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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문학의 거장 어슐러 K. 르 귄
국내 첫 인터뷰집이자 생애 마지막 책
어슐러 K. 르 귄, SF와 판타지 문학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자 수많은 저작으로 그만의 세계관을 널리 퍼뜨린 작가다. 그가 창조한 ‘어스시’ 세계에서는 마법사들이 지상을 걷고 용들이 하늘을 날았으며, ‘헤인 우주’ 세계관에서는 지구뿐 아니라 양성애 행성 게센, 권위에서 벗어난 아나레스 사회 등 저마다 고유한 무대가 펼쳐졌다. 그런 그의 생애 마지막 책이자,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그의 인터뷰를 담은 책이 세상에 나왔다. 이 세상의 어슐러, 잠시 펜을 내려놓은 순간들을 기록한 일종의 맨얼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일평생 글쓰기에 공헌해온 그답게 이번 인터뷰는 르 귄의 글쓰기(소설, 시, 논픽션)를 주제로 진행되었다. 장르를 넘나들며 오가는 말들 속에서 점차 분명해지는 것은 이 대화가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영어의 3인칭 대명사 ‘he’와 ‘she’의 사용에 대해 말하던 대목에서 언어의 구조 밑에 깔린 남성 우월주의적 시각을 논한다거나, 플롯 구성의 한 요소인 ‘갈등’과 현실 세계의 그것을 교차해 바라보는 순간들이 그렇다. 르 귄의 표현을 따르면 일종의 “멋진 배드민턴 랠리”와도 같은 이 대화들은 그의 글쓰기를 향한 통찰이자 사회문화적, 정치적 논의를 아우르는 또 다른 장이다.
지구에서 소멸하고 있는 ‘비인간’ ‘상상력’ ’여성의 글쓰기’를 바라보는 어슐러 K. 르 귄의 시각은 그 자체만으로도 다분히 SF적이다. 세상의 불균형을 해결하기 위해 모두가 SF를 읽어야만 할 것 같은 이 담대하고 유쾌한 인터뷰가, SF에 대한 접근으로,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시각의 접근으로 모두에게 읽히기를 소망한다.
―천선란(소설가)
소설, 시, 논픽션을 아우르는
르 귄의 사려 깊은 고민과 혜안
인터뷰의 첫 장은 르 귄의 ‘소설’을 두고 이루어진다. 그의 소설 쓰기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귀를 기울이는’ 일이다. 말 그대로 르 귄은 자신의 글쓰기가 만들어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앞으로 써 내려갈 문장이 몸 안에서 울리는 소리를 들을 때라야 올바른 ‘리듬’을 갖출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문법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피력하는데, 이때 등장하는 문법의 정확함과 도덕 사이의 토론이 흥미롭다. 그 예로 들고 있는 단수로서의 ‘they’의 사용은 ‘he’와 ‘she’ 사이의 대안으로, they가 ‘올바르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르 귄은 일침을 가한다.
셰익스피어는 ‘he 또는 she’─일상 대화에서는 우리 모두가 그러고 있고, 언제나 그랬죠─라고 쓰지 않고 그냥 ‘they’라고 썼어요. 그런 용법을 영문학에 다시 불러오기 위해서는 여성운동이 필요했어요. 이건 중요해요. 이건 정확함을 운운하는 괴롭힘과 언어의 도덕적 사용 사이의 교차로거든요. 만약 ‘he’가 ‘she’를 포함하지만 ‘she’는 ‘he’를 포함하지 않는다면, 거대한 사회적, 도덕적 함의가 담긴 큰 선언이 이루어지는 거죠.
―26쪽
이어 “영어를 개혁하지 않고는 사회를 개혁할 수 없다”고 말하는 그는, 남성 작가들의 뒤로 밀려난 여성 작가들의 위상을 기리며 그들을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오랜 세월 문학계를 지켜보면서 생긴 혜안이 빛을 내는 순간이다.
한편 인터뷰어 데이비드 네이먼은 르 귄의 시 세계를 일컬어 ‘사색’이라는 단어로 풀어낸다. 르 귄은 그가 존경해 마지않는 자연에 대해 사색한다. 그런 그의 사색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로 이어지는데 이를 두고 르 귄은 이렇게 요약하기도 한다. “지금 자연에 대해 쓰면서 어떻게 우리가 우리 세상에 무슨 짓을 했는지를 시에 집어넣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아울러 르 귄은 내용뿐 아니라 시 속의 단어들이 빚어내는 박자를 깊이 파고든다. 인간과 비타자(동물, 식물, 돌멩이까지도) 사이의 유대감을 사려 깊게 표현해내는 그의 시 세계에서 소설과는 또 다른 리듬이 들려온다.
