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 정선례
잦은 이사를 하지 않는 시골에서는 도배 장판을 자주 하지 않는다. 우리집도 마찬가지여서 언제했는지 까마득하다. 거실 바닥과 벽이 습기에 곰팡이 얼룩이 지고 색이 바래 누렇다. 한 번 하기 어려운 작업인만큼 장판이나 도배지를 좋은 것으로 골랐다.
먼저 할머님이 생전에 쓰시던 방안 서랍의 물건들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서랍에는 작고 낡은 사진첩이 있었다. 몇 년 전 97세의 일기로 하늘나라로 떠나신 할머니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다. 겨우내 방안에 쿰쿰하게 잘 띄운 메주를 마루 한쪽 벽에 내다 거는 작업을 하며, 할머니는 네 살 된 손자와 옆머리를 맞대고 개구쟁이처럼 아이와 웃고 있다. 서랍 안 빛바랜 사진 속 할머니의 얼굴이 살아계신 것처럼 생생하다. 당신께서도 자리에 몸져누워 계실 때 서랍에서 가끔 이 사진첩을 꺼내 보지 않았을까
아담한 체구에 총기가 서려 있는 눈, 동그란 얼굴에 곧고 날선 콧날, 부처님을 닮은 귀와 위엄이 서려있는 목소리. 동네 사람들은 할머니 앞에서 예의를 갖추었지만 할머니는 그 사이에서 농을 치시며 분위기를 밝게 하는 유머도 있으셨다. 홀로 딸 셋을 키우며 온갖 풍상을 겪으신 세월에도 의연함이 돋보였다. 할머니는 담배를 수시로 피우셨다. 다 키운 아들을 먼저 보내고 가슴에 묻고 살면서 의지하며 함께 살았던 큰딸마저 모진 병으로 잃은 아픔을 담배 연기에 날려 보내는 듯하였다. 곰방대에 남아 있는 담뱃재를 놋재떨이에 땅땅 털어내던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
처녀 적부터 잠이 많은 나는 결혼을 하고나서도 늦잠버릇을 고치지 못해 당황할 때가 여러 번 있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농번기에도 잠 때문에 남편의 볼멘소리에 놀라 잠을 깨곤 했다. 얼마나 깊은 잠에 빠졌으면 할머니가 몇 번이고 놋재떨이를 때리는 소리도 듣지 못했을까. 아침 해는 중천인데 밥할 생각도 안하고 잠만 자는 손부 때문에 얼마나 애를 태우셨을까
할머니의 일상은 머리에 동백기름을 바르는 것으로 시작했다. 참빗으로 백발 머리를 빗어 비녀로 정갈하게 쪽을 지으셨다. 나는 그런 할머니에게 머리를 짧게 자르면 권유했지만 할머니는 늘 쪽 찐 머리를 고집했다. 하지만 결국 내 설득에 못 이기신 듯 할머니는 미용실을 가자며 따라나섰다. 미용실 거울 앞에 앉으신 할머니는 짧은 커트 머리가 낯설어서인지 어색한 듯 수줍게 웃는 모습이 영락없는 열여덟 소녀다. 내친김에 흑갈색으로 염색까지 해드리고 나서 “할머니, 멋진 영감님이 따라오면 어쩌죠?” 농담을 던졌더니 당신의 바뀐 모습이 예쁘신지 “ 좋지” 하며 환하게 웃으셨다.
천성이 부지런한 할머니는 담배를 피우시는 시간 외에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텃밭에 나가 잡초를 뽑고 싸리나무 빗자루로 집 안팎을 쓸어 우리 집 텃밭과 집 안팎은 항상 깨끗하였다. 해질녘이면 그날 입었던 옷은 방망이로 두들겨 빨고 흙 묻은 하얀 고무신을 깨끗하게 씻어 댓돌 위에 올려놓았다. 큰손자 바라기였던 할머니의 사랑은 증손자로 이어져 우리 아이들까지 잘 돌봐 주셨다.
때론 우두커니 않아 먼 산을 바라보며 먼저 간 딸을 그리워하다가 한탄 섞인 할머니의 한숨소리가 못내 속상할 때도 많았다. 그렇게 지내시던 할머니가 연세 탓인지 자주 넘어져 몸 여기저기 상처가 나서 쉽게 아물지 않았다. 약해지신 할머니에게 되도록 집안에 계시기를 당부했지만, 증손자가 유치원에서 올 시간이 가까워지면 어느새 집밖 큰 길까지 나가서 기다리는 모습이 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몇 해 전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노인성 질환인 중풍, 치매 등으로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에게 손과 발이 되어 일상생활을 돌봐 드리는 일이다. 교육이 끝나 갈 무렵 제법 큰 요양원으로 실습을 나갔다. 어르신들의 일상생활을 돌봐 드리면서 때론 우리 할머니도 가족들에게 짐이 되기도 했지만, 고령인지라 당신 의지대로 안 되는 것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노화란 여러 질환들이 따라올 수밖에 없다는 걸 돌아가신 후에야 알게 되었다. 잘해드린 것은 생각이 나지 않고 못 해 드린 것만 생각이 난다. 좀 더 빨리 깨달았다면 할머니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할머니를 향한 그리움과 회한이 남는다.
할머니의 서랍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나서 곰팡이가 잘 닦인 벽에 도배를 시작했다. 꽃망울이 환하게 그려진 벽지에다 내가 풀을 발라주면 남편은 결 따라 벽지를 붙였다. 어느새 어둡고 칙칙했던 방안이 꽃향기로 가득한 듯하다. 도배를 끝내고나서 할머니 사진을 깨끗하게 닦아 액자에 끼워 거실에 걸었다. 마음이 뿌듯하고 평안하다. 할머니는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은 어른으로 언제나 내 마음속에 살아 계실 것이다.
첫댓글 선생님의 할머니가 눈에 보이는 듯 생생하네요. 멋진 분이셨을 것 같아요. 따뜻한 글을 읽어서 좋습니다.
도배 해본 기억이 새록새록 합니다. 보통 일이 아닌데, 수고 많으셨습니다.
선생님 글 읽으면서 저도 희미하게 남아있는 할머니가 떠오르네요. 잘 읽었습니다.
시할머니를 모시고 지내셨군요. 큰 일하셨네요. 힘든 도배를 어떻게 직접하셨을까요. 고생하셨겠어요. 잘 읽었습니다.
시할머니처럼 의연하게 나이드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