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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공부’니 ‘선생’이니 하는 좋은 말이 삶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지난 연말, 수년 만에 (오승준 군의 표현에 따르면) 친정 자매들 -고월 백진숙, 부용 이선이, 청라 정일신-이 부용의 장소에 모여 그간 못다한 말들을 드문드문 나눈 이후, 어느 순간, 그 묵고 묵은 어휘들이 다시 제 자리를 찾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결국, 부용의 제안으로 <여시아문>을 다시금 읽는 중이다. 여러 번 읽은 책인데, 단 한번도 매듭을 짓지 못하였지 싶었건만, 이번의 더불어 읽기로 인해 작은 매듭 하나 지어지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다.
<여시아문>은 일본 불교학자인 마이다 슈이치가 아케가라수 스님과의 만남을 통해 정토종에 발을 딛고, 삶을 내어 던지듯 스님의 가르침을 일평생 좇아, 무상의 진리 속에서 일상을 살아내게 된 연유를 소상히 밝히고 있는 책이다. 한마디로 ‘종교’서적이며, ‘일본 정토종’이라는 종교에 귀의하게 된 개인적 체험담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렇다보니, 정토종에 관한 이해가 없다면, 눈과 귀에 찰떡같이 붙기가 쉽지 않은 책이다. 잠시 정토종에 대해 살펴보자.
정토교는 말법의 세상에는 아미타불의 본원(本願, 정토문)을 믿고 부처의 공덕을 생각함으로써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는 교의를 가지고 있다. 아미타불은 마음을 다해 성실하게 부르면 누구든 구원해 준다는 자비 깊은 부처로, 아미타불에 귀의한다는 뜻의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염불을 외는 것만으로 극락왕생할 수 있다는 개념은 지치고 무지한 서민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1].
중국에서 정토종은 수십 년간 수 차례 왕조가 바뀌던 혼란기에 지친 민중 사이로 급속도로 퍼져 정토종(淨土宗)으로까지 성립되었는데, 담란(曇鸞)·혜원(慧遠)·도작(道綽)·선도(善導) 등에 의하여 더욱 발전되었고, 신라의 원효(元曉)·경흥(憬興)·현일(玄一)·의적(義寂)·태현(太賢)·신방(神昉) 등에 의하여 우리 나라의 정토사상이 전개되었다.
일본에서의 정토종은, 극심한 사회적 혼란을 겪는 헤이안 시대 말기 말법사상의 유행 가운데 도래하였다. 종래의 융합적 성격을 띤 불교를 배척하고 오로지 하나의 구원의 길만을 선택해서 따르려는 전수(專修)운동이 강하게 일기 시작하던 무렵, 무사들이 지배하는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1192~1333]에 들어오면서 새로운 종파들이 출현했으며, 가마쿠라 시대에 성립된 이러한 전수 불교적 종파들을 남도육종이나 천태종과 진언종으로부터 구별하여 신불교(新佛敎)라 부르기도 한다.
전수 불교의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전수 염불을 주창한 호넨[法然:1132~1212]으로서, 오직 진실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정토에 왕생한다는 단순한 신앙운동을 전개하여 많은 대중적 호응을 얻었으며 일본 정토종(淨土宗)의 원조가 되었다. 호넨의 제자들 가운데는 염불의 행(行)을 중시하느냐 아니면 아미타불의 본원을 믿는 믿음(信)을 중시하느냐에 대한 문제로 대립이 발생한 가운데 믿음을 중시하는 신란[親鸞:1173~1263]의 출현과 함께 정토진종(淨土眞宗)이라는 새로운 종파가 성립되었고, 현재 정토진종은 일본불교의 최대 종단을 형성하고 있다.
<여시아문>을 살피다
<여시아문>의 저자인 마이다 슈이치와 그 스승인 아케가라수 스님의 만남은, 정토종의 역사와 토양 위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이 바탕이 없이 두 사람의 만남의 이치를 이해할 길은 없다. 마이다는 그의 스승인 아케가라수 스님과 자신의 만남과 공부길 위로, 목숨을 걸고 송나라로 떠나 여정선사[如淨: 1163-1228]를 만난 일본의 도겐[道元: 1200~1253]의 모습을, 정토종의 종조인 호넨을 ‘평생의 스승’이자 ‘여래의 현신’으로서 좇았던 신란의 모습을, 더 나아가, 세자재왕 붓다 앞에서 본원(“만약 제가 부처를 이룰 때 시방의 중생들이 지극한 마음으로 믿고 원해 저의 국토에 태어나고자 저의 이름을 열 번을 불러도 태어날 수 없다면, 저는 결단코 부처가 되지 않겠습니다.”)을 서원하는 법장보살(아미타불)의 모습을 투영시키고 있다. 다시 말해, 마이다는 ‘좋은 선생’을 만나 ‘좋은 학생’이 되어 ‘좋은 삶’으로서의 깨달음을 얻어낸 공부인들의 인연법과 계보 속에 자신의 스승과 자신을 배치시킨다.
