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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말씀 / 누가복음 3:1-38
요절 / 누가복음 3:21 찬송가/내 영혼이 은총입어
눅1장은 찬양으로 시작해서 찬양으로 끝났습니다. 그 찬양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돌아보셨다는 것입니다. 돌아보심으로 하나님께서 구원자를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찬양의 근거가 되었던 세례요한, 예수님이 역사의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이들이 무엇을 하기에 이들의 등장이 하나님의 돌아보심의 증거가 되고 찬양이 되었을까요?
1장.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1-20)
1장은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으니라.”(80)로 끝났습니다. 그리고 3장에서 그 아이가 자라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합니다. 먼저 당시의 시대상황을 말합니다. 당시는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지 열 다섯 해라고 했습니다. 디베료는 가이사 아구스도를 이어 AD14년에 황제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15년이 지났으니 지금은 AD28년입니다. 굳이 이를 기록한 것은 예수님의 사역이 역사의 무대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밝히는 것입니다. 헤롯대왕 이후에 유대는 헤롯의 첫째인 헤롯 아켈라오가 상속 받았습니다. 그런데 못되고 악하게 굴다 일 년 만에 추방되고 빌라도 총독이 왔습니다. 또 갈릴리 분봉왕인 헤롯은 헤롯 안티파스로 사복음서에 주로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빌립은 갈릴리 위에 동북쪽을 다스렸고, 가이사 빌립보를 세운 인물입니다. 루사니아가 갈릴리 서북쪽을 다스리는 아빌레네의 분봉왕이었습니다. 분봉왕이라는 말은 1/4을 다스리는 왕이라는 뜻입니다. 헤롯이 다스렸던 나라를 반쪽도 아니고 반의 반쪽입니다. 우리로 하면 충청도 왕, 전라도 왕, 경상도 왕이 있는 꼴입니다. 로마가 이렇게 한 이유는 나라를 쪼개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해, 로마에 반역하지 못하게 함이었습니다. 정책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 밑에 사는 백성들은 얼마나 정신없고 힘들고 답답하겠습니까?
종교적인 상황은 더 심란했습니다. 당시 제사장도 로마황제의 인준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인준을 받은 안나스를 황제가 취소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입맛에 맞는 가야바를 세웠습니다. 그래도 산헤드린 공회는 안나스를 여전히 대제사장으로 인정하므로 대제사장이 둘이 되었습니다. 로마라는 정치권력이 성전을 뒤흔들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 교회들이 정치권력에 의해서 교회가 분열되고 교회 안에 성도들이 누구 파 누구파로 나뉘는 모습이 너무나 비슷합니다. 흔들리는 세상에서 올바른 방향을 잡아 주어야 할 곳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세상 권력이 교회를 흔들면 힘듭니다. 지금 유대는 나라도 빼앗기고 힘든데, 성전도 흔들리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직을 주었다가 다시 뺐고, 나라도 네 쪽으로 쪼개고, 여러 가지로 복잡하고 답답한 상황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런 심란한 가운데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고 했습니다. 사가랴의 아들 요한은 제사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금수저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흙수저 보다 못한 빈수저로 빈들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에게 말씀이 임하였습니다. 말씀이 임한다는 것은 말씀을 아는 것이나 말씀을 깨닫는 것과는 다릅니다. 읽고 지나가던 말씀, 알고 있던 말씀이 어느 순간에 그 전과 달리 어떤 메시지를 담아서 내게 확 박혀 버리는 것입니다. 내 감성을 자극하고 삶을 자극하고, 그래서 나를 뒤집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말씀이 임해야 뭔가 변화가 일어납니다. 마음이 달라지고 눈빛도 달라지고 삶이 달라집니다. 그럼 어떤 사람에게 말씀이 임할까요? 말씀은 아무리 시대가 어수선할 지라도 말씀을 듣고자 하는 사람에게 임합니다. 나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데, 말씀이 갑자기 나에게 뚝 떨어져서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자 사모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말씀이 임하는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 좀 많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런 말씀이 성전의 대제사장이나 제사장이 아니라 빈들에 있는 요한에게 임하였습니다.
