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중요한 결정을 해야 했다. 어제 계획대로 우리 모두 베이스 캠프로 내려 갈 것인지, 아니면 3차 등정 시도를 위해 이 곳에 남을 것인지, 또 남게 되면 누구를 남겨두어야 될지 어려운 결정이었다.
2주전, 우리에게 많은 경험을 안겨준 1차 등정 실패 이후, 바람 결 조차 느낄 수 없는 베이스 캠프에서 구름 한 점 없는 세로토레를 그저 바라보아야만 했던 4일간의 기막힌 지난 기억들과, 5일 전부터 지속된 악천후로 이곳으로 다시 내려와야 했던 어제의 일들, 그리고 오늘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맑게 게인 날씨, 세로토레의 변덕스런운 날씨는 올라가면 나빠지고 다시 내려오면 좋아진다고 너스레를 떨며 우리에게 여러 가지 유익한 정보를 준 베이스 캠프에서 만난 러시아 등반가 '알까디'의 말이 심사 숙고 해야만 할 중요한 이유였다. 만약 또다시 세 번째의 잘못된 판단으로 일을 그릇 치게 된다면 대장인 나는 대원들의 용기를 빼앗아 버리는 멍청한 대장으로 남아야 할게 분명했다.
베이스 캠프인 캠프 브리드웰에서 6시간 남짓 거리에 있는 이곳 노르웨지언 비박지는 무서운 돌풍으로 인한 텐트 설치의 어려움 때문에 바위 틈새들을 이용하여 돌 벽을 빼곡이 쌓아 만든 척박한 캠프 지였다. 2주전 우리는 이 곳에 유일하게 있는 작은 평지를 찾아 돌 벽을 쌓고 3인용 텐트 한 동을 설치했다. 그래서 주변 돌 틈 비박지와는 다르게 좀 더 쾌적하고 여유 있는 캠프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단지 흠이라며 돌 벽 틈새로 파고들며 텐트에 구멍이라도 낼 듯한 돌풍과 그 바람에 날리는 돌가루였다. 그러나 이런 지독한 바람이 오늘 만큼은 어제와 다르게 바람 결 조차 느낄 수 없었다.
나의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다. 5일간 지속된 나쁜 날씨가 좋은 날씨로 바뀔 때가 됐을 거라는 예측과 기대가 베이스 캠프로 내려가려 했던 어제의 계획을 흔들어 놓았다. 산에서 희망이라는 말은 부 질 없는 것이라고 한 마에스트리의 말대로 비록 내일 날씨가 다시 나빠진다 해도 나의 결정이 굳어지고 있는 이유는 내일 보다 현재 날씨가 좋다라는 불확실한 가능성에 대한 단순함과 두 번에 걸친 실패와 경험에 빚어진 절박함이었다.
우리는 텐트에 모여 회의를 했고, 나는 대원들의 분위기를 읽어야 했다. 물론 나의 단호한 결정에 대원들이 따라 줄거라 믿지만 그들에 고뇌를 진정시키기는 쉽지 않았다. 해승이와 세웅이 그리고 2차 등정 시도에 참가했던 철한이가 오후에 베이스로 내려가 식량을 가져오기로 하고, 철한이 대신 경례가 나 그리고 기범이와 함께 3차 등정 시도를 위해 이 비박지에 남기로 했다. 해는 세로토레 쪽으로 가깝게 기울 수 록, 빙하 건너편 거대한 피츠로이 서벽은 그 빛에 반짝이며 이글거렸고, 날씨는 변함 없이 고요해져 가기만 했다.
변화 무쌍하게 급변하는 이 곳 날씨에 빠른 등반이 최선책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지만, 좀더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단순한 오름 짓만을 빠르게 해서 될 일이 아님을 두 번이나 실패한 경험으로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좀 더 극한적인 방법을 찾아야 했고, 그 해결책은 밤을 이용하여 잠을 자지 않고 계속 등반해 나가는 것뿐이었다. 배낭 무게를 많이 줄일 수 있고, 체력과 시간을 적게 소모시킬 수 있음이 분명했다. 우리의 등반시기는 오늘 오후 6시 이후로 잡기로 했다.
