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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 론 요 지 서
사 건 2013 노 92 국가보안법 위반 (찬양·고무)
피 고 인 0 0 0
위 국가보안법 위반 (찬양·고무) 사건에 대해 피고인은 다음과 같이 변론합니다.
다 음
■ 현 국제정세에 대한 이해
피고인은 국제정세분석 전문가가 아닙니다. 또한 현재를 추정하는 정세 분석들은 서로의 이해관계와 시각에 따라 다양하고 복잡하기에 수많은 의견과 견해 속에서 판사님이 객관적 받아들일 수 있는 진실 정도를 취사선택하는 것에 많은 고민이 있었으며, 이를 장황하지 않고 짧고 명료하게 이해시켜야 한다는 부담 역시 있었습니다.
이러한 많은 문제와 고민들 속에 이를 이해시키기 위해 우선 결론부터 이야기하고 이러함이 맞는지를 찾아가는 것이 옳다 생각하기에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기로 하였음을 말씀드리며, 하나라도 의문이 있는 경우는 이야기하시면 즉시 이를 보충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국제정세는 1990년 이후 이어져온 미국 1극 패권이 중국, 러시아, 이란, 베네수엘라, 브라질 등 다극에 의해 위협받는 상황이며 이러한 상황을 추동하게 할 수 있는 힘이 북에서 나온다고 알고 있고, 혹자들은 이러한 상황을 북에 의한 전 세계의 자주화라 합니다.
물론 미국 등 서방 그리고 미국의 힘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이들은 이러한 상황을 미국 1극 패권에서 다극 패권으로 이동하기를 원하는 오마바 등 “그림자 다극주의자”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은밀하게 추동되어지는 다극화라 역시 이야기합니다.
누구의 이야기가 옳은 것이든 1990년 이후 20년 넘게 이어져온 미국의 1극 패권이 무너지는 것은 틀림이 없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세계 최강 초강대국인 미국의 1극 패권은 왜 무너지는 것이며, 미국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지는 능력을 가진 중국, 러시아, 이란, 브라질 등 다극이 어떻게 이를 보완하여 1극 패권을 위협할 수 있었던 것인지 이야기 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세계의 패권은 국제 정치 역학 상 지금까지는 오로지 힘, 즉 무력에 의해서 결정이 됩니다. 미국은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유럽의 경제 기반이 무너지자 달러를 대량 유통해 기축 통화로서의 발판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1990년 독일의 통일, 1991년 소련의 해체로 인한 냉전의 종식으로 1극 체재의 지위를 가지게 되자, 91년 걸프전에 참전함으로써 중동의 정세를 재편하였고, 많은 국가에 침공과 내전 유도를 반복하여 친미 성향의 정권이 창출되게 함으로써 석유의 결재 수단을 달러 유일 체재로 만들었으며, 이러함은 기축 통화로서의 달러의 위상을 공고히 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기축 통화로서의 지위가 지금의 미국을 유지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이 된 것입니다.
근래 들어 중국이 G2(Group of 2)로 급부상하고 있는데, 앞서 변론요지서에서 말씀드렸듯이 이러한 중국의 힘은 북을 등에 업지 않고는 실현될 수 없습니다. 미국은 이미 중국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중국의 약점을 역시 잘 알고 있었기에, 북이 없는 중국은 미국의 상대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중국의 정식 명칭은 중화인민공화국으로 1949년에 건국된 역사가 64년 밖에 되지 않는 신생국가이며, 한족을 중심으로 55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현재 인구가 13억명 정도인데 이중 한족이 93%에 달하며 중국 경제의 대부분을 한족이 잡고 있지만, 나머지 7%의 소수 민족의 생활터전은 중국 면적의 50~60%에 이릅니다.
이러한 중국은 내전으로 분열이 되기 쉬운 조건을 가지고 있고, 2008년 8월 북경 올림픽이 있기 전 티벳에서는 분리 독립 시위가 발생하였으며 중국 정부의 무차별 진압 방식으로 인해 서방에서는 자유와 인권을 이야기하며 올림픽 참가 거부까지 시사했고, 실제 올림픽이 열릴 수 있을까 하는 우려까지 있었습니다.
중국은 소수 민족인 티벳인을 위해 자치구 형식으로 그들의 생활 풍습과 문화 등을 지켜 갈 수 있도록 해 오고 있었지만, 엄연히 다른 문화로 인한 정체성의 차이가 존재하고 중앙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신들 스스로가 행하는 자치에 대한 당연한 바램과 함께 티벳의 경제권을 한족이 장악하고 있음으로 인해 격는 경제적 곤란들을 감안하면 티벳인의 분리 독립 요구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극단적 유혈사태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분명하게 이를 지원하는 또 다른 동력이 필요합니다.
제국주의는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국가에 대해 직접적인 군사 행동 대신 이러한 분란을 비집고 들어가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권을 세워오고는 했으며, 그렇게 세워진 정권은 어김없이 국민들을 고통스럽게 만들어 왔습니다. 이러한 수단과 방법이 꼭 미국의 전유물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피고인은 현재 분명하게 그러한 우려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다시 티벳의 분리 독립 시위로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2008년 3월 20일 [뉴시스]에서 티벳의 분리 독립 시위에 대한 북의 견해를 밝힌 기사가 나옵니다.
북한, 티베트 유혈사건 관련 중국 입장 옹호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20일, 중국 티베트 자치구에서 일어난 유혈 폭동 사태와 관련, "베이징 올림픽을 보이코트 하려는 극소수의 불법분자들의 행동"이라고 맹비난 했다고 일본 교토통신이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을 인용, 보도했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이날 조선중앙통신과 인터뷰를 갖고 "티베트의 안정과 티베트인들의 이익을 위한 중국 당국의 노력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티베트 유혈 폭동 사태와 관련, 북한이 공식 입장을 표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또 "티베트가 중국의 일부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밝힌 후 "이번 사태는 불법분자들이 조직적으로 일으킨 폭력 범죄사건"이라고 지적했다.』
북은 급부상하고 있는 중국에 대한 서방의 이간책에 분명하게 제지 의사를 표명한 것입니다. 지금 일어나는 국제정세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북중, 북러가 도대체 어떤 관계인가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 언론은 미국이 대한민국의 후견국의 지위에 있는 것과 비슷하게, 중국과 러시아를 북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후견국인 것처럼 지속적으로 보도를 해오고 있습니다.