논픽션을 다룰 때의 그는 조금 주춤하는 듯한데, “내 취향은 아니에요. 정말이지 내 능력에 맞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잘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의 논픽션에서 고유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던 세월 때문일 것이다. 전미도서상을 받고서 한 6분의 연설을 위해 6개월을 공들였다는 그, 예술의 상업화와 예술 실천의 대립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위해 중학생 시절 이후로 그렇게 긴장한 적이 없다고 말하는 그에게서 문학을 향한 진심이 우러나온다. 덧붙여 소설 쓰기에서도 논한 적 있는 여성 작가에 대한 차별도 다시 떠오르는데, 그들이 정전에서 지워지는 점, ‘예외’로 여겨지는 점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문제다.
차이를 넘어서는 글쓰기
상상력의 생생한 활동으로
상상력의 힘을 중요시했던 르 귄이었기에, 그의 글쓰기를 두고서 상상력을 논하는 일은 불가피해 보인다. 데이비드 네이먼의 말을 빌리면 르 귄은 “상상력의 작가”다. 그에게 상상이란 “남는 시간에만 하는 무의미한 활동”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이게 만드는 권능”이다. 르 귄은 SF와 판타지 문학을 대변하면서 그 모든 소설이 삶에 대해 즉각적인 이득을 다루지 않는다는 이유로 폄하되는 것에 반대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상상력, 우리의 정신 활동에서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하는 상상력에 손상을 입힌다고 웅변한다.
그의 상상력에 대한 옹호는 ‘차이를 넘어서는 글쓰기’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데, 그 예로 동물을 다루는 문학이 언급된다. 동물의 관점을 상상해서 쓴 동물담이 오직 아이들용이라고 여기는 현상을 지적하는 대목에서는 그가 느꼈을 좌절과 답답함이 느껴진다. 한편 르 귄은 상상력을 통해 다른 주체가 되어 글을 쓰는 위험도 짚어내는데, 그들의 목소리를 “멋대로 가져다” 쓰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파렴치한’ 행동이었다고 고백하기도 한 『파드의 묘생 일기』(르 귄이 그의 고양이 ‘파드’의 입장에서 써 내려간 책)이 최대한 파드를 이해하고 추측한 결과물, 파드를 향한 존중이었음을 이해하게 되는 지점이다.
다만 우리는 다른 존재의 마음을 상상할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 상대를 멋대로 이용하지 않도록, 매 걸음을 아주 아주 아주 조심해야죠. 우리가 상상하고 이해해보려는 목소리의 자리를 넘겨받아서, 거기에 우리의 목소리를 넣는 거니까요. 끝없이 경계해야만 해요.
―117~118쪽
P.18
저는 제가 쓰는 글의 소리를 들어요. 아주 어렸을 때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언제나 머릿속으로 소리를 들었죠. 알고 보니 글쓰기에 대해 쓰는 많은 사람이 듣거나 귀 기울이지 않고, 좀 더 이론적이고 지적으로 인식하는 것 같더군요. 하지만 몸 안에서 글이 울리면, 스스로가 쓰는 글을 들으면 올바른 리듬을 들을 수 있고, 그러면 문장이 깔끔하게 이어지는 데 도움이 됩니다.
P.38
전 사람들이 선택의 폭에 대해 생각하게 하려는 거예요. 쓰이지 않는 아름다운 선택지가 정말 많으니까요. 어떻게 보면 1인칭시점과 제한적 3인칭시점은 제일 쉬운 시점이고, 그만큼 제일 흥미롭지 않은 선택이에요.
P.41
이야기는 갈등을 다룬다고, 플롯은 갈등에 바탕을 둬야만 한다고 말하면 세상을 보는 관점을 심각하게 제한하는 거예요.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정치적인 선언이기도 하죠. 삶은 갈등이고, 그러니 이야기에서 정말 중요한 건 갈등뿐이라고 말이에요. 이건 그냥, 사실이 아니에요. 삶을 전투로 보는 건 시야가 좁은 사회진화론의 관점인 데다, 굉장히 남성적인 시각이기도 해요. 물론 갈등은 삶의 일부죠. 소설을 쓸 때 갈등을 끌어내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단지 갈등이 이야기의 유일한 생명줄은 아니라는 거예요. 이야기는 다른 많은 것을 다루니까요.
