따라서 이 주식회사 제도를 넘어 새로운 소유 형태를 다양하게 모색해야 하는데, 그것은 ①개인회사(개인이 전적인 책임을 지는), ②직원회사(직원들이 공동결정,공동분배,공동책임의 주체가 되는), ③지역공동체회사(지자체나 마을 조직과 같은 공공기관이 운영하는), ④공동번영회사(모든 사람의 복리에 기여하는)등이다. 이렇게 다양한 소유권을 가진 회사들이 나름의 혁신전략으로 책임성 있게 운영되면서도 사회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잘 이루면, 빈부격차나 사회 양극화 없이 모든 사람이 오늘의 퐁요를 누리며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오늘날 자본주의가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긴 하지만, 자세히 보면 바겐크네히트가 제안한 '다른'소유 형태도 제법 있으며, 또 부단히 생성된다. 예컨데, 한국의 '한살림'이나 '아이쿱'으로 상징되는 각종 협동조합이 그러하고, 마을기업이나 사회적기업 또한 그러하다. 민영화 이전의 국영·공영 업체들 역시 그러했다. 또 청주의 '우진교통'이나 대구의 '달구벌버스', 진주의 '삼성교통'과 같은 자주관리 기업들은 노동자가 곧 주인이기에 모두 의욕적으로 협동한다. 당연히 성과도 좋다. 공동소유·공동결정·공동분배·공동책임 원리가 구현된 덕이다. 바겐크네트에 따르면 독일에도 이런 사업장이 7,000개 정도나 되고, 그중 1,800개는 '조합회사'다.
반면 현재의 주식회사 제도는 (증권시장과 더불어)흔히 '자본주의의 꽃'으로 불리기도 하나, 한편으로 막대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세계 전역으로부터 투자자를 불러들이고, 다른 편으로는 더 높은 이윤만 보장된다면 지옥이라도 기꺼이 달려간다. "검은 고야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 던 1970년대 말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 바로 이 논리(그가 미국을 방문한 뒤 중국의 개혁개방['시장사회주의']을 주창하면서 사용한 논리인데)는 흥미롭게도 '경제봉건주의'에 불과한 신자유주의 단계의 자본주의와 통한다. 물론, 그 쥐가 중국 인민의 삶인지 미국 달러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는 모호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세계 전역에서 모여든 투자자들은 그 회사가 활동하는 나라의 민주주의나 삶의 질에는 (소름 돋을 정도로)무관심하다. 어쩌면 미국의 트럼프는 이런 면에서 자본주의 주식회사의 투자자들을 상징적으로 대변할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났는지 모른다. 2018년 2월, 플로리다주 어느 고등학교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나 17명이 소중한 생명을 잃고 수많은 이들이 가슴을 쓸어내리던 바로 그 순간에도, 또 전국적으로 수 많은 사람들이 총기 규제를 요구하던 와중에도 그는 총기 생산 기업 내지 군수산업의 이익을 대변하듯 "교사들에게도 총기무장을 시켜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트름프로 상징되는 자본의 경제는 한마디로 죽임의 경제다.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회와 세계에 보내는 교서에서 이렇게 말했다."이 경제는 지금 죽어가고 있다." 이 죽어가는 세계경제를 과연 어떻게 해야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하게 할 수 있을까? 즉, 죽임이 아닌 '살림'의 경제는 어떻게 창조할까? 이것이 우리가 직면한 시대의 화두다.
한편, 세계의 주식회사들은 생산이든 금융이든 나름 열심히 돈벌이 활동을 하다가도 충분히 돈을 뽑아냈다고 판단하면 언제든 '먹튀'를 할 준비가 되어 있다. '론스타'나 '상하이차', GM등이 온갖 사회적 논란을 일으킨 것은 결코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자본은 국적에 매이지 않는다. 나아가 이 투자자들은 바로 그 돈벌이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적극 망가뜨린다. 비선출직 공무원들을 맘대로 조종할 뿐 아니라 선출직 공무원조차 사업에 방해가 되면 교묘한 선거 개입으로교체해버린다. 양심적인 정치가나 행정가들이 만든 법률이나 제도, 정책조차 폐기 처분하거나 이윤증식에 유리하도록 대체한다.
대표적인 예가 노조 와해를 목적으로 무려 6,000여 건의 비밀문서를 만들고 관리해온 삼성그룹이다. 삼성 미래전략실과 '신문화팀'은 그룹내 노조 설립을 저지하기 위해 검찰과 경찰은 물론 노동부 공무원까지 철저히 매수, 관리해왔다. 또 영호 <또 하나의 약속>에도 나오듯, 회사 직원은 산재 담당 공무원은 물론, 피해자 가족과 증인, 실험실 과학자까지 매수한다. 한편으로 과학기술을 이윤생산에 적극 동원하고, 다른 편으로 사법적으로도 회사에 유리한 결론을 얻기 위해 과학기술을 오·남용한다. 이렇게 자본은 삶의 모든 국면을 반민주적으로 만든다. 그래야 자본이 편히 몸집을 불릴 수 있다. 아니, 자본은 (인간·자연의)생명을 먹고 산다고 해야 정확하다.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병립?