세로토레의 수문장 격인 엘모초 벽 밑 우측으로 휘돈 가파른 설릉은 늦은 오후 차가운 기온으로 알맞게 크러스트 되어있어 킥스텝 하며 오르기가 쉬웠다. 이곳을 세 번째 오르는 우리는 서로 로프를 연결하지 않았다. 이제 이 정도 난이도의 어려움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적응력과 자신감 때문이기도 했다. 가파른 설릉이 끝나고 이어지는 크래바스 지대와 광활한 설원지대에서는 서로 몸에 로프를 연결했다. 바람으로 희미해진 어제 남긴 우리 발자국을 따라 하단 벽 밑으로 나아갔다. 날씨 변화에 대한 예민함인지 하늘과 주위 산 군을 자주 둘러보게 되었다.
하단 벽을 시작하는 베르그슈른트의 균열은 일주일 전보다 더욱 벌어져 있었고, 좌측의 세락은 심하게 붕괴되어 그 크기 거대했다. 사면으로 접근하기 위해 부서진 세락으로 형성된 스노우브릿지를 조심스레 지나야 했고, 이어진 긴 사면은 60미터 로프 길이가 부족함을 아쉬워해야만 했다. 거대한 사면에서 항상 느낄 수 있는 거리 감각에 대한 문제라는 걸 알면서 매번 새롭게 느껴야만 했다. 세락 위에 올라선 후 기범이와 경례가 쥬마링을 할 수 있게 스노우바를 설치 한 후 로프를 고정 시켰다. 우리는 이렇게 정해진 각자의 포지션대로 충실하게 움직여 나가야 했다. 왜냐하면 그 포지션이 지루하고 재미없다 해도 자신이 맡은 오름 짓에 익숙해 있음이 지금 이 세로토레 등반에서는 매우 중요한 사실임을 실패한 두 번의 경험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암벽과 눈으로 형성된 혼합지대의 버트레스와 좌측에 무너져 내린 세락들 사이로 하단 벽의 등반루트는 이어졌고, 군데군데 눈 위로 들어 난 고정 확보물들이 일주 일 전 보다 눈에 잘 띄었다. 버트레스 좌측을 따라 오르는 눈 사면은 단단하지 않은 표면으로 피켈 보다 스노우바가 더욱 안정감이 있었다. 스노우바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면 아마도 우리는 여기에서 등반을 포기했을 지도 몰랐다. 이 하단 벽에 대한 정보를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거라고 한 기대는 큰 실수였다.
암벽지대는 아이젠을 벗고 등반하는 것이 수월하지만, 설 사면에서 다시 신어야 하기 때문에 번거로움과 등반 기술의 어려움을 잘 판단해서 그 사용여부를 결정지어야 했다. 어둠은 렌턴을 켜야만 할 만큼 짙어져 이런 일들이 더욱 번거로웠다. 하지만 시간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 좀 더 모험적인 등반기술을 구사해야 했고, 모험적 등반 방식들은 하단 벽이 끝나는 총 10피치까지 계속 이어져야만 했다.