과연 중국과 러시아가 북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강국인 것인지? 아니면 북의 힘으로 인해 중국과 러시아가 국제사회에서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지게 되고 그러한 힘이 미국이 주도하던 1극 패권을 무너뜨려, 패권의 다극화(자주화)로 전환되게 한 배경인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북중과 북러가 도대체 어떠한 관계인지에 대한 확인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 “간도되찾기 운동”에 대한 이해
북중 관계, 북러 관계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말씀드리기 전에 이야기를 잠시 돌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역사 교과 과정에도 수록되어 있던 “간도 되찾기 운동”이라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러한 간도가 도대체 어디인가? 교과서에서 이에 대해 자세하게 가르쳐 주지 않고 간도가 북중 접경 지역 어딘가에 있는 작은 마을 정도로 유추하게 만 합니다.
하지만 간도는 한반도의 면적을 넘어서는 크기의 고조선과 고구려의 옛 영토 중 일부입니다. 간도되찾기 운동본부(http://www.gando.or.kr/)에서 소개하는 간도 지도를 보면 간도는 심·요지역, 서간도, 동간도, 북간도로 나뉘며 옆으로 연해주 지역이 있고, 북으로 옛 북방 고토 지역이 있습니다. (오른쪽은 오늘날 중국의 조선족자치주와 동북 3성입니다.)
이러한 간도에 대해 청나라는 19세기 말기부터 간도가 자국의 영토라 주장하며 군대까지 투입하고 지방관까지 두었으나, 대한제국도 그에 강력히 맞서 영토권을 주장하였으므로 간도 영유권 문제는 한·청간의 오랜 계쟁문제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일제는 1905년(광무 9)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뒤 청나라와 간도문제에 관한 교섭을 벌여 오다가 남만주철도 부설권과 푸순탄광 채굴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를 청나라에 넘겨주는 협약을 체결하였고, 이후 이 지역을 다시 정복하여 1932년 “만주국”이라는 일제의 식민 괴뢰국을 건설합니다.
이후 간도는 1945년 만주국을 정복한 중공군에 의해 탈환이 되었고, 중국 영토 내에서 조선족 자지주를 포함한 동북 3성으로 현재 남아 있습니다. 중국에 있는 동북 3성은 랴오닝성(요녕성), 지린성(길림성), 헤이룽장성(흑룡강성)을 지칭하는데, 간도와 옛 북방고토를 포함하면 조선족 자치주와 함께 동북 3성으로는 부족하지만 얼추 비슷하게 보입니다.
근래 들어 중국이 동북공정으로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 역사에 편입시키려 하기에 이에 대한 우려들이 많습니다. 동북공정은 중국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 역사로 만들기 위해 2002년부터 중국이 추진한 동북쪽 변경지역의 역사와 현상에 관한 연구 프로젝트입니다.
중국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역사가 64년 밖에 되지 않는 신생국가이기에, 스스로의 역사를 창조하기 위해 현재 중국의 국경 내에서 벌어진 모든 역사를 자신의 역사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우리 민족의 옛 영토인 북방고토지역과 간도 역시 동북 3성으로 편입하고 있기에 고구려의 역사까지를 자신의 역사라 하는 것입니다.
간도를 포함한 동북 3성 지역은 중국이 아닌 대한제국 당시까지 우리 민족의 영토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 건국의 발상지이자 성지이며, 항일 무장 독립 운동의 산실이기에 결국 중국의 동북공정을 막아내고 우리의 역사를 지키기 위해서는 이 영토를 다시 찾아 와야 함을 말씀드립니다.
■ 북중 관계와 북러 관계에 대한 이해
북중 관계와 북러 관계를 속 시원하게 이야기해주는 자료는 없습니다. 물론 북도, 중국도, 러시아도 서로의 관계가 어떠하다를 명확하게 이야기 하지 않으며 서로의 관계는 불변이 아닌 정세의 변화에 따라 미묘하고 때에 따라서는 빠르게 변해갑니다. 그러하기에 3국의 관계가 어떠한 관계인가는 현 시점에서 정세의 변화에 따라 나름 유추할 수밖에 없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은 생애 총 9차례 방중을 하였고, 이중 후계자 시절인 1983년 1차례를 제외하면 국가지도자로서는 8차례 방중을 하게 됩니다. 물론 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에는 방중 자체가 없었고, 당연히 중국의 도움도 없었습니다. 당시 중국은 초강대국인 미국에 부화뇌동하여 북에게 개혁개방을 요구하며 북을 어떻게 집어삼키나 군침만을 흘리고 있었을 뿐입니다.
