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탐험사 100장면 75 - 남극에서 명승부를 펼치다 환경에 적응해 승리한 아문센(19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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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4.27. 21:29조회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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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탐험사 100장면
남극에서 명승부를 펼치다
환경에 적응해 승리한 아문센(1911년)
요약 1911년, 고래 만에 상륙한 아문센과 에레버스 해안에 상륙한 스콧의 남극점 정복 경쟁이 일어났다. 아문센은 털가죽 옷을 입고 스키를 타고 허스키 개를 썰매에 사용하는 등 환경에 대한 용의주도한 계획으로 남극점 정복에 성공할 수 있었다. 스콧 탐험대는 이후 눈이 덮인 텐트 속에서 죽어서 발견되었다.
1911년 12월 14일 남위 90도
아문센의 이 당당한 모습은 〈브리태니카 백과사전〉에 실려 있지 않다. 이 사전은 남극점 경쟁에서 패한 영국인(스콧)에 대해서는 사진과 함께 3분의 1쪽 분량을 소개했지만, 북서 항로를 처음 통과하고 북동 항로를 두 번째로 통과했으며 남극점을 처음 밟고 북극해를 처음 횡단 비행한 노르웨이인에 대해서는 사진 없이 6분의 1쪽 분량으로 간략히 기술했다.
남극 탐험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은 아문센과 스콧이 펼친 남극점 정복 경쟁이다.
1868년 영국 데번포트에서 태어난 로버트 스콧은 해군에 들어가 1901~1904년 남위 82도 17분까지 탐험하고 '에드워드 7세의 땅'을 발견했다. 그 공으로 그는 대령으로 진급했다. 1909년 어니스트 섀클턴이 남위 88도 23분까지 갔다가 돌아오자, 남극점 정복이 가능하다고 본 영국 정부는 그 일을 스콧에게 맡겼다. 스콧 대령은 대원 11명을 이끌고 1910년 6월 남극으로 향했다.
아문센은 북극점에 가려고 준비해 오다가 피어리에게 선수를 빼앗기자 목표를 남극점으로 바꾸었다. 그 역시 1910년 6월 남극으로 떠났다.
1911년 1월 14일 고래 만에 상륙한 아문센과, 1월 18일 에레버스 해안에 상륙한 스콧은 각각 기지를 세우고 겨울을 나면서 탐험 준비를 했다. 그런데 아문센의 '프람 하임' 기지는 남극점으로부터 1,300km 떨어진 곳에 있어, 스콧의 기지보다 남극점에 100km쯤 더 가까웠다.
난센이 아문센에게 물려준 프람호는 얼음덩어리에 둘러싸여도 끄떡없으므로, 아문센은 남극 대륙 안쪽으로 100km나 쑥 들어간 고래 만으로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스콧의 테라노바흐는 고래 만의 유빙을 헤치고 나아갈수가 없었으므로 고래 만 바깥 에레버스 해안에 상륙할 수밖에 없었다.
아문센은 데포(저장소 : 나중에 꺼내 쓸 식량을 미리 파묻어 놓는 곳)를 위도 1도마다 만들었다. 제1 준비대가 남위 80도에 제1 데포를 만들어 식량 550kg를 묻고 이틀 만에 돌아왔다. 그들이 썰매가 무거웠다고 보고하자 아문센은 75kg짜리 썰매를 22kg로 고쳐 만들었다.
제2 준비대는 남위 81도와 82도에 식량을 묻었다. 그들은 데포마다 동서로 8km식 16km에, 800m마다 깃발을 세웠다. 아무리 코스에서 많이 벗어나도 좌우로 16km에 걸쳐 20개나 꽂힌 깃발을 못볼 리 없다. 깃발에는 데포가 그 깃발의 어느 쪽에 있는지도 적었다.
그들은 데포뿐만 아니라 행군 코스에도 깃발을 150개쯤 세우고, 깃발마다 번호 · 위치와 다음 깃발까지 거리를 적었다. 이는 나중에 미로(迷路)의 실타래처럼 갔던 길을 찾아 되돌아오는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아문센은 썰매 4대에 바퀴를 달았다. 바퀴가 도는 수를 헤아려 얼마나 나아갔는지 알 수 있게 되자, 눈보라 속에서도 위치를 알아 시간을 아낄 수 있었다.
아문센은 1911년 10월 20일 기지를 출발했다. 스콧은 나흘 늦은 10월 24일 기지를 떠났다. 온세계가 지켜보는 세기(世紀)의 대결이었지만, 승부는 초반에 결정나고 말았다. 스콧의 말들이 남위 83도 30분에 이르자 지쳐서 쓰러지는 바람에 말썰매 10대를 사람이 끌게 된 것이다.