흔히 민주·진보 세력조차 '시장경제와 민주주의가 병행 발전할 수 있다고 외치지만, 그것이 진정 가능한 경우는 민주주의가 시장경제를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을 때뿐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 시장경제는 자본주의의 다른 이름일 뿐, 실은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실질적으로 형해화한다. 진정한 민주주의가 사람(생명)을 근본으로 삼는 민본주의라면, 이것은 자본(이윤)을 근본으로 삼는 자본주의와 정면 배치된다.따라서 어정쩡하게 '시장경제와 민주주의'가 병행 발전한다거나 '자본주의 산업화와 민주화'를 순차적으로 이뤘다는 식으로 말하는 건 부정확하다. 나아가 보수 우익처럼 '자본주의가 곹 민주주의'라 보는 것은, 자본주의도 민주주의도 전혀 모르고 하는 소리다.
바겐크네히트의 물음,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가?"에 대해 나름 답을 찾아나갈 차례다.무엇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지금까지의 성장 방식을 성찰하게 된다. 안철수식으로 '새로운 먹거리산업'운운하며 성장중독증에 빨질 일이 아니라, 현재의 먹거리 생산과 분배 방식을 진지하게 반성할 일이다. 물론, 이 먹거리는 돈이다. 사실 동일한 돈으로도 이를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 일례로, 이명박식'사(4대강)·자(자원외교) ·방(방위산업)'으로 수십, 수백조의 혈세를 날려버릴 일이 아니라 교육이나 복지, 유기농에 쓰면 우리 삶의 질은 크게 달라진다.
또 우리는 돈벌이 과정 자체도 반성해야 한다. 미세먼지나 오폐수를 만드는 대가로 큰돈을 버는 건 아닌지, 민초들을 속이면서 돈 버는 건 아닌지, 사회 불평등에 눈 감고 나만 잘살려고 하는 건 아닌지,이런 걸 물어야 한다. 권력 세습화, 재벌 세습화에 이어 고용 세습화, 심지어 학벌 세습화가 일어나는 현실은 봉건경제를 넘어 봉건사회로의 회귀를 의심케 한다. 이런 잘못위에, 우리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해야 한다. 1321년 카탈루냐에서 파산한 은행가를 참수형에 처했던 법처럼, 작은 공동체에 책임을 지는 금융개혁(아이슬란드식'공동번영은행')과 더불어 조건 없는 기본소득을 실시하는 것은 꼭 해야 할 일에 든다.불로소득과 재능 개발과 노동시장 단축(하루4시간 정도로)도 필요하다.
그렇게 되면 우리 모두는 수고로운 노동 외에 행복한 삶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더 많은 시간을 갖게 된다. 예컨데, 우리의 사랑과 친구, 좋은 책읽기 혹은 아름다운 콘서트 방문, 달리기, 자전거 타기, 축구 혹은 그냥 잔디 위에서 햇볕 쬐기, 새의 노래와 윙윙대는 벌 소리를 듣는것 등.
바겐크네히트의 말대로, 자본주의 세계경제가 이룬 풍요를 모든 사람들이 함께 누리도록 만드는 것은 결국 정치의 몫이다. 더 많은 민주주의, 더 깊은 민주주의를 향해 함께 손잡을 때다. 분열과 배제에 대한 두려움을 회피하기보다는 공동으로 직시하고, 실천적 용기와 내면의 자유를 가진 사람들이 연대의 힘으로 정면 돌파할 일이다. 진정"자유롭고 풍요로운 삶은 다른 사람들과의 연대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이 책은 일정한 한계도 품고 있다. 일례로 저자는 자유, 책임, 경쟁, 성과, 능력에 따른 분배가 이뤄지는그런 시장경제를 논리적으로옹호하는 입장인데, 과연 그것이 실제로 구현 가능하고 또 바람직하다고 믿는 것인지, 아니면 현실 비판을 위한 방법론으로 제시한 입장인지 불분명하다.
또 역자의 소개처럼 그녀는 F.리스트류의 역사학파 논리, 즉 국가의 긍정적 역할론에 기대기도 하는데, 과연 이것이 1945~1975년식 복지국가 부활을 기대하는 것인지, 아니면 현재의 탐욕적 신자유주의를 비판할 언덕으로 활용하는 건지도 불확실하다.
끝으로 저자는 조건 없는 기본소득을 주창하면서도 '오직 자신의 노동만으로 이뤄지는 소유'를 상상하기도 한다. 그 존재도 불분명한 4차 산업혁명이 아니라 모든 (사회적)노동은 보이지 않는 사회적 협동과정이다. 땅(지구)또한 사회적 존재다. 이 사회적 관계를 사유화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본질이다. 진정한 대안은 비록 소박한 수준일지라도 사회적 노동의 결실을 사회적으로 향유하는 것(조건 없는 기본소득처럼)이지, 오로지 자기 노동의 결과만 자기 것으로 전유하는 논리에서 나올 것 같진 않다. 물론, 이런 점들은 저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열린 토론을 통해 풀어야 할 공동 과제다. 바겐크네히트와 함께, 그리고 그녀의 한계를 넘어, 자본의 탐욕에서 우리 자신을 구해낼 방법을 찾아보자. 과연 우리는 언제쯤 풍요를 즐길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