2012년 1월 31일 통일뉴스 기사에 따르면 1990년대 초반 제작되어 제공된 북의 기록영화에서 김정일 위원장은 “미국이 핵 공격을 가해올 경우 미국을 지도상에서 아예 지워버리겠다”, “지구를 깨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미국을 소멸할 것이다”, “조선이 없는 지구는 필요가 없다”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지금부터 7~8년 전 부터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 이란 전 대통령 역시 김정일 위원장의 이러한 이야기를 빌려 “도발을 감행하면 이스라엘을 지도상에서 완전히 지워버리겠다.”라고 수차례에 걸쳐 공언한 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이란은 북에 의해 키워졌고 중동에서 북을 대신하여 이스라엘과 미국에 맞서고 있고 중동의 질서를 지금 새롭게 재편하고 있습니다. 이란에 대해서는 차후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이후 1999년 2월 4일 연합뉴스에서 보도된 『미 국무부 "북 대포동 2호 시험발사 단계』라는 기사를 보면 지금도 가능성 여부에 대해 갑론을박을 하고 있지만, 1999년 당시 이미 북이 미국 본토를 직접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실토하고 있으며 당시 기사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국무부의 제임스 루빈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북한은 지난해 8월 3단계 로켓 방식의 대포동 1호를 발사한데 이어 장거리 탄도탄인 대포동 2호 개발을 추진해왔다"면서 "북한은 금년 중 대포동 2호를 첫 시험 발사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루빈 대변인은 "미국이 북한의 미사일 문제에 우선적인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면서 북한이 미사일 개발과 시험발사, 수출 등을 전면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이와 같은 언급은 북한이 미국 본토를 직접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대포동 2호 미사일 개발을 사실상 완료했음을 시사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북을 보며 중국의 장쩌민은 김정일 위원장에게 방중을 요청했고, 김정일 위원장은 2000년 5월 29일 국가지도자로서 첫 방중을 하여 장쩌민 주석과 급변하는 세계에서 양국의 관계를 공고히 하여 국민들의 이익을 증대시키고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21세기에도 계속 발전시켜 협력을 강화시키자는 데에 의견을 같이 합니다.
이후 2001년 1월에 2차 방중, 후진타오 주석이 집권한 2004년 4월에는 3차 방중이 있었으며 당시 김정일 위원장은 전 중국 국가 주석이자,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었던 장쩌민과의 별도 회동을 통해 대규모 대북지원을 요청했으나 장쩌민 전 주석은 중국식 개혁 개방을 채택할 경우 지원하겠다고 하며 팽팽한 기 싸움을 펼쳤다고 합니다.
또한 방중을 마치고 돌아오던 날인 2004년 4월 22일 북의 룡천역에서는 초대형 폭탄테러 사건이 발생합니다. 당시 폭발로 룡천역 주변 500m의 땅이 꺼지고 폭발 지점에 10m의 웅덩이가 생겼으며, 파편 확산 범위가 4Km에 이를 만큼 강력한 폭발로 주변 500M 이내의 건물이 완파되었고 이로 인해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던 것인데 김정일 위원장이 새벽에 비밀리에 먼저 돌아왔기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결국 3차 방중 시기까지도 중국과 북은 표면적으로는 전통적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하고 있으나, 중국의 속내는 세계 제일의 패권국인 미국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고 나아가 북을 집어삼키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후 9월 8일 북 량강도에서는 지진파와 함께 직경 3.5Km에 달하는 버섯구름이 포착됩니다. 이에 대해 미는 핵실험이냐, 아니냐를 놓고 갈팡질팡 했었는데, 이후 2005년 2월 10일 북 외무성은 6자회담 참가를 무기한 연기하겠다는 것과 함께 핵무기 보유 선언을 함으로써 “핵무기를 만들 의사도 능력도 없다”는 기존의 핵정책을 포기하고, 나아가 한반도 비핵화와 함께 전 세계가 동참하는 핵군축을 제안합니다.
이러한 절차를 거치면서 2005년 9월 19일에 북핵 처리를 위한 9.19 공동성명은 발표되었고, 10월 28일에는 후진타오 중국 국가 주석이 4일간의 일정으로 첫 방북을 합니다. 김정일 위원장 체재에서 중국 국가 주석의 첫 방북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며, 북중 관계가 기존과는 다르게 흘러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심을 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김정일 위원장의 4차 방중은 후진타오가 방북한 이듬해인 2006년 1월 10일에 있었고, 역대 방중 기간 중 가장 긴 9일간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4차 방중이 기존 방중과 달랐던 점은 김정일 위원장이 후진타오 주석만이 아닌, 중국 서열 2위와 3위인 우방궈 전인대 상무위원장과 원자바오 총리를 접견하고 나아가 중국을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공산당 정치국 위원들과도 만남을 함께 했다는 것입니다.
나머지 4차례의 방중은 김정일 위원장 서거 전인 2010년 5월에서 2011년 8월까지 1년이 조금 넘는 시간동안 집중적으로 이어졌고, 이러한 방중은 이전 4차례의 방중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즉 북중 관계의 근본이 과거와는 다르게 180°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김정일 위원장은 이 기간 동안 행한, 상식을 뛰어넘는 이해하지 못할 기이한 4차례의 방중으로 북이 가지는 위상을 직접적으로 세계만방에 각인을 시켰던 것임을 아울러 말씀드립니다. 또한 이 기간 있었던 1차례의 방러를 통해서도 북러 관계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의 5차 방중 (2010년 5월 3일 ~ 7일)
김정일 위원장의 5차 방중은 2010년 5월 3일에서 7일까지 5일간, 비밀스럽고도 전격적으로 이루어 졌으며, 북과 중국의 최종 설명으로는 비공식 방문이었고 우리 정부에서는 사전에 이를 전혀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김정일 위원장의 방중 기간 동안 극심한 보도통제로 인해 북과 중국이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중국이 신화통신을 통해 제공한 최종 발표문으로 당시의 분위기를 나름 유추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이를 첨부하며, 북중 관계 역량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는 발표문을 떠나 방중 경로에서 보여준 중국의 행동들을 보면 중국이 북에 대한 예우가 각별한 정도를 넘어선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마저 듭니다.
5차 방중 당시 김정일 위원장의 방중 경로에서 행한 중국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그대로 나열해 보겠습니다.
첫째, YTN의 보도에 의하면 단둥 철로변의 모든 교통이 통제되고 평소 허용하던 사람들의 통행도 50m 간격으로 보완 요원을 배치하여 통제하였습니다.
둘째, 특별 열차에서 승용차로 갈아타서 이동한 선양에서 베이징간 120Km 고속도로에 대해서도 당시 전날 밤부터 전면 통제를 하였습니다.