마이다의 회상은 우선 ‘무상(無常)’으로 시작한다. 삶을 뒤바꾸는 체험의 근간에는 ‘그동안 소중하게 여기던 모든 것을 한꺼번에 빼앗기는(62)’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가치전도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아직, 나는 나다. 공부는 멀었다. 그렇다면, 나(라는 소중함)의 경계를 깨뜨려줄 그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나를 완전히 죽여 버리는 사람(83)’인 참선생을 만나는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일로서, 선생과의 만남이라는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기존의 ‘나’라는 지난한 사태는 끝날 수가 없다.
도겐선사는 극적으로 여정선사를 만났던 순간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마침내 천동산에서 여정선사를 만났을 때, 내 생애 가장 중요한 일이, 나의 구도행이, 끝나 버렸다(76)”. 이처럼, 선생을 만나야만 무언가를 끝낼 수 있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내 머리를 깨뜨려 부수는 일(95)'을 좇는 이들로서, 이들에게 있어 선생이란, 학생의 어떠함에 대하여 끊임없는 부정만 있을 뿐, 인정이란 없는(94) 존재다.
”때로 그분이 악마 두목이라는 생각이 든 적도 있었습니다. 그분이 제 약점을 날카롭게 찌를 때는 무서웠지요. …. 제가 서 있는 바탕이 무너져 내렸고, 저는 완전히 묻혀 버렸습니다. 그분은 저에게 있는 모든 것으로 가져가 버렸어요. 그리고 바닥에 쓰러질 때까지 계속해서 밟고 걷어찼습니다(100).”
선생에 의해 부서짐을 당하는 학생에게는 그 선생에게 의지하려는 마음이 차오른다. 그러나, 선생은, ‘법’ 앞에 홀로 서야 함을 당부하며, 선생에게로 한없이 기울어진 학생의 온 존재를 아프게 찌른다.
“좋으신 분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신뢰하는 것”으로 묘사되는 선생과 학생의 관계는 앞에서 말씀드린 연인 관계와 흡사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점에서 그것을 이해할 수 있어요. 연인 관계에서는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 중요하지요. 그러나 선생-학생 관계에서는 선생을 통하여 빛을 비추는 ‘법’이 중요합니다. “그분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이에요. 신란은 호넨 안에서 아미타 부처님을 보았습니다. 그냥, 호넨이란 사람을 본 게 아닙니다. 학생이 선생한테서 ‘법’을 보지 못할 때, 이른바 ‘선생에 대한 잘못된 의존’이 생겨나지요. 선생이 가지고 있는 것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법’입니다. 그의 인격도 재질도 아니에요. 법이, 염불을 통하여 아미타 부처님의 구원을 입는다는 법이, 그게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선생이 당신 몸으로 체현하고 있는 ‘법’에 곧장 다가가야 해요. 사람이 아니라, 인격이 아니라, 법을 봐야 합니다. 직접 여래를 만나야 하는 거에요.” 157
선생의 말이 아닌 나의 말, 선생의 깨달음이 아닌 나의 깨달음이 무엇인지 답해야만, 학생은 학생일 수 있고, 학생이 학생이 되어야만 선생은 선생일 수 있다.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이냐고 묻자 “뜰 앞 잣나무(庭前栢樹子)”라 답했던 조주(趙州)선사의 제자인 법안스님에게, ‘과연 그러한지’를 묻는 질문에, 법안은 '조주 스님은 실로 그런 말씀 하신 적이 없다. 조주 스님을 비방치 말라’고 하였다는, “사무차어(師無此語. 스승은 그런 말씀 없으셨다)”의 가르침은, ‘말로서의 스승’은 이미 없는 것임을, 아니, ‘스승’이란 이미 없는 것임을, 그 대신 오롯이 ‘내’가 서 있는 것임을 웅변하는 셈이다. ‘그런 말씀 없으’신 스승은, 참된 선배는 자기 자신이며, 참된 안내자는 나 자신이기에, 붓다의 길을 배우는 것은 결국 홀로 서기와 자유의 길을 배우는 것이고, 그것은 자기 자신을 배우는 것(214)임을 알려주는 대자유인이다. 대자유인으로서의 선생을 만난 학생은, 선생을 통해 자신보다 더 큰 자신을 발견하고, 그 자신에게 무릎 꿇고 자기를 배운다.
