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18세기 말, 이벽(세례자 요한, 중국 실학자들의 영향을 받아 스스로 서양의 종교와 과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천주교에 대한 지식을 동료 학자들에게 전하여, 후일 조선에서 자생적으로 천주교 신앙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를 만든 인물)을 중심으로 한 몇몇 실학자들의 학문적 연구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는데, 이들 가운데 이승훈이 1784년 북경에서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신앙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마침내 조선에서 처음으로 천주교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선교사의 선교로 시작된 외국 교회와 비교하면 매우 특이한 일로 당시의 조선 사회는 충효를 중시하던 유교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새롭게 전래된 그리스도교와 크게 충돌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성리학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죽은 이후에 내세와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이 허황된 것이었고, 제사를 금지하는 것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으며, 나아가 인간이 평등하다는 주장은 당시의 신분제도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천주교를 사교로 규정하면서 천주교 박해시대를 맞이하게 되었고 그 결과 신해 박해(1791년)를 시작으로 병인박해(1866년)에 이르기까지 일 만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의 해인 1984년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이 순교자들 가운데 한국인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평신도였던 정하상 바오로를 비롯한 103위를 시성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그동안 9월 26일에 지냈던 ‘한국 순교 복자 대축일’을 9월 20일로 옮겨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로 지내게 되었으며, 이 날은 자랑스러운 신앙 선조들을 기리며, 순교자들의 피로 우리를 복음의 빛 안으로 불러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는 날로 선조들의 순교 신앙을 본받아, 저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기로 다짐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 김대건 안드레아 (https://cafe.daum.net/mcparish/fBYX/174) 신부에 관해서는 7월 5일 별도의 축일이 정해져 있으므로 여기서는 ‘정하상 바오로’ 순교자 성인만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성 정하상 바오로(丁夏祥, 1795년 ~ 1839년 9월 22일)는 조선의 천주교 순교자이며 평신도 신학자이자 교회 지도자로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한 정약종의 아들이자 정약용의 조카입니다. 그는 남인 양반의 후예로 1795년 경기도 양근 지방 마재(현재 경기도 남양주시)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정씨 가문에서 최초로 신앙을 받아들인 복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으로 1801년 신유박해 때 맏아들인 복자 정철상(가롤로)와 함께 순교하였고, 어머니인 성녀 유(체칠리아)는 기해박해의 여파로 1839년 11월 순교하였습니다. 아버지가 순교할 당시 겨우 일곱 살이었던 그와 누이동생 성녀 정정혜(엘리사벳)는 어리다는 이유로 어머니와 함께 풀려나게 됩니다.
그러나 재산을 몰수당해 살길이 막막해진 그와 가족은 양근지방 마재에 있던 그의 숙부 정약용(요한)에게 의지하며 생활하게 되는데 당시 정약용 역시 전라도 강진에서 유배 중이었기에 천주교를 믿지 않던 친척들과 주변 사람들로부터 갖은 천대와 냉대를 받으며 생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친척들은 정하상과 그 집안 식구들이 천주교를 버리게 하려고 통렬한 비난은 물론 협박, 멸시, 조소, 심지어 학대까지 온갖 방법을 동원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어머니는 그와 누이동생에게 기도문과 교리를 가르침으로써 신앙을 버리지 않도록 격려했는데, 하지만 이는 단지 구전으로 전해지는 내용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천주교 탄압으로 천주교 서적이 모두 소각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듯 일반인들 사이에서 천주교인의 본분을 지키기가 어려워지자 20살 때에 한양으로 거처를 옮겨 성녀 조증이(바르바라)의 집에 머물면서 목자 없는 조선 교회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교회 재건을 모색하게 됩니다. 이후, 교리를 배우는데 한계를 느낀 그는 신유박해때 함경도 무산으로 유배를 당해 있던 한학자 조동섬(유스티노)을 찾아가 천주교와 학문을 배우기도 했는데, 그는 신유박해때 중국 천주교 사제인 ‘주문모’ 신부가 순교하여 조선의 천주교회를 지도할 사제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신분을 감춘 채 역관의 집에 하인으로 들어가 중국 북경으로 가 세례와 견진과 성체성사를 받은 후 주교에게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게 됩니다.
