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2. 15(토)
마르코(2,1-3,6)
루카(5,17-6,11)
마태오(9,1-17)
(마태 9,2)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묵상-
세 집(마르코, 루카, 마태오 복음)을
넘나들며 읽는 거, 나름 수고스럽다.
여기저기 일일이 읽어보고,
연결된 맥락들을 찾아서,
공지해주는 거, 귀찮고
번거로울 텐데, 통독방 봉사자들의
노고가 존경스럽다.
읽어본 중 가장 간결하게
축약된 마태오 복음을
묵상의 시작점으로 삼았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군중이
몰려든다. 치유 받을 병자들이
줄을 선다. 예사롭지 않은 환자,
중풍병자의 등장.
마태오 복음에선 중풍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마태 9,2)
단 두줄이다.
이 장면을 똑같이 목격하고
쓴 루카와 마태오 복음 사가의
글은 어땠을까.
루카 복음은 조금 더 길고
구체적으로 표현했다.
중계방송을 해주듯이 선명하게
말이다. 마치 내가 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루카 5,18-20)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군중 때문에 그를
안으로 들일 길이 없어 지붕으로
올라가서 기와를 벗겨 내고 평상에
누인 그 환자를 예수님 앞,
한 가운데로 내려 보냈다.‘
마태오 복음의 두 줄 문장이,
일곱 줄 문장으로 늘어난 거다.
마르코 복음으로 넘어가 보자.
(마르2,1-3,6)
사람들이 어떤 중풍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있는 들것을 달아내려 보냈다.
루카 복음과 비슷하게 여덟 줄이다.
좀 더 구체적인 문구를 추가했다.
루카에서는
‘지붕으로 올라가서 기와를 벗겨내고
평상에 누인 그 환자를~~‘이라고
표현했다면, 마르코에서는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누운
들것을 달아내려 보냈다.‘고 한 거다.
전체적인 내용으로 보면, 어떤 장면인지
어떤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파악이 된다.
다만, 마태오복음에서 두 줄로 언급할 땐,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데려와서 예수님이
치유해주셨구나.‘라고 생각하며,
추상적으로 이해했을 거다.
그런데 루카와 마르코에서는,
사람들이 미어터지는데, 주님께 어떻게
접근할까 하고 고민하는 이들에게,
‘자, 봐봐. 여기가 예수님이 지금 계시는
집이야. 다급한 환자를 데려왔는데,
뚫고 들어가기가 어렵잖아. 그래서
지붕으로 올라가서 기와를 벗겨내고,
구멍을 내서 집안으로 내려갈 수 있는
통로를 만든 거야. 들것을 끈으로 달아
예수님께 내려 보낸 끝에 치유된 거야.‘
훨씬 정교하고 섬세하고 눈에 보이듯이
선명하게 표현된 문장이 아니던가.
이는 상대(읽는 독자)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네명의 친구들의
극성맞은 사랑이 더 돋보인다.
또한 병자를 위해 간절하게 기도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고
다가가는지 묵상하게도 한다.
세 복음사가의 표현을 보면서
나는 어떤 소통을 하는지
돌아보았다.
사실 위 세 복음에서 보여준 차이는
장면에 대한 연결감이 아닐까 한다.
현장에서 있었던 생생한 모습을,
현장에 있지 않아도 본 듯이 느끼도록
하여, 더 깊은 감동과 통찰을 이끌어내는
그런 거 말이다.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 자신의 생각과
습관들이 묻어난다는 걸 알지 않은가.
어떤 이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것들을 이성적으로 정리해서 한 두줄로
표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내가 아는 것을 최대한 상대가 쉽게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서
전하는 사람이 있다.
나 같은 경우는, 후자에 속한다.
누군가 내 글을 읽고 편하고 쉽게
이해된다고 했다. 그런데엔 이유가
있다. 나는 방송작가로서 대본이나
내레이션을 쓸 때, 화면으로 tv를
보는 시청자들이, 공통적으로 다
이해할 수 있는 단어와 문장을
택하여 쓴다.
왜냐하면, 시청자중엔 고학력도 있고,
아예 글을 모르는 까막눈도 있다.
90대 어른도 있고, 서너 살 아이도 있다.
아무리 어렵고 난해한 내용이라도,
그것을 내것으로 만든 다음 최대한 쉽고
편안하게 표현해내는 것이 익숙하기
때문이다. 또 어릴때부터 힘든
엄마를 위로하고 말을 들어주며
쉽게 이해시켜드리는 과정에서
훈련된 것이기도 하다.
성경을 쓴 복음사가들은,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쓰긴 했지만,
그럼에도 각자의 성향과 감성 등
자기만의 표현법이 녹아났던것
같다.
배우자와 소통할 때, 나는 가끔
답답함과 단절감을 느낀다.
‘당신 오늘 점심 뭐 먹었어요?’
하고 물으면,
‘사먹는 거 늘 뻔하지 뭐. 냉면 먹었어.’
이렇게 단답형으로 대답할 때가 많다.
아내가 점심 메뉴가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거다.
아내는 이 질문을 시작으로 연결된
대화를 하고 싶었다는 것을!!
남자와 여자의 다름이 드러나는
대화법이다. 가족이 뭔가 묻거나
질문을 할 때, 왜 이렇게 묻지?
하고 상대의 마음을 생각한 다음,
그 말끝을 물어주면 공감적인
대화가 될 텐데, 한 줄로 대답한다. 이런 화법이 때로는 공감력이
부족한 사람으로 오해받기도 한다.
일부러 그러는게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게 익숙치않거나,
어릴적부터 그런 대화를 경험하지
못해서 훈련되지 않아 낯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훈련차원에서
배우자에게,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궁금해서 그러는데,
번거롭겠지만 1,2,3,4로
나눠서 알려줄래요?'라고
부탁한다. 나름 효과가 크고,
대화법은 혼자가 아닌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게도 한다.
마태오 복음의 그 두 줄이
그런 맥락이 아닐까 싶다.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고쳐주셨대.
라고만 생각할 수 있는 생략적인
표현법!!
루카와 마르코에서는 그 두 줄에서
생길 수 있는 궁금증,
‘그래? 그럼 어떤 방법으로 치유하신거야?’
를 좀 더 사실적이고 생생하게, 그리고
이해하기 쉽게 알려준 거다.
나는 위 대목을 읽으며,
나의 대화법과 글 표현법,
인간관계 안에서 나의 역할에 대해
묵상했다. 앞으로는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내 대답이 내 중심적인
차원인지, 상대가 진정 원하는 것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내용인지,
신중하게 생각해봐야겠다.
그런 대화에서 우린 단절이
아닌 연결감을 느끼며
공감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상대에 대한 배려이고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첫댓글 요셉피나님
좋은 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