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7일의 제107회 세미나는 100년을 맞는 한국영화의 기점인 <의리적 구토> 발제부터 시작했다. 왜 한국영화 100년인지 자세히 아는 분들은 적다. 일제강점기인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에서 공연된 이 영화는 연극 도중에 실사장면으로 한강철교, 청량리 등이 소개되며 한국 최초의 영화가 되었다. 1960년대 문공부의 질의에 영화인협회가 이 영화를 한국영화의 기점으로 결정하여 매년 10월 27일을 영화의 날로 정하였고 올해 100년을 맞게 된 것이다.
3부의 주인공은 문종금 배우 겸 감독, 제작자이다. 그는 경북 울진 생으로 울진의 죽변초등학교 때부터 태권도를 연마하였고 울진의 죽포중학, 죽변상고를 졸업하였다. 1975년부터 대구의 최용술 합기도 도주를 찾아가 사사받았다. 당시 지한재나 김무웅, 홍성길은 각기자신들의 도장을 운영 중일 때이다.
그는 영화계에 데뷔할 때까지 최용술 합기도 도주에게 4년간 지도를 받았다.
그는 대구의 흥행업자이며 배급사를 운영하던 구동수 회장의 추천으로 유병완 배우와 함께 귀경하여 1977년 김선경 감독의 합작영화 <무협문>으로 데뷔한다. 그리고 김선경 감독이 동시기에 촬영한 동아수출공사의 <비룡문>에 출연하는데 이소룡이 롤모델이었지만 흉내는 꿈도 못꿨다는 그이다. 그만큼 이소룡은 우상이며 접근하기 어려운 경지에 있는 분이라는 뜻이다. 그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것을 보여주고자 했지만 현실은 녹녹하지 않았다.
그는 YMCA에서 액션배우로서의 훈련을 하였고 배우 데뷔 후에 영동백화점 옆에서 합기도장을 운영했다. 영화 출연만으로는 생계 유지가 안되었기 때문인데 이때 김동건이 진행하던 <비밀의 커튼>에 최용술 도주를 출연시켰다.
그리고 김정용 감독의 <무림18여걸>, 그리고 <정무신권>, <무림악인전>, <복권> 등에 출연한다. 1년에 평균 2~3편 정도 출연했다. 그후 왕사상, 장보영 통역의 주선으로 1978년 해외개발공사에서 교육을 받고 곽무성, 김동호와 함께 대만으로 갔다. 그는 홍콩과 대만에 진출해 <손오공홍해야대전>, <월야성야>, <인터폴>에 출연했다.
2년여 한국을 오가며 활동했는데 성공해 귀국하겠다고 다짐을 했지만 만만디 촬영에 출연작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출연료 마저도 소개업자에게 떼이는 일도 있었다. 이렇게 제작된 합작영화들은 한국에서 지원금을 받기 위해 편법으로 제작된 영화들인데 현지에서는 개봉도 안되고 창고로 들어가는 일도 있었다고 회고한다.
이때 많은 홍콩배우들과 교류하였는데 호혜중, 황가달과는 함께 출연했다. <외팔이 >시리즈의 왕우와는 대영영화사에서 제작한 이정호 감독의 합작영화 <외팔이 권왕>에서 공연했다. 특히 무명시절때 한국에서 활동하던 성룡과는 라이온스호텔에서 한달 간 함께 생활하기도 하여 절친한 사이이다.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이 한국합기도협회 회장을 맡고 있을 즈음엔 대우빌딩 27층에서 함께 운동하기도 했다.
타국에서의 고생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는데 당시 활동하던 한국배우들로는 모사성, 김사옥, 황인식, 황정리, 권영문, 왕호 등이다. 신상옥 감독이 납북되던 시기이다.
귀국 후 1980년 초 통일교의 문선명 총재는 한국전쟁 소재의 <오! 인천>을 제작한다. 그는 이 영화의 스턴트를 맡았는데 김유행, 백황기, 곽정섭 등이 참여한다. 그는 월급으로 300만 원을 받았고 스턴트 건당 30만 원 씩을 별도로 받았다. 이 영화는 테렌스 영 감독이 초빙되고 로렌스 올리비에 등이 출연하는 초호화 대작이었지만 칸영화제에서의 혹평으로 국내에서는 개봉조차도 하지 못했다.
그는 1990년에 임정수 감독의 <어린이 무술왕>을 기획했고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리고 나한일, 유혜영 주연의 필리핀, 일본 로케이션 영화 <무>로 감독 데뷔를 한다. "아무 것도 없다"라는 자신의 소신과 철학을 담아낸 제목으로 오로지 의욕 하나로 제작한 영화였다.
그는 배우활동을 하면서도 감독 수업을 병행한 준비된 감독이었다. 많은 감독들의 촬영 현장을 도우며 장단점을 눈여겨보고 하나씩 배워나갔다. 편집실에도 가서 편집을 익혔는데 이런 일들은 일반 배우들이 하는 일들은 아니었다. 그가 꼽는 명감독은 조명화 감독이다.
