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따뜻해야 / 최종호
작은아들 책상 위에는 대한적십자사에서 보내 준 은장(銀裝)이 있다. 자그마한 액자 속에 들어있는 은빛의 메달이다. 붉은색으로 되어 있는 원 안에는 형상화된 흰색의 혈액 방울이, 그 가운데는 적십자 마크가 있다. 원 바깥쪽은 별빛 모양이다. 컴퓨터가 있는 방이라 자주 들어가는데 눈길을 끈다. 작은녀석의 것이지만 내가 받은 것처럼 뿌듯하다. 헌혈을 30번 했다는 증표로 보내 준 것이다. 금장이 목표라고 하면서 50번을 채우겠단다.
고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 헌혈을 시작했다. 네 시간 봉사 활동으로 인정해 주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영화표를 받는 것도 재미가 있었단다. 조금 핼쑥하고 피곤한 기색이 엿보이면 헌혈한 날이다. 그럴 때마다 안쓰럽다고 그만하라는 아내와 달리 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가능할 때까지 해도 좋지 않겠어?”라고 지지해 주는 편이다. 학생들에게 도덕적인 생활을 강조하면서 한 번도 용기를 내지 못한 아쉬움이 있어서다.
이 녀석은 나를 많이 닮았다. 내향적이고 계획적이다. 긍정적인 데다 체계적이다. 방 정리도 깔끔하게 잘한다. 친구를 사귀는 폭은 좁지만 깊게 사귀는 면에서도 비슷하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처지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면에서는 탁월한 것 같다. 신체적으로 장애가 있거나, 불우한 가정환경으로 성격이 비뚤어졌거나, 우울증으로 학교생활에 적응이 어려운 친구와 가깝게 지낸다. 중학교 이후에 더 도드라진다.
고등학교 때 사귄 친구는 한쪽 어깨를 쓰지 못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 어렸을 적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치료하는 중에 또 사고가 났다. 그 바람에 한쪽 어깨 치료는 포기했다고 한다. 양쪽 다 신경 치료를 하면 뇌에 부하가 커져 위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수도권 대학에서 심리학을 공부했으나 전공을 살릴 수 있는 길이 막막하자 몇 차례 공무원 시험에 응시했다. 다행히 서울시교육청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발령을 앞두고 있다.
최근에 근황을 물어보니 건강에 적신호가 켜져 열심히 다이어트하는 중이라고 한다. 웬만한 일은 한 손으로도 가능해서 생활에 큰 불편을 느끼지 못하나 할 수 있는 운동이 제한적이어서 등한시했던가 보다. 그 친구와 가깝게 지내는 이유를 물으니 “배울 점이 많고 마음이 잘 통해요.”라며 밝고 긍정적이란다. 외모나 행동거지를 보고 호감이 가지 않으면 마음이 가지 않았던 나와는 다른 점이다.
작은녀석은 몸무게가 기준에 미치지 못해 상근예비역으로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현역으로 자원했다. 전방에서 경계 근무 경험이 있던 친구의 무용담을 듣고서다. 군 생활을 하면서 체력 단련실에서 근육을 키우려고 노력했다. 체중을 늘리는 목적이 있어서다. 어느 날, 후임병과 탄약고 경계 근무 중에 꿈을 물었더니, ‘디스크자키’라면서 몸매도 가꾸어 보고 싶다고 하더란다. 살이 많이 쪘던 그에게 헬스 운동을 권유한 뒤로 함께 열심히 했다. 몸이 좋아지면서 자신감도 생겼으며 표정도 밝아졌다고 한다.
처음에 그는 동료나 상급병에게 미움을 받았다. 청소 시간에는 사라지고, 작업 시간에는 뒤로 빠지기 일쑤였다니 짐작이 간다. 부대 안에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경계 근무 중에 그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준 뒤로 작은녀석을 많이 따랐단다. 운동도 열심히 했지만, 책도 즐겨 읽게 되었다. 처음에는 헬스 관련 책을 빌려주었고 점차 좋아할 만한 책을 읽어보라고 했다. 나중에는 당직 사관에게 허락을 받아 부대 안에 있는 작은 도서관에서 같이 열두 시까지 읽고 이야기를 자주 나누었다고 한다.