그때 그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3절을 읽겠습니다.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그 시대는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혼돈과 절망의 시대였습니다. 많은 청년들이 열심당원에 들어가 나라를 되찾고자 로마와 싸웠습니다. 또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의 자존심을 되찾고자 하는 바리새인들이 있었습니다. 세상을 등지고 경건만을 주장하는 에세네파도 있었습니다. 요한도 이런 것에 합류해서 뭔가 새바람을 일으키고자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요단강 근처에 와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습니다. 이미 유대에는 성전이 있었습니다. 성전을 통해 죄문제를 해결하는 제사제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유대교의 시스템이 아닌 전혀 새로운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한데는 이사야서의 말씀이 임하였기 때문입니다. 4-5절을 읽겠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그는 이 말씀대로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습니다. 그가 이런 회개의 세례를 전파한 것은 주의 길을 준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내 마음에 메시야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회개’란 본래 ‘마음을 바꾼다’는 뜻입니다. 이사야서 말씀을 보면, 왜 주님이 오시기 위해서 회개를 해야 하는가를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산과 같이 높고, 골짜기와 같이 깊게 패어 있습니다. 그럼 주님이 드론이라도 타고 싹 넘어오시면 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겸손하게 우리가 준비한 마음의 길을 따라 오십니다. 이 때문에 높은 마음을 낮추고, 낮아진 마음은 높여서 주님이 오실 수 있도록 길을 평탄하게 해야 합니다. 산과 같이 높은 마음은 교만과 자기 신뢰, 자기 과시, 자기 자랑, 자기 만족입니다. 골짜기와 같이 패인 마음은 자기 절망과 자학과 낮은 자존감입니다.
저는 대학 1-2학년 때 운동권 학생이었습니다. 운동권 학생들의 특징은 교만하다는 것입니다. 사회적 약자, 노동자, 농민들을 위해 싸우는 우리는 우등한 사람이고, 그렇지 못한 일반 학생들은 열등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강합니다. 그러다보니 모태 신앙이었던 저는 자연히 교회와도 멀어졌습니다. 내가 제일 나고 똑똑하다고 생각하는데, 왜 굳이 신을 믿고 의지해야 하는가? 라는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에게 회개하라고 하면, “흥 당신이나 회개하세요.”라고 대꾸 할 것입니다. 회개가 이렇게 힘듭니다. 젊은 사람은 젊어서 힘들고, 늙은 사람은 늙어서 힘듭니다. 뭐가 있는 사람은 뭐가 있어서 힘들고, 뭐가 없는 사람은 뭐가 없어서 힘듭니다. 그래도 교만과 같은 높은 마음은 삶을 통해 깨지면 받아들입니다. 저도 군병장시절, 사귀던 여친이 고무신을 꺾어신고, 또 복학하면 4학년인데 아무런 준비도 없이 졸업을 하면 취직이라도 할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마음이 빡 깨졌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 복음을 영접하고 받아들였습니다. 반면 골짜기와 같이 패인 마음은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잘 받아 들리지 않습니다. “지금 내가 이렇게 힘든데, 내가 이렇게 좌절 가운데 있는데 뭘 회개하라고 하는가?” 라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교만이나 절망이나 원뿌리는 자기를 중심한 마음으로 같습니다. 주님이 내게 오시려면 높은 마음만이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 너무 자학하고 절망하는 마음이나 낮은 자존감도 회개해야 합니다. 그때 그 곧아지고 평탄해진 마음으로 비로소 주님이 오십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게 됩니다.
