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상도(氣象圖)
김기림
세계의 아침
비늘
돋힌
해협(海峽)은
배암의 잔등
처럼 살아났고
아롱진 「아라비아」의 의상을 두른 젊은 산맥들
바람은 바닷가에 「사라센」의 비단폭처럼 미끄러웁고
오만(傲慢)한 풍경은 바로 오전 칠시(七時)의 절정(絶頂)에 가로누웠다
헐떡이는 들 위에
늙은 향수(香水)를 뿌리는
교당(敎堂)의 녹슨 종(鍾)소리
송아지들은 들로 돌아가려무나
아가씨는 바다에 밀려가는 윤선(輪船)을 오늘도 바래 보냈다.
국경 가까운 정거장(停車場)
차장(車掌)의 신호(信號)를 재촉하며
발을 구르는 국제열차
차창마다
「잘 있거라」를 삼키고 느껴서 우는
마님들의 이지러진 얼굴들
여객기들은 대륙의 공중에서 띠끌처럼 흩어졌다
본국(本國)에서 오는 장거리 「라디오」의 효과를 실험하기 위하야
「쥬네브」로 여행하는 신사(紳士)의 가족들
「샴판」, 갑판 「안녕히 가세요」, 「다녀오리다」
선부(船夫)들은 그들의 탄식을 기적(汽笛)에 맡기고
자리로 돌아간다
전서구(傳書鳩)들은
선실의 지붕에서
수도(首都)로 향하여 떠난다
......「스마트라」의 동쪽.... 5 「킬로」의 해상(海上)......일행 감기(感氣)도 없다
적도(赤道) 가까웁다. ...... 20일 오전 열시......
(『기상도』 제1부, 1936)
[어휘풀이]
-사라센 : 유럽에서 아라비아인 또는 이슬람교도를 부르는 이름
-윤선 : 화륜선(火輪船), 기선(汽船)을 지칭하던 옛말
-차장 : 예전에 버스, 전차 등의 승무원을 이르던 말
-쥬네브 : 스위스 서부에 위치한 시계 공업의 중심 도시
-샴판 : 샴페인
-전서구 : 소식을 전하는 비둘기
-스마트라 : 인도네시아의 섬
[작품해설]
1930년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하면서 시작(詩作)을 시작한 김기림은 이양하, 최재서 등과 함께 주지주의 문학, 특히 LA/리차즈의 문학 이론을 도입하여, 이를 근거로 해서 모더니즘 문학운동을 선언하는 한편, 그 이론에 입각한 시 창작을 시도하였다. 그는 「현대시의 기술」 · 「현대시와 육체」 · 「오전(午前)의 시론」 등의 주지적 시론을 발표하면서 시 창작을 병행하여 나갔다. 그러면서도 그는 언어의 기교적 측면에만 관심을 갖는 일부 모더니즘 시인들을 ‘기교주의’라 비판하면서 내용과 형식이 조화가 된 ‘전체시’를 창ㅈ가할 것을 주장한다. 그의 장시 「기상도(氣象圖)」는 바로 김기림 자신이 주장한 ‘전체시론’의 방법론에 근거하여 의도적으로 창작된 작품이다. 이 시는 자신의 모더니즘 이론을 충실하게 이행하려 한 시이며, 현대시가 지녀야 할 주지성과 회화성, 그리고 문명 비판적 태도 등을 동시에 시도하여 본 작품이다. 따라서 이 시는 그 시적 형상화의 면에서보다는 시사(詩史)적인 면에서 더 의의를 지니는 작품이다. 이 시는 전체가 7부 400여 행으로, 그 전모는 ‘①세계의 아침 ②시민 행렬 ③태풍(颱風)의 기침(起寢)시간 ④자취 ⑤병든 풍경 ⑥올빼미의 주문(呪文) ⑦쇠바퀴의 노래’로 구성되어 있다. ‘태풍의 내습과 강타’라는 극적 상황 설정을 통해 세계 정치의 ‘기상도’를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태풍’의 진행 과정을 중심으로 볼 때, ①,②는 태풍 이전 ③,④는 그 발생과 진행 ⑤,⑥은 태풍 내습 후의 파괴된 풍경 ⑦은 기상의 정상 회복에 대한 시인의 희망을 서술하고 있다.
윗부분은 이 중의 제1부 ‘세계의 아침’에 해당하는 것으로 태풍 내습 이전의 건강한 세계의 아침 풍격을 묘사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바다’ · ‘갑판’ · ‘정거장’ 등을 배경으로 한 세계 시민의 행복한 삶이 ‘아침’이라는 신선한 이미지로 제시된다. 따라서 윗부분에서는 어떤 상징적 의미보다는 첫 연에서 보듯 이미지즘의 형태와 같은 기법적인 측면에 더 관심을 기울일 만하다. 이와 함께 과도한 외래어의 사용이 초래하는 모더니즘의 부정적인 특성도 엿 볼 수 있다.
시 전체로 볼 때, 이 시는 ‘이야기 시’가 아닌 형식으로 처음으로 시도된 장시(長詩)라는 형식적 의의를 지니며, 내용적인 면에서는 ‘태풍의 내습과 강타’라는 상황이 알레고리적 수법에 의해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상징화 되어있어서, 문명 비판 의식이 당대의 역사적 ·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파편화된 이미지들이 과도하게 흩어져 있을 뿐 이들을 하나로 통합시킬 수 있는 시적 통일성의 장치가 부족하고, 그 이미지도 시인의 관념 속에서만(세계지도 위에서만)펼쳐지고 있어서 시적 구체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물론 김기림의 이러한 결점은 차츰 극복된다. 이 시 이후 발표한 시들을 묶어 낸 시집 『태양의 풍속』은 점차 이미지즘 위주의 시작 경향을 보여 주고 있다. 『바다와 나비』 · 『요양원』 · 『겨울의 노래』 등의 대부분의 시들은 모두 서정과 지성이 결합된 선명한 시각적 영상을 보여 주눈 데에 성공하고 있다.
[작가소개]
김기림(金起林)
본명 : 김인손(金仁孫)
1908년 함경북도 학성 출생
1921년 보성고보 중퇴 후 도일, 릿쿄(立敎) 중학 편입
1926년 니혼(日本)대학 문학예술과 입학
1930년 졸업 후 조선일보 기자
1931년 『신동아』에 「고대(苦待)」, 「날개만 돋치면」을 발표하여 등단
1933년 이효석, 조용만, 박태원 등과 구인회(九人會) 창립
1935년 장시 「기상도(氣象圖)」 발표
1936년 도호쿠제국대학(東北帝大) 영문학과 입학
1945년 조선문학가동맹의 조직 활동 주도
1950년 6.25 때 납북
시집 : 「기상도」(1936), 「태양의 풍속」(1939), 「바다와 나비」(1946), 「새 노래」(19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