P.42
모든 인간 행동을 갈등으로 제한하는 것이야말로 드넓고 풍성한 인간의 경험을 빼먹는 짓이에요.
P.48
저에게 이야기가 무엇을 다루냐고 묻는다면, 변화라고 하겠어요.
P.67
많은 과학자들이 다른 동물들과 우리의 관계를 객관화하고 싶어 하기에, 우리는 그 어린 유인원이 딱 어린 인간처럼 행동한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요. 아니다, 그 유인원은 유인원의 방식으로 반응할 뿐이다, 우린 그에 대해 결코 인간의 표현을 쓰면 안 되고, 함부로 의인화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드 발이 지적하다시피, 유대감에 대한 공포도 있어요. 우린 유인원이나 생쥐에게 동질감을 가질 수도 없고 가져서도 안 된다는 거죠. 하지만 동질감이 없다면 시가 어디 있겠어요?
P.83
독재자들은 언제나 시인들을 두려워하잖아요. 시인은 정치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여기는 많은 미국인에게는 이상해 보이겠지만, 남아메리카나 다른 독재 치하의 나라에서는 사실 조금도 이상하지 않아요.
P.91
의견을 담아내는 글이라면 어느 경우에나 글 끝에 꼭 문을 열어놓아야 한다고 느껴요.
P.96
나쁜 시절에 예술에 일어나는 일은, 특히 언어예술에 일어나는 일은 무엇이든 무척 중요해질 수 있어요. 나쁜 시절에는 무슨 말을 하는지가 정말 중요하니까요.
P.101
상상력을 아끼거나 방해하거나 업신여기는 건 끔찍한 짓이고, 무엇에 대해서든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 어리고 성장 중인 정신에는 특히 해로워요. 아이들은 상상하고, 상상과 실제를 구별하는 방법을 배워야 해요.
P.101
이성과 상상, 둘 다 훈련이 필요하지요. 몸을 움직일 때처럼 이성과 상상도 운동을 해야 해요. 지금도 합리적인 사고는 어느 정도 훈련하지만, 상상력은 미국의 교육에서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어요. 이건 굉장히 무서운 일이에요.
P.104
전 동물을 다루는 문학과 어린이책 같은 문학이 그들과 최소한의 접촉이라도 하기 위한 창의적인 방법이라 생각해요. 그러니 아주 중요하고요.
P.111
남성의 능동적인 창조력만이 진정한 힘이고, 다른 힘이나 능력은 그에 비해 열등하다고 주장하는 인간 행위의 얼마나 많은 부분이 남성의 보상 심리에서 나왔을까요?
때늦게의 서문 중에서
시는 나무나 강이 무엇인지를 말하려고 시도할 수있는 인간 언어다. 즉, 인간의 능력으로 그 대상에
‘대해서‘ 말하는 동시에 그 대상을 위해서 말한다는뜻이다. 시는 개별 인간의 관계를 어떤 대상(돌멩이든 강이든 나무든)과 관련지음으로써 그렇게 할 수도있고, 아니면 그저 대상을 최대한 진실하게 묘사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도 있다.
과학은 외부에서 정확하게 묘사하고, 시는 내부에서 정확하게 묘사한다. 과학은 밖으로 풀어내어 해설하고, 시는 안으로 풀어내어 함축한다. 둘 다 묘사 대상을 기린다.
우리의 무지나 무책임을 알려주지 못하는 ‘정보‘만 끝없이 쌓지 않으려면 우리에게는 과학의 언어와 시의 언어 둘 다 필요하다.
「사용 설명서」 중에서
시인이 대사로 지명됩니다. 극작가가 대통령으로 선출됩니다. 새로 나온 소설을 사려고 건설노동자들이 사무장들과 같이 줄을 섭니다. 어른들이 전사원숭이들, 애꾸눈 거인들, 그리고 풍차와 싸우는 미친 기사들의 이야기 속에서 길잡이와 지적인 도전을 찾습니다. 문해력은 끝이 아니라 시작으로 여겨집니다.
글쎄요. 어디 다른 나라라면 그럴지도 모르지요.
이 나라에서는 아닙니다. 미국에서 상상력이란 보통 TV가 고장 났을 때나 쓸모 있을지 모르는 뭔가로 간주되거든요. 시와 희곡은 실제 정치와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소설은 학생과 주부, 그리고 일하지 않는 사람들이나 읽는 겁니다. 판타지는 어린아이와 모자란 사람들이나 보는 것이고요. 문해력이란 사용 설명서를 읽을 수 있다는 거랍니다! 저는상상력이 인류가 가진 가장 유용한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마주 보는 엄지의 유용성을 넘어설 정도죠.
