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모여 사는 수도권(2010 인구주택 총조사에 따르면 전체 인구의 49.0%가 수도권에 산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다보니 그만큼 민심이 빠르게 변한다. 2007년 대선과 2008년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승리한 바탕에는 수도권의 압도적인 지지도 한 요인이다. 2007년 대선에서 이 대통령은 수도권에서 전국 평균(48.7%)를 웃도는 51.7%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특히 서울에서 득표율은 53.2%로 민주당 정동영 후보(24.5%)의 두 배가 훌쩍 넘는 압도적 지지를 확보했다. 2008년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수도권 111개 지역구 중 서울(40)과 인천(9개), 경기(32개)에서 81개를 휩쓸었다.
하지만 불과 2년 반 뒤 치른 2010년 6월 지방선거에서 확인된 것은 수도권 민심 이반이었다. 3개의 광역단체장 중 인천시장 하나를 내줬지만 서울시장 선거도 0.3%포인트차이로 가까스로 이겼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투표 당일 '지옥과 천국'을 경험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풀뿌리 민심을 그대로 반영하는 수도권 기초단체장 선거 결과는 한 마디로 처참하다. 2006년 싹쓸이하다시피한 수도권 기초단체장 66곳 중 41개(77%)를 야당에 내줬다.
한나라당 수도권 의원들 입장에선 모골이 송연한 결과다. 6월 지방선거 이후 한나라당 수도권 의원들이 '일방독주'식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번번이 반기를 들고 나서는 것도 이런 '절박함' 때문이다. 이 대통령 방식을 무작정 따라가다가는 자신의 '금배지'가 날아갈 수도 있어 보인다.
수도권의 이런 '변심'은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7.4.7 공약', 2008년 총선에서 한나라당의 '뉴타운 공약' 등 '욕망의 정치'로 불렸던 정치적 흐름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또 전세대란, 구제역, 안보 등 이명박 정부의 '실정'이 수도권 주민들의 삶에도 밀접하게 연관된 것이라는 점에서 현 정부의 국정운영에 대한 '심판 정서'의 수위도 엿볼 수 있기도 하다.
곧 '미니총선'이라 불리는 4월 재보선이 치러진다. 수도권도 임태희 대통령실장의 지역구였던 분당을 지역이 포함돼 있다. 현재 진행 중인 한나라당 공성진 의원(서울 강남), 현경병 의원(서울 노원갑)의 재판 결과가 3월 이전에 확정될 경우, 추가로 늘어날 수도 있다. 4월 재보선이 향후 정국에 미칠 영향을 감안해 여야 모두 '총력전'을 다짐하고 있다.
4월 재보선을 연결시키지 않더라도 수도권 민심의 향배는 2012년 대선과 총선에서 매우 중요한 변수다. 현재 수도권 민심에 영향을 끼치는 몇 가지 정치적 변수를 감안해 서울 노원구, 관악구, 경기도 파주, 분당 등 일부 지역의 민심을 둘러봤다. 편집자
파주는 좀처럼 그 속내를 내보이지 않는 도시였다. 영화 <파주>를 연출한 박찬옥 감독은 실제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공간을 먼저 떠올렸다고 한다. 그는 파주를 "한 사람이 자기가 살고 있던 곳에서 계속 떠나려고 시도하지만 번번히 실패하는 그곳"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그건 아마도 떨쳐버리기 힘든 변방의 정서였을까.
기자가 "요새 파주가…"라고 물으면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구제역 파동부터 언급했다. "도대체 초기 방역을 어떻게 했길래 이 지경이 됐는지 모르겠다", "지역경제 자체가 모두 멈춰섰다"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럼 한나라당이…"라는 말에는 모두 입을 다물었다.
