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암사-용암사일출-마애불-거북바위-왕관바위(3코스 휴양림)-전망점-(2코스 휴양림)-장령정-
(이원면 장전리/지맥갈림길)-(1코스 휴양림)-장령산(명소코스 휴양림)-휴양림
금천계곡은
장령지맥(방화봉, 대성산, 장령산, 마성산)의 좌측편과
장령지맥에서 뻗어나온 서대산의 우측편으로 흐르는 계곡
금산천이 서화천으로 흡수된다.
서화천은
장령지맥과 식장지맥 사이로 흐르는 계곡이다.
▲정상과 전망대 갈림길이정표(전망대0.7km, 정상0.3km,주차장1.8km) 이정표가 서 있는 주능선에 올랐는데, 여기서 장령산 정상은 우측으로 300m 떨어진 곳에 있다. 장령산은 영동에서 옥천에 걸쳐 있는 천성장마 종주산행 코스에 들어 있는데, '천성장마'는 천태산, 대성산, 장령산, 마성산을 줄인 말로 코스의 길이는 27km 정도가 된다. 이곳 갈림길에서 정상으로 향한다. 그리고 다시 이쪽으로 회귀해서 전망대(장령정)로 가야한다. 정상가는 길은 거의 평지 수준으로 이어지다가 정상 가까이에서 완만한 오르막으로 올라간다.
▲장령산(長靈山.장룡산.655m).정상표석과 장령산 휴양림 안내도. 충남 옥천군 군서면과 이원면, 옥천읍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정상석2개가 있고 구조이정목과 이정표, 장령산 등산안내도, 넓은 공터에 쉼터 시설이 있다. 남서쪽으로 서대산과 이웃하며 사목재를 경계로 북쪽의 마성산과 마주하고, 산 정상에서 북쪽을 향해 능선이 완만하게 마성산과 용봉, 삼성산으로 이어져 동쪽의 옥천분지를 감싸고 있으며 서쪽 금산리 방향은 1991년부터 각종 편의시설과 주차장 등이 개발되어 휴양림으로 조성되었다. 서쪽 기슭에는 일출과 운해로 유명한 용암사가 있는데 CNN이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곳 50에 선정된 곳이기도 하다. 국립지리원에서 발행하는 대한민국 공식 지도에 이 산의 지명이 장용산(場龍山)이라고 표현되어 있었는데 1995년 5울 열렸던 군 지명위원회(당시 위원장 박남규 전 군수)가 장룡산(場龍山)을 장령산으로 고치는 ‘지명개정안’을 심의⦁의결해 국립지리원 중앙지명위원회에 제출했고 이 개정안이 1999년 5월 1일 받아 들여져 중앙지명위원회가‘장령산(長靈山)으로 지명을 개정 고시했다. 장령산은 불가에서는 ’신령스러운 산‘이란 뜻이며 옥천이 소개되고 있는 ’봉국여지승람‘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등 조선시대까지 발간된 각종 지리지 등에 뚜렷이 지명이 나타나고 있지는 않으나 1935년에 발간된 ’조선환려승람‘ 옥천의 산천편에는 장령산(군의 서남쪽 15리, 삼청리 뒤)이라고 표기하고 있어 장령산이 본래의 명칭임을 밝히고 있어 이 산은 장용산이 아닌 장령산이 확실한 듯하다.