셋째, 텐진 영빈관에서 베이징간 8차선 도로 역시 보안 요원이 배치되고 한쪽 차선에 대해 완전 통제를 하였습니다.
넷째, 조선일보 2010년 5월 8일자 기사 “[김정일 방중 결산] 정치국 상무위원 9명 총출동… 他외국정상과 다른 극진 접대”에 따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맞은 중국의 최고지도부(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9명 전원이 총출동해 극진한 접대를 한 것으로 밝혀졌다. 다른 외국 정상을 접대할 때는 볼 수 없는 환대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다섯째, 당시 베이징을 방문한 김정일 위원장은 후진타오 주석의 안내로 박오생물유한공사를 방문하였고 극심한 보도통제 속에 중국은 2장의 사진을 언론을 통해 공개하였는데, 언론에 보도되는 사진들은 국가 간의 위상을 나타내는 것이기에 충분하게 엄선하여 선택하는 것을 감안하면 이해할 수 없는 사진이 나옵니다.
당시 중국이 제공한 2장의 사진 속에 후진타오 중국 주석의 표정과 함께 두 손을 가지런히 공손하게 모으고 김정일 위원장을 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지도자가 기관 방문 시 안내하고 설명하고 지도를 받는 기관장의 모습과 흡사하며, 이를 통해 북중 관계 속에 누가 대국의 위치에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외교관례 상 국가지도자에 대한 예우수준은 곧 대방의 지위를 표시하는 척도입니다. 세계 대국 중 하나인 중국에서 미국의 대통령 오바마는 물론 자국의 최고지도자도 누릴 수 없는 가장 최고의 예우를 받았다는 것으로 김정일 위원장이 중국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생각합니다. 어째서 김정일 위원장의 위상이 중국에서 이처럼 갑자기 커진 것일까요? 우리는 이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김정일 위원장의 6차 방중 (2010년 8월 26일 ~ 30일)
5차 방중 후 100일이 조금 넘은 2010년 8월 26일에서 30일까지 5일간, 김정일 위원장은 다시 6차 방중을 하게 되는데, 6차 방중은 5차 방중 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행보들이 함께 합니다.
6차 방중 역시 극심한 보도통제 속에 실제 어떤 대화들이 오고 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방중 과정에서의 이해할 수 없는 행보들로 북중 관계의 변화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생각합니다.
6차 방중은 후계자인 김정은과 함께 했고, 중국의 경제 발전 상황을 보기 위한 것이 아닌 오직 김일성 주석의 항일 무장 투쟁 유적지가 모여 있는 동북 3성 중 길림성과 흑룡강성에 대한 방문만으로 이어졌으며, 특이한 점은 이로 인해 북중 정상 간의 만남이 베이징이 아닌 길림성 장춘에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국제 외교 관례 상 일국의 정상이 타국을 방문하게 되면 타국의 수도에서 타국 정상을 먼저 만나고 방문 일정 등을 이야기하며 일정에 편의를 요청하는 것이 상식인데, 김정일 위원장은 길림성 장춘에 머물면서 후진타오 국가 주석만이 아닌 차기 주석인 시진핑을 비롯하여 중국의 최고 지도부인 9인의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전원을 도리어 맞이했고, 개별적으로 면담을 하였다고 합니다. 누가 국가의 주인인 것인지 혼란스러울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후 2010년 10월 18일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 부주석으로 선출된 시진핑은 동월 25일 베이징 인민대회장에서 열린 『항미 원조전쟁 참전 60주년 좌담회』에서 “위대한 항미 원조전쟁은 평화를 지키고 침략에 맞선 정의로운 전쟁이었다.”라고 합니다.
중국의 이전까지의 한국전쟁에 대한 공식 입장은 “항미 원조전쟁”이었는데, 이를 “세계 평화와 인류 진보를 지켜낸 위대한 승리인 정의의 전쟁”이라 격상한 것이며, 이러한 시진핑의 발언은 명백하게 세계의 1극 패권인 미국에 대한 정면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미국의 오바마는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를 통해 중국을 G2(Group of 2)라 치켜세우며 세계를 함께 선도해 나가자 그렇게 꼬드겼는데, 중국은 미국의 달콤한 유혹을 강하게 뿌리쳤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판을 깨버린 것입니다. 중국과 미국의 국방력의 격차는 20년 가까이 벌어져 있다고 알려져 있고, 경제력 역시 중국이 급성장하고 있다고는 하나 미국을 지배하는 이들인 금융 자본 세력을 상대하기는 버겁습니다.
미국의 속셈이야 안 봐도 뻔합니다. 중국을 치켜세워 함께 북을 견제·고립시키고 최종적으로 타도하는 것이며 만만한 중국은 천천히 처리하면 된다는 것인데, 중국은 미국의 이러한 얄팍한 속셈을 정확히 알아차리고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한국전쟁을 세계 평화와 인류 진보를 지켜낸 위대한 승리인 “정의의 전쟁”이라는 표현을 통해 북의 입장을 대변하며 미국에게 한 방 먹여 버린 것입니다.
불과 6년 전인 2004년까지만 하더라도 미국의 입장을 대변하며 북을 포위·압박하고 중국식 개혁 개방을 요구하던 중국이 도대체 무엇을 보고, 무엇을 확인했기에 초강대국인 미국에게 정면으로 도전장을 던지게 된 것일까요? 누구도 넘볼 수 없다는 아성을 가진 초강대국인 미국을 향한, 자칫 오만으로도 비춰질 수 있는 시진핑의 이러한 자신감은 도대체 무엇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생각하십니까?
시진핑의 자칫 무모하게 보일 수 있는 도전은 도저히 무너지지 않으리라 던 미국의 1극 패권의 몰락과 함께 전 세계의 자주화가 현실에서 실현될 수 있는 것임을 암시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김정일 위원장의 7차 방중 (2011년 5월 20일 ~ 26일)
김정일 위원장의 7차 방중은 20011년 5월 20일 출발하여 7일간 동북3성을 넘어 중국 남부 난징과 양저우까지 이어집니다.