민주당 소속 임현주 시의원은 이를 "접경지역의 특수성"이라고 설명했다. 파주는 오랫 동안 소외돼 왔던 땅이다. 서울시와 안양시를 합친 면적(672.47㎢)에 약 36만 명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이제는 서울과의 출퇴근이 일상화된 일산과 인접해 있지만, 지역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여의도에서 차를 달리면 불과 한 시간 만에 판문점에 도착한다. 우리의 행정구역 상 판문점은 파주시 진서면 널문리에 위치해 있지만, 북한에서는 '개성직할시 판문군 판문점리'라고 부른다. 파주는 한나라당 내에서도 '군사통'으로 잘 알려진 황진하 의원이 재선에 성공한 지역이기도 하다. 임 의원은 "뿌리깊은 반공의식와 오랜 피해의식이 아직까지 작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주민들이 외지인을 상대로 '정치'와 '한나라당'을 쉽게 입에 올리지 못하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주민들이 직접 피해를 입는 일이 벌어지면 분위기가 뒤숭숭해지는 것은 사실이에요. '이거 큰일났다', '다 죽게 생겼다'는 목소리도 터져 나오지요. 하지만 특이한 점은 논리적으로 그 사이에 나와야 할 이야기, '이명박 정부의 정책실패'를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동시에 파주는 출판단지와 헤이리마을처럼 '문화예술 도시'의 면모도 함께 갖고 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경과하는 동안 이뤄진 변화다. 남북 사이의 긴장이 완화되고 개성공단 등 평화정책이 적극적으로 추진되는 동안 파주는 반공과 소외된 지역의 피해의식이라는 두터운 외투를 벗어 나가고 있던 중이었다.
구제역의 악몽…"동물들의 죽음이, 재앙이 중첩되어 간다"
그런 파주가 두 가지 홍역에 시달리고 있다. 최근 한국사회를 강타한 두 가지 이슈, 연평도 사태 등 대북 이슈와 사상 초유의 구제역 사태에 직간접적으로 휘말려있다.
천안함과 연평도 사태는 지역의 민심을 '안보' 쪽으로 다시 되돌렸다. 한나라랑 파주시당원협의회 이찬희 수석부위원장은 "전부터 보수세가 강한 지역이기도 했지만, 연평도 사태 이후 지역의 안보의식은 더 강화됐다"고 했다. 지역의 야권 인사들의 설명도 다르지 않았다.
연평도 사태 직후 황진하 의원이 소위 '보온병 논란'에 휘말렸지만, 그마저도 별다른 논란이 되지는 못했다고 한다. 지역 정치권의 한 야권 인사는 "우리 지역의 국회의원, 그것도 군사 전문가라는 사람이 그런 실수를 했다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라면서도 "중앙 정치권에서는 이슈가 될 지 몰라도 주민들은 아무도 그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고 전했다.
지난 6.2 지방선거에서 민주당 소속 이인재 시장이 '리틀 MB'라고 평가받던 류화선 전 시장의 3선 도전을 좌절시키고 당선된 것은 일대 사건이었지만, 이 시장이 최근 해병대 전우회와 재향군인회 등 보수단체가 개최한 대북 규탄집회에 참석하는 등 튀는 행보를 이어가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그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보수 꼴통 좌파'라고 규정해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대체적으로 한나라당 강세 지역이지만, 구체적인 지역 현안에 있어선 여야가 따로 없다고 했다. 민주당 임현주 시의원은 "파주는 민주당도 한나라당도 아닌, 파주당"이라고 말했다.
▲ 민주당 소속 이인재 파주시장(위 사진 왼쪽)이 한나라당 황진하 의원과 함께 대북 규탄집회에 참석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아래 사진은 같은 자리에서 연설하고 있는 이인재 시장. "무력은 무력으로 때려잡자 김정일"이라는 문구의 플래카드가 눈에 띈다. ⓒ이인재 파주시장 홈페이지
반면 구제역 사태는 여당 입장에선 결정적인 악재다. 지역의 축산농가는 700여 세대에 불과하지만, 겉잡을 수 없이 번져나간 사상 초유의 구제역 사태는 지역경제 전체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설 명절을 코앞에 둔 시점까지 약 15만 두의 소·돼지 가운데 10만 마리가 넘는 가축이 살처분당했다. 특히 전염속도가 빠른 돼지는 95% 이상이 생매장됐다. 안락사를 시킬 인력도, 예산도, 시간도 없었기 때문이다.