저는 엄지손가락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있지만, 상상력이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책 속의 짐승」 중에서
왜 대부분의 아이와 많은 어른은 진짜 동물과 동물에 대한 이야기 양쪽에 반응하고, 우리의 지배 종교와 윤리들은 인간이 이용할 대상이라고만 보는 존재들에게 매혹되고 또 그들과 스스로를 동일시할까요. 산업사회에서는 예전처럼 우리와 일하지도 않고, 그저 우리 식량의 원재료나 우리에게 이득이 될 과학 실험 대상, 동물원과 TV 속 자연 프로그램에서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진기한 존재들, 우리의 심리 건강을 개선하기 위해 두는 애완물일 뿐인데?
어쩌면 우리가 아이들에게 동물 이야기를 주고 동물에 대한 관심을 북돋아주는 건, 우리가 아이들을 온전한 인간이 아니라 열등한 존재로, 정신적인 ‘원시‘인으로 보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우린 애완동물과 동물원과 동물 이야기들을 어린이가 어른으로, 배타적인 인류로 발전하는 길의 ‘자연‘스러운 단계로 보는 거죠. 지성도 없고 무력한 아기에서 시작해서 지적인 성숙과 지배의 영광을 획득하기까지 거쳐야 할 사다리쯤으로요. 존재의 대 사슬 만물이 가장 낮은 무생물부터 가장 높은 신까지 계층적으로 연결되어 질서를 이룬다는 개념이라는 계통 발생의 단계를 반복하는 개체 발생이랄까요.
하지만 그 아이가 찾는 건 뭘까요. 아기 고양이를 보고 흥분하는 아기, 피터 래빗」을 또박또박 읽는 여섯 살짜리, 『블랙 뷰티』를 읽으면서 우는 열두 살짜리라면? 문화 전체가 부정하는데 그 아이는 알아차리는 게 무엇일까요?
「사라지는 할머니들 중에서
예외
남자의 소설을 논하면서 저자의 성별을 언급하는경우는 몹시 드물다. 여자의 소설은 저자의 성별과 함께 논의되는 경우가 아주 잦다. 표준은 남성이다.
여성은 표준의 예외, 표준에서 배제된 존재다.
비평에서나 서평에서나 이 예외와 배제를 실천한다. 예를 들어 버지니아 울프가 위대한 영국 소설가라는 점을 인정해야 하는 비평가는 애써 그녀가 예외임을 보여줄 수 있다. 멋진 요행이라고 말이다.
예외와 배제의 수법은 다양하다. 여자 작가는 소설의 ‘주류‘에 속하지 않음이 드러난다. 그 작가의 글은 ‘독특하며 후대 작가들에게 아무 영향을 미치지않는다. 어떠한 ‘컬트‘의 대상이다. 그녀는 (매력적이고, 우아하며, 마음을 저미고, 감성적인) 연약한 온실의 꽃이며 그러니 남성 소설가의 강력하고, 선이 굵고, 대가다운) 활력과 경쟁한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제임스 조이스는 거의 나오자마자 정전에 올랐다.
버지니아 울프는 정전에서 배제되거나 마지못해 받아들여졌으며 그러고도 수십 년간 의구심을 샀다.
정교하고 효과적인 서술 기법과 장치를 갖춘 『등대접기로」가 기념비적으로 막다른 길인 『율리시스』보다 후대의 소설 쓰기에 미친 영향이 훨씬 크다는 주장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침묵, 유배, 교묘함‘을 선택하고 은둔 생활을 한 제임스 조이스는 스스로의 글과 경력 외에는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는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 나라에서 지적, 성적, 정치적으로 활발한 사람들이 이루는 비범한 집단으로 꽉 찬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어른이 된 후 내내 다른 작가들을 읽고, 서평을 쓰고, 출간했다. 제임스 조이스가 연약한 쪽이고, 버지니아 울프가 굳센 쪽이다.
조이스가 컬트의 대상이고 우연이며, 울프는 20세기 소설의 중심에서 지속적으로 풍부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정전주의자들은 결코 여자에게 중심을 부여하지 않는다. 여자들은 반드시 주변에 남겨져야한다.
