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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20일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요한 3,31-36
태양에 반응하지 않으면 생명체가 아니다
영화 ‘더 레슬러’는 1980년대에 활동했던 프로 레슬링 스타인 랜디 로빈슨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랜디는 예전에는 레슬링계에서 굉장한 인기를 끌었지만, 그의 몸은 나이와 건강 문제로 인해
점점 약해져 가고 경기도 이전보다는 덜 하게 됩니다.
평생 레슬링에 몸을 바친 랜디는 아내도 없고 딸도 아버지를 인정하지 않으며 세상에서 혼자가 되었습니다.
돈도 없어서 컨테이너에서 사는데 그마저 월세도 밀린 판입니다.
어쩔 수 없이 랜디는 소규모 관객을 대상으로 레슬링 경기를 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다시 되돌리고자 합니다.
하지만 의사는 심장에 무리가 와서 더는 레슬링을 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는 레슬링 아닌 곳에서 안식처를 찾지만 찾지 못합니다. 아이 하나 딸린 술집 여자만이 그에게
관심을 가져줍니다.
그리고 그녀의 응원으로 딸과의 관계도 회복시켜보려 합니다.
그러나 관계란 것이 틀어질 때도 있기 마련인데 랜디는 딸과 연인과의 관계 모두를 다시 엉망으로 만듭니다.
랜디는 다시 무대에 나섭니다.
그리고 그 무대에서 죽기를 원합니다.
이미 그를 응원하는 함성소리가 크게 울려퍼집니다.
그를 걱정하여 온 애인이 무대에 오르면 안 된다고 말하지만, 랜디는 여자의 말을 뿌리치고 무대로 오릅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환성소리를 지르며 천천히 죽어갑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미키루크는 80년대를 풍미했던 꽃미남 영화배우였습니다.
하지만 마약과 교통사고 후 망가진 얼굴로인해 삶이 추락해버렸고 이후 성형수술로 얼굴 복원 수술을하지만 그마저도 실패해서 지금의 얼굴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화속 주인공의 설정은 사실상 현실의 미키루크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은 하늘 아니면 땅입니다.
땅은 우리가 본래 생겨난 곳입니다.
랜디에게는 링입니다.
거기서 벗어나려 해도 다른 곳에서의 안식처가 그 링의 유혹을 이길만큼 크지 못합니다.
그는 이전의 영예도 다시 느끼고 싶고 애인이나 딸과의 관계도 잘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욕심이었고 그러다 다 망쳐버렸습니다.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는 어쩌면 하늘과 땅은 영원히 만날 수 없고 타협할 수 없음을 몰랐을 수 있습니다.
애인에게 가기 위해서는 링을 떠나야 합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은 극단적인 이원론일 수밖에 없습니다.
통합이니 뭐니 하는 소리에 휘둘리면 안 됩니다. 극단적 이원론 시각으로 볼 줄 알아야 올바른 선택이 가능하고 그래야 구원을 받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늘에 계십니다.
땅에는 계시지 않습니다.
어쩌면 “하느님은 계시지 않은 곳이 없는데
어떻게 하늘에만 계십니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라고 하십니다.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섞일 수 없는 분이란 뜻입니다.
주님의 기도에서도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합니다.
왜 땅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으실까요?
사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실 수 없는 곳이 땅입니다.
땅이란 하느님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을 의미합니다.
어떻게 하느님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공간이 있을까요? 인간의 자유의지로 하느님의 영향을 단절한 곳이 존재합니다.
그곳이 우리 마음일 수도 있고 그러한 사람들이 모인 지옥일 수도 있습니다.
좋은 예가 있습니다.
태양은 모든 나무에 빛을 줍니다.
하지만 죽은 나무 속으로는 빛이 아무런 효과도
내지 못합니다.
땅은 그러한 곳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은 하늘과 하늘이 된 존재에게만
함께 머무시는 것입니다.
새로 태어난 존재는 어떨까요? 빛의 열매를 맺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빛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그 사람 안에 들어가 열매를 맺는다면 그 사람은 하늘의 존재입니다.
그러나 죽은 나무처럼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땅에 속한 존재인 것입니다.
이것으로 우리의 구원과 멸망이 결정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꽃이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조각에 불과할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태양에 반응하고 바람에 흔들립니다.
하느님 말씀에 반응하고 흔들린다면 아직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카리옷 유다처럼 흔들리지 않고 자기 갈 길을 간다면 죽은 것입니다.
죽은 고목에 아무리 태양 빛을 쬐여도 그것은 살아나지 못합니다.
하늘 아니면 땅입니다.
빛 아니면 어둠입니다.
생명 아니면 죽음입니다.
천국 아니면 지옥입니다.
둘이 공존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하늘의 것이 되려면 생명을 갖는 수밖에 없습니다.
땅의 것을 포기하고 하늘로 오르는 나무처럼 되어야 합니다.
바람에 흔들리고 빛에 반응할 때 그 생명은 땅에서 낳지만 하늘의 것이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4월20일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요한 3,31-36
환골탈태한 사도들의 모습!
요즘 첫 번째 독서로 봉독되는 말씀은 사도행전입니다.
사도행전은 신약성경의 다섯번째 책으로 초대 교회 공동체의 생활상과 사도들의 행적에 대해서
소상히 파악할 수 있는 소중한 책입니다.
신약성경 가운데 유일한 역사서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이 어떻게 만방에 전파되고 지속되는지를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바오로 사도의 협력자이자 제3복음서의 저자인 루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와 요한 사도에 대한 루카복음사가의 기록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그 무렵 유다 지도자들과 원로들과 율법학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사도행전 4장 13절)
제가 사도행전을 기록했다면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 예수님의 애제자였던 요한에 대해 최소한의 예우를 갖춰 기록했을 것입니다.