“자기를 배운다”는 말로 선사들은 자기를 스승으로 모시고 그 앞에 무릎 꿇는 가장 겸손한 길을 설명합니다. 215
자기를 배우는 순간, 학생에게 있어 ‘나’는 이미 없다. 선생을 통해 ‘나’라는 감옥에서 이미 풀려난 학생에게 있어, 이제는 세상의 모든 생명이 바로 자신이다. 그리고 이처럼, ‘나’가 없는 사람만이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을 자기생명으로 여길 수 있으며, 그 사람만이 아무도 그를 대적 못하는 세상에서 살 수 있다(218). 참사람, 즉, 선생을 만난 뒤에야 비로소 우리는 역사의 장에서 생각을 끝낼 수 있고(233), 생각이 끝난 자리에서 새 삶은 시작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하는 유일한 일은 배우는 것뿐이다.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하는 유일한 일은 배우는 것입니다. 끝없이, 영원히 배우는 거에요. 배움 안에서 우리는 말 못할 즐거움을 경험합니다. 우리가 끝없이, 영원히 배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어요. 그리고 바로 이 ‘끝없음’이 곧 다르마입니다. 그것은 ‘법장보살의 끝없는 배움’이지요. 세자재왕 붓다께서는 법장에게, 국자로 바닷물을 모두 퍼내리라 굳게 결심한 사람처럼 끝없이 배우고 또 배우면 마침내 깨달음을 얻게 되리라고 가르치십니다. 이 가르침을 받고 법장은 끝없는 배움의 길에 들어서지요.” 234
이 끝없는 배움의 도상에서 학생은 선생을 업연과도 같이 만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선생을, 마땅히 그 한 사람 만나기를 강하게 바라게끔 양육(124)되는 과정 자체가 바로 ‘공부’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생애가 아무 조건 없이 결합되는 것(166), 다시 말해, 참된 신뢰 안에서 선생과 학생은 서로의 생애를 걸고 공부한다. 그 공부의 결과가 무엇이든, 이들은 공부 안에서 태어나고 죽고 다시 태어난다. 구속함 없이 서로를 사랑하며, 우러름 없이 서로를 경배한다. 망각 없이 헤어지고, 반복하나 어리석지 않다. 이런 선생과 제자라면, 그 공부가 향하는 곳이 ‘지옥’이라 해도 상관이 없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제 식으로 말하자면, 신란은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에요. “내가 시방 잘못을 저지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만 그래도 나는 호넨 성인에게로 갑니다.” 한 사람이 자기 생애를 다른 사람에게 맡길 때에는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참된 신뢰는 생애를 거는 거에요. 판단과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류에 빠지기 쉬운 사람이 오류에 빠질 수 있음을 의지처로 삼는” 것은 한 사람의 생애를 다른 사람의 생애에 무조건 맡기는 일이에요. 그것은, 말하자면 두 사람의 생애가 아무 조건 없이 결합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일컬어 신뢰라고 하지요." 166
나가며
짧지 않은 세월 동안 ‘공부’라는 화두에 사로잡혀 살았다. 늘 무언가를 좇았으나 늘 혼자였고, 늘 무언가를 마셨으나 늘 목이 말랐다. 그 결과, 짧지 않은 세월 동안 ‘공부는 실패했다’는 자책에 사로잡혀 살았다. 2022년 세초에, 그간의 ‘공부실패’를 떠올리며, 나는 “그 한 사람 만나기를 강하게 바라게끔 양육”된 나의 모습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양육의 과정 자체가 바로 공부였음을 뒤늦게 깨단하였다.
나는 여전히 ‘참사람’으로서의 선생을 기다린다. 선생과의 만남 없이는 한 뼘도 자랄 수 없다고 지독히도 무섭게 믿고 있다. 그렇다, 나는 여전히 ‘공부’를 하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선생이 없는 어둑한 시절에도, 나는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어떤 간절함을 길러내었다. 쓸쓸하고 아픈 시절이었으나, 그 푸르스름한 공부의 시절 속에서, “사무차어(師無此語. 스승은 그런 말씀 없으셨다)”라는 말을 스스로에게 되뇌며, 뜰 앞 잣나무(庭前栢樹子)가 되어 세한의 시절을 살아내었다.
서로를 닮아 있는 간절함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동무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이들 -고월 백진숙, 부용 이선이-에게 이 자리를 빌어 이번 생에는 다 못 갚을 은혜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우리에게 아직 짧은 ‘공부’의 시간이 더 남아 있다면, 동무들아, “국자로 바닷물을 모두 퍼내리라 굳게 결심한 사람처럼 끝없이 배우고 또 배우면 마침내 깨달음을 얻게 되리라”는 믿음 하나로, 서로의 곁에서 서로를 선생 삼아 끝없이 배우고 또 배워 마침내 저 언덕너머에서 다시 만나볼 일이다.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娑婆訶
[1] 법장보살은 일국의 왕이었다. 그는 세자재불(世自在佛)로부터 법문을 듣고 발심 출가하여 원을 세워 수행한 결과 청정한 세계를 향유한다. 부처님은 그 수행의 결과를 널리 알려 다른 사람들 또한 그와 같이 원을 세울 수 있도록 한다. 그 내용이 법장보살의 48대원이다. 법장보살은 원을 성취하여 부처를 이루어 극락정토를 건설한다. 그 부처님이 바로 아미타부처님이다. 법장보살의 48대원을 아미타부처님의 본원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본원 중의 본원이 제18원이다: “만약 제가 부처를 이룰 때 시방의 중생들이 지극한 마음으로 믿고 원해 저의 국토에 태어나고자 저의 이름을 열 번을 불러도 태어날 수 없다면, 저는 결단코 부처가 되지 않겠습니다. 단 오역죄를 지었거나 정법을 비방한 자는 제외하겠습니다.” 출처: 법보신문(http://www.beop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