우리 정부는 역시 방중 사실을 알 수 없었고, 양저우와 난징을 거쳐 베이징에 도착하기 하루 전인 방중 4일 후에야 중국으로부터 김정일 위원장의 방중 사실 확인을 할 수 있었고, 이러한 중국 정부의 행동에 김성환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은 “김 위원장이 베이징에 도착하기 전에 알려주는 등 우리와의 관계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한심한 소리를 합니다.
당시 김정일 위원장은 양저우에서 2박 3일 동안 머물렀었는데 누가 김정일 위원장을 영접했는지에 대해 북과 중국은 모두 공식적으로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2011년 6월 4일 YTN에서 보도한 “북·중, '시진핑, 김정일 영접' 숨기나?”라는 기사의 내용을 보면 사실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차기 지도자격인 시진핑 부주석이 직접 양저우까지 내려가 김 위원장 일행을 영접한 것은 북한에 대한 '매우 각별한 대접'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대외적으로 공개될 경우 중국에 대해서는 “굳이 차기 지도자가 직접 양저우까지 내려가서 김 위원장을 영접할 정도로 북한의 눈치를 보는가?”라는 해석도 가능해집니다.
따라서 “중국은 시 부주석을 양저우에 보냄으로써 북한에 대해서는 극진한 예우를 다하되 이런 사실을 대외엔 함구함으로써 외부의 따가운 시선을 피하려 한 것이 아닌가” 하는 관측이 나오고 있습니다.』
또한 2011년 5월 23일 동아일보에서 보도한 “[김정일 방중] 김정일 머문 양저우 準계엄상태… ‘시진핑이 영접’ 소문도”라는 기사 제목만을 보더라도 김정일 위원장의 중국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알고도 남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은 양저우를 거쳐 난징에서 특별열차 편으로 베이징으로 갔고, 2011년 5월 25일 북중 정상회담을 하게 되는데, 당시 정상회담 자리 배치를 보면 또한 의아합니다.
중국 측에서는 후진타오와 시진핑을 포함하여 외교를 담당하는 인사들 위주로 9명이 배석하였고, 북은 김정일 위원장을 포함하여 4명이 배석합니다. 좌석 배치 상으로 보면 중국이 북에 보고하는 형태가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김정일 위원장의 7차 방중에 대해 보수 인터넷 언론인 이데일리에서는 이러한 이해할 수 없는 김정일 위원장의 행보와 의문을 엉뚱하게 왜곡하기 위해 아래와 같은 기사를 보도하였지만, 그러한 보도를 통해서 도리어 중국에서 김정일 위원장을 어떻게 영접했는지에 대한 실상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하이=이데일리 윤도진 특파원] 2011. 5. 27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자국 방문을 맞은 중국 사람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현지 인터넷에는 `가는 곳 마다 민폐`라는 타박이 이어지고 있다. 중국인들은 인터넷을 통해 이번 김정일 위원장 방문에 다양한 종류의 반응을 내놓고 있다.
주목할 부분은 김 위원장을 향한 노골적인 반감이 중국 정부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를 들여다 보자.
우선 생활에 불편을 주는 김 위원장의 방문을 고깝게 보는 불만들이 많다. 창춘(長春), 양저우(揚州), 난징(南京), 베이징(北京) 등 김 위원장이 거쳐 간 곳마다 시민들은 교통 정체에 따른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느닷없는 김 위원장의 방문으로 교통이 통제돼서 학교나 직장에 지각하게 됐다는 얘기가 웨이보에 줄을 잇는다.
"어제 아침 지하철 운행이 갑자기 중단됐다. 누가 지하철에 뛰어들었나? 아니면 김정일 그 늙은이가 또 신제커우(난징 내 지명)를 막았나. 정말 짜증난다. 출근해야 하는데!"(小鹿)
`김 위원장의 특별열차 때문에 기차시각표가 엉망이 됐다` `왜 비행기를 안타고 와서 이렇게 혼란을 초래하나`라는 비난도 난무한다.
상하이(上海), 광저우(廣州), 선전 등 김 위원장이 방문하지 않은 곳에서도 평소보다 차가 막히거나 길가에 공안 요원들이 배치되어 있으면 여지없이 `김정일이 여기 와서 길이 막힌다`는 글이 쏟아진다.
이는 북한에 대한 비호감 표시로 이어진다. 김 위원장의 방문을 두고 `김 위원장이 온 것은 분명 식량 때문이다` `제발 중국에 손 좀 그만 벌려라`는 식의 글들도 줄줄이다. `다함께 외치자. 김정일 돌아가~!`라는 선동도 눈에 띈다.
▲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방문으로 교통이 통제돼 텅 빈 있는 난징 중심가 신제커우(新街口). 지역 일간지 사진기자라는 한 네티즌이 웨이보에 올린 사진이다.
이런 김 위원장과 북한에 대한 악감정은 이를 용인해주는 자국 정부에 대한 비판으로 진화하는 특징을 보인다.
"김정일이 마음대로 중국을 출입하는 것을 보면 나는 중국인으로서 치욕을 느낀다. 마치 한 동네 무뢰배 건달이 내 집 안방을 드나드는 것과 뭐가 다른가"(태양과비, 太陽和小雨)
중국과 북한의 관계를 `원조교제`라고 표현하며 "이젠 이런 관계를 끊어야 할 때"라는 지적도 있다. 또 하나 눈여겨 볼 부분은 중국 정부의 보도 통제를 비판하는 글들이다.
