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교리문답 세례 5
우리의 태도와 상관없이 세례는 세례다.
어리석은 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바른 신앙으로 받지 않으면 그 세례는 말짱 도루묵이다.’
그렇게 따지면 이런 논리가 되어 버립니다.
‘내가 믿지 않으면 그리스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런 논리는 하나님 은총에 맞지 않습니다.
이 질문은 세례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잘못 받았어도 세례는 여전히 세례입니다. 아무리 잘못된 것처럼 여겨지고, 죄인에 의해 집례된 것이라고 해도 훼손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다음의 문장은 꼭 들어맞는 말입니다. ‘오용이 본질을 훼손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확증한다.’ 금은 금입니다. 매춘부가 죄와 수치 가운데 몸에 걸쳤을지라도 그것이 금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세례는 받는 이의 인격과 상관없이 그 자체로 가치 있다
그러므로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세례는 언제나 유효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 완전한 본질을 보존합니다. 믿음 없는 별종 인간이 받았다고 해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말씀은 사람에 의해 변하거나 바뀌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열광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보지 못합니다. 세례를 그저 시냇물과 그릇에 담긴 물로만 보고 공적 권위를 가진 집례자를 그저 그런 보통 사람으로만 봅니다. 믿음과 순종으로 보기 않는 한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고, 아무런 가치도 둘 수 없습니다.
그 이면에는 비열하고 선동적인 악마가 숨겨져 있습니다.
악마는 공적 권위자의 면류관을 가로채서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모든 행위와 그분의 질서를 왜곡하여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 무장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말씀에서 떠나지 않도록 하여 세례를 단순한 상징이라고 말하는 열광주의자들의 환상을 차단해야 합니다.
물속에 잠겼다가 다시 올라오는 행위에 세례의 의미가 담겨 있는데, 이는 옛 아담이 죽고 새사람으로 매 순간 부활하는 것을 뜻한다
끝으로 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인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렇다면 세례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왜 하나님께서 이런 외적 표지와 보이는 행동을 통해 성례전을 제정하셨는지를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세례 때 행위는 이렇습니다.
물속에 완전히 잠긴 다음, 다시 그 위로 올라옵니다.
물속에 잠겼다가 다시 올라오는 이 두 가지 행위는 세례의 능력과 효과를 암시합니다.
이는 옛 아담이 죽고 새사람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우리의 전 생애에 걸쳐 계속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매일 세례’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 한 번의 세례로 시작되었고, 매일의 삶을 통해 계속 갱신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매번 옛 아담에 속한 것들을 끈임 없이 제거해야 하고, 새사람의 것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옛 사람이란 무엇일까요?
옛 사람이란 아담에게서 유전된 것입니다.
분노, 미움, 시기, 음탕, 탐욕, 게으름, 오만불손, 의심처럼 모든 악독함에 미쳐 있는 것이 옛 사람입니다. 태생적으로 옛 사람에게서는 선한 것을 하나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나라 안에 들어갈 때, 이런 악독함은 매일 작아집니다. 또한 그분의 다스림 가운데 오래 머물수록 그 자리에 온유, 인내, 겸손으로 채워집니다. 그리하여 미움, 시기, 탐욕, 오만불손 같은 것들이 무너져 버립니다.
매일 세례를 통해 새롭게 태어나는 일은 온전함을 위해 평생에 걸쳐 수행해야할 과정이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 가운데 베풀어지는 물세례의 바른 용도이며, 물속에 잠겼다가 다시 올라오는 행위와 본래 뜻입니다. 이 일이 계속 수행되지 않고 옛 사람에게 고삐를 넘겨주는 순간, 옛 사람은 더욱 강한 모습으로 찾아옵니다. 즉 세례의 삶을 살지 않고 세례에 반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은 매일 난폭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속담도 있습니다.
‘난폭해질수록 더욱 약해진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일 년 전, 어떤 사람이 의기양양하고 탐욕스러웠다고 가정합시다.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은 훨씬 더 심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부도덕한 사람과 함께 아이가 자랐다면, 그 아이 역시 그 뒤를 그대로 따라갈 것입니다. 그렇다고 본성적으로 어린아이가 특별히 부도덕한 것은 아닙니다. 보고 배운 그대로 음란하고 탐욕스럽게 자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른이 되면, 부도덕한 아비와 함께 살아온 만큼 악독함은 더욱 강력해집니다.