어떤 여자 소설가가 1급 예술가라는 사실이 인정되더라도, 배제 수법은 여전히 작동한다. 제인 오스틴은 존경을 많이 받지만, 그래도 어떤 본보기로 여겨지기보다는 독특하고 흉내 낼 수 없는 놀라운 우연으로 여겨질 때가 많다. 실종될 순 없어도, 완전히 포함되지도 않는다.
작가의 생존기에 일어나는 폄하, 누락, 예외는 작가의 죽음 이후 일어나는 실종의 준비 작업이다.
진지한 문학에 대하여
밤중에 뭔가가 그녀를 깨웠다.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젖은 운동화를 신고 아주 천천히 계단을 오르는...... 그런데 누구지? 왜 신발이 젖었지? 비는 오지 않았는데, 저기, 다시 그 무겁고 젖은 발소리다. 하지만 몇 주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았는데, 폭염만 계속됐는데, 갑갑한 공기와 곰팡이 냄새, 아니 썩은 내인가, 아주 오래된 살라미 아니면 초록색이 되어버린 간 소시지에서 나는 것 같은 달콤한 썩은 내. 아, 또다. 빽빽 소리가 나는 느린 발걸음, 그리고 썩은 냄새가 더 강해졌다. 뭔가가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문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썩어가는 살을 뚫고 나온 발꿈치뼈가 부딪치는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그게 뭔지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건 죽었는데, 죽었단 말이야! 저주받을 셰이본. 다른 진지한 작가들과 힘을 합쳐 그것의 오염된 손길에서 진지한 문학을 구하기 위해 묻어놓았더니 그걸 무덤에서 끌고 나왔어. 그텅빈 데다 뾰루지투성이인 얼굴, 썩어가는 눈동자의 무감각하고 무의미한 눈길이 얼마나 무서운지! 셰이본 그 바보는 뭘 한다고 생각한 거야? 진지한 작가들과 진지한 비평의 끝없는 의식들에 관심도 안 둔 거야? 공식적인 추방 의식들에 반복된 저주, 심장을 관통하고 또 관통한 말뚝들, 신랄한 비웃음, 무덤 위에서 끝도 없이 춘 엄숙한 춤들에 하나도 관심을 안됬어? 그 작자는 야도Yinddo, 뉴욕의 예술가 커뮤니티의 순결을 보존하고 싶지 않았던 거야? 사이파이와 반리얼리즘 소설을 구별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도 못 한 거야? 코맥 매카시는 비록 터무니없이 애매한 어휘를 훌륭하게 사용해대는 걸 빼면, 그의 책에있는 모든 것이 홀로코스트 이후에 나라를 가로지르는 사람들을 다룬 많고 많은 초기 SF 작품들과 놀랍도록 흡사하긴 하지만, 그렇다 해도 결코 어떤 상황에서도 사이파이 작가라곤 할 수 없다는 걸, 코맥 매카시는 진지한 작가고 그러니까 정의상 장르를 쓴다는 품위 떨어지는 일을 할 수가 없다는 걸 이해하지 못한단 말이야? 셰이본은 어떤 미친 멍청이들이 퓰리처상을 줬다는 이유만으로 ‘주류‘라는 말의 성스러운 가치를 잊어버렸단 말이야? 아니다, 그녀는 빽빽 젖은 발소리를 내며 침실까지 들어와서 이제는 그녀를 굽어보는 그 물건을 쳐다보지 않을 것이다. 로켓 연료와 크립토나이트슈퍼맨의 고향 크립톤에서 온 물질로, 슈퍼맨의 힘을 약화한다의 악취가 풍기고, 세찬바람 속 황야의 낡은 저택처럼 삐걱거리며, 뇌는 과일처럼 속에서부터 썩어가고, 두 귀에서 작은 회색세포들을 뚝뚝 흘리는 그 물건을. 하지만 그녀의 주목을 요구하는 그 물건의 힘은 강력하고, 그 물건이 손을 뻗자 그녀는 반쯤 썩은 손가락 하나에 낀 타는 듯한 금반지를 보았다. 그녀는 신음했다. 어떻게 그 물건을 그렇게 얕은 무덤에 묻고는, 버려두고 그냥 걸어올 수가 있었을까? ˝더 깊이 파요, 더 깊이파!˝ 그렇게 외쳤건만, 그자들은 그녀의 말을 듣지않았다. 그래서 이제 그자들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녀에게 꼭 필요한 다른 진지한 작가와 평론가들은 지금 어디 있나? 그녀의 『율리시스』 책은 어디 있을까? 침대 옆 협탁 위에는 독서등을 받치는 데 쓴 필립 로스 소설책 한 권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얇은 책을 들어 끔찍한 골렘 히브리 신화에서 사람의 형상을하고 움직이는 존재. 현대 판타지에서는 종종 마법의 힘으로 움직이는 흙 인형이나 괴물을 가리킨다 앞으로 들어 올렸다. 그러나 그걸로는 부족했다. 필립 로스도 그녀를 구할 순 없었다. 괴물이 비늘 덮힌 손을 그녀에게 얹자 반지가 타는 석탄처럼 그녀를 지켰다. 장르가 그녀의 얼굴에 시체의 입김을 불어넣자 그녀는 지고 말았다. 그녀는 더럽혀졌다. 죽는 편이 나을지 몰랐다. 그녀는 이제 결코 문예지 집필 의뢰를 받지 못할 것이다.
