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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7 / 시험이 있거들랑 (창22:1-14)
넌센스 퀴즈입니다. 성경 인물 중에 딸을 가장 많이 낳았던 여자는 누구일까요?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막 딸만 낳았답니다.
그럼 성경 인물 중 시험만 쳤다 하면 노상 100점을 받는 사람은 누굴까요?
‘미리암’입니다. 답을 미리 알았으니까요.
그런데 이런 넌센스와는 달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의 아버지는 누구인가를 물으면 거의 모두가 아브라함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믿음의 아버지라고 불리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본문 1절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뭔가 좀 이상하지 않나요? 시험이 있어도 피하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이 어째서 아브라함을 시험하려 하신 걸까요?
게다가 본문에서는 굳이 ‘하나님의 시험’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렇다면 평소 우리가 아는 시험과 본문이 말하는 하나님의 시험은 다른 걸까요?
예. 다른 겁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성도들로 현재의 믿음에서 ‘더 나은 단계로 들어가게 하기 위한 일종의 통과 절차’입니다. 이에 반해 마귀의 시험은 성도를 현재의 믿음에서 ‘더 나쁜 단계로 떨어뜨리기 위한 것’으로 하나님의 시험과는 정반대됩니다.
성경을 보면 시험이란 단어가 많이 나오는데, 횟수만큼이나 여러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선 시험은 ‘유혹’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누구를 시험하지도 아니하신다고 할 때의 시험이 바로 이 유혹을 의미합니다.
시험은 또한 ‘시련, 고통’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할 때의 시험은 시련과 고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로든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시험은 있습니다. 유혹의 시험이든, 시련과 고통의 시험이든 모든 시험은 다 성도의 믿음을 약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사탄이 가져오는 것이고 세상과 사람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믿음의 사람에게는 어떤 종류의 시험이든 시험이 있다는 말은 그 뒤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있고 기쁨이 찾아온다는 뜻이기도 하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특히나 오늘 본문에서 사용된 시험이라는 단어는 사탄이 주는 유혹도 아니고 시련도 아닙니다. 본문에서는 시험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세 번째 의미 곧 ‘테스트’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자격시험에서 떨어지면 해당 자격을 얻지 못합니다. 취직 시험에서 떨어지면 원했던 취업이 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도가 하나님의 시험에서 떨어지면 하나님이 준비하신 신앙에서의 다음 단계로 나갈 수가 없게 됩니다.
이해되지 않는 건 그냥 은혜 주시고 축복하시면 좋을 텐데 하나님은 왜 굳이 믿음에서 테스트라는 단계가 있게 하셨을까요?
그냥은 이해가 잘 안 되기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시험을 주셨다고 하는 말을 제대로 알려면 영적인 해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시험하심이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위하여 그의 앞에 더 나은 축복의 단계로 나아가는 문을 열어 놓으셨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복 받을 기회를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런 의도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면 이제 남은 것은 아브라함이 그 시험을 잘 통과해서 더 나은 단계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건 아브라함이 해결해야 할 숙제입니다.
세상의 시험은 실력으로 통과할 수 있습니다. 노력하면 통과할 수 있습니다. 가끔은 운이 좋아서 통과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영적인 시험 특히 하나님의 시험은 오직 믿음으로만 통과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험하심은 ‘택함의 단계-시험의 단계-양육의 단계’라는 세 단계로 구분된다는 것입니다.
‘택함의 단계’는 말 그대로 믿는 자는 다 구원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단계에서 오해하기 쉬운 것이 ‘구원받았으면 다 된 거 아닌가?’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린 아직은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때문에 ‘구원 이후’의 은혜를 위해서는 택함을 받은 자들일지라도 구원받은 이후에 찾아오는 단계 곧 시험의 단계를 통과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소위 구원파라는 단체는 이 두 번째 단계를 부인합니다. 시험이 없다 합니다. 누구든지 구원의 확신과 그를 증명할 사실만 있으면 더이상 어떤 죄를 짓더라도 이미 받은 구원이 있기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어떤 은혜도 축복도 빼앗기지 않을 거라고 얘기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인간적으론 꽤 마음에 드는 교리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누구든 구원의 확신이야 가질 수 있겠지만 구원의 확증은 오직 하나님만이 인정하시는 영역입니다. 그런데 구원파가 내세우는 증거라는 것들을 보면 하나님이 없습니다. 하나같이 다 자기 주관적인 사건이나 개인적인 경험들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중요하나 개인적인 경험이나 주관적인 체험들이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은혜와 축복을 보장해 주지는 못합니다.
