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부산 발달장애인 ‘사고’를 기억한다
작년 12월 3일 부산시 사하구의 한 종합사회복지관 3층에서 활동보조인이 커피를 마신다며 근무지를 이탈한 동안 한 지적·자폐성 장애인이 두 살배기 아기를 비상계단 난간에서 아래로 떨어뜨린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의 책임 관계 규명은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뜨거운 논쟁과는 다르게 장애계는 다소 조용하다. 간헐적인 목소리나 기사만 나올 뿐이다. 아마 자극적인 기사에서 비롯된 과도한 일반화를 염려해서겠지만, 우리는 이 사건을 계기로 구체적인 사건과 사례를 놓고 발달장애인의 권리와 의무에 대하여 실증적인 토론과 토의를 진행해야할 현실에 직면하고 있다.
이제 곧 당사자 본인들을 권리의 주체로 인정하고 지원해야 하는 발달장애인법(2015년 11월, 발달장애인 권리보장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 시행을 앞두고 있는 가운데, 2013년부터 시행된 성견후견제도 역시 폐지 논란에 휩싸여 있는 상태다. 장애인의 사회 활동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이런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 또한 높아질 것이다.
이런 사건은 발달장애인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넓은 범위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다 보면 다양한 사건, 사고는 발생할 수 밖에 없기 마련이다. 문제는 이렇게 예상되는 사건과 사고들을 미리 예방하고 대비할 수 있는 시스템과 인력을 제대로 준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작년 부산 사건도 활동지원서비스가 제도화 되면서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발달장애인에 대한 활동보조인의 전문성이나 이용인 가족에 대한 교육, 관리기관의 책임성 등은 이 사건 이전에도 숱하게 제기돼 왔다. 사건 현장인 복지관의 시설 관리 문제 역시 오래전부터 복지관을 이용하는 장애인이라면 공감하고 공유했던 주제였다.
이 사건의 근본적인 문제는 앞서 언급한 문제들에 대해 장애인과 그 가족들, 장애인계, 사회복지계, 나아가 온 사회가 미리 알고도 대비하지 않은 채 방치했다는 점이다. 다행히 오는 5월 인권도시 광주에서 이와 관련한 의미있고 심도 깊은 논의를 시작하는 국제 포럼이 열린다. 2015년 5월 15일 ~ 5월 18일 동안 진행되는 2015 세계인권도시포럼이 그것이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5월 16일 세 번째 주제회의로 열리는 ‘도시와 장애: 도시와 발달장애인’이다. 광주장애인차별철폐연대, 광주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서 주관하는 본 주제 회의에서 다루는 것은 바로 ‘발달장애인과 관련된 사건들, 어떻게 보고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회의에서는 주로 ‘피해자’로서의 당사자 이야기로 채우지만, ‘가해자’로서의 당사자 문제도 함께 논의한다. 또한 장애 당사자 부모와 장애 인권교육 활동가, 학계 전문가 및 발달장애인 지원 기관 전문가 등이 모여 발달장애인 관련 사건들을 다각도에서 짚어보고, 아울러 해외에서 유사한 사건들과 사회적 반응, 그리고 이후의 변화들에 대하여 공유할 예정이다.
특히 이번 포럼은 미국의 발달장애인 관련 사건들과 사회적 반응과 지원 체계를 알아보고, 일본의 발달장애인 관련 사건과 이후 변화 및 시사점도 들어봄으로써 당사자와 관련한 갈등과 사안들을 많이 경험한 다른 나라들의 시스템을 공유하고 우리나라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장이란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필자는 발달장애인에게 인권교육 활동가로서 토론에 참가하는데, 당사자의 권리와 의무가 크게 확대되는 이 시기에 어떤 교육이 필요한 것인지 고민이 깊다.
장애인 대상 비장애인 이해, 인권교육도 필요
아무리 지적 능력이 부족하고 의사소통 능력이 없는 장애인이라고 해도 ‘다른 사람의 감정을 느끼거나 알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감정’이라는 그릇이 있다면 그 그릇에 인권이란 내용을 담을 수 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인권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감수성’이니까. 완전통합으로 학교를 다녔던 필자도 군대 영장을 받아들고 네가 장애인이어서 부럽다며 흘리는 비장애인 친구의 치기 어린 눈물을 이해하기까지 꽤나 많은 시간과 경험을 통한 깨달음이 필요했다. 비장애인 친구들의 군대에 의한 경력 단절의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 같은 민족의 사람에게 총구를 겨누어야 하는 윤리적인 갈등을 이해한 것은, 필자가 ‘군가산점 위헌 소송’을 제기하면서 부터다. 패쇄적인 시설에서 빈번하게 발생하지만 문제제기조차 힘든 의문사는 군대나 장애인 시설이나 변명이 닮아 소름이 돋는다.