어제 내려간 인내의 안부에 다시 올라섰다. 시간은 자정인 12시가 조금 넘었다. 인내의 안부 능선에 불빛이라곤 우리 세 명의 렌턴 빛과 검은 하늘에 초롱 이는 수많은 별 빛 뿐이었다. 베르그슈른트로 들어가 우리가 두고 간 식량과 버너를 꺼내 소모된 체력과 본격적인 등반을 위해 비축할 에너지를 차와 스프를 끓여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새벽 3시가 조금 넘은 시간, 나는 기범이의 확보를 받으며 암벽화를 갈아 신고 미리 걸어놓은 로프를 이용해 베르그 슈른트 위 약간 우측에 크랙으로 접근하여 등반을 시작해 나갔다. 바위의 촉감이 너무 좋았다. 며칠 전에 크랙 속에 꽉 차있던 얼음도 온데 간데 없고 깨끗했다. 손과 발의 째밍이 너무 확실하고, 손끝에 느껴지는 시려옴이 싫지만은 않았다. 렌턴 불빛에 들어오는 나의 시야는 좁았지만 순간순간 밀려오는 다양한 동작들에 대한 문제 해결과 그 어려움을 풀어나가기 위한 집중력이 몹시 좋았다. 피치가 끝날 때마다 확실한 확보물과 편안한 자리는 주위의 밤 경치를 만끽할 수 있는 충분한 여유로움을 가질 수 있었다. 별빛 어둠 속에 실루엣으로 그려진 피츠로이는 그 거대함이 낯보다 더욱 위압적이며 세로토레의 야간 등반에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이 어둠의 적막을 깨는 유일한 소리는 기범이와 경례의 거친 숨소리와 장비울림소리의 화음이었다. 설 벽 지대에서 나는 빙벽화로 갈아 신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을 줄일 수 있는 방편에서 피켈로 얼음을 깍 아 발 디딤을 만드는 편이 유리했다. 쥬마링에 어려움을 감안해서 로프가 크게 꺽이는 부분은 카라비나를 걸지 않았다. 어떤 때에는 한 가닥의 로프를 묶고 오르고, 어떤 때에는 두 가닥의 로프를 묶고 올랐다. 기범이와 경례가 동시에 올라올 수 없는 곳에선 이런 방법을 번갈아 가며 사용했는데, 시간을 절약하기 위한 예측된 모험이었다. 이런 일들은 지난 2주전 이곳을 올라봤기에 시야가 제약된 어둠에도 가능할 수 있었다.
어둠은 다행히 이 루트에서 그 중 어렵다는 5.10 난이도의 레이백 크랙을 다음피치 에 두고 있을 때에 가시기 시작했다. 날이 밝아지며 시야가 넓어질수록 이 피치의 어려움은 없었다. 단지 확보물 설치의 거리가 멀어 집중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두 피치 정도의 쉬운 페이스 등반이 이어지고 난 후, 이 루트 초등 자 마에스트리의 세로토레에 대한 집착 증세에 대한 처절함을 느낄 수 있는 셋 피치에 달하는 볼트 트레바스 시작 지점에 도착했다. 30년 전에 박은 Cassin사 볼트인데, 수많은 볼트가 녹슬지 않고 견고하게 박혀 있었다.
지난 2주전의 일이었다. 1차 등반에서 기범이와 함께 아침 7시 30분 경 인내의 안부에 있는 베르그슈른트 비박지를 출발하여 이곳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오후 2시 30분이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앞으로 18피치를 더 가야 했고, 올라온 피치는 모두 10피치였다. 그러니 중간에 비박을 해야 함은 분명했다. 아니면 이곳에서 포기하고 뒤돌아서는 게 현명한 판단이었다. 왜냐하면 정상까지 가지 못하고 다시 내려온다면 이 볼트 트레바스의 하강이 결코 쉽지 않아 많은 어려움을 당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분명한 판단과 결정을 해야 했다. 대가를 치루고 서래도 비박을 감행 할 것인지, 아니면 여기서 뒤 돌아설 것인지, 하지만 사람의 욕심은 한 가닥의 희박한 가능성만 엿보이면 작아지기보다는 점 점 커짐을 어찌하리, 그래서 우리는 비박 할 수 있는 여분의 옷과 우모 자켓 또한 없었지만 대가를 치룰 각오로 돌아오기 쉽지 않은 이 볼트 트레바스를 등반해 나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정상에 가지도 못하고 또 비박도 할 수 없어 다시 돌아왔지만 그 때의 경험이 우리에게 매우 소중했다.
기범이의 선등으로 우리 세 명은 동시에 등반해 나갔다. 지난 경험을 살려서 시간을 줄이려고 무엇하나 망설이지 않고 거침없이 아이스 침니 구간으로 움직여 나갔다. 정상으로 이어지는 헤드월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였고, 한 2시간 정도면 헤드월을 지나 정상에 올라 설 수 있는 거리로 보였다. 하지만 이 볼트 트레버스 피치를 끝마치는 데 만 1시간이 넘게 걸렸다. 왜냐하면 3피치에 달하는 구간이었다.
