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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4: 16. 먹을 것을 주라 17. 우리에게 있는 것은 18. 내게 가져오라
마 14: 16. 먹을 것을 주라 -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 예수께서 가라사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
그 방황하며 갈망하는 무리를 위해 주께서는 자리를 피하거나 그들을 강제로 해산시키려 하지 않으셨다.
그는 오히려 그들의 육신적 양식에 관심을 가지셨다. 그는,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셨다.
1]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문자적으로 '가게 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서, 부정어 '우'(*)가 사용되어 강압적인 부정문이 되고 있다.
예수께서는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것과 같은 제자들의 주장을 한 마디의 말로 거부하셨다. 예수께서는 해산(解散)하기를 종용하는 제자들의 말에 따라 힘없이 돌아가는 병들고 굶주린 사람들을 보고, 깊은 연민과 애정으로 돌아가려는 그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인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그리스도에게서 떠나는 일은 전혀 필요치 않다. 정녕 예수께서는 지금도 인간이 안고 있는 그 어떤 문제일지라도 외면치 않고 당신의 넓은 품 안으로 받아들이고 계신다.
* 요 14: 1 -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제자들은 '스스로 사 먹게 하소서'라고 말하였다.
예수는 '너희가 그들에게 그것을 주라'고 하셨는데,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참으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명령에 쓰인 동사 '도테'(*)는 '주다'란 뜻의 '디도미'(*)의 제 2 과거형으로, 즉각적이고 긴급한 행동이 요구됨을 의미한다.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못했던 제자들에게는 무리들에게 음식을 대접해야 할, 그것도 지금 당장 수행해야 할 의무가 주어졌다. 물론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많은 사람을 먹일 수 있는 능력이나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알고 계셨다.
그러나 이 말씀은 굶주린 군중들에 대한 그들의 책임감을 일깨워 주는 것과, 또한 자신에 대한 제자들의 신앙의 정도를 시험하기 위한 의도에서 행해진 것일 것이다. 여기서의 책임은 무리들에게 물질적인 양식뿐만 아니라 영적인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해야 할 사명을 가리킨다.
예수께서 사도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치라, 먹이라'고 세 번이나 거듭 부탁하셨다. 본문에서도 제자들에게 그들의 사명을 잊지 않도록 당부하고 계신다.
* 요 21: 15-17 –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이러한 제자들의 책임은 현존하는 교회의 사명이기도 하다. 교회는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들에게 육의 양식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심령이 굶주리고 메마른 자에게 영원한 생명수를 마시게 할 책임이 있다.
3] 무리를 불쌍히 여기심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군중들을 피하여 고요히 기도할 곳을 찾아 배를 타고 빈들로 가셨다. 그곳은 벳세다 광야였다.
예수님께서 그 곳에 계시다는 소식을 들은 많은 무리들이 광야로 몰려들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모인 무리들의 영혼과 육체의 궁핍함을 보시고 기적을 베풀어 그들의 영육을 채워주셨다.
(1) 병자를 치료하심은 육신의 질병을 고쳐 주셨다.
예수님을 따라 벳세다 광야로 모인 무리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병자는 병을 고치기 위해서, 심령이 메마른 자는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어떤 이들은 주님의 이적과 기사 행하심을 호기심으로 구경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큰 무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헤매는 모습을 보시고 가련하고 불쌍히 여기사 그들 가운데 많은 병자를 고쳐 주셨다.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 기간 중에도 병고치는 일을 많이 하셨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위대한 의사로서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
* 마 9: 2 -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2) 심령의 병을 고치셨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비분과 절망에 쌓인 무리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이리 저리 유리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의 공허한 심령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주셨다.
심령의 질병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치유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악함을 강건케 하시고 어리석음을 지혜롭게 하시며 구원에 이르게 하는 능력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의 심령을 채우시고 고쳐 주셨다.
마 14: 17. 우리에게 있는 것은 -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 제자들이 가로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니이다. )
제자들은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라고 말하였다. 요한복음에 보면, 그것은 한 아이가 예수님께 드린 것이었다(요 6: 8-9).
1] 제자들이 이르되,
주님의 명령에 대하여 제자들은 떡을 사서 나누어주는 방법만을 생각하였다.
* 막 6: 35-37 – 35 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날도 저물어가니 36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37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 요 6: 5-7 –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제자들의 대답은 극히 당연한 말이다.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해결하는 방도 외에는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없었다.
2]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니이다.
확인된 음식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었다. 떡과 물고기의 숫자는 4복음서 모두 동일하다. 다만 요한복음에서는 떡이 구체적으로 보리떡이고 소유자가 어린아이임을 덧붙이고 있다.
