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역사소설 태종 이방원 202
대마도를 점령하라
정벌군, 대마도에 하륙(下陸)하다
두모포에서 출정식을 마친 대마도 정벌 함대가 순풍에 돛을 달고 경강(京江)을 미끄러져 갔다.
유사 이래 최대의 함선에 놀란 갈매기들도 길을 비켜 주었다.
경강을 꽉 채운 조선 수군의 위용이 장관이었다. 군졸들의 사기도 하늘을 찌를 듯 했다.
군졸들은 광진에서 양화진까지 한강을 경강이라 부르기를 좋아했다.
당시 한강에는 한강진을 비롯한 6개의 진(津)이 있었다. 수군기지다. 당연 수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오늘날 육군에 입대한 병사들이 ‘수도방위사령부에 근무한다’라며 최전방에 근무하는 병사들보다 상대적으로
우월감을 느끼듯이, 수군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예전 진이 있었던 곳에 검문소가 있었듯이, 진(津)은 왕성 경비의 외곽 축이었다.
이러한 경강에 근무하고 있던 수군들은 어께에 힘이 들어가고 우쭐했다.
경강(京江)이 훗날 보통 상인들과 차별화 된 상인의 대명사 ‘경강상인’으로 등장한다. 뭔가 다름의 표현이다.
정벌대를 발진시킨 태종은 사전 정지작업에 나섰다.
부산포와 내이포의 왜관을 폐쇄하고 591명의 왜인을 감금했다.
뿐만 아니라 세작(細作-간첩) 냄새가 나는 평망고등 21명의 왜인을 처형해 버렸다. 대마도 공격에 대한 정보가 누출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조치다.
대마도 정벌 함대가 조강(祖江) 월곶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경강이 임진강과 예성강이 만나는 지점을 옛 사람들은 조강이라 불렀다. 강의 할아버지라는 뜻이다.
일로일로 남진. 화원반도에서 선수(船首)를 동쪽으로 꺾어 울돌목을 통과했다.
훗날 조일전쟁에서 이순신 장군이 12척의 배로 133척의 일본 함대를 궤멸시킨 명랑해전의 현장이 바로
울돌목이다.
대마도 정벌군이 거제도에 집결했다. 한양에서 내려온 지휘부와 3도의 선군(船軍)이 견내량에 모여들었다.
경상·전라·충청의 3도 병선 2백 27척과 1만 7285명의 정예군이다.
당시 조선 수군이 5만여 명인 것을 감안하면 3분지 1 병력이다. 나머지 3분지 2는 전면전을 각오하고 일본군이 역공을 감행해올 경우 국토를 수호하기 위하여 동래와 마산 그리고 여수에 비상 대기 시켰다.
썰물을 기다렸다 해류를 타라
부산포에서 대마도까지는 직선거리로 49.5km다.
정벌군이 부산포에 집결하지 않고 견내량을 선택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견내량은 하루에 두 번 물살의 방향이 바뀐다.
썰물을 기다렸다 전함을 발진시키면 힘들이지 않고 넓은 바다로 나갈 수 있다.
해협에서 북동쪽으로 흐르는 쿠로시오(日本海流)해류를 타면 쉽고 빠르게 대마도에 닿을 수 있다.
이것을 노린 것이다.
“닻을 올려라.”
삼군도체찰사 이종무 장군의 명이 떨어졌다.
썰물을 탄 함대가 연안을 빠져나왔다. 헌데 바람이 받쳐주지 못했다. 마파람이었다.
가수알바람이 조금만 불어주면 해협으로 나가 쿠로시오 해류를 탈 수 있었을 텐데 이종무 장군은 아쉬웠다.
이종무 장군은 함대를 돌리라 명했다. 선수를 돌린 함대는 주원방포(周原防浦)에 정박하여 전열을 정비했다.
“출항하라.”
공격군이 시간을 지체하면 정보가 샐 뿐이다. 이종무는 지체할 수 없었다.
대마도를 향하여 닻을 올렸다. 둥둥둥둥. 북소리가 울렸다. 거제도에 집결했던 대마도 정벌 함대가 발진했다.
이종무 장군의 중군이 맨 앞에 나섰다. 좌군에 유습 장군, 우군에 이지실 장군이 오방진을 대형을 갖췄다.
