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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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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사진 작가 스크랩 독립문에서 명동까지
하늘바다 추천 0 조회 105 11.04.23 20:29 댓글 6
게시글 본문내용

 

 

서대문 형무소에서 명동까지

(독립공원 -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선바위-사직단-사직공원-서울교육청-명동)

 

2011년 삼일절,  공동체 형제들에게 길을 걷자고 제안을 했지만 반겨주는 사람 없어 점심 뒤 혼자 길을 나섰다.

오늘의 의미를 살필 수 있는 곳으로 길을 나섰다.

지하철 3호선 4번 출구를 나서면 독립공원을 만난다.

 

 

겨울 찬바람이 아직 완전히 물러가지는 않았지만 춥지는 않다.

독립문은 동립공원의 남쪽 끝에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 주초와 함께 세워져 있다.

독립문은 현 위치에서 동남쪽으로 7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세워졌으나

1979년 성산대로를 개통하면서 이곳으로 옮겨졌다.

 

 

서재필 박사(1864년 11월 20일 전라남도 보성 - 1951년 1월 5일) 동상,

독립협회의 창설과 함께 종래의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건립하는 운동을 제의하였다.

이 제의는 국민 각계각층의 호응을 받아 1897년 11월에 국민의 성금으로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건립하였다

 

이름 하나로도 호감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매번...

 

 

1907년 시텐노가즈마(四天王數馬)의 설계로 착공,

다음 해 '경성감옥(京城監獄)'이란 이름으로 문을 연 후

80년 동안 약 35만 명을 수감, 숱한 민족의 수난사를 잉태하였다.

일제강점기 때는 주로 민족지도자와 독립운동가,

4·19혁명 이후 1980년대까지는 정치인·기업인·세도가·군장성·재야인사·운동권 학생 등과

이 밖에 살인·강도 등의 흉악범과 대형 경제사범·간첩 등 다양한 범법자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1912년 서대문감옥, 1923년 서대문형무소, 1946년 경성형무소,

1950년 서울형무소, 1961년 서울교도소 등의 명칭을 거쳐 1967년 서울구치소로 개칭되었고,

1987년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한 이후 1998년 사적(史蹟) 제324호로 지정되었다.

서울시는 이곳을 민족의 수난과 독립운동의 역사교육 현장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구한말의 독립관을 복원하고, 공원을 조성하여 1992년 '서대문독립공원'으로 개원하였다.

1998년에는 역사관을 개원하여 옥사와 사형장, 망루와 시구문 등을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이곳에는 3.1운동때 유관순열사가 갇혔던 지하 여자감옥,

윤봉길의사가 복역중 만들었다는 붉은 벽돌,

강우규의사가 처형당한 사형장,

여러 독립투사들이 투옥되었던 1평 남짓한 좁은 감옥들이 남아있다.

 

 

 3.1절이라 입장료 없는 날이다.

아이들과 함께 온 가족들로 넘쳐났다.

 

 

 

 

원래 15개 동이었던 옥사를 7개 동만 원형대로 보존하여 역사관으로 개관했다.

 

 

 

 

3.1절 행사가 진행되는 틈새에...

그대여, 조국을 위해 ....!

 

 

 

 

 

1855년 6월 2일 (평안남도 덕천) - 1920년 11월 29일

제3대 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를 폭살하기로 결심하고,

 1919년 9월 2일 남대문역(현재의 서울역)에서 사이토의 마차에 폭탄을 던졌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피신하던 중 체포되어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을 당하였다.

 

 

 

 

 

 

1923년 벽돌로 쌓은 높이 4미터의 담장이다.

담장의 총 길이는 1,161미터였으나

현재는 앞편에 80미터, 뒷편에 200미터가 보존되어 있다.

 

 

한센인 수감자를 따로 수감하던 옥사

 

 

 

아이들에게 문제를 내고 아이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는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1930년 대 후반에 설치된 높이 10미터의 망루.

원래 6기가 설치되었으나 현재는 앞뒤편 1기씩 2기가 보존되어있다.