* 요 6: 9 -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이 음식의 양은 제자가 어림잡아 산출한 예산과 대비되어 엄청나게 부족한 것임을 강조한다.
거기 모인 5,000명 이상의 군중에 비하면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양이다. 보리떡은 가난한 사람들의 음식으로 어린아이가 먹으려고 소유했던 것임을 감안한다면 한 사람의 식사 양으로 충분한 것이 못되었을 것이다.
* 막 6: 38 –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따라서 여기서 밝힌 음식의 양은 기적의 효과를 고무시키기 위한 배경이 된다.
* 요 6: 13 -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3] 제자들의 요청
저녁이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말씀드리기를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먹게 하소서'(15절)라고 하였다. 우리는 이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제자들의 불신앙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이곳에 모인 무리들은 예수님의 병 고침의 이적과 말씀에 완전히 매료되어 시장한 것을 몰랐으며, 안다해도 한끼의 식사를 거르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보다는 육의 양식을 구하였다. 그리고 음식을 구하기 위해 사람들을 마을로 내려보내고자 제의를 하였다. 이러한 제자들의 행위는 하늘의 모든 권세를 지닌 예수님을 불신하는 행위가 되고 말았다.
그들은 주님께서는 이러한 빈들에서도 그들의 주린 배를 채워줄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신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영혼의 허기보다는 육신의 배고픔을 더욱 중요시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서 음식을 만드는 마르다보다 주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마리아를 기쁘게 생각하셨다.
우리는 육신의 배고픔을 생각하는 제자들보다 영혼의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서 말씀을 청종하는 무리가 될 때 하나님의 합당한 백성이 되는 것이다.
(1)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확고한 신앙을 심어주기 위해서 제자들의 제의를 물리치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하셨다. 제자들은 영혼의 배고픔을 느끼는 무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열심히 가르치고 있는 예수님의 일을 돕기보다는 방해가 되었다. 제자들은 종종 그들의 열심이 주님의 일을 방해하는 경우가 되었다.
사실 제자들의 제의는 영혼의 기갈을 해소하기 위하여 모인 무리를 해산시키려고 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보다는 자기들의 육체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먼저였다. 예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자 제자들은 놀랐을 것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우리들에게 먹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면서 어떻게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을까? 하고 당황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제자들에게 확실한 믿음을 심어 주기 위하여 황량한 빈들에서 능력을 행하셨다.
(2) 기적과 믿음
예수님의 능력은 지극히 작은 헌신을 발판으로 행해졌다. 그것은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다. 예수님은 이것을 가지고 그곳에 모인 장정 오천 명을 먹이셨다. 이성과 과학, 그리고 수학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기적이었다.
이러한 기적의 산출은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소박한 믿음과 그에 따른 순종이었다. 우리는 벳세다 광야의 기적이 주는 교훈으로 예수님의 말씀이라면 무조건 순종할 때 기적이 나타난다는 진리를 배우게 된다.
베드로가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으나 허탕을 쳤으나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그물을 던질 때 기적이 나타나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자들을 위하여 기적을 행하셨다. 말하자면 믿음이라는 목적을 위해 기적이라는 수단과 방법을 사용하셨다.
마 14: 18. 내게 가져오라 - 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 가라사대,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
그 떡 다섯 개는 너무 부족한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그 보잘것없는 것을 가지고 그 많은 무리들을 배부르게 먹이실 수 있었다.
1] 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마태만이 이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분명히 떡의 분배 사건이 예수의 손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암시하는 말이다.
'먹을 것을 주라'는 예수의 명령을 이해치 못한 제자들의 연약한 믿음에서 기적이 형성된 것이 아니라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는 예수의 마음에서부터 발생 되었다.
따라서 제자들은 기적의 공동 창조자가 아니라 기적의 분배자(分配者)에 불과하였다. 제자들의 연약한 믿음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기까지 계속되었다.
'내게 가져오라'는 이 말은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키 위해 제자들에게 오로지 교회의 머리 이신 주님에게로만 자신을 가져가야 한다고 하는 사실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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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악함을 강건케 하시고 어리석음을 지혜롭게 하시며 구원에 이르게 하는 능력이 있다.
💖보좌의 능력과 축복을 가진 자의 지혜로운 한마디가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도 멋진 날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악함을 강건케 하시고 어리석음을 지혜롭게 하시며 구원에 이르게 하는 능력이 있다.
설교 감사합니다.
심령의 질병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치유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