그의 집은 부산이다. 어렸을 적에 부모가 이혼하고 할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사랑을 많이 받지 못해서인지 따뜻하게 대했던 작은녀석을 믿고 의지했다. 제대하고 집에 있을 때였다. 그 후임병이 휴가를 나와 할머니보다 아들을 먼저 찾았다. 담양에 있는 주말 주택에서 하루 묵고 나서 집으로 갔다. 그는 제대 후에도 운동을 계속해서 ‘부산 헬스 선수권 대회“에서 수상을 두 번(2등과 4등)이나 했다. 피트니스 모델이 꿈이다. 곧 있을 대회에도 준비 중이란다. 그는 이제 미래를 꿈꾸는 어엿한 청년이 되었다.
아들은 대학에 다니면서 군 복무를 마친 친구들과 가깝게 지냈다. 방사선사 시험을 앞두고 정보를 공유하느라 연락이 잦더니 지금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뜸하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관심을 쏟는 선배가 있다. 나이가 우리 아이보다 더 많아 형이라고 부른다.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특별한 이유는 학교 다니면서 우울증이 심했다. 부정적이고 자존감이 낮다. 목표 의식이 뚜렷하지 않고 성취 의욕도 낮다. 부모님한테 인정도 받지 못한다. 걱정되는지 자주 연락하고 가끔 그의 집에 가서 자기도 한다.
겨우 졸업은 했지만, 자격증은 취득하지 못했다. 무기력하게 있던 그에게 바리스타 자격증에 도전해 보라고 권해서 활기를 찾았다는 소식을 듣고 좋아했다. 얼마 뒤에는 커피숍에 취직했다고 해서 우리 가족은 내일처럼 기뻐했다. 그런데 못 미더웠던지 지점장이 날마다 허드렛일만 시킨단다. 조만간 그만두고 방사선사 자격증에 도전할 것이라며 작은녀석에게 도움을 청했다. 듣고 있던 아내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여러 날을 공짜로 해줄 수는 없는 것 아니냐?”라고 하자, 녀석은 그럴 수 없다는 반응이다. 외모도 왜소한 데다 정신적으로 허약한 녀석에게 그토록 관심을 보이는 것을 보면 확실히 남다른 면이 있다.
요즈음 어느 당 대표는 장애인들과 갈등이 생겼다. 공감 능력이 낮아서다. 사람들은 그가 유명 대학을 다녔기에 똑똑할 것이라고 믿고 주목한다. 처음에는 나도 그랬다. 하지만 관심을 거두었다. 지능지수는 높을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공감지수는 낮다. 한마디로 가슴이 차갑다. 말은 현란한 것 같지만 쓸 말이 적고, 핵심도 파악하기 어렵다. 정치인은 누구보다 다른 사람의 처지를 이해하고, 약자를 보듬어 주는 따뜻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국민을 갈라치는 얄팍한 술수로는 인기를 오래 끌 수 없다.
며칠 전, 작은녀석에게 친구들 소식을 물어보면서, “너는 다른 사람의 처지를 잘 이해하는 것 같아.”라고 했더니 “엠비티아이(MBTI) 검사에서 테레사 수녀와 같은 유형이었어요.”라며 웃는다.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 즐겁단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서도 그쪽 분야의 공부는 계속하려구요.”라고 한다. 부모가 가르쳐주지 않았어도 정의롭고 마음 따뜻한 아이로 자란 것 같아 대견하다.
첫댓글 최교장 선생님 자랑스러운 아드님을 두셨습니다. 훌륭합니다.
마음 따뜻한 것은 교장 선생님 닮았네요.
잘 읽었습니다. 믿음직한 아들을 두셔서 든든하시겠어요.
공감 능력이 탁월한 아드님이네요.
우리가 키우려는 이상적인 모습의 아드님을 두셨네요. 아드님의 성품도 훌륭하시고, 아들의 친구들을 다 꿰고 계시는 선생님도 정말 훌륭한 아버지십니다.
저도 헌혈을 한 번도 하지 못했답니다. 여고 시절에 학교에 헌혈 버스가 와서 친구들이 가기에 따라간 적이 있는데 퇴짜 맞았습니다. 빈혈이라서 제 피도 부족하다고 하더라고요. 교장 선생님 닮아서 멋진 아들이네요. 오래 전 사돈 맺자고 하실 때 의기투합했어야 했는데. 이제와서 아쉽습니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