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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9일 연중 제5주일>
‘자기애성’을 뛰어넘어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오늘 복음에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중략)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 이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상징적으로 잘 나타내주고 있다. 어쩌면 ‘교회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다.’라고 답해도 좋으리라. 게다가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신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비를 선포하고자 한 것(1고린 2,2)이라고 구분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1고린 2,5)이라고 말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소금과 빛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까? 바오로 사도가 말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신비’란 무엇일까? 이 말씀들의 뜻을 잘 아는 것도 중요하겠으나 무엇보다 가톨릭 신앙에 매우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눈에 띈다. 그것은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둔다.’라는 것이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기도를 많이 하는 신자들도 이따금 고민을 털어놓는다. 어떨 때는 열정도 생기고 피곤한 줄 모르고 열심히 뛰어다니지만, 어떨 때는 흥이 나지 않고 열정이 식었는지 기도를 해도 별 감흥도 없고 그저 그럴 때가 있단다. 한주라도 미사에 빠질세라 전전긍긍하며 몇 년을 단 한 번도 주일미사에 빠지지 않았다는 신자들도 가끔 고민을 토로한다. “열심히 다녔는데 어찌 제 생활은 나아진 것이 없는 거죠? 제가 뭘 잘못했나요?” 그러면서 공통으로 하는 말이 동료 신자들이 신앙생활에 오히려 방해된다는 둥, 신부님의 태도나 강론이 별로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는 둥, 수도자에게 실망한 나머지 성당에 나가고 싶지 않다는 둥 불평을 한다.
그래서 나온 말이 먼저 우리가 ‘복음화’되어야 한다는 구호다. 말인즉, 먼저 우리가 복음화되어 신자다워야 선교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 신앙을 권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아직 준비가 덜 된 모양새다. 어째서 몇십 년 동안이나 신앙생활을 하고 미사 전례와 기도 생활을 해 왔는데 아직도 ‘복음화’되어야 한단 말인가? 무엇이 문제인가?
예전에 심리상담대학원에서 ‘신앙 성숙도와 대인관계 적절성’에 관한 졸업논문을 쓴 적이 있다. 신자 7백여 명의 조사 대상에 유의미한 답변자 4백여 명 표본으로 얻은 통계 결과, 신앙이 성숙한 사람일수록 대인관계의 적절성이 높게 나왔다. 분명 신앙과 한 인간의 성숙 정도는 유의미하게 일치한다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인지 밝힐 수 없지만, 몇십 년 동안이나 신앙생활을 했는데 공동체 내에서 서로에게 여러 가지 불편과 불만을 여전히 느끼고 있다면 오랜 신앙생활이 자신의 성숙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여러 가지 측면에서 우리의 신앙생활을 성찰할 수 있겠지만 간략하게 심리 내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현대인의 자기애성 성향(나르시시즘)’이 하나의 이유일 수 있겠다. 현대인은 어느 시대보다 ‘자기애성’이 강한 시대인으로 분류된다. 자기애성 자체를 ‘좋다’ 또는 ‘나쁘다’라고 평가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어린아이일수록 자기애성이 강하게 나타나고 이는 아이의 성장환경과 발달에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물론 아이는 점점 자라나면서 자기애성 안에서 긍정적인 자기 경험을 쌓으며 이타성을 발달시킨다. 이 과정을 보노라면 인간이 어디를 향해서 가는 존재인지를 말해주는 듯하다. 이타성은 곧 ‘소금과 빛’의 은유로 말하는 바와 전혀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든지 이러한 이타성을 발달시키지 못한 채 어린아이의 자기애성에 머물러있게 되면 여러 가지 어려움이 발생한다. 뭐든지 ‘자기’를 강조하고 ‘자기’ 안에 머물러 마치 ‘자기’ 안에 갇혀있는 양 전혀 자유롭지 못한 모양새다. 공동체 안에서도 ‘자기’가 우선이고 오직 ‘자기’만이 최고인 양 그러한 태도에 사람들은 무척 힘들다. 기도와 영성 생활은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의 성장을 위한 방편임에도 불구하고 뭐든 자기를 드러내려는 장신구로 여기려 하니 성장이 일어날 수 있을까? 속이 있는 사람은 이를 세련되게 위장하여 넌지시 드러내지만 이마저도 안되는 사람은 모두가 다 찡그리는데 본인만 모르고 좋아한다. 모두의 반대 속에서도 자신의 소신으로 살아가는 그런 모습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이 신앙생활과 기도 생활에서 ‘자기만족’에 젖어있는 것 같다.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매우 미숙하면서도 신앙과 영성에서는 자기 전능감에 빠진 그리스도인, 몇십 년의 신앙생활을 한들 무엇이 달라질까?
