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승 생활'이란 영어로 'monastic life' 또는 'monasticism'이라 하는데 이는 수도생활 초기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적인 수도생활을 의미한다. 즉 그리스도를 더욱 철저히 추종하고 오로지 하느님만을 찾기 위하여 세상으로부터 물러나 사막이나 광야로 들어간 은수자들이나 독수자들의 삶의 전통을 잇는 수도생활을 말한다. 수도승 생활을 하는 수도자를 우리 말로 '수도승'(ՌՏՍՁՏՓ, monachus, monk)이라 한다.
'수도생활'이란 말은 영어로 'religious life'라 하는데 이는 예수회 이후에 생겨난 새로운 형태의 수도생활을 포괄하는 보다 폭넓은 개념이다. 전통은 단지 고행과 기도의 생활을 통해서만 도달될 수 있는 이상인 '하느님을 찾는 것', 또는 '하느님만을 위해 생활하는 것' 외에 수도승 생활에 다른 어떤 목적도 부여하지 않는다. 전통적인 수도승 생활(monastic life)이 어떤 특별한 사도직 활동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하느님을 찾는 삶', 또는 '하느님만을 위한 삶'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어떤 특정한 사도직 활동을 목적으로 하는 일반적인 수도생활(religious life)과는 엄밀히 구분된다.
'축성생활'은 영어로 'consecrated life'라 하는데 현 교회법에서는 '수도생활'(religious life)과 '재속회'(Institute secular)를 포함하여 '축성생활'로 언급하고 있다(교회법 573조 1항 참조). 그리고 넓은 의미로는 '사도생활단'(societates vitae apostolicae)까지 '축성생활'에 포함시키고 있다(교회법 731조 1항 참조). 이처럼 전통적인 수도생활을 의미하는 '수도승 생활'은 '수도생활'과 '축성생활' 안에 포함되며 따라서 그 개념상 가장 좁은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수도승 생활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에바그리오 뽄띠꼬(345-399)와 요한 까시아노(365-435)에 의하면 수도승생활은 크게 관상생활(vita contemplativa)과 수행생활(vita pratica)로 이루어져 있다. 관상생활의 목표는 ‘하느님과의 일치’ 또는 ‘하느님 나라’이고 수행생활의 목표는 '아파테이아'(apatheia : 이는 특별히 에바그리오가 사용한 그리스어로서 말 그대로는 ‘욕정들의 不在’를 뜻한다. 다시 말해 수행들을 통하여 자신의 모든 욕정들로부터 해방된 내적 평정 상태를 의미한다). 혹은 ‘마음의 순결’(puritas cordis : 이는 요한 까시아노가 사용한 용어인데, 그 내용은 에바그리오의 ‘아파테이아’와 동일한 것이다. 에바그리오는 ‘아파테이아’란 개념으로 인해 오리게네스 논쟁에 연루되어 사후 그의 저서들이 단죄되는데, 이는 예로니모가 에바그리오의 ‘아파테이아’의 개념을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되었다. 까시아노는 바로 이러한 논쟁의 소지 때문에 에바그리오의 ‘아파테이아’를 사용하지 않고, 대신 ‘마음의 순결’puritas cordis 또는 ‘사랑’caritas 이란 용어로 바꾸어 사용하였던 것이다)이다.
그리고 관상생활의 내용은 ‘기도’, ‘묵상’, ‘성서독서’(lectio divina) 등이고, 수행생활의 내용은 ‘영적 수행들’(askesis) 혹은 ‘금욕적 수행들’이라 할 수 있다. 금욕적 수행이란 ‘악습들’(에바그리오는 자신의 저서「프락티코스」(Praktikos: 수행)에서 악습들(욕정들)을 다음 여덟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즉 탐식, 음욕, 물욕, 근심, 분노, 영적태만(영적 무기력), 헛된 영광(허영심), 교만이다. 오늘날의 칠죄종(七罪種)은 바로 여기서 유래한다)과 ‘악한 생각들’(loghismoi)을 거스른 투쟁으로서 이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과의 내적 투쟁을 뜻한다. 따라서 관상생활은 기도나 성서독서 등을 통해 하느님과의 일치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수행생활은 자기 자신과의 이런 내적 투쟁을 통해 마음의 순결, 혹은 아파테이아(apatheia)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볼 수 있다.
초기 수도승 문학에서는 관상생활을 구약의 이스라엘에, 그리고 수행생활을 야곱에 비유하곤 한다. 창세기에 보면 야곱은 하느님과 겨루어 이겼고, 그 결과 하느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었다(창세 32,23-33 참조). 교부들은 여기서 야곱이 하느님과 겨루는 것은 바로 수행생활을 의미하고, 마침내 이겨서 하느님으로부터 얻게 된 새 이름 이스라엘은 관상생활을 뜻한다고 해석하곤 하였다.
결론적으로 수도승생활은 영적, 금욕적 수행들(수행생활)을 통해 관상, 하느님과의 일치에로 나아가는 삶(관상생활)으로서 이는 영적 혹은 내적 인간으로 변화되어 가는 하나의 영적, 내적 여정이다.
수행생활의 목표는 바로 마음의 순결, 즉 모든 욕정들로부터 해방된 순수한 내적, 영적 인간(원죄 이전의 상태)이다. 이러한 상태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그 궁극목표인 하느님을 관상하고 그분과의 일치에 이를 수 있다. 따라서 영적, 금욕적 수행 없는 수도승생활도 또 관상을 지향하지 않는 수도승생활도 있을 수 없다. 수행 없는 관상은 공허하고, 반대로 관상을 목표로 하지 않는 수행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초기 수도교부들(에바그리우스, 요한 까시아노, 등등)은 이러한 ‘관상생활'은 자기와의 내적 투쟁인 '수행생활'을 통해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수행생활'은 ‘관상생활'을 도와주며, 하느님과의 일치에로 나아가는데 있어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서 수도생활의 다른 한 축을 구성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영적, 내적 여정으로서의 수도승생활은 노예 살이 하던 이집트(흔히 욕정들의 거처로서의 인간 육체 또는 죄와 죽음이 가득한 세상을 상징)로부터 탈출하여(활동생활의 목표) 새 도읍 천상 예루살렘(새로운 내적, 영적 인간 또는 천국, 하느님이 거처하시는 곳을 상징)으로 나아가는(관상생활의 목표)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허성석, "베네딕도회", 한국 가톨릭 대사전 제5권, 한국교회사 연구소, 1997, 3288; 허성석, 하느님을 찾는 삶,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2002, 67-69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