"며칠 전 김정일이 중국에 왔단다. 하지만 신문들은 모두 `외신에 따르면` 김정일이 어찌어찌했다는 식의 보도뿐이다. 나는 답답하다. 여기는 중국 아닌가. 젠장 걸핏하면 `외신에 따르면`이라니. 중국 기자들은 그렇게 능력이 없나. 아니면 특별한 이유가 있나?"(日思录)
결국 김 위원장과 북한을 품어 안는 중국 지도부의 방침은 민심을 등 돌리게 해 정권에 대한 부담으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북한이 김정은으로의 권력 승계가 다급해 경제적으로 중국에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지만, 중국 역시 내년에 시진핑(習近平) 국가부주석으로 권력 승계가 예정돼 있다. 그 만큼 민감한 시기다.
점점 강해지는 인플레이션 탓에 생활고를 호소하는 서민들의 불만도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민심을 외면하면서까지 중국이 북한을 챙기기는 점점 쉽지 않을 것이 불보듯 뻔한 것이다.
중국에서 네티즌을 일컫는 `왕민(網民)`의 인구는 무려 4억 5700만여 명이나 된다. 전체 인구의 40%에 가까운 숫자가 주는 무시 못할 위력은 `70년 혈맹` 북중 관계에 어떤 변수가 될 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
김정일 위원장의 방러와 8차 방중 (방러 2011년 8월 20일~ 25일, 방중 25일~27일)
김정일 위원장은 2001년 특별 열차를 통해 모스크바를 다녀온 바 있으며, 2002년에는 북러 접경지역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푸틴 대통령과 정상 회담을 한 적이 있으나, 이후 러시아 방문은 처음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은 러시아 극동 지역 최대의 수력 발전소인 부레이 발전소를 방문 후 중러 국경지역을 따라 열차로 이동해 울란우데에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는데, 이 또한 이례적인 것이 앞서 이야기하였듯이 국제 외교관례 상 정상회담은 타국의 수도에서 하는 게 원칙이며 2001년 러시아 방문 시에도 당연하게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를 향했는데, 이번 회담은 바이칼 호수 인근의 동부 시베리아 도시 울란우데에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북에서 울란우데보다 모스크바에서 울란우데가 거리가 더 멉니다. 왜 정상회담 장소를 울란우데로 정했는지 알 수는 없으나, 러시아 대통령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는 김정일 위원장과 정상회담을 위해 모스크바에서 그 먼 시베리아의 도시 울란우데로 와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함을 보면 북러 관계가 1950년대의 북과 소련의 관계나, 현재 언론에서 보도되는 것처럼 러시아가 북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나아가 러시아인의 강한 자존심을 감안하면 모스크바에서 멀리 떨어진 울란우데까지 드미트리 메드베데프가 왔다는 것은 러시아가 북에 무언가 의존하거나, 바라는 것이 있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러시아의 바램을 유추할 수 있는 것은 2011년 8월 27일 한국일보에서 보도한 “러시아 군 인사 ‘북·러 軍民 관계강화 중요’”라는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콘스탄틴 씨젠코 러시아 연방군 동부관구 사령관은 26일 "러시아와 북한 군대와 인민들 간 관계강화가 중요하다"고 말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전했다.
사령부 대표단을 이끌고 최근 방북한 씨젠코 사령관은 이날 귀국에 앞서 중앙통신과 인터뷰를 갖고 "앞으로 조선인민과 전통적인 선린 우호관계를 귀중히 여기고 다방면적인 협조와 교류를 위해 노력하겠다"며 이같이 밝혔다.
그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방러에 대해 "양국 간 친선관계를 새로운 높은 단계로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며 "두 나라 수뇌 분들에 의해 마련된 러조 친선이 공동의 이익에 맞게 더욱 강화 발전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씨젠코 사령관은 앞서 25일 리영호 조선인민군 총참모장 겸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을 만나 환담했다.』
최근 러시아는 시리아 사태에 대해 적극 개입하여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을 터줌으로서 중동에서의 미국의 영향력을 약화시켰고, 나아가 중동의 질서를 새롭게 재편하는데 일조하고 있으며 그러함으로 인해 국제 사회에서의 영향력 역시 강화되고 있습니다.
두 개의 사진을 첨부합니다. 좌측은 김정일 위원장의 특별열차 내부에서 브라티야공화국 대통령과 지도 간부와 환담하는 사진이고, 우측은 러시아 방문 행로 및 귀국 동선입니다.
2011년 8월 31일 MBC에서 보도된 “북한방송, 김정일 특별열차 전용칸 공개”라는 기사를 보면 북은 김정일 위원장의 특별열차를 2001년 러시아 방문 시, 2004년 중국 방문 시, 그리고 이번 2011년 러시아 방문 시 3번 기록영화를 통해 공개를 했는데, 2001년과 2011년 내부가 똑같다고 합니다. 단지 바뀐 것은 2001년에는 바닥이 나무마루였는데, 이 바닥 재질이 변한 것을 제외하고 쇼파와 책상 등 모든 집기가 동일합니다.
기사에는 “10년 동안 큰 변화 없이 같은 열차를 이용한다는 것은 북한의 어려운 경제사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는 분석입니다.”라고 하고 있지만 이는 김정일 위원장이 우리들에게 알려진 것과 같이 호화와 사치를 일삼는 이가 아닌 소탈하고 검소한 성품임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가 잠시 옆으로 흘렀습니다. 사진에서 보듯이 김정일 위원장의 특별열차는 달리는 집무실로 알려져 있듯이 그저 이동만 하는 것이 아닌 이동 중에 끊임없이 사람들을 만나 의견을 교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김정일 위원장의 귀국은 중국이 마치 제 나라인양 동북 3성을 가로질러 이동하고 있으며 열차가 중국 국경을 넘어 네이멍구(내 몽골) 후룬베이얼역에 도착하자, 후진타오 중국 주석의 위임을 받은 왕자루이 대외연락부장과 성광주 철도부장, 후춘화 네이멍구 당서기, 후룬베이얼 시서기가 총 출동하여 영접하고 환영 연회를 베풀었다고 합니다. 네이멍구자치구 후룬베이얼은 우리가 알고 있는 회복해야 할 민족의 북방 고토에 포함되는 북쪽 끝입니다.