신약에서도 보면 간음한 여인이 돌에 맞아 죽게 된 형편일 때 예수님께서 용서를 베푸시고 지은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이 장면만 놓고 보면 명명백백한 구원 사건입니다.
그러나 여인을 돌려보내면서 예수님이 추가하신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짓지 말라.”
구원파의 논리대로라면 죄 사함을 받았으니 자타가 인정하는 구원받은 사건이 분명한데도, 예수님께서 여인을 향해 ‘가서 다시는 죄짓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까요?
이는 구원 받은 이후에도 시험은 있을 것이며 유혹도 있을 것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땐 지금처럼 실패하지 말고 반드시 받은 구원을 지켜 내는 믿음을 가지라고 권면하신 것입니다.
사실이 이러하기에 구원은 어떤 사건이나 경험으로 받고 못 받고가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고 믿을 때면 개인이 확신하든 못하든 이미 구원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구원은 변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구원파의 주장과는 달리 성경은 구원받은 이후에도 구원과는 별개로 시험이 있을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하나님은 이미 아브라함을 택하셨습니다. 이때 택하셨다는 말은 구원은 물론이고, 그가 세상을 사는 동안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예비해 놓으셨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아브라함이 언제 어떻게 그것들을 받아 누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시고 필요한 은혜도, 축복도, 물질도, 건강도, 행복과 평안까지도 다 예비해 놓으신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이십니다.
다만 우리 역시도 언제 어떻게 그것들을 받고 누리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며, 두 번째 단계인 시험의 단계가 있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누구든 시험을 통과하는 믿음이 있으면 복을 받고 누리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믿음의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의 시험은 축복을 위한 더 나은 단계로 나아가는 통과 절차요, 관문인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보세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외아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시험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시험을 통해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축복은 순종으로 받습니다. 따라서 누구든 믿으면 구원받지만, 축복은 각자의 순종이 있어야만 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시험은 우리에게 믿음이 있나 없나를 보려 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는 우리가 순종하는지, 안 하는지를 스스로가 확인하게 하려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첫 번째 ‘택함의 단계’에서의 통과 열쇠가 믿음이었다면, 두 번째 ‘시험의 단계’를 통과하기 위한 열쇠는 순종입니다.
믿음이 없었기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에게 더 큰 약속과 복을 주시기 위해 그에게 순종할 것을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 안에서는 시험도 필요합니다. 순종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현재 우리에게 있는 시험의 단계를 통해 우리에게서도 순종을 보려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아브라함이 올라가야 했던 모리아 산은 하나님이 의도대로라면 그것은 시험의 산이 아니라 순종의 산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아브라함은 순종함으로써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믿음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그 산을 넘어야 할 사람들은 이제 우리들입니다.
너나없이 우리 모두의 앞에는 시험의 산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린 그 산을 시험의 산으로 볼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넘어야 할 산, 또한 순종으로 올라야 할 산으로 여겨야 소망이 있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 올라 시험을 통과했을 때 그는 무엇을 볼 수 있었습니까?
믿음으로 시험을 넘어섰더니 여호와 이레의 복이 보이더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시험으로 받으면 인생이 힘들어집니다. 그러나 시험을 믿음으로 받으면 그 시험의 산은 우리에게서도 다름 아닌 여호와 이레의 산이 될 것입니다.
이즘에서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은 그런데도 만약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택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세 번째 단계가 ‘양육의 단계’인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험에서 탈락한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다음엔 시험을 이기는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해 양육의 단계로 돌려놓아 주십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는 아브라함이 거부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을 보면 아브라함은 흉년이라는 시험을 만났을 때 한 번은 애굽으로 또 한번은 그랄로 피신함으로써 하나님의 시험에서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나님은 실패한 아브라함을 세 번째 단계인 양육의 단계로 옮겨 놓아 주셨습니다.