 

 

임승오 작가의 2010년 작품의 추모비로

제목은 "민족의 혼 그릇"이다.

작품에는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서대문 형무소 사형장,

사형장을 담으로 다시 둘렀다.

 

 

"통곡의 미루나무"

1923년 사형장을 만들 때 함께 심어진 미루나무이다.

사형장으로 끌려가던 애국지사들이 이 나무를 붙잡고 독립을 이루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해야 하는 원통함을 ....

 

 

통곡의 미루나무는 담 안과 밖으로 한 그루씩 심겨졌다.

사형장 안쪽의 미루나무는 너무나 억울한 사람들의 한을 온 몸으로 받아서인지

담 바깥의 미루나무에 비하면 높이도 둘레도 채 삼분의 일도 되지 못한다.

 

"가슴 아프다."

 

 

서대문 형무소를 나와 길을 건너 인왕산 자락으로 든다.

선바위 이르는 오르막 길에는 다닥다닥 집들이 있는데

자세히 보면 OO사, OO암들이다.

여기엔 일년 내내 굿판이 벌어진다.

 

 

선바위,

1973년 1월 26일 서울시 민속자료 제4호로 지정되었다.

2개의 거대한 바위가 마치 중이 장삼을 입고 서 있는 것처럼 보여 ‘’자를 따서 선바위라 불렀다고 전한다.

 암석 숭배의 일종으로 이곳에서 소원을 빌면 모두 이루어진다고 여겨 일찍부터 신앙의 대상이 되어왔다. 

조선 태조가 성을 쌓을 때

정도전()과 무학대사가 이 바위를 성 안으로 할 것인지 성 밖으로 할 것인지를 놓고 의견 대립을 보였으나

결국 정도전의 의견에 따라 성 밖으로 밀려났다.

이에 무학대사는 "이제 중이 선비의 보따리나 짊어지고 다니게 되었다."고 하며 탄식했다고 전한다.

선바위에서 바라본 서울

 

 

 

 

이 계단이 끝나는 곳이 국사당이다.

국사당은 남산에 있었으나

1925년 일제가 남산 중턱에 신사를 세우는 바람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조선시대, 국사당에서는 굿의 성격을 짙게 띤 제사를 지냈다,

삼일절, 그 날에도 굿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인왕산, 사직공원 가는 길에...

 

 

맞은편 언덕에서 바라본 선바위와 국사당이 있는 곳

 

 

서울 성곽을 끼고 내려가면 사직공원이다.

 

 

 

 

서울 성곽에서 바라본 경복궁

 

 

서울시 교육청 앞의 녹음 스튜디오

복음성가를 녹음하기 위해 휴일인데도 동료 수사님은 일하고 있었다.

위로차 들러 밥이라도 함께 하자고 했다.

 

 

저녁 먹으러 가다가

예뻐서 찰칵!

 

 

저녁을 먹고 명동을 향해 걷다가....

광화문 광장의 야경

 

 

명동이 춤춘다.

서울이 춤춘다.

대한민국이 춤춘다.

 

삼일절,

대한민국 만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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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1.04.23 20:30

    첫댓글 통곡의 미루나무,
    사형장 담 안쪽의 미루나무,
    생각만 해도 아프다.

  • 11.04.23 21:51

    미루나무에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알고 보니 마음이 다르네요. 고맙읍니다.....

  • 오늘은 아멘이라 할 분위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부활 축하 드립니다..알렐루야..

  • 11.04.25 15:06

    감사합니다. 역사교과서를 보는 듯합니다. 통곡의 미루나무...지금은 무슨 생각을 하며 묵묵히 서 있을까요?

  • 11.04.29 12:20

    신부님!광화문의 화려한 불빛과 형무소의 붉은 벽돌이 대조되는 군요
    수많은 영혼들을 위하여 누군가 촛불을 키고 있겠지요 오늘도..저만 빼구요

  • 11.05.01 15:12

    신부님, 근대사 공부 잘 했습니다. 저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태극기를 보면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데 지금은 열정이 많이 퇴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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