사람들이 교회가기 싫은 이유를 조사한 것을 보면, 교회가면 회개하라고 하기 때문이라는 통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들만이 아니라 목자인 저도 회개하라는 말이 싫고 부담됩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내 마음을 준비해야 주님이 오시고,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봅니다. 그러니 듣기 싫어도 회개해야 합니다. 기분 나빠도 회개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만이 아니라, 오랜 시간 신앙생활 한 목자라도 해야 하고, 선교사라도 회개해야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회개함으로 이 약속된 은혜를 누리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회개해야 할까요? 7절. 요한이 세례를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를 보고 말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이들은 겉으로 볼 때,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귀합니까? 그런데 요한은 이들에게 따뜻한 커피라도 주면서 환영하는 것이 아니라,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합니다. 이것은 그냥 욕이 아니라 일종의 자극요법입니다. 요한은 이들에게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라고 했습니다. 이들이 세례를 받고자 하는 것은 정말 마음으로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일단 장차 올 진노를 일단 피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일단 소나기는 피하고 보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죽은 뒤에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하는데, 지옥에 가면 큰 일 나니 일단 천국행 티켓은 얻어놓고 보자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일단 이렇게 시작할 수 있는데, 계속 이렇게 하면 오래 못갑니다. 신앙생활은 은혜의 감동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으니 너무 힘듭니다. 즉 신앙생활을 은혜와 감동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계산으로 하는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진짜 회개를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천국도 못갑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무엇을 말합니까? 8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회개는 마음을 돌이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말합니다. 소위 ‘회개합니다. 회개하겠습니다. 회개하기를 기도합니다.’라는 식으로 끝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돌이켰으면 그 돌이킨 마음을 갖고 계속 그 문제와 씨름해서 마침내 삶의 열매를 맺기까지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방해하는 것이 나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헛된 자부심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도 않으면서도,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기에 당연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혈통에 의해 상속된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상속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상속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돌로도 얼마든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으십니다. 한편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된 자녀가 된 것이니 정말 좋은 것입니다. 모태신앙, 선교사 자녀, 2세, 정말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헛된 자부심이 되어가지고 나는 적당히 회개의 장단만 맞춰도 천국 간다고 여기는 것이 문제입니다. 대단한 착각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해도 회개하지 않으면 길가의 돌만도 못하게 됩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모태신앙, 선교사 자녀, 2세도 제대로 빛을 발합니다. 이렇게 살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9절을 보십시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좋은 열매’는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말합니다. ‘이미 도끼가 놓였다’는 것은 ‘이미 심판이 임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무늬만 신자인 사람, 즉 회개의 합당한 열매가 없는 사람은 찍혀 넘어질 나무와 같습니다.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미룰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요한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이 질문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라는 물음입니다. 요한이 이들에게 대답합니다. 옷 두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들에게 주라고 합니다.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세리들에게는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고 합니다. 군인들에게는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고 합니다. 요한의 이들에게 주는 방향을 볼 때에, 회개하고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흔히 회개하고 하면 우리는 먼저 어떤 죄를 생각합니다. 죄를 회개하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데 지금 요한이 주는 방향을 보면 회개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만 해결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부딪치는 삶의 문제도 내가 회개해야 할 문제라는 것입니다. 즉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문제뿐만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문제도 제대로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올바른 삶으로의 전환입니다. 너무나 영적이고 늘 회개하는데 늘 사람과는 싸웁니다. 절대로 양보하지 않습니다. 늘 자기 것만 챙깁니다. 이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요즘 세상이 교회를 걱정한다는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교회가 세상을 걱정해야 하는데 거꾸로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신자인 우리가 삶의 문제에서 제대로 변화된 모습을 보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만 교회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인 내가 봐도 내 자신이 걱정이 된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가 신자인데 정말 천국은 갈 수 있나? 걱정하고 의심합니다. 이것은 건강한 영적 긴장과는 다른 것입니다. 정말 의심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회개를 안 하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열심히 자기 죄를 찾아내서 회개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의심이 되는 것은 그만큼 내 삶의 관계의 문제에서 뭔가 자꾸 엉키고 꼬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신을 보면서 자신감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죄는 회개하는데,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문제를 발견하고 회개하고 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삶이 없는 회개만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이 힘들고 피곤합니다. 그러니 스스로 힘듭니다. 우리가 맺어야 할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아주 영적이고 신앙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회개하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사랑과 배려, 나눔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더 욕심을 안 부리고, 내 것만 주장하지 않고, 나만을 생각하지 않고, 배려하고 나누고 있는 것으로 감사하고, 이런 실제적인 삶의 문제를 하나 하나 해결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회개를 하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구원의 은혜를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혼자는 굉장히 신령합니다. 기도도 많이 하고, 말씀도 사랑합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 사람과 놀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 심각한 것입니다. 생각해 봐야 합니다. 혼자는 잘 믿습니다. 이러면 안 됩니다. 같이 잘 믿어야 합니다. 더불어 함께 하는 삶의 기쁨과 행복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회개의 합당한 삶의 열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메시지는 백성들에게 충격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요한이 혹 그리스도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요한이 이들에게 대답합니다.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요한의 세례는 죄사함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죄사함을 받을 준비를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십니다. 세례는 본래 침례입니다. 물속에 완전히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죄악 된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과거의 우리의 죄를 태우시고 새롭게 해주십니다. ‘성령’은 ‘사람의 마음과 생각에 빛을 비추어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도록 돕는 일’을 하시고 ‘불’은 ‘심판’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성령님을 통해서 사람을 변화시키기도 하시고 불로 심판하기도 하십니다. 그분은 마치 추수하는 농부와도 같습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웁니다(17).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알곡이 되어 곡간에 저장됩니다. 반면 좋은 열매 맺지 않는 사람들은 쭉정이가 되어 땔감이 되고 맙니다. 주님은 이런 자들을 다 모아두가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주시는 세례요, 심판입니다. 우리에게는 구원과 심판이라는 두 갈래 길이 놓여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에 대한 나의 욕심을 회개하는 것이요, 하나는 그냥 내 욕심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는 나만을 생각하는 것이요, 하나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며 돌아보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는 알곡의 인생이요, 하나는 쭉정이의 인생입니다. 우리가 어떤 길을 가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회개함으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 맺는 자들이 되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고 알곡의 인생이요, 구원을 얻는 자들이 되길 기도합니다.