스콧 일행이 사람 넷이 썰매 하나씩 끌고갈 때 아문센은 빈 몸으로 스키를 지쳤다. 그들은 위도 1도마다 돌아갈 때 이용할 데포를 만들었으므로 개썰매는 갈수록 가벼워졌다. 12월 7일에는 남위 88도 16분에 마지막으로 열 번째 데포를 만들었다.
1911년 12월 14일 점심 무렵, 아문센은 남위 89도 53분에 이르렀다. 그들은 긴장한 나머지 숨을 몰아 쉬며 관측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남극점은 소리 없이 그들 앞으로 다가왔다. 오후 3시.
"멈춰!"
아홉 사람의 입에서 똑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관측기 바늘은 90도에 딱 멎어 있었다.
아문센 탐험대가 남극점 위에 서서 노르웨이 국가를 합창하고 있을 때, 스콧 탐험대는 죽을힘을 다하여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1912년 1월 18일 그들은 기지를 떠난 지 87일 만에 1,380km를 걸어서 남극점에 닿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노르웨이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아문센은 1월 25일 기지로 돌아왔으나 스콧은 아홉 달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다. 수색대는 11월 12일 제1 데포에서 18km 더 가서 눈덮인 텐트를 발견했다. 두 사람은 슬리핑백 속에서, 스콧은 그 옆에서 죽어 있었다. 부대장 에드거 에번스와 육군 대위 로렌스 오츠는 보이지 않았다. 스콧의 일기 겉장에는 '읽고 나서 영국으로 가져가 주시오'라고 쓰여 있었다.
일기에 따르면, 스콧은 3월 21일 그곳에 이르러 9일 동안 눈보라에 갇혀 있다가 죽었다. 그들은 영하 40도를 밑도는 추위에서 굶주림과 동상에 시달리면서도 견딜 수 있는 마지막 선까지 버티다가 죽음을 침착하게 받아들였다. 에번스는 그곳에 오기 전에 죽었고, 오츠는 병든 몸이 동료들에게 짐이 될까 봐 스스로 텐트를 나서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다.
스콧은 일기장과 함께 남긴 유서에서 살아서 돌아가지 못함은 말들의 죽음과 나쁜 날씨 탓이라고 썼다. 그렇지만 날씨는 아문센에게도 똑같이 혹독했다. 생사의 갈림은 바른 판단과 용의주도한 계획에서 판가름났다.
아문센은 이누이트처럼 털가죽옷을 입었고, 스콧은 유럽 제일의 방한복을 입었다. 털가죽은 가볍고 따뜻했지만 모직 방한복은 영하 40도에서 제구실을 못했다. 또 아문센은 스키를 탔고, 스콧은 그냥 걸었다.
제일 중요한 수송 수단에서도, 아문센은 북극 추위에 길든 허스키개를 썼지만, 스콧은 만주산 조랑말을 썼다. 게다가 아문센은 개에게 말린 먹이를 주어 무게를 줄이고, 개를 잡아 먹을 요량으로 식량을 조금만 실었다.
지치고 약해진 개들을 차례차례 식량으로 쓴 것이야말로 그들이 살아서 돌아오는 데 가장 큰 힘이 되었다. 아문센의 썰매개 52마리는 마지막에 12마리로 줄었지만, 아주 좋은 컨디션으로 예정을 8일이나 앞당겨 왕복 2,993km를 무사히 돌아왔다.
스콧의 조랑말 19마리는 추위를 이기지 못했다. 또 크레바스에 빠지면, 개처럼 목걸이줄로 끌어올릴 수도 없어 어김없이 죽거나 다쳤다. 설상차(동력 썰매) 3대 중 1대는 바다에 빠뜨렸고 2대는 고장났으며, 개 30마리는 불쌍하다며 가는 길에 돌려보냈다. 또 애초에 4명이던 공격대를 마지막에 1명 늘림으로써 한 사람분 식량이 부족하게 되었다.
영국 사람들은 아문센이 야만인처럼 털옷을 입고 개고기를 먹었다고 비난했다. 그들은 스콧이 영국 신사다웠다고 내세웠다. 그러나 살아 돌아오지 못한 신사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네이버 지식백과] 남극에서 명승부를 펼치다 - 환경에 적응해 승리한 아문센(1911년) (세계 탐험사 100장면, 2002.7.18., 이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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