보시듯이 북은 약소국으로서 강대국인 러시아와 중국을 방문한 것이 아닌 러시아와 중국에 비해 강자의 입장에서 러시아와 중국을 휘젓고 다닌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이를 결코 가벼이 봐서는 안 되며 국제정세가 변화하게 되면 지금까지 가져왔던 고정관념을 버리고 실리와 안보를 동시에 담보할 수 있도록 외교와 안보 정책도 바뀌어야 한다 생각합니다.
김정일 위원장의 서거와 중국 지도부의 조문 (2011년 5월 20일 ~ 26일)
2011년 12월 19일, 김정일 위원장 서거 당시 북은 일체의 외국인에 대한 조문을 허용하지 않았고, 중국의 최고지도부와 군부, 정재계 인사들은 베이징 북한 대사관 찾아 신속히 조문을 합니다. 서거 다음 날인 20일에는 중국의 후진타오 국가주석, 21일에는 원자바오 총리 등 수뇌부가 조문했고 중국 언론은 2장의 사진으로 북에 대한 예우를 표시합니다.
원자바오 총리를 비롯한 자청린, 리커창 이하 정치국 상무위원을 맞이하는 지재룡 중국 대사의 허리가 참 꼿꼿하고, 나아가 중국 최고 지도부가 2줄 정 간격으로 도열하여 목례를 하는 모습을 보면 사진을 찍기 위해 인위적으로 줄을 맞춰 의도적으로 연출을 했다는 느낌이 들며, 뒤로 보이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표어 역시 그러합니다. 도대체 중국은 북에게 왜 이런 과도한 예의를 갖추는 것일까요?
중국이 알아서 언론에 제공한 이 사진은 누군가에게 “우리도 이렇게 하고 있다”라는 분명한 메시지라 생각합니다.
또한 중국은 김정일 위원장의 서거를 자국의 지도자가 숨진 것과 같이 연일 보도를 했고, 12월 28일 치러진 김정일 위원장의 영결식에 대해서는 아예 생중계를 해버립니다. 이를 전하는 MBC 뉴스의 보도 내용을 소개합니다.
중국 언론, 北 영결식 '생중계' 대대적 보도 [MBC 뉴스, 2011년 12월 29일]
『◀ANC▶
김정일 위원장 영결식 장면을 아예 생중계했습니다. 마치 자기 나라 지도자가 숨진 것처럼 커다란 관심을 보였습니다. 베이징 김경태 특파원입니다.
◀VCR▶
중국의 국영방송 CCTV가 한국시각으로 어제 낮 2시부터 평양에서 거행된 북한 김정일 위원장의 영결식을 중국 전역에 생중계했습니다.
북한의 조선 중앙TV가 송출한 화면을 그대로 받고 여기에 동시 통역사를 투입해 말 그대로 실시간으로 영결식 장면을 전달했습니다.
◀SYN▶ CCTV 생중계
"김정일 장군의 혁명사상, 업적, 고상한 풍모와 미소는 영원히 우리 군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특히 CCTV는 김 위원장이 강성대국 건설 등 북한 경제를 회복시키려 애를 썼고 한국과 두 차례 정상회담을 하는 등 대외 관계 개선에도 애를 썼다는 평가를 내놓았습니다.
이와 함께 후계자인 김정은에 대해서도 북한의 당, 정, 군을 이끄는 최고 지도자가 됐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중국의 주요 포털들도 일제히 특집 뉴스 사이트를 마련해 김 위원장 영결식 장면과 소식을 집중적으로 보도했습니다.
또 반 관영 통신사인 중국신문사는 물론 관영 신화통신도 영결식 장면을 찍은 사진들과 함께 행사장 주변의 모습이나 참석자들의 반응 등을 매우 상세하게 보도해 눈길을 끌었습니다.
한편, 김 위원장의 사망 이후 중국군 병력이 북한에 들어갔다는 한국의 일부 언론 보도에 대해 중국 국방부는 완전히 근거 없는 것이라며 이를 공식 부인했다고 중국 관영 신화통신이 보도했습니다. 베이징에서 MBC뉴스 김경태입니다.』
■ 변론을 마치며
이게 현 국제정세 속에서 북중, 북러 관계의 진실입니다. 우리가 미국 다음의 대국이라 알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가 미가 아닌 북에 다가가 머리를 조아리는 것은 반드시 이유가 있는 것이며, 이러한 정세의 변화들이 공고하게 1극 패권을 유지하던 미국의 몰락과 함께 전 세계의 자주화 또는 서방이 이야기하는 다극화를 추동할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대한민국이 지난 시절 행해온 관성으로 인해 한미 동맹에만 매달리게 되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큰 화를 입지 않을까 염려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라도 빨리 말도 안 되는 구시대의 칼, 국가보안법을 역사 속으로 던져 버리고 평화와 번영, 그리고 희망이 함께 하는 헌법이 정하는 평화 통일을 향한 한 길을 가야 할 것입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미국의 몰락을 이야기하면 코웃음을 치는 게 일반적 의견이었으나, 지금 많은 이들이 그러한 미국의 몰락을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지난 11월 5일 국방부 국정감사에서 민주당 김민기 의원이 “남한과 북한이 전쟁을 벌이면 어느 쪽이 이길 것으로 보느냐”라고 묻자, 국방부 정보본부장이 “한미동맹에 기초해서 싸우면 우리가 월등히 이기지만 미군을 제외하고 남북한이 1대1로 붙으면 우리가 진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정보본부장의 이야기에 네티즌들은 공분을 했다고 하지만 정보본부장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한미동맹에 기초해 싸우더라도 이길 수 없으며, 그러함이 미국의 고민이고 몰락의 원인인 것입니다. 북은 대한민국의 군사력은 계산에 넣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피고인은 1992년 군에 입대해서 94년 병장 만기 제대를 하였습니다. 피고인의 병과는 시설공병이었고 모두가 매년 받는 유격훈련도 받지 않으며 시설업무만 합니다. 매일의 일과가 삽질인거죠.