시험에서 실패했음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위기를 넘겼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바로와 아비멜렉이 보상으로 주었던 엄청난 금은보화로 인해 아브라함은 일거에 당대의 거부도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신앙 체험들이 반복되고 쌓여가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커 가도록 양육해 가셨고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그렇게 인도하시며 믿음이 커지도록 양육해 가십니다.
나는 실패해도 하나님은 그 실패조차 축복의 기회로 바꿔 주십니다.
흉년이라고 하는 시험에서 두 번씩이나 실패했음에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그 시험에서 건지시고 다음 시험에선 믿음 안에서 반드시 이기게 하시려고 계속 양육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양육 받은 아브라함이었기에 결국 오늘 본문에 이르러서는 모리아라고 하는 큰 시험의 산을 통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시험의 단계에서 실패한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양육의 단계입니다. 때문에 설사 저와 여러분이 바울이 언급했던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더하여 가난이나 질병의 골짜기에 던져졌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거기서 당신의 자녀를 붙들어 주십니다. 그곳에서 양육하시고 믿음을 강하게 하셔서 결국엔 시험을 통과하여 더 나은 은혜와 축복과 치유와 강건함의 자리로 나아가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이후에도 시험은 있습니다. 고난받을 수 있고, 실패할 수 있습니다. 손해도 볼 수 있고, 억울한 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붙잡고 예수님만 바라보며 순종의 산을 오르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은 반드시 시험 너머의 여호와 이레의 복이 있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듯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잠깐의 시험을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시험이 아브라함에게는 아들을 번제로 드리기 위해 모리아 산에 오르는 것이었다면, 여러분에겐 어떻습니까?
때론 하는 일마다 지지리도 안 되고 막히는 시험의 산을 만날 수 있습니다. 때론 참기 힘들 정도의 원수와 방해꾼을 만나 인생이 억울하고 피곤할 수도 있습니다. 때론 가난에 내몰려 힘들어질 수도 있고, 때론 건강 때문에, 때론 가족이나 이웃이나 사람 때문에 괴로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서건 우린 그 모든 시험을 넘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투기가 아닙니다. 절대로 저절로 잘 되거나, 갑자기 일확천금이 생기고, 느닷없이 일이 풀리지 않습니다.
잘 믿으려면 그만큼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순종하려는 의지적인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요즘 트롯 열풍과 함께 정동원이란 가수가 부른 여백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가사 중에 보면 ‘전화기 충전은 잘하면서 내 삶은 충전하지 못하고 사네’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을 우리의 믿음에 적용한다면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전화기 충전은 잘하면서 혹여 믿음은 충전하지 못하며 살고 있지는 않으신지요?
인생에 시험이 있다 함은 바로 그때야말로 내 믿음을 충전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영적인 신호입니다. 그럴 때면 즉시 믿음을 충전해야 합니다.
배터리가 방전되면 제아무리 최신 휴대폰일지라도 무용지물이듯이 인생에서는 방전된 믿음도 그러합니다.
믿음이 충만해야 시험을 당했더라도 시험이 아닌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보여야 믿음도 순종도 가능해집니다.
믿음으로 보면 시험이 있다 해도 답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우린 시험의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순종의 산을 오르고 있는 것임을 여러분 스스로가 확신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내 앞에 있는 문제와 시련과 고난과 모든 어려움들을 시험으로 볼 것인지 믿음으로 볼 것인지를 놓고 우린 선택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상황만 놓고 보면 우리를 힘들게 하는 모든 것이 시험의 산인 듯하나, 순종하겠노라는 믿음을 갖고 그 산은 다시 보면 그것이 축복의 산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 역시 시험의 산을 오를 때만 해도 몰랐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데에만 온 힘을 다했습니다.
그러다가 산에서 내려오면서는 알았을 것입니다. 지나고 보니 ‘이게 시험의 단계였구나!’라고 하는 것을….
믿음으로 통과하고 보니 축복의 산이었다는 것을….
시험의 산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처럼 하나님은 오늘, 저와 여러분도 시험의 산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렇기에 지금이든 장차든 우린 시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여러분에게 어떤 시험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들을 향해 ‘내가 이 시험을 통과하여 현재의 시험의 산을 장차의 축복의 산으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믿음에서 흔들림 없이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시험이 있거들랑, 그 너머엔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 준비되어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