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이 나라를 강제로 빼앗고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우며 중국과 동남아를 침략할 때에 이른바 내선일체 정책을 펴면서 우리 겨레를 징병과 진용, 위안부로 전쟁터로 끌고 갔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우리말을 쓰지 못하게 하면서 일본식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민족정신까지 없애려고 했다. 또 우리말 사전을 만드는 것이 독립운동이라며 조선어학회 간부들을 함흥 형무소에 가두고 온갖 고문과 협박을 했는데 이때 이윤재, 한징 두 분은 모진 고문과 추위,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옥에서 돌아가셨다. 이른바 1942년에 일제가 우리 겨레를 없애려고 조선어학회 간부들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조작해 형무소에 가둔 조선어학회사건이다. 일제는 1938년부터 학교에서 조선어 과목을 없애고 우리말을 쓰지 못하게 했다. 1940년 2월부터는 우리식 이름과 성씨까지 일본식으로 바꾸게 하고, 민족정신을 가진 모임들에게 국민총연맹에 가입하게 하면서 그 이름들까지 그들 입맛에 맞게 바꾸게 해서 조선어학회도 어쩔 수 없이 우리말 독립운동을 계속하려고 ‘국민총력조선어학회연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 때 2대 조선어학회간사장을 지낸 신명균은 그에 항거해서 자결했다. 그는 주시경의 제자로서 학회 회지인 ’한글‘지 편집장, 한글맞춤법통일안, 표준말과 조선어사전 만들기에 가장 힘 쓴 조선어학회 중심인물이었다. 그런데 일제가 회유하고 협박하며 우리 겨레를 없애려하니 그에 넘어가지 않고 목숨으로 저항한 것이다. ▲ 왼쪽부터 일본 강점기에 중국에서 김두봉이 쓴 거로 추정되는 김구 선생 부인 최준례님 한글 비문,1932년 최현배가 쓴 붓글씨, 그리고 1933년 만들 한글맞춤법안과 우리말 사전 원고뭉치. © 리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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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이름난 조선인들에게 창씨개명을 하고 일제 앞잡이를 만들려고 회유해서 이광수 같은 소설가는 변절했고 1940년 7월까지 많은 이들이 일제 앞잡이가 되는 것을 보고 신명균은 그 해 11월에 자결한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일제에 항거하는 뜻도 있지만 조선어학회 뜻벗(동지)들에게 절대로 일제에 넘어가지 말고 우리말 독립운동을 해달라는 뜻도 있었다고 본다. 그 때 여러 민족 지도자들이 변절해서 일제 앞잡이가 되었는데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철저하게 무장한 민족정신을 가지고 우리 표준말과 로마자표기법도 정하면서 우리말 사전 만들기를 마무리하려고 하니 1942년 10월 1일부터 1943년 4월 1일까지 학회 간부들 48명을 잡아다가 조사하고 33명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재판에 넘긴다. 1944년 1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9회 공판을 거쳐서 “이극로·이윤재·최현배·이희승·정인승·김윤경·김양수·김도연·이우식·이중화·김법린·이인·한징.정열모·장지영·장현식·이만규·이강래·김선기·정인섭·이병기·이은상·서민호·정태진 등 24명은 기소, 신윤국·김종철·이석린·권승욱·서승효·윤병호 등 6명은 기소유예, 안재홍은 불기소, 권덕규·안호상은 기소중지하고 “치안유지법 내란죄”로 처벌한다. 그때 일제는 조선어학회가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내통하면서 문화운동이라는 가면을 쓰고 조선어사전을 만든 것은 조선 독립운동을 한 것이다.”라는 골자로 예심 결정문을 썼다. 일제는 무장독립투쟁만 독립운동이 아니라 우리말 사전을 만드는 학술활동과 문화운동도 중대한 독립운동임을 밝힌 것이다. ▲ 광복 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제로부터 고초를 겪은 분들이 동지회를 만들고 찍은 사진 © 리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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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이렇게 우리말과 한글을 지키고 다듬어 독립과 건국운동을 하는 조선어학회를 강제 해산시키고 출판을 앞둔 우리말 사전 원고를 빼앗아갔다. 그러나 1945년 광복이 되어 함흥형무소에서 조선어학회 간부들이 풀려나고 일제가 빼앗은 우리말 사전 원고를 서울역 창고에서 찾게 되어 그 뒤 우리 말글로 교과서도 만들고 교육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일제는 8월 15일 패망하고도 조선어학회 선열들을 풀어주지 않아 함흥 유지들이 항의하니 8월 17일에 출옥하게 되었는데 한 분은 들것에 실려 나오고, 한 분은 절뚝거리고 모두 몰골이 정상이 아니더라고 그 때 본 분이 증언했다. 이렇게 목숨을 바쳐서 우리말과 한글을 지켰는데 광복 75돌이 지난 오늘도 일본 식민지 때 길든 일본 한자말을 일본처럼 한자로 적자는 이들이 판치고 있다. 만약이지만 일제가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지 않고 몇 십 년만 더 지났다면 우리말과 겨레는 사라졌을지 모른다. 또 조선어학회가 일제 강점기에 목숨을 바쳐서 우리 말글을 지키고 다듬지 안했다면 광복 뒤에도 조선시대처럼 한문을 쓰거나 일제 때처럼 일본 말글로 말글살이를 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일본 강점기에 우리말을 지키고 갈고 닦은 조선어학회 분들은 거의 외국 유학을 다녀오고 학식이 높았기에 일본 관원이나 다른 일로 편안하게 잘 살 수 있었지만 제 몸 편하자고 돈 잘 버는 일은 안 하고 온갖 어려움 겪으면서 오직 우리말을 다듬고 우리말 사전을 만드는 일에 매달렸기에 오늘날 이렇게 우리 말글로 말글살이를 하고 있다. 조선어학회 초대 간사장을 맡은 이극로는 1929년 독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미국에서 “겨레말 사전을 만들고 겨레말을 지키는 일은 어떤 일보다도 가장 먼저 해야 할 독립운동이다. 나는 고국에 돌아가면 이 일에 몸을 바치겠다.”고 하고 귀국해서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하고 일본 총독부와 잘 통하는 동아일보 김성수와도 가깝게 지내며 친일단체에도 이름을 걸고 그 일을 마무리했다. 그의 정치력, 일제에 항거해 자결한 2대 간사장 신명균, 3대 간사장을 지낸 최현배가 1932년에 경성 음식점 방명록에 ’한글이 목숨“이라고 쓴 정신, 함흥형무소에서 옥사한 이윤재, 항징 두 분의 희생을 되새시며 조선어학회 선열들께 고마워하자. 그리고 아직도 이루지 못한 이루지 못한 그 분들 꿈인 우리 얼말글 독립을 우리가 이루자. ▲ 왼쪽부터 학회 간사장을 지낸이극로, 신명균, 최현배. 함흥형무소에서 옥사한 이윤재, 한징. © 리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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