끝이 뾰족한 첨자형 오방진 진법은 태종의 지시에 따라 양화진에서 수없이 연습했던 진법이다.
조선 수군의 최신예 전선(戰船) 삼판선은 당당했다.
좌현과 우현을 가룡목으로 개량한 삼판선은 튼튼하기가 이를 데 없어 적선을 들이받아도 끄떡없을 정도로
견고했다. 가히 철갑을 두른 듯한 돌격선이다.
바람도 좋았다. 늦하늬바람을 맞으며 쾌속항진 했다. 군사들의 사기도 산뜻했다. 사시(巳時)에 출발한 함대는
이튿날 오시(午時)에 대마도에 도착했다. 적선의 저항은 없었다. 25시간만에 주파한 것이다.
죽음이 두려우면 항복하라
대마도 앞 바다에 포진한 함대는 10여척의 병선을 해안에 접근시켰다. 섬에 있던 왜구들이 자신들의 동료가
노략질 나갔다 돌아온 것으로 착각하고 술과 고기를 가지고 환영을 나왔다.
주력함대가 두지포(豆知浦)에 정박했다.
환영 나왔던 왜적(倭賊)들이 혼비백산 도망가고 50여 인이 응전해왔으나 정벌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종무 장군은 대마도에서 귀화한 지문(池文)을 보내어 도도웅와(都都熊瓦)에게 항복하기를 권고했으나
답이 없었다.
“대마도를 공격하라.”
총사령관 이종무 장군의 명이 떨어졌다.
좌군이 대마도에 하륙(下陸)했다. 상륙은 일본에서 역수입된 한자 문화다.
섬나라 일본은 뭍에 오르는 것이 동경의 대상이다. 그래서 상륙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평화 시 풍랑에 배가 파선하여 불가피하게 뭍에 오를 경우에는 상안(上岸)이라 했고 전투 시 공격적 어휘는
육지에 내린다는 의미로 하륙이라 했다.
조선 수군은 크고 작은 왜적선 1백 29척을 빼앗아 그중에 사용할 만한 20척을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불살라
버렸다. 또 왜구의 가옥 1천9백39호를 불질러 버렸다.
칼을 빼고 응전해오는 자는 가차 없이 베어 버렸다. 그 머리가 114명이었다.
칼을 버리고 항복한 자는 21명이었다.
조선 수군의 공격은 파죽지세였다.
승기를 잡은 이종무 장군은 좌군으로 하여금 니로군 지역에 하륙하라 명했다.
군졸을 이끌고 니로군에 오른 좌군 절제사 박실은 뜻밖의 상황을 만났다.
지형지물에 어두웠던 박실 부대는 적의 매복에 걸려 고전을 면치 못했다.
편장 박홍신·박무양·김해·김희 등 180여명의 전사자를 내며 위기에 몰렸으나 우군(右軍) 절제사 이순몽과
병마사 김효성 부대의 지원으로 가까스로 적을 제압했다.
깜짝 놀란 일본, 결사항전으로 맞서다
대마도 정벌군의 침공을 받은 일본은 경악했다. 조선 단독 공격이 아니라 조·명(朝明) 연합군으로 오인했다.
위기를 느낀 왜국은 시코꾸(四國) 지역의 제후들이 연대하여 총력전으로 나왔다.
사활을 건 결사항전이었다.
당시 전투 상황에 대하여 <대주편년락(對州編年酪)>은 조선군 2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열 배 이상 부풀러져 있다. 예나 지금이나 전과에는 거품이 들어가 있다.
전의를 상실한 왜구들이 산 속으로 숨어버리자 이종무 장군은 휘하 장졸들에게 훈내곶(訓內串)에
목책(木柵)을 설치하라 명했다.
훈내곶은 혼슈에서 오는 배가 아소만과 조선으로 가는 길목이며, 상 대마도와 하 대마도를 잇는 전략요충이다.
지금은 매립으로 육지가 넓어졌지만 당시에는 훈내곶을 중심으로 양쪽의 바다가 거의 붙어 있다시피 했었다.
정벌군은 65일분의 식량을 가지고 출발했다. 장기전을 준비한 것이다.
정벌군은 훈내곶에 진을 치고 대마도의 목줄을 누르기 시작했다.
다음. 203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