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이 저한테 그래요. 목사님 하나님이 불쌍한 자를 불쌍히 여기지 않아요? 그러더라고요. 하나님이 불쌍한 자를 불쌍히 여긴다? 하나님이 정말 불쌍히 여기는 것이 인간이 선악 속에 살아가면서 나 같이 얼마나 불쌍하게 살았어요. 우리는 다 이런 개념을 가지고 하나님 개념을 맞추거든요. 그럼 거지들 다 구원 받아야해. 하나님이 거지들 축복 하셔야해. 그런데 진짜 세상을 살아가는 인생을 들여다보면, 시험들 지경이야.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하나님이 진짜 불쌍한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맞다면 세상 속에 살아가는 불쌍한 인생들 저렇게 안되야 하거든요.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고 하면서 그 세계를 보면 오히려 살아계신것 같지 않아, 이것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만 그런게 아니에요. 나 자신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도 모르고 선악 속에 믿다 보면 저 같이 과거에 하나님 앞에 기도 할때 어떻게 하세요. 당당하게, 당당하게 못해도, 편안하게 하나님 하면서 기도 합니까? 일단 인상을 좀 써야 해요. 주여~ 나를 불쌍해 여겨 주옵소서, 그건 사람들에게 조금 통할까 말까 할 건데, 사람도 혹시 열 명 중에 한 사람이 불쌍히 여길지 모르겠지만, 아홉 사람은 더 무시해요. 저 믿다 보니 그렇게 믿고 있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기도하는 폼이 딱 그거야. 아마 그때 비디오 찍어서 봤으면 어떻게 너희 하나님은 그렇게 생겼냐.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선악 속에 믿다 보면 성경을 전부다 외곡해서 받아들여요. 내가 나를 위한 신관, 그게 잘못된 하나님이거든요. 그러니 나는 그렇게 불쌍한 척 하면서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은혜만 안 주셔. 차라리 사람이 더 나아. 사람한테 진짜 불쌍한 척 하면 열 명 중에 한명을 걸리지만, 하나님한테는 안 걸려. 이게 선악 속에 종교 생활 속에 내가 만든 내 하나님이야. 삭게오를 찾아오신 구원하신 하나님이 아니거든 나는 계속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 나가니까. 이게 계속 안 맞는 거지. 그런데도 몰랐어요. 불쌍히 여김을 받기 위한 모습만 아니라. 실제로 어떻게 하냐. 금식을 해야지. 금식을 하면 죽는 거잖아. 나를 쳐서 복종 시키는 것이니까. 인상 쓸 것도 없어. 다 죽어 가니까. 믿다 보니 어느새 하나님이 굶어야만 내게 은혜 주시는 하나님을 내가 만들고 기도 하고 있는 거야. 어떤 때는 응답을 하세요. 그럼 그렇지, 이 신관에다가 그대로 힘을 얻어 버려요. 참 이게 하나님이 여호와 되신, 하나님이 내 인생의 구원의 일을 실제로 깨달아 갔어야 하는데 이것만 몰랐던 거예요. 참 지금 돌아보면, 얼마나 이 혼돈 속에 그런데 몰랐어요. 누가 혼돈하다 생각 합니까. 얼마나 내가 성경을 배웠고 알고, 진짜 3-400명 모이는 교회 속에 내 스스로는 탑이라고 안했지만, 사람들이 탑이라고 하더라고. 제일 잘 믿는 다고, 참 이게 종교 속에 답이 없는, 그런데 믿는 폼을 보면 너무나 잘 믿는것 같고, 실제로 내 안에 답이 없으면서도 죽을 뻔 했어요. 이제서야 그런 과정 까지도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여러분 이게 단순한 들어서, 깨달아서 그런게 아닙니다. 속는 줄 몰라도 복음은 절대로 속일 수 없는 사실이 나는 믿는데 믿으면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사실도 믿는 자 속에 속일 수 없거든요. 그런데도 보아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내 영적인 혼돈, 그런 과정이 조금씩 조금씩, 내가 가끔 가다 말하듯이 조금씩 깨달아 가면서 아 하나님은 항상 하셨던 일이었구나. 변함없이 내 인생에 나타내셨던 일이었구나. 나만 착각은 자유다. 자기 생각대로 믿는 거예요. 맞다라고 스스로, 착각 하면서, 여러분, 구원의 길은 유일한 길입니다. 오직 한 길,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다.