그러나 중국에서도 이미 1805년에 교회박해가 있었던 터라 천주교 북경교구에서도 선교사를 보낼 수 없었기에 뜻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실망하지 않고 조숙(베드로), 권영례(데레사) 부부의 도움을 받아 계속해서 북경까지 9회, 변문까지는 11회나 왕래하며 성직자 파견을 위하여 노력하게 됩니다. 1824년에는 교우이자 중국말 역관인 ‘유진길’ 등이 동반하였는데, 학식이 있고 글도 잘 쓰는 유진길의 동행은 그의 뜻을 이루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당시 유진길이 써서 라틴말로 번역한 서신을 본 교황 ‘레오 12세’는 조선을 독립된 전교지로 지정해서 교황청에 직속시키고 파리 외방전교회에게 전교를 맡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후 1831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파리 외방전교회 산하에 천주교 조선교구를 설치하여 브뤼기에르 주교를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하게 되는데,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받은 브뤼기에르 주교는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와 함께 조선으로 입국하려 시도했으나 중국인 사제인 ‘유방제’ 신부가 전교를 독차지하려는 욕심을 부려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835년 만주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듬해인 1836년(헌종 2년) 1월, 모방 신부가 정하상과 조선 천주교인들의 안내를 받아 드디어 조선에 입국을 하게 되는데, 당시 모방 신부는 정하상을 ‘중심이 되는 인도자’로 존중하여 숙소도 그의 집으로 삼았습니다. 아울러 교회에 해를 준 유방제 신부를 조선 천주교회 부주교의 권한으로 중국에 돌려보낸 모방 신부는 앵베르 주교, 샤스탕 신부와 함께 선교사로 활동하게 됩니다.
서기 1838년(헌종 4년), 천주교 신자들의 수가 9천여 명으로 늘어나자 선교사들은 조선인 천주교 신부를 키우기 위하여 후보자를 물색하게 되는데, 모방 신부는 조선 천주교회를 지도해 온 그의 도움을 받아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를 천주교회 신부 후보로 선발하게 됩니다. 한편,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는 학식이 있고 성실히 신앙생활을 해온 정하상이 사제가 되기에 적당하다고 여겨 그에게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치게 되는데, 그러던 와중에 천주교 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먼저 주교를 피신시키고 순교의 때를 기다리게 됩니다. 이때 그는 체포될 경우를 대비하여 “상재상서”(재상에게 올리는 글)를 작성했는데, 이것이 조선 교회 최초의 호교론서(護敎論書)로 글 속에서 그는 박해의 부당성을 뛰어난 문장으로 논박했기 때문에 당시 조정에서까지 이 글에 대하여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기해박해가 한창이던 1839년 7월 11일, 포졸들이 그의 집에 들이닥쳐 노모와 누이동생과 함께 그를 체포하여 포도청으로 압송한 후 4대 조상까지의 이름을 명부에 올린 뒤 옥에 가두게 됩니다. 이튿날 호교론서인 ‘상재상서’를 포장대리에게 전달하자 사흘 뒤 문초가 시작되었는데, 극심한 고통을 강인하게 참아내며 배교하라는 엄명을 단호하게 거절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후로도 계속된 고문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그는 샤스탕 신부와 모방 신부의 은신처를 대라는 심문에 끝내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이후 두 신부가 자수를 한 다음 몇 차례의 심문과 고문을 더 받고나서 서양 신을 나라에 끌어들였다는 모반죄와 부도(不道)의 죄명으로 유진길(아우구스티노)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게 됩니다. 1839년 9월 22일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습니다.
이후 어머니 유소사(체칠리아)와 누이 정정혜(엘리사벳)도 그 해에 순교함으로써 정약종 가족은 모두 그리스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한 순교자 가족이 되었습니다. 그의 시신은 고향인 양근의 분원(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 인근 배알미리(경기도 하남시 배알미동)에 묻혔다가 1981년 10월 파묘되는 과정에서 유해를 수습하여 수원교구 하남 신장성당에 안치했다가 그해 12월 31일 천진암 성지로 옮겨져 안장되었습니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한국 순교성인’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그의 축일은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함께 경축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