그러므로 세례의 능력으로 제어하고 막지 않으면, 옛 사람은 그 본성대로 거침없이 활개를 치게 됩니다. 반대로 그리스도인이 되면, 옛 사람이 완전히 파멸될 때까지 매일매일 조금씩 사라지게 됩니다. 이것이 매일 세례의 물에 잠겼다가 다시 새롭게 되살아나는 것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제정된 외적 표지는 그 자체로도 효력이 있지만, 그것을 넘어 암시하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믿음이 열매로 나타나는 곳에서는 세례가 공허한 상징이 아니라 그에 수반하는 효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신앙이 결여된 곳이라면, 그것은 그저 열매 없는 표지일 뿐입니다.
우리가 세례의 배에서 뛰어내릴 수는 있어도 그 배는 절대 가라앉지 않는다. 우리는 ‘참회’를 통해 그 배로 돌아갈 수 있다
여기서 세례의 능력과 의미는 제3의 성례전으로 불리는 ‘참회’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참회는 세례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참회가 무엇입니까?
진정을 다해 옛 사람을 공격하는 것이고, 새로운 삶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회의 삶을 산다는 것은 세례의 능력이 가득한길로 들어선다는 뜻이 됩니다. 이 길에는 새 삶의 의미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새 삶을 만들어 내고, 증진시키고, 계속하게 합니다. 세례 안에는 은총과 영과 능력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으로 옛 사람을 누르고 새사람으로 나와 강하게 자랍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영원히 보전됩니다.
비록 우리가 부패하고 죄를 지을지라도, 우리에게는 항상 세례의 길이 있기에 옛 사람을 다시 굴복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을 다시 부을 필요는 없습니다. 수백 번 물에 들고 날지라도 결국 한 번의 세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번 세례의 효과와 의미는 여전히 유지되고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참회는 세례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며, 그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를 통해 이전에 시작되었던 것이 갱신되고, 잊혔던 것이 다시 새롭게 됩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세례 안에서 살아왔지만, 세례의 바른 이해에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에 다시 빠지거나 넘어질 때, 더 이상 세례가 필요 없어졌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세례를 단 한 번으로 끝나는 행위라고 생각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실제로 히에로니무스는 이렇게 서술하기도 했습니다.
‘참회는 두 번째 널조각이다. 세례의 배가 부서진 다음, 이것을 붙들고 헤엄쳐 바다를 건너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우리도 이렇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례의 용법을 바르게 진술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식이라면 우리에게 세례는 더 이상 필요가 없습니다.
세례의 배는 절대 파선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배는 앞서 말했듯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그 배에서 미끄러지고 떨어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 배를 똑바로 응시하고 헤엄쳐 그곳에 다시 올라선 다음, 항해를 계속할 수 있도록 떨어지지 않게 단단히 붙들어야 합니다. 전에 처음 시작했던 때와 같이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실하게 우리와 함께하신다
자 이제 우리는 세례가 얼마나 귀하고 탁월한 것인지 알았습니다.
세례는 ①악마의 목구멍 안에 있는 우리를 낙아 챈 다음 하나님의 소유로 만듭니다. ②죄를 누그러뜨리고 제거합니다. 그리고 세례는 ③날마다 우리로 하여금 강하고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게 하여, 비참함 가운데 있는 우리가 영원한 영광에 이를 때까지 계속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매일 입고 살아간 당신의 옷으로 보시기바랍니다.
그리고 항상 믿음 안에서 그 열매를 발견하십시오. 그 옷을 입고 옛 사람을 누른 그 자리에서 새사람이 자라나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그에 합당한 일에 힘을 쏟아야 합니다. 그것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리스도인의 일에서 낙오한 사람이 있다면, 다시 돌아오십시오.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은혜의 보좌가 있습니다. 우리가 죄인일지라도 그분은 우리를 피하지도 거절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께서 다시 오라고 하십니다. 그분의 모든 보화와 선물도 그대로 남겨 두셨습니다. 우리는 한 번의 세례로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죄의 힘은 우리가 생명이 있는 한, 다시 말해 옛 사람을 목에 걸고 있는 한 매일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