그래서 정말 저의 인생을 돌아 봐도 있는 자나 부자, 나 같이 없는 자나 똑같다는 것이, 그런데 우리는 똑같지 않거든 뭔가 비교적으로 비교될 내가 있기 때문에, 저는 있고, 나는 없는 것들 속에 비교 의식 속에 그럼 있다고 하는 만큼은 부자로 묶여 감속에 나를 위한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일수록 우상을 만든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자들도 다르지 않아요. 특히 여자는 꽃이래요. 꽃이기 때문에 남자도 외모가 중요하지만 여자들의 외모는 더 여성으로서 갖는 최고의 자신을 위한 배경이 될수 밖에 없어요. 그래서 여러분 어떤 수녀는 인물이 너무 잘생겼데요. 은혜를 받고 나니까, 이건 잘못된 신앙관인데 자기 얼굴에 자해를 한거야. 예쁜 얼굴을 망가트렸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자기 보면서 죄짓지 않게 하려고. 또 자기도 자기 외모 때문에 은혜를 받고 보니까, 좋은 건데 부자로 산,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나를 위한 것 속에 우상 만든 만큼 인물 잘난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데, 자연 은총인데 이것이 사단의 통로가 되면 나를 위한 최고의 우상이 되기 때문에 내 인생에 화가 되게 만들고 남에게도 화를 끼치는 거거든요. 그런 면에서 삭게오를 보면 부자요, 세리장이다. 좋아요 안 좋아요? 여기도 지금 삭게오 처럼 부자였으면 여기 앉아 있을 사람 없을 것 같아. 그런데 삭게오를 통해 보여준게 뭐에요? 부자요, 세리장이라는 말은 새무국장이라는 말이거든요. 괜찮은 사람이에요. 부자가 천국 들어가기가 약대가 바늘귀 들어가는것 보다 어렵다. 부자가 나쁜 게 아니라 부자가 선악 속에 태어나서 선악 속에 살아 갈수 밖에 없는 만큼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약대가 천국 들어가기보다 어려운 속힘의 과정, 그래서 여러분, 이거 모르면 다 선악 속에 살아가면서 모르면 현실이, 나를 위한 스스로 나의 자랑이 되겠죠. 정말 자랑 할 만한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있고 없는 것이 일반인데 우리에게 일반일수가 없어요. 이 갭이 너무나 커요. 어제도 나눌 때 보니까, 야 ~ 은혜주신 만큼은 상관없이 참 이건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거잖아요. 삭게오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그 분이 오시겠다는데, 이게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일이거든요. 그게 뭡니까?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임하였으니, 이도 아브라함의 자손임 이로다. 은혜 주신 만큼의 변화도 있어요. 그런데 이게 평생 과정이잖아. 그런데 있는 만큼 똑같은 문제, 아직도 그런 것들 속에 선악, 이게 선악의 세계에요. 내가 스스로 살아가면서 우린 이 세계관을 만들어 온 만큼 선악 속에 이 묶임의 기준, 그래서 좋은 것이 있는 만큼 나쁜 만큼 이 묶임이 우리 안에 만들어진 세계관이 있는 만큼 비교를 당해. 그래서 여러분 인생이 이미 살아온 만큼, 내 의를 가지고 살아가는 거예요. 그 의가 자랑, 그래서 사람은 뭔가 나를 위한 재물, 돈도 인물도 집안도, 나를 위한 것이 많을수록 사람들이 힘이 있어요. 여기 보니까 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어. 반대로 없다. 없을수록 나같이 어깨가 쳐져요. 저 이전에 꾸부정했었어요. 지금 많이 펴진 거야. 자존감이 낮다고 그러죠? 그런 사람 보면 자존심도 없는것 같은데 깊어요. 그런데 하도 당해서 자존심을 안 부려서 그렇지 깊어. 반대로 부자, 나를 위한 재물이 많은 만큼 이것이 묶고 묶인 만큼 자존감도 쌔고 자존심도 쌔게 나타나는 거예요. 그게 다 뭐냐, 따라서 합시다. 내 안에 묶임 들입니다. 나타난 것은 선악 속에 살아가면서 기준에 묶인 것이지만 그 묶임이 어둠의 세력이 잡혀 있는 상태에요. 그래서 부자가 천국 들어가기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것 보다 어렵다고 말하는 겁니다. 이걸 모르면 기독교는 분명히 종교가 아니라고 하면서 또 금욕주의가 아니라고 하면서도 인간은 태어나면서 선악 속에 태어났고 살아온 만큼 이것이 우리 안에 성경을 보면서 나는 믿는다고 하는데 그대로 있어요.
한 예로 전에 우리나라에 다른 나라 왕이 왔는데 예수를 믿는 분인가 봐. 그러다 보니까 한국에 대형 교회 예배 참석하러 가겠다고 했는 가봐요. 뭘 요구한줄 아세요? 로얄박스를 준비해 주세요. 왕이니까. 준비 해주는지 안해준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워낙 시대가 그러니까. 이해는 됩니다마는 예배는 하나님 앞에 드리면 다 죄인된 자로 나가야 하는데, 자기가 세상에 대통령 이면 대통령이지 뭘 하나님 앞에 나가면서 로얄 박스를 준비 해 달라 그래. 그 자리에서 자기 의 모습 그대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간다는 거잖아요. 이건 한 예지만, 많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정도 차이지만 이게 없는 줄 아세요? 내가 세상에서도 괜찮은 만큼 세상에서도 사람들 속에 나를 선악의 세계 관속에 나를 자존감을 높여서 산만큼 그것 갖고 교회 와서 예배를 드리고 성도와 교제를 나누고 그런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성경에도 누가 좋은 옷을 입고 오니까, 뭐가 있을 것 같거든 어서 오시라고 자리까지 준비해 주고, 옷이 별 볼일 없고, 별 볼일 없는 인생 같이 보이면 거들어 보지 않고, 여러분 이것도 윤리와 도덕으로 이래야 된다 하지 마시고, 제가 말하는 것이 뭐냐. 누가 완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몰라도 살아가는 인생의 상태가 그대로 드러나지는 거잖아요. 그죠? 부자가 천국 들어간대요? 못들 어간데요? 못들 어간데요. 그 말은 이 세상의 묶임 속에 없을 수는 없겠지만 내 모습 이대로 속에 하나님이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은혜가 필요한 자야.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우리 어제도 하루 계속 말씀 드렸지만, 이게 삭게오의 키 작고 많은 사람이 애워싸워 나가고자 하여도 할 수 없는 한계의 문제거든요. 이게 삭게오의 키 작고 나갈 수 없는 상태를 드러낸 건데, 우리는 낙심만 하지 않으면 되요. 그러면서 예수께 나아가고자 하는, 이게 뭐냐, 그렇기 때문에 더 구원의 은혜가 필요한 자로, 그런 자들 속에 복음은 우리와 상관없어요. 하나님만 하실 수밖에 없고 그런 만큼 삭게오를 통해 보여 준 것처럼 돌 무화과나무. 이게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는 거예요.
동경 집회 4강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