아이스 침니에서 빙벽 등반 장비를 사용하지 않고 암벽등반 기술을 이용했다. 위험스럽긴 해도 얼음이 없는 바깥쪽을 이용해 살금살금 통과해 나가는 것이 많은 시간을 줄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오히려 지난번 보다 침니 속에 덥힌 얼음이 많이 녹아있어 더욱 쉽게 오를 수 있었다. 아이스 침니와 다시 이어지는 인공등반을 지나는 동안 해는 점 점 세로토레 서벽 쪽으로 기울고 기온은 조금 차가워 졌다. 16피치가 시작되는 이 곳 까지 경험한 나는 암벽화로는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구간임을 알고 있어, 빙벽화로 갈아 신고 아이젠을 착용해야 했다. 동작이 투박해지겠지만 다음 피치부터는 경험해 보지 않은 미지의 세계라서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궁금함이 몹시 기대되었다.
스크류가 2개 밖에 없다는 것이 조금 부담스러워 졌다. 곧 무너질 것 같은 아이스 타워 밑을 트레버스 해 나가는 동안 긴장감으로 동작을 늦출 수 없었다. 밑에서 보면 누워 보였던 빙사면이 막상 올라가면 수직빙벽 같이 느껴지는 아이스 걸리, 비박지라고 하는 18피치는 아무리 봐도 비박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보였고, 어디 한곳 엉덩이를 붙이고 쉴 만한 곳도 없었다. 비좁은 얼음 통로와 다시 이어지는 인공등반은 이제 아이젠을 벗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고, 계속 얼음과 암벽이 번갈아 이어지며 등반을 곤혹스럽게 했다.
헤드월 밑 좁은 바위 골은 너무 옹색했다. 두 발을 붙이고 서있기가 쉽지 않았다. 지금껏 불지 않던 바람도 헤드월은 달랐다. 벽면이 허공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기 직전이라서 그런지 바람이 거셌다. 시간은 오후 7시가 조금 넘었다. 우리는 이 수직 벽의 헤드월 등반을 위해 기범이와 경례가 내 짐을 서로 나누어지고 불필요한 짐은 이곳에 남겨두기로 했다. 나는 배낭을 지지 않고 등반하기로 했다.
마에스트리의 콤퓨레셔는 보이지 않고 정상 쪽을 향해 총총히 박힌 은빛 볼트만 눈에 들어왔다. 나는 암벽화를 다시 갈아 신고 헤드월 첫 피치를 등반해 나갔다. 풍부하게 많은 손 홀드와 발 홀드를 이용하며 수직 벽을 어렵지 않게 움직여 나갔다. 단지 어려움은 간혹 들썩거리는 홀드를 조심해야 했고, 바람의 세기가 문제였다. 60미터 로프의 장점을 살려 2피치까지 등반해 나갔다. 이처럼 수많은 볼트를 사용하며 손쉽게 세로토레를 오를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마에스트리의 고마움은 오를수록 더해 갔지만, 한편 볼트 남용에 대한 그의 편 집중적인 한심스러움 또한 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헤드월 4피치 등반에 접어들면서 3개의 볼트에 매달려 있는 콤퓨레셔를 보고 극에 달하게 되었다. 이 곳 까지 끌어올리며 수많은 볼트를 박은 말로만 듣던 그 콤퓨레셔의 크기는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컸으며, 그래서 30년 전에 이 엄청난 무게의 쇠 덩어리를 끌어올리며 등반한 마에스트리의 대한 존경심이 생겨나게 되었고, 그 존경심은 지금 나의 등반에 대한 느낌이 허무함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바람은 몹시 차가웠다. 콤퓨레셔에서 몇 개의 볼트를 지나니 은빛 색깔의 Cassin사의 볼트는 보이지 않았다. 이 지점부터 브리드웰 피치인 듯 했다. 마에스트리가 콤퓨레셔를 이용해 수많은 볼트를 박으며 재확인의 초등을 이룬 후 내려오면서 마지막 피치의 볼트를 모조리 뽑아버린 것을 그 후 미국에 짐 브리드웰이 첨예한 인공등반 기술을 구사해 재등을 이루었던 그 피치였다. 육각 볼트는 녹이 슬어 눈에 잘 띄었지만 알루이늄 리벳 볼트는 흰색이라 눈에 잘 보이지 않았다. 코퍼헤드는 매우 확실하게 박혀있었고, 앵글 하켄은 숨겨져 있어 줄사다리를 밟고 일어서야만 찾을 수 있었다. 와이어 행거는 이 피치 등반에 필 수 장비였다. 나는 이런 등반기술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단지 알루미늄 리벳 볼트가 흰색이라 하강암 색조에 은폐되어 있어 찾아내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정상 바위 턱을 5미터 정도 남겨 놓고 로프의 길이가 다 되 버렸고, 어둠이 서서히 밀려들기 시작했다. 기범이와 경례가 쥬마링하며 올라오는 시간동안 계속 움직이며 찬바람을 이겨내야 했다. 어둠은 신속하게 밀려들었고, 짙어 가는 어둠에 기범이와 경례의 모습이 점 점 보이질 않았다.