소금의 맛은 짜다. 그러나 소금은 짠맛을 위해서 녹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음식이든 소금이 들어가면 ‘간이 맞으면서’ 제맛이 난다. 소금은 ‘너를 너답게’ 해준다. 너에게 녹아 들어가 ‘나는 사라지고’ 너는 더욱 ‘너’가 된다.
빛은 밝다. 자기 스스로 빛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비추어주기 위해서’ 빛이다. 머나먼 동방에서 아기 예수님께로 박사들을 인도했던 그 빛처럼, 빛은 누군가를 인도한다. 빛은 사람들을 지혜로 인도하고, 절망에서 희망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인도한다. 빛은 ‘그리스도에게’ 그리고 ‘그 자신에게’ 인도한다.
소금이든 빛이든 ‘자기’에게 집착하지 않는다. ‘짠맛’이든 ‘밝게 빛’이 나든 그 자체는 별 의미가 없다. 어쩌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로 이런 존재가 아니었을까? 그들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나 그들이 세상에 그리스도를 전하고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갈 때 비로소 ‘너를 너답게 해주는’ 소금이 되고, ‘그리스도 예수님께 인도’하는 빛이 되지 않을까?
물론 어린 시절 부모의 균형 있는 사랑과 관심 속에 성장한 사람이라면 성숙한 이타성을 충분히 발달시켰을 것이지만 대부분 그렇지 못한 우리는 ‘자기애성’ 성향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마냥 부모님을 원망하며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성인이 되면 스스로 자신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을 키우면서 자기 내면에 ‘이타성’을 발달시켜야 한다. 하느님의 사랑은 스스로 자신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길 줄 아는 힘을 키우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비신앙인보다 신앙인의 경우, 자신의 어린 시절의 상처를 딛고 일어서서 자기를 소중히 여기며 타인을 위할 줄 아는 내적 힘을 키우는 데 훨씬 유리하다. 신앙이 ‘인간 성숙’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분명하다.
열심히 하는 신앙생활, 많은 시간의 기도 생활 등 다양한 전례에 참여하는 것이 분명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먼저 중요한 것은 신앙생활을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자기를 사랑할 줄 아는 것이요.’ ‘자기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아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예수님께서 ‘이제 너희를 벗이라 부르겠다.’라고 하시고 우리 모두를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자기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진정한 신앙, 믿음을 가진 자라 할 수 없으리라. 우리 대부분 부족한 인간 부모에 의해 온전한 양육을 받지 못했지만 ‘하늘 부모(하느님)’에 의해 자기 사랑과 이타심을 함께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자기 사랑과 이타심으로 다시 태어난 우리는 비로소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 아닐까?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신비’가 바로 그 절정의 모습이 아닐까?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 5,16)
첫댓글 어쩌면 모두가 저의 신앙 생활을 콕콕 찍어 말씀하시는 거 같아
찔리면서도 후련해지는 마음입니다
나는 사라지고 너는 더욱 너답게 하는 소금.
그동안 소금은 짠맛을 내기위해 녹는다 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거같은데
좀 다른 해석인듯,같은 뜻인듯 한데 ~~
뭔가 다르게 느껴집니다
ㅎㅎ
하느님의 사랑은 자신을 사랑하고 더불어 타인과 함께
사랑을 나눌수 있을 때 행복을 느낄수 있는 것..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