재앙에 가까운 구제역 사태는 그 동안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았던 지역 민심의 '논리적 중간고리', 이명박 정부 무능론을 바닥에서부터 자극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파주시청 인근에서 철물점을 하는 김모 씨는 "(구제역이 처음 발생한) 안동에서 못 잡았기 때문에 이 지경까지 이른 게 아니냐"면서 "요즘은 동네에서 술자리도 갖지 않는 분위기"라고 했다.
공무원이나 기업들도 송년회, 신년회를 대부분 취소됐다고 한다. 헤이리마을 등 주말마다 줄을 잇던 관광객들의 발길도 끊어진 지 오래다. 관광이나 요식업뿐 아니라 지역의 축산가공·유통산업, 사료업계는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직격탄을 맞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구제역 사태가 수습되기도 전에 조류독감이 다시 창궐하고 있다.
출판단지 인근의 방역초소를 지키고 있던 민주당 파주지역 윤후덕 위원장은 "연평도 등 대북이슈들이 지역에 미친 영향을 사실 별로 없지만, 구제역은 달라요"라며 "민심요? 다 돌아선지 오래됐어요"라고 했다. 민주당 지역조직은 시 당국과 협조 하에 30여 곳에 달하는 방역초소 근무와 계속된 살처분 작업에 동참해 왔다고 한다.
"대놓고 이야기들은 하지 않지만, 소주 한 잔 나눠보면 그 분노가…"라고 말을 흐린 윤후덕 위원장은 그 동안 방역작업에 동참하면서 작성했다는 일지의 한 대목을 보여 줬다.
"구제역 확산에 이어서 조류독감이 발생해 오늘은 발생지역의 3㎞ 내의 닭을 모두 살처분했다. 동물들의 죽음이, 재앙이 중첩되어 간다. 내 고향 파주. 구제역과 돼지 침출수, 토양오염, 조류독감 게다가 북의 포탄세례 예상지역이라는 내키지 않은 단어들이 만들어 내는 좋지 않은 이미지가 너무 많이 퍼졌다…(중략)…무형의 손실이 너무도 크다. 파주, 교하, 운정, 금촌, 문산, 탄현이 언제가 되어야 싱그럽고, 향기나고, 대담하고, 기대되는 이름들로 다시 기억될까? (2011년 1월25일 밤 10시 : 구제역 방역초소 21일차)"
▲ 구제역 사태로 생매장되고 있는 돼지들. 파주 지역에서 살처분 및 방역작업에 참여한 민주당 윤후덕 지역위원장이 촬영한 장면이다. ⓒ윤후덕
한나라 '강화론' vs 야당 '대안론'…"내년에 투표함 열기 전까진 모른다"
물론 바닥에서부터 끓어오르기 시작한 민심이 향후 선거에 미칠 영향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는 게 여야 정치권 인사들의 공통적인 설명이었다.
토박이 정서와는 이질적인 유입 주민들의 인구가 30%까지 늘어났다는 점도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상대적으로 중앙의 정치적 이슈에 민감하지만, 지역 현안에는 무관심한 이들의 표심이 어느 쪽으로 기울 것인지는 아직 단언하기 어렵다고 했다. 지역에서 이뤄지고 있는 야권 단일화 논의의 경우 지나치게 유입 주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어 오랫동안 거주해 온 토박이들과 유리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무엇보다 총선과 대선은 아직 머나먼 이야기다. 한나라당 파주시당원협의회 이찬희 수석부위원장은 "연평도 사태 이후에 한나라당에 힘을 실어주자는 분위기가 확산된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 관건은 앞으로 우리가 하기에 달린 게 아니겠느냐"라고 반문했다.
민주당 임현주 시의원은 "지금 주민들이 마음 속에서 정말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런 생각이 어떤 정치적 요구로 분출될 것인지는 알 수 없다"며 "아마 끝까지 모를 것 같다, 내년 총선에서 투표함이 열리기 전까지는…"이라고 했다.
안보 위기로부터 촉발된 '여당 강화론'과, 구제역 사태 등 민생과 직결된 악재가 작용하고 있는 '야당 대안론' 사이에서 지역의 정서는 앞으로도 '소리없는 널뛰기'를 계속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