정상이 펀펀한 암벽지대이고 그 위에 세로토레 정상의 눈 버섯이 있을 거라는 나의 예측은 완전히 빗나가 버렸다. 마지막 바위 턱을 잡아 선반 오르기 자세로 헤드월 정점에 올라서야 했고, 발을 딛고 설 수 있는 바위 턱은 불과 한 뼘 정도의 폭이며, 다시 경사진 눈 사면으로 이어졌다. 그 사면을 올라가야만 정상의 눈 버섯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좁은 바위 턱 위에 조심스럽게 굽으리고 앉아 바위 턱 바로 밑에 박힌 2개의 볼트에 로프를 고정시켰다. 그리고 몸의 안정된 자세와 편안함을 가지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나마 두 개의 볼트 중, 한 개의 볼트 행거는 빠져 있었다. 바람은 거세졌고, 그 바위 턱에 서있기가 어려웠다. 잠시 후, 기범이와 경례가 올라왔지만 좁은 바위 턱 위에서 또 어둠과 세찬 바람 속에서 무엇하나 제대로 하기가 힘들었다. 비록 정상은 아니지만 정상에 선 거나 다를 바 없는 헤드월 정점에서 환희를 맛보기는커녕 이 고통스러운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을 꼭 찾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렌턴을 비추며 나는 조심스레 기범이 배낭에서 빙벽화를 꺼내 갈아 신고 아이젠을 착용했다. 좁은 바위 턱에서 매우 어려운 움직임들이었으며, 많은 시간을 소모시키는 일들이었다. 정상의 눈 버섯이 바람막이가 되어준다면 사면을 올라 눈 버섯 밑으로 가는 것이 최선책인 듯 했고, 그래서 나는 사면을 따라 올라갔다. 희미하게 보이는 사면의 스카이라인은 발붙일 수 없는 날카로운 능선 정도로 보였다. 그러나 다행히 사면을 따라 올라갈수록 정상의 눈 버섯이 바람을 막아주었고, 게다가 눈 버섯 밑은 작은 안부를 이루며 거의 평평한 사면을 이루는 매우 아늑한 곳이었다. 마치 환상의 나라에 얼음궁전 같은 곳에 온 듯 했다. 누군가 흘리고 간 짧은 스크류 한 개를 주었다. 마침 나는 로프를 고정시킬 스크류가 없었다. 그래서 그 것을 설치하여 로프를 고정시킨 후 기범이와 경례을 올렸다. 우리 세 명은 눈 버섯의 진정한 정상은 아니지만 어쨌든 세로토레 정상에 섰다. 그러나 서로 껴안고 기뻐하지 못 했다. 지금 이곳이 진정한 정상이 아니기도 했지만, 지금 눈 버섯의 정상에 올라간다 한들 사진 촬영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주위 경치도 관망 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우선 몸에 걸친 장비를 풀어 정리하고 간식을 먹으며 허기진 배를 채웠다. 하루 종일 사탕과 초코렛으로 버텨왔는데도 물리지 않고 잘 먹혔다. 지금 모든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은 내일 아침해가 뜰 때까지 비박하며 밤을 새우는 일이었다. 우리는 배낭을 깔고 가깝게 붙어 쪼그리고 앉아 추위에 버티기 위해 서로 체온을 유지하려 했다. 멀리 찰텐 마을의 밝은 불빛이 아름답게 보였고, 라카시타 레스토랑의 맛있는 스태이크 요리 생각이 났다. 우리가 저 곳에 무사히 내려갈 수 있을까라는 잡념과 함께 졸음이 밀려들었다. 적막한 시간적 공간의 지루함을 달래기는 참기 어려운 추위였다. 기범이는 쓸러질 듯 내 어깨에 기대어 있었고, 경례는 추운지 몇 번씩 일어나 몸을 추수렸다. 나도 선잠을 자려 했고, 또한 간혹 선잠을 자고 있음을 나는 스스로 느낄 수 있었지만, 그때마다 추위를 참기가 더욱 더 힘들어졌다.