이후 그는 선프로덕션(후에 동해영화제작소와 모닝캄 필름으로 바뀜) 창립 후 권일수 감독의 <전국구> 및 <신혼여행 특공대>, <무인도의 남과 여>를 제작했고 <싸울아비>를 감독했다.
이우석 동아수출공사 사장은 자신이 운영하던 영성비디오 프로덕션을 통해 이들 영화를 배급해주어 도움을 주었다. 그 고마움에 "이우석 회장이 없으면 문종금도 없다"라고까지 표현한다.
2001년작인 <싸울아비>는 <야인시대>의 이환경 작가에게 7천만 원의 고료를 지급한 대작이다. 당시 사극드라마 붐으로 백제 무사의 이야기를 7억 원을 들여 제작에 착수했다.
처음에는 김두호 평론가의 추천으로 임권택 감독에게 의뢰하였으나 다른 영화를 준비 중이라 직접 메가폰을 잡게 되었다. 그리고 권일수 감독에게 메가폰이 돌아갔으나 중도 하차했다.
그리고 그가 직접 메가폰을 잡아 55억 원의 초대작으로 완성했다. 그가 하고자 하는 일에는 꼭 투자자가 나서기에 가능한 일이다. 지인들과 일본의 투자자들이 마련해준 55억 원이 있었기에 이 영화는 완성될 수 있었다, 이 영화에는 최재성, 남궁원, 이상훈, 양택조, 이해룡, 장정국, 박동룡 등 한국배우와 일본의 톱스타인 에노키 다카아키와 우메미야 마사코, 카츠노 히로시
일본에서 합작 허가를 받고 완성보증을 하여 크랭크인하였고 80% 이상을 일본에서 현지 로케이션하여 제작했다. 국내 촬영을 포함하여 약 80회차를 촬영한 영화로 당시로는 초유의 일이었다. 일본의 비자 기간도 20일이라 국내외를 오가며 힘들게 촬영하였다.
이 영화는 6세기 전사들의 이야기로 사실감을 높이기 위해 국내 촬영 후 일본 큐우슈우에서 올로케 제작하였다. 1300여 년 전의 시대적 상황이라 고증 및 액션 연출, 의상, 분장, 말 동원 등에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인 현지 스태프들까지 대거 동원된 엄청난 작품이었다. 당시 일본 언론에서도 소개되었고 칸국제영화제에서도 소개되며 북한에 수출되기도 했다. 이런 화제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흥행에서는 실패했다. 흥행은 알 수 없다지만 그는 흥행안되는 영화는 만들 필요없다며 재기를 꿈꾸었다. <싸울아비>는 지금도 여러모로 회자되는 명편이다. 이런 대작을 기획할 수 있는 것은 그를 신뢰하는 투자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가 11월 8일에 청주에서 개최한 삼보대회도 30억 원의 예산이 들어갔지만 이러한 투자자들이 있기에 가능했다.
그의 출연작으로는 <사약>, <돌아이2>, <은하에서 온 별똥동자>, <안개속의 여자>, <전국구>, <충무로 돈키호테>, <비천권>, <괴적귀무>, <사대통의문>, <맹룡아호> 가 있다. 제작한 영화는 흥행작 <전국구> 외에 최용호, 김정용 감독의 임화수 일대기인 <충무로 동키호테>, 권일수 감독의 <암흑가의 무소속>, <무인도의 남과 여>, 조명화 감독의 <소림사의 왕서방>을 제작 및 공동주연하였다. 그리고 <아이 엠 샘>을 수입해 동아수출공사의 이우석 회장으로부터 "하늘 보고 별을 땄다."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렇게 성공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지론은 상업적인 감독이 되겠다는 것이다. 관객들이 외면하는 영화는 만들지 않겠다는 각오이다. 결국 제작자나 수입업자로서 성공한 그이다.
그는 영화배우로 출발해 감독, 제작자, 수입사 사장을 거쳐 현재 감독협회 이사 및 대한삼보연맹 회장을 맡아 동분서주하고 있다. 삼보는 러시아의 국기로 합기도와 유도의 기술이 들어간 남자다운 스포츠이다. 효도르 때문에 국내에서도 많이 알려져 있는데 그는 삼보에 관심을 갖고 오늘날 한국 삼보연맹의 회장을 맡아 각종 대회를 유치하고 주최하고 있다.
그가 강조하는 말은 "누구와 아느냐?"와 "내가 하고싶은 일을 하겠다"는 것이다. 남들이 하지못한 불가능한 일을 만들어낸 그의 성공비결이다.
그의 세미나를 맞아 임정수, 우태영, 박동열 등 영화인 및 충북삼보연맹의 강종한 회장 등 삼보협회원들이 참석해 자리를 빛내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