적어도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이란 표현은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신 어떻게 하면 그들의 약점을 감추고 장점을 부각시키려고 애를 썼을 것입니다.
“이들은 비록 정식 율법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지혜롭고 총명했다.
특히 전문직 어부로서 갈릴래아 호수 전체를 꿰뚫고 있었으며, 고기잡이에 관해서는 둘째가면 서러워할 노하우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루카복음사가는 그 어떤 가감도 없이 솔직하게 두 사람의 출신배경을 소개합니다.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
따지고 보니 그렇습니다.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이었던 베드로와 요한 사도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지혜와 경륜이 충만한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당대 둘째가면 서러워할 율법학자들의 토론에서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탁월한 언변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의 말씀을 묵상하노라면 깜짝 놀랄 일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때 무기력하고 의기소침했던 제자들, 나약하고 우유부단했던 제자들의 모습은 더 이상 발견할 수 없습니다.
완전 딴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완전 환골탈태한 새로운 모습으로, 그 어떤 박해나 협박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섭니다.
용맹하고 당당하게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다가 체포되어 산헤드린 앞으로 끌려갔던 베드로와 요한 사도였습니다.
더이상 머뭇머뭇하던 과거 그들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노회하고 구린 산헤드린 의원들 앞에서 조금도 주눅들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했습니다.
더 이상 더듬더듬, 주저주저가 아니라 술술~감동적이고 논리정연한 설교를 펼쳐나갔습니다.
풀려난 두 사도는 동료 제자들이 모여있는 장소, 곧 초대 교회로 달려갔습니다.
그 기쁜 소식, 자신들이 적대자들 앞에서 얼마나 당당하고 통쾌하게 주님의 말씀을 전했는지를 알려줬습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동료들은 한 마음으로 목소리를 높여 하느님께 기도를 바쳤습니다.
성령으로 가득 찬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더 이상 의혹이나 불신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박해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습니다.
환골탈태한 제자들! 그 배경에 과연 무엇이 자리 잡고 있는가 생각해봅니다.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초대 교회 공동체 전체를 뒤덮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이제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힘차게 활동하고 계십니다.
성령의 활기찬 동반에 힘입어 제자들은 간절히 기도하고, 힘차게 선포하며, 박해 속에서도 기쁘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제2주간 목요일>(2023. 4. 20. 목)(요한 3,31-36)
<지금 여기서>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요한 3,31).”
이 말을 뜻에 따라서, “예수님은 땅에서 난 사람이 아니라 위에서(하늘에서) 오신 분이고, 만물을 지배하시는 주님이신 분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땅에 속한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다.” 라고 바꿔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 오시는 분’이라는 말은, ‘하늘에서 오신 분’, 또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는 뜻이고,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라는 말은, 만물을 지배하신다는 뜻입니다.
‘구원’에 초점을 맞추면, 이 말은 사람을 구원하거나 구원하지 않을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땅에서 난 사람’은 그냥 ‘인간’을 뜻하는 말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을 뜻하는 말입니다.>
‘땅에 속하고’는 하느님께서 구원해 주시지 않으면 구원받을 길이 없는 피조물의 처지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피조물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창조주이십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1,1-3).”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라는 말은, 예수님의 복음, 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 세상의 학문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인데, 여기서 ‘땅에 속한 것’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구원사업과는 상관없는, 세속의 학문 같은 것들을 가리킵니다.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요한 3,32-34).”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뒤의 7장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나의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다. 누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려고만 하면,
이 가르침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인지 내가 스스로 말하는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요한 7,16-17).”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 믿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믿고 있습니다.
항상 믿음이 먼저입니다.>
여기서 ‘증언’은 인류 구원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과 의지에 대한 증언, 즉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구원의 복음’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너무 적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아무도’ 라는 말은, 하나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너무 적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서,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 사람들도 포함하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한 것이다.’ 라는 말은, “인간의 멸망이 아니라 구원이 하느님의 뜻”
이라는 것을 증명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지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하느님의 뜻은 인간 구원’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입니다.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34절의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라는 말은, 32절의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라는 말의 보충 설명입니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예수님은 하느님의 성령으로 충만하신 분이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다.”) 라는 뜻인데, “모든 것 위에 계신다.”, 즉 “만물을 지배하시는
주님이시다.” 라는 말의 보충 설명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요한 3,35-36).”
예수님은 인간에 대한 전권을(생살여탈권을) 가지고 계신 분이기 때문에(마태 28,18),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고,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멸망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영생과 멸망으로 갈라지는 것에 대해서 ‘선택’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영생과 멸망은 비교할 수 없는, 또는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는 일이고, 사실상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라는 말은 신앙인들에게 주는 약속이고,
우리의 희망입니다. <반드시 이루어질 확실한 희망입니다.>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라는 말은,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경고입니다.
‘머무르다.’ 라는 말은, ‘지금 여기서’ 그 상태가 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서 진행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믿어서 생명을 얻는 일도, 믿기를 거부해서 멸망을 향해 가는 일도 ‘지금의 일’입니다.
‘나중’은 없습니다. (‘나중’은 인간의 시간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믿어야 하고, 지금 회개해야 합니다.
구원과 영생은 지금 여기서 시작되어서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됩니다.
지금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가 그날 그곳에서 갑자기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 아무것도 안 하면, 그때 가서 후회만 하게 될 것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