장령산과 마주한 동쪽의 월이산(伊院里)이 우암의 태몽꿈을 꾸었다는 곳이기에 눈이 간다. 이원면에서 가장 가까운 산이다. StartFragment 우암 송시열선생의 일화: 우암선생은 서기 1607년 이원면 구룡촌(구룡촌 ; 현 龍坊里) 그의 외가에서 태어나 자랐으므로, 이 고장에는 여러 가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가 태어난 곳에는 유허비가 있고, 그가 공부하던 곳에는 용문서당(龍門書堂 ; 현 龍門影堂)이 있으며, 이지당(二止堂 ; 일명 覺新書院)도 현재 남아 있다. 우암의 어머니 곽씨(郭氏)께서 우암을 잉태할 때 태몽을 꾸었는데, 월이산(伊院里)을 몽땅 꿀꺽 삼켜버리는 것이었다. 이처럼 우암선생은 처음 잉태될 태부터 비범한 인물이었음을 예측케 하였다. 또 선생이 탄생하던 바로 그 시각에는 월이산이 웅장한 소리를 내고, 금강물의 색깔이 잠시 변했다고도 전한다. 일설에는 월이산 초목의 잎이 마르고 금강 물이 홍색으로 변했었다고도 전한다. 우암선생은 그의 탄생지요 외가가 있는 옥천군 이원면에서 본가인 회덕(懷德) 송촌(松村 ; 현 대전시 동구)으로 가서 자라면서 글공부를 하였다. 그런데 그는 그의 스승 김장생(金長生)이 죽자, 그의 아들 김집(金集)이 연산(連山 ; 현 충남 연산면)에 있었으므로, 회덕과 연산을 왕래하면서 면학에 힘썼다고 한다. 책과 점심 도시락을 싸들고 먼거리를 다니면서 공부를 하던 그는 매우, 근면히 그리고 누구보다도 성실히 공부에 열중하였다. 그는 점심밥은 연산가는 길, 십리못미처에서 반만 먹고, 나머지 반은 다시 싸서 나뭇가지에 걸어 두었다가 돌아오는 길에 먹곤 하였다 한다. 우암선생이 용문서당에서 공부할 때의 이야기다. 어느 늦은 봄, 그는 독서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근처 연못에서 개구리와 맹꽁이가 개골개골, 맹꽁하며 어찌나 시끄럽게 울어대는지 정신을 집중하여 독서하기가 곤란한 상태였다. 그리하여 그는 연못에서 울어대는 개구리 무리에게 "이놈들 너희들 소란에 공부를 할 수가 없구나, 썩 그치지 못하겠느냐?" 하고 외치니 그 시끄럽던 개구리, 맹꽁이 울음소리가 뚝 그쳐서 조용해지더라고 한다. 그래서 조용한 속에서 열심히 공부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회덕에서 연산으로 다니면서 공부하던 시절 어느 해 동짓날에 집에서 팥죽을 쑤었는데, 그는 그의 스승에게 가져다가 대접하기 위하여 그 팥죽을 회덕에서 싸들고서 연산까지 추운 겨울에 달려갔다. 그가 가지고 간 팥죽이 아직 식지 않고 따뜻하여 스승이 "네가 스승 존경하는 태도가 남다르니 어찌 팥죽이 식겠느냐? 사제지간의 정이 이리 따뜻하니 너는 장차 크게 될 인물인가 보다" 고 칭찬을 했다 한다. 우암선생은 그후 장원급제하여 조선중기의 대유학자로 사조(四朝 ; 네 임금)에 걸쳐서 벼슬하였고, 북벌계획을 세운 인물이며, 노론의 영수로 그 역사적 위치가 대단한 분이다.
▲ 장령지맥 633.7m봉: 좌측 넓은길은 용암사로 가는 길이고 맥길은 우측으로 꺾어간다. 용암사(龍巖寺)는 552년(신라 진흥왕 13) 의신(義信)조사가 세운 사찰이다. 용암사라는 절 이름은 경내의 용(龍)처럼 생긴바위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지는데, 일제 강점기때 일본인의 만행에 바위가 파괴되었다 한다. 절집은 최근에 지은 것들이지 보물 1388호인 쌍삼층석탑과 마애불은 천년이 넘는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또한 이곳은 U.N이 선정한 "한국에서 가봐야 할 아름다운 곳 50선" 중 38번째에 오른 곳이다. 이는 용암사에서 바라본 운해(雲海)가 절경이기 때문이다. 금강에서 발원한 운해가 옥천 평야를 뒤덮는데 그 모습을 용암사에서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특히 일교차가 심한 요즘에는 더욱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데, 운해가 깔린 옥천 산야에 극적인 일출 장면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신의 작품을 바라보는 절경이다. 대웅전 위에 절벽에는 "여래입상마애불(유형문화재17호)" 이 있다. 마애불은 고려 중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마의태자가 신라 멸망을 통탄하며 유랑하던 중에 이곳에 머물다가 떠나자 그를 추모하는 사람들이 그를 기리며 조성하였다고 하여 "마의태자상"이라고도 한다.
등산코스와 전혀 다름
(장령지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