나는 대학에 올 때까지 비장애인 친구들도 누군가에게 무언가 도움을 주었을 때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한다는 것을, 어떤 이는 도움을 주기 전에 수없이 많은 것을 고민하고 망설이기도 하고, 장애가 없음에도 때로는 몸을 쓰는 것이 엄청나게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비장애인의 문화 속에서 성장했지만, 장애인이 비장애인을 100%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물며 특수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은 오죽하겠는가? 문제는 특수학교에 다녔던 이들은 존재로서 비장애인을 느끼고 경험하고 깨닫는 스트레스 과정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제는 우리가 장애인에 대한 비장애인의 인권교육 과정과 콘텐츠를 개발하는데 많은 재정과 노력을 기울여 온 만큼, 장애인 당사자의 인권교육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연구해야 한다. 이것을 자기 옹호, 나아가 권리 옹호라고 부른다. 권리 옹호는 자신의 권리뿐만 아니라 타인의 권리도 옹호하기 위한 교육이다. 위 사건에서도 장애인 당사자가 살아있는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기 어려워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그렇다면 그는 특수학교에서 12년 동안 무엇을 배웠는가? 그가 12년 동안 특수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어도 그 정도도 습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중증장애였다면, 그를 홀로 두고 커피를 마시러 간 활동보조인의 결정은 과연 타당했는가? 주변의 가족들과 교사들이 그의 장애에만 매몰된 나머지 그에 대한 교육을 외면한 것은 아닌지 착잡하기만 하다. 비장애인 대상 ‘장애 이해 교육’ 만큼이나, 장애인에게도 ‘비장애인’을 이해하는 교육이 내실있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장애인에게 장애인인권교육은 어떤 의미인가?
여성이 여성학을 배우고 토론하면 자기 스스로가 ‘여성’인 것이 어떤 의미로 다가 오는가? 아마도 여성으로서 받는 차별과 억압을 각성하며, 여성이라는 정체성에 자부심이 생길 것이다.
그렇다면 장애인들이 장애인권교육이나 장애 이해교육과 권리옹호 수업을 받으면 그들도 장애인으로서 자부심이 생겨나야 하지 않겠는가? ‘장애인’이란 것이 어떤 사람을 제대로 지원하고 필요한 자원을 배분하기 위한 분류체계일 뿐이라면 말이다. 그런데 교육의 실상은 어떠한가? 혹시나 장애와 비장애를 비대칭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은가? 나아가 비장애는 우월한 것, 장애는 열등한 것처럼 전달하는 오류를 범하며, 장애인의 인생과 교육의 목적이 ‘비장애’의 상태로 만드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는가? 장애인에게 장애를 감추게 하고 부끄럽게 만든다면 그것은 장애 비하교육일 뿐이며, 마치 가부장적인 남성의 관점에서 여성인권교육을 하는 것일 뿐이다.
장애인은 ‘치료나 재활’ 또는 ‘교육’이 인생의 과정상 필요할 수는 있지만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환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를 포함한 장애인 당사자들이 언제 ‘장애인’이라고 불리는가? 일상적으로 가족들이 장애인 아들이라든지, 연인을 장애인 남자친구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우리가 불가능함에 직면할 때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국가적 지원이 필요할 때, 휠체어를 내릴 장애인 주차구역이 필요할 때, 승강기가 필요할 때, 활동보조인이 필요할 때에만 한시적으로 장애인이라 구분되어질 뿐이다. 보다 신속하고 효과적인 지원을 받기 위해서.
이따금씩 필자처럼 장애가 눈에 확 띄지 않는 장애인 당사자들은 나에게 묻는다.
“저는 목발이나 휠체어를 사용하지 않는데 친구들이 장애인이라 놀려요. 제가 왜 장애인인가요? 전 장애인이 싫어요.”
이와 같은 질문에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다리가 아프지 않아. 늘 통증이 있는 것도 아니란다. 단지 조절이 잘 되지 않는 뇌병변이란 장애가 있을 뿐이지. 그리고 너는 내가 싫으니? 나는 장애인인데? 너도 장애인카드 갖고 있잖아. 여기 장애인 복지관도 다니고 있고. 너도 무엇인가 어렵고 힘들면 나에게 장애인 카드를 내밀잖아. 이렇게 너에게 장애인이라고 이름 붙여준 것은 보다 자유롭게 보다 많은 것을 멋있게 해보라고 필요한 지원을 당당하게 받으라고 국가가 책임지겠다는 뜻으로 붙여 준 것이란다. 친구들에게 장애인이라고 놀림 받는게 싫으면 친구들에게 알려주렴. 내가 장애인이란 것은 국가가 지정한 개인비밀정보이며, 그렇게 부르는 것이 정말 싫고 모욕죄로 신고 할 수도 있다고. 무엇보다 나에게는 부모님이 붙여준 멋진 이름이 있다고. 나는 네가 장애인이어서 좋아. 네가 장애인카드를 가지고 있으니까 같은 장애인인 나를 만난 거잖아. 여기 복지관에서!”
물론 우리 사회가 아무리 완벽한 ‘무장애’ 환경을 구축하고 인권의식이 신장되더라도, ‘장애’자체에 대한 생물학적인 공포나 부담까지 제거되리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우리는 동물의 세계에 살고 있지 않다. 우리는 이런 생물학적인 어려움을 견디고 초월하는 인간의 세계, 교육의 세계에 살고 있다.
장애인을 임신했다고 해도 힘을 모아 낳아서 멋지게 잘 키워보자. 중증 장애인도 생산성을 높일 수 있도록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투자해 보자. 장애가 있는 배우자가 멋진 아버지, 어머니, 남편, 부인이 될 수 있는 환경과 지원이 무엇인지 고민하자. 장애인이 존재해야만 비장애인이란 개념이 존재하고, 장애를 함께 고민하는 것이 진정한 인간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