내 몸에 느껴지는 추위 때문인지 내일 날씨가 나빠질 수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서 우리가 사진을 남기지 못하여도 지금 내려가는 것이 옳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그만 내려가 버리면 진정한 정상인 눈 버섯에 가지 못한 아쉬움이 오랫동안 남을 일이 염려스러웠다. 그래서 어두운 눈 버섯의 정상에 꼭 가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밤에 이곳을 내려가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기범이와 경례에게 정상에 갔다가 내려가자고 하며 몸을 흔들어 그들을 깨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추위를 이기려 몸을 움직였다. 시계를 보니 새벽 2시가 가까웠다. 우리가 정상 안부에 있은 지 2시간 남짓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우리는 피켈을 들고 서벽 쪽 안부 위로 걸어갔다. 그 쪽 눈 버섯의 사면은 완만했으며 등반성은 없어 보였다. 5미터 정도는 피켈을 사용해야 했고, 그 위로는 쉽게 걸어 갈 수 있었다. 다시 헤드월 쪽 방향으로 20여 미터 걸어가니 정상이었다. 바람이 심하게 불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렇지 않았다. 헤드월을 올라올 때보다는 그 바람 세기가 많이 약해져 있었다. 정상의 어둠은 그렇게 짙지 만은 않았다. 광활한 이에로 컨티넨탈 빙하와 피츠로이의 실루엣을 희미하게 나마 볼 수 있었으며, 우리의 환희는 희미한 정상의 어둠만큼이나 우리들 마음속으로 희미하게 밀려들었다.
- 끝 -
소요 된 장비 ( 등반인원 3명 기준 )
- 공동장비 -
* 로프 : 9미리 60미터 - 2동.
* 카라비나 : 50개 ( 퀵드로 10개 포함 )
* 캠 : 1호 - 1개, 2호 - 1개, 3호 - 1개, 4호 - 2개, 5호 - 2개, 6호 - 2개, 7호 - 1개
8호 - 1개, 9호 - 1개
( 이상 트랑고 사 제품 기준 )
* 피켈( 햄머 ) : 2자루( 50센티 )
* 피켈( 브레이드 ) : 1자루( 55센티 )
* 아이스 스크류 : 2개 ( 18센티 )
* 와이어 행거 : 5개
* 웨빙 : 15개( 55센티 )
* 스노우바 : 2개 ( 하단 벽에서 만 사용했음 )
- 개인장비 -
* 안전벨트 : 1개
* 쥬마 : 1조
* 빙벽화 : 1컬레
* 암벽화 : 1컬레( 선등자 만 사용 - 릿지 화를 사용했음 )
* 아이젠 : 1세트
* 하강기 : 1개( 튜브 )
* 쥬마스탭 : 1개
* 줄사다리 : 2개( 4단 - 얇은 슬링으로 매듭져 만들었음 )
* 장갑 : 1컬레( 가죽 장갑 )
* 헬멧 : 1개
* 렌턴 : 1개
* 피피 : 1개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