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맑스의 [독일이데올로기](1845)에는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공산주의 운동’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내가 이 문장에서 주목하는 낱말은 ‘공산주의’보다 ‘지양’과 ‘운동’이다. 맑스가 높은 단계의 공산사회의 형태로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한 만큼 나눠 갖는’ 사회를 언급한 적이 있지만 그 때도 그런 이상사회를 실현하겠다면 ‘지금 여기’에서부터’ 현실적인 문제들을 ‘지양’해 가는 것이 중하다는 것이었다. 현재의 문제적인 상태를 그대로 둔 채 어딘가에 그런 이상사회를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런 이상사회가 가능하다면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운동의 과정에 따르는 결과로서 주어지는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런 사회를 지향하지 않는 한 그런 사회로 갈 일은 없다. 그런 사회가 이상이고 지향점에 불과할지라도 개인들의 삶의 방향일 수 있는 것이고 그런 사회를 지향하는 개인들이 존재하는 한 이상사회 혹은 지금보다 더 나은 사회에 대한 가능성에 열려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만 그렇다고 아무것이나 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그 일의 시작과 끝은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운동일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현재의 상태가 자본주의일 수 있고 자본주의가 야기하는 현실의 문제들이 잉여가치 착취문제일 수도 있고, 경제 양극화 문제일 수도 있고, 노동력 착취나 실업, 자연 수탈이나 전쟁과 같은 문제일 수도 있고 약자에 대한 혐오나 차별이나 소외의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런 문제들이 자본주의의 구조가 야기하는 문제라고 하더라도 그런 문제들을 지양해 나가는 것은 일상적인 삶에서부터 개인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 구조라는 것이 어디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국가나 정치의 성격을 민주적으로 바꾸는 것도 평등한 공동체를 만드는 것도 민주적인 시민사회를 만드는 것도 노동자나 세계시민의 이름으로 연결되고 연대하여 전 지구적인 경제, 전쟁, 기후 위기에 대응해 나가는 것도 일상에서부터 개인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운동에는 현재의 상태를 알아가는 것만 아니라 개인의 생각과 행위가 현재의 상태를 구성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개인들의 현실 문제들에 대한 인식이나 행위도 지양해야 할 대상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지양’의 의미를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다.
2026. 5.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