논픽션에 대하여
지난 10년간 그는 중요해진 유명 인사이자 사상가인 ‘이 세상의‘ 어슐러였다. 같은 기간 동안 어슐러는 구글이 저작권을 무시하고 책을 디지털화할 수 있게 합의한 작가조합에 항의하며 조합에서 공개적으로 탈퇴했다. 또한 많은 이가 전미도서재단 역사상 가장 맹렬한 연설로 꼽을 발언도 했는데, 미국 문학에 대한 두드러진 공헌을 인정하는 상을 받으면서 그 기회에 아마존 같은 곳이 책과 저자들을 점점 더 상업화하고 상품화하는 현실을 맹공격했다. 어슐러는 소위 포스트 팩추얼 시대 무엇이 사실인지 중요하지 않게 된 시대에 사실이란 무슨 의미인가에서부터,
정부로부터 ‘해방‘하겠다는 이유로 민병대가 오리건주 남동부의 야생동물보호구역을 점령하는 시절에 과연 ‘공유지‘란 무슨 의미인가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많은 문제를 두고 벌어지는 전국적 담론에서 중요한 구성원이 되었다. 또한 같은 시기에 어슐러는 작가로서 초기에 겪은 어려움을 나누고, 어느 웹사이트 포럼에서 글쓰기에 대한 조언을 했으며,
블로그에 고양이 파드의 ‘회고록‘을 연재하면서 그의 삶을 다른 식으로도 보게 해줬다.
그러니 우리의 세 번째 대화로 논픽션 쓰기를 이야기하고자 라디오
송국이 아니라 어슐러의 집에서 만난 것도 어울리는 일이었다. 우연히도 어슐러의 삶과 작가 경력에 대한 다큐멘터리 촬영을 돕고 있었던 KBOO의 오후 뉴스 코디네이터 에린이 우리 대화를 녹음해주겠다고 자원했다. 나는 예린과 함께 그 집으로 갔고, 우리는 야외 녹음으로서는 최상의 품질이 나오는 안락하고 책이 가득한 2층 공간에 자리를 잡았다. 그래도 세상이 계속 끼어들기는 했다. 우리는 트럭이 가까이 지나갈 때도 멈추고, 옆 침실 안의 제일 좋아하는 침대에 누워 있다가 이게다 무슨 소란인가 확인하러 나온 파드에게 인사하느라고도 멈췄다.
내가 그랬듯 독자들도 어슐러가 소설과 시에서 가장 편안함을 느끼고,
선언과 주장의 세계에서는 좀 더 불편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어둠의 왼손」에서 어슐러는 ˝어떤 질문이 대답할 수 없는 것인지 배우고, 그런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압박과 어둠의 시절에 꼭 필요한 기술이다˝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세이, 문학비평, 강연에서-과학과 환경에 대해서든, 구글과 아마존에 대해서든, 페미니즘과 문학의 정전에 대해서든 자신의 관점을 전달하는 이영역에서 어슐러는 목소리가 없는 이들을 변호하고, 모든 예술가, 아니 모든 사람의 내면에 있는 답 없는 존재를 대변해 말하는 것 같다.
논픽션에 대한 이 대화를 끝내면서 나는 소설, 시, 논픽션이라는 세 장르 모두에 이렇게 깊은 역사를 지닌 사람과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드문 일인지 말했다. 지금까지의 여정이 얼마나 특별했는지도. 사실은 달리 누구와 이런 일을 또 할 수 있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이대화를 책으로 만들어야겠는데요!˝ 어슐러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리하여 이 책이 나왔다. 어슐러 K. 르 귄의 사색이 우리의 현실이 되고, 세상에 나온 오브제가 되어 우리 손안에 펼쳐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