그러한 시설 공병도 1년에 한 달은 FTC 훈련이라는 것을 합니다. FTC 훈련은 Field Traning Course로 야전 공병 훈련을 뜻합니다. 지뢰, 축성, 조립교 등 다양한 훈련을 하는데 피고인은 당시에도 이해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6.25때나 쓰던 조립 철교를 만들고, 송곳과 같은 탐침봉으로 45°도 각도로 지뢰를 찾고, 철조망을 설치하고, 참호를 파고, 이게 과연 현대전에서 필요한 훈련인지? 현재를 6.25 당시로 착각하는 것은 아닌지? 라는 의문이 가시지를 않았습니다. 보병 역시 마찬가지이고, 포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뉴스에서는 정보본부장의 이야기가 논란이 되자 북한군의 군사력이 월등한 것은 맞는데 북한의 무기들은 상대적으로 오래된 것들이 많다며 물타기를 하는데 이 것도 사실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군함과 전투기 등 몇 종류를 제외하고는 우리 군이 가진 무기의 노후화는 정말 매우 심각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미국은 일본을 믿지, 언제라도 북과 통일을 할 수 있는 대한민국을 믿지 않습니다. 또한 자신들이 가진 철 지난 고물무기를 비싼 값에 처리할 수 있는 나라가 필요했습니다. 그러하기에 대한민국 스스로가 자주 국방을 할 수 없도록(대표적으로 미사일 사거리 제한 등) 제약을 걸었고 현대전에 걸맞게 해군과 공군을 육성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김종대씨의 “씨크릿파일 서해전쟁”에서 보듯이 기형적이게 육군에 치중하게 함으로써 자주국방 능력을 망가뜨렸던 것입니다.
그러한 기형적 군의 형태에 문제를 제기하고 고치고자 하면 그 부족한 해·공군 능력을 보완하기 위해 주한 미군이 주둔하고 있지 않느냐? 라며 달랬을 것이고, 이로 인해 군은 미군에 완전히 종속이 되어 버렸으니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만은 절대 안 된다고 난리를 치게 되는 것입니다. 북에서는 대한민국의 군을 미군이 방패막이로 앞세운 대포밥이라고 합니다. 이게 암울한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지난 번 변론요지서에서 말씀드렸듯이 왜 군이 군 최고통수권자인 대통령의 말을 듣지 않고 다른 이의 말을 더 높이 듣는 다 생각하십니까? 스스로의 자주 국방 능력에 대해 잘 인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군에 완전히 종속되어 버려 어쩔 수 없는 스스로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군이 없으면 바로 무너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큰일 날 대한민국입니다. 미국은 침몰하는 난파선임을 부디 깨달아야 합니다. 중국과 러시아가 북에 꿀리는 것은 북이 핵을 개발하고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보유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중국도, 러시아도, 모두 핵을 가지고 있고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를 잘 생각하시기 바라며 부족하지만 다음 변론에서는 중동의 새 질서와 유럽의 변화들, 그리고 미국이 앞으로 어떻게 몰락할 것인지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첨부 : 김정일 위원장 5차 방중에 따른 중국 관영 신화통신의 발표문 사본 1부. 끝.
2013년 11월 00일
위 피고인 0 0 0 (인)
제주지방법원 제1형사부 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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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제된 댓글 입니다.
댓글을 지우셨네요. 2년 먼저 제대를 했으면, 저 보다 윈데,,죄송할 필요는 없습니다.^^
훌륭한 글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띄엄 띄엄 읽었지만 읽은 부분들이 다 좋은 글들이었습니다.
sampling 검사 결과 100% 좋은 글!
저의 blog로 (펌 해서 )모셔 갑니다.
저 혼자(서)만 보기(에)는 아까운 글입니다.
저의 blog의 방문자들과 함께 보고 싶은 글입니다.
나중에 시간이 나면 저의 blog에서 찾아 내서 꼼꼼히 읽으려고 합니다.
여유가 있는 시간에 정독 하려고 합니다.
똘똘이 스머프 홍익(인간)님의 글들은
술 취한 똘똘이 스머프, 술 주정뱅이 스머프, 주사 스머프로서
안하무인 격으로 타 회원들을 무시, ... 폄하, 격하, ...비난, 욕 했던 글들은 뺀
거의 100%의 글들에 추천을 (눌러 )드려 오고 있습니다.
홍익인간 님이 (악질 회원과 불량 회원들인 )“수준 미달”이 욕쟁이 “티무르” (와 그의 패거리들)보다(야) ((당연히 ))100배, 1 000배, 10 000배는 (더 )나은 진정한 (최 )우수 회원이십니다!
(요즘의 )홍익인간 님은 정론직필 카페에 매우 유익한 회원이십니다.
저는 순수한 순진한 온순한 이, 순들이 3, 그래서 3순이인데
티무르 에게 욕플 악플 뻘플 똥플 로 (1번의 )봉변을 당한 이후로
감정이 점점 더 나빠져서
요즘에는 (티무르 에 대한 반 감이 누구보다도 강하고 사람들 모두에서 가장 강한 )티무르 안티, 안티 티무르 가 되어 있습니다.
(아주 )꼴도 보기 싫습니다!
(아예 )상대할 가치를 못 느낍니다!
저는
(원래 )온순한 사람이지만
그보다도
(가장 기본 근본 근원 적으로는 )give and take 의 인간입니다.
@나는 사랑을 꿈꾼다.
티무르님은 저도 답답하지만, 가만히 지켜보면 세상에 대한 한이 무척 많은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기에 어떤때는 안쓰럽기까지 합니다. 글을 쓴 것을 보면 대개 술이 한잔 들어가 있는 것 같고요.
여하튼 님의 댓글 감사드립니다.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댓글도 훌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