이를 아는 요한은 자신은 예수님의 신발 끈도 풀 수 없는 수준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 볼 때, 오히려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그밖에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이후에 요한은 분봉 왕 헤롯인 헤롯 안티파스가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빼앗은 것을 책망했습니다. 그러자 헤롯은 이런 요한의 말에 회개하기보다 오히려 그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누가는 그가 악한 일에 한 가지 악을 더하였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 할 수 있고 악을 행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악에 대한 책망을 들을 때,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하면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봅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으면 악에 악을 더하게 됩니다. 우리가 회개의 때에 회개하므로,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기를 기도합니다.
2장.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21-22)
21절을 읽겠습니다.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요한의 세례는 죄사함을 받게 하는 세례였습니다. 한마디로 죄사함 받을 준비를 시키는 세례였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준비를 시작하는 세례였습니다. 구원을 위해서는 이런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백성이 다 나와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온 유대를 뒤흔드는 변화의 새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런데 이 바람을 타고 역사의 무대에 예수님이 등장하셨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기록은 출생이후에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12살 때의 기록이 잠깐 등장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철저히 역사의 커튼 뒤에 있던 예수님이 이제 마침내 등장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무대가 요한이 세례를 베푸는 현장이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어 마리아의 몸을 빌려 오신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머리를 숙이시고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을까요? 그동안 혹시 조금이라도 잘못한 일이 있으신 것일까요?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자 하실 때에 요한이 적극적으로 만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함으로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고 하십니다. 그제야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모든 의는 바로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존심을 내려놓고 자기 권리를 포기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머리를 숙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특권과 권세, 모든 신분과 정체성, 모든 권리를 내려놓으셨습니다. 죄인이 아니시지만 죄인과 같이 되셨습니다. 머리를 숙이실 필요가 없지만 머리를 숙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예수님을 향해 ‘겸손의 왕’이라고 찬양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는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낮추신 이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렸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22절.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테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하늘이 열리며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는 예수님께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 위에 강림하셨습니다. 노아의 홍수 때에 등장하는 비둘기는 심판이 끝나고 마른 땅에 닿았다는 희망과 구원의 메신저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앞으로 예수님의 사역은 사람들에게 심판이 끝나고 이제 희망과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이 예수님을 향해 선포하셨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마리아의 몸을 빌려 오신예수님께서 이제 세례까지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시작할 준비를 마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일을 시작하십니다. 그것은 불과 성령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심판을 받아 마땅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하시며 기뻐하셨습니다.
3장. 하나님의 아들의 족보(23-38)
30절.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할 때에 나이가 30세라고 했습니다. 30세는 제사장이 임무를 공식적으로 시작하는 나이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의 틀을 존중하며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후에 긴 족보가 나옵니다. 이 족보는 마태가 기록한 족보와 차이가 있습니다. 마태는 요셉의 아버지가 야곱이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헬리로 나옵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났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들이 있습니다. 또 마태의 족보는 아브라함과 다윗을 중심으로 예수님이 여기에 연결된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여기의 족보에는 주인공이 따로 없고 그냥 예수님부터 죽 위로 올라갑니다. 마태가 하향식이라면 누가는 상향식입니다. 그런데 이 족보에는 그 끝이 아브라함을 지나 아담에 이르고 결국에는 하나님에게 이릅니다. 이는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먼저 예수님이 두 번째 아담이심을 보여줍니다. 또한 이 족보는 예수님을 하나님까지 연결함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머리를 숙이고 세례까지 받으셨습니다. 두 번째 아담으로 오셔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속이 텅 빈 쭉정이 같아서 불로 태워질 수밖에 없는 우리를 회개하게 하시고 성령과 불로 새롭게 하셔서 속이 꽉 찬 알곡으로 바꾸셔서 구원을 얻게 하십니다. 우리가 회개할 뿐만 아니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음으로 이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을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