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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
요 4:1-5
1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2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3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4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요 4:1-5 / [사마리아 여자와의 대화] 군중들이 침례를 받고서 제자가 되기 위해 요한보다 예수께 더 많이 모여들고 있다는 소문이 바리새파 사람들의 귀에도 들어갔다. 2) 그러나 사실 침례를 준 것은 예수가 아니라 제자들이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알고 3) 유대를 떠나 갈릴리 지방으로 되돌아가기로 하셨다. 4) 그곳으로 가자면 사마리아를 지나가야만 하였다. 5) 정오쯤 되어 예수는 수가라는 사마리아의 한 동네에 이르셨다. 이 동네는 야곱이 그의 아들 요셉에게 물려준 땅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다.
예수님은 남쪽 유대 지역을 떠나 북쪽 갈리리 지역으로 가셨습니다. 유대 지역과 갈릴리 지역 사이에는 사마리아가 있습니다. 당시 경건한 유대인은 사마리아 지역을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빠른 길을 택하십니다.
사마리아(1-4)사마리아 사람과 유대 사람이 서로 상종하지 않으며 원수로 지내는데는 그만한 역사적 이유가 있습니다. 원래 하나의 통일국가였던 이스라엘은 솔로몬이 죽은 후 주전 922년 남과 북으로 분열됩니다. 북 왕국을 북 이스라엘이라 하고, 남 왕국을 남 유다라 합니다. 분열 후 사마리아는 북 이스라엘의 수도가 되었으며, 사마리아의 세겜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세겜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여호와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장소입니다. 요셉의 시신을 묻었던 곳도 세겜입니다. 세겜은 북이스라엘의 정치 종교의 중심지였으며, 그리심 산과 에발 산 사이 계곡에 위치하여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사마리아의 비극은 주전 722년 앗수르에 의하여 북 이스라엘이 멸망당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앗수르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앗수르로 이주시키고, 또 앗수르 사람들을 사마리아로 이주시켜 혼합종족을 만들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피가 섞인 사마리아인을 이방인 노예보다 더 경멸했다고 합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주전 4세기에 알렉산더 대왕의 허락으로 그리심 산에 자신들의 성전을 건축하였는데, 유대인들에 의해서 주전 135-104년에 파괴되었습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증오와 보복의 악순환이 이어졌습니다. 그런 사마리아 땅에 예수님이 들어오셨습니다.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5) 요한은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만난 장소를 '세겜'이라 지칭하지 않고,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라고 기록합니다. '세겜'에는 에발 산과 그리심 산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곳 세겜에서 여호와를 위해 최초로 제단을 쌓았고, 야곱이 제단을 쌓은 곳도 바로 이곳입니다. 그뿐 아니라 세겜은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모여서 여호와를 예배하고 계약 갱신 식을 거행하고 왕위 식을 거행한 이스라엘의 종교와 정치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라진 이후 남 유다는 예루살렘을, 북 이스라엘은 세겜을 종교의 중심으로 삼아 서로 반목의 역사를 써내려갔습니다. 요한의 의도는 비록 남쪽 유대 지역과 세겜이 있는 사마리아가 지금은 서로 반목하고 있지만 본래 그들은 한 조상을 가진 한 동족이며 형제였다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한 것으로 보입니다.
적용: 유대인이 사마리아인을 경멸하고 차별한 이유가 타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어떤 사람은 차별받아도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참조 마 9:13)
미국 앨라배마 주 엔터프라이즈라는 작은 마을은 오래 전 목화를 재배하며 살아갔습니다. 그러는 중 목화 벌레들이 기승을 부리더니 목화 수확량이 1/3로 줄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순식간에 빈곤해지고 실직자가 줄을 이었습니다. 견디다 못한 마을 사람들은 평생 함께하던 목화밭을 포기하고 땅콩을 심기 시작했습니다. 땅콩은 목화 벌레의 피해를 보지는 않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작물을 재배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화학제품의 옷감이 대량 생산되면서 목화산업이 갑작스럽게 사양산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엔터프라이즈는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땅콩 생산지를 만들었습니다. 마을에는 해충인 목화 벌레를 기리는 기념탑이 세워져 있는데 그 탑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를 적어 넣었습니다. ‘벌레가 준 고난이 번영을 가져왔음을 감사하며 탑을 세운다.’ 기회는 항상 고난의 가면을 쓰고 우리 곁에 다가옵니다.
< 설 교 >
내 인생 최고의 순간
요 4:1-26 / 노경모 목사
2008년 임순례 감독이 제작한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한국 핸드볼 여자 국가대표팀’에 대한 선수들의 모습들을 영화로 제작한 것입니다. 지난날 과거의 혹독한 훈련과 열악한 삶의 환경 속에서도 어려움과 아픔을 딛고 당당히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것으로 선수들에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의 순간이었고 그들을 바라본 사람들의 마음에는 한없는 감격이었기에 ‘우리 모두 생애 최고의 순간’ 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있어서 내 인생의 최고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내 인생의 최고의 순간이 오지 않았다고 생각되면 어떤 일이 내 인생의 최고의 순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 복권 1등 당첨 어떻습니까? 내 인생의 최고의 순간이 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런 기사를 읽었습니다. 저주받은 로또였을까? 40대 가장이 로또복권 1등 당첨금을 모두 날리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가족에게는 5000여만원의 빚을 남겼다. 2012년 7월 23일 오후 2시45분쯤 광주 서구 한 목욕탕 욕실 안에서 ㄱ씨(43)가 목을 맨 채 숨져있는 것을 목욕탕 주인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ㄱ씨는 2007년 초 로또복권 1등에 당첨돼 18억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ㄱ씨는 이날 오전 혼자 목욕탕에 들어왔다. 가끔 탈의실로 나와 물을 마시기도 했다. 탕과 탈의실을 오가던 그는 목욕탕에 손님이 한 명도 보이지 않자 출입문을 안쪽에서 잠갔다. 그리고 스스로 세상을 등지는 선택을 했다. ‘인생역전’으로 불리는 로또 1등 당첨 5년만이다. 부인과 1남1녀를 둔 ㄱ씨는 복권당첨 이전에는 광주에서 자그마한 주점을 운영하며 단란한 가정을 꾸려갔다. 하지만 거액이 손에 들어오자 변하기 시작했다. 단골 손님이 제법 많았던 주점도 곧바로 접었다. 그리고는 더 큰 ‘대박’에 눈길을 돌렸다. 당첨금으로 각종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그는 하는 일마다 실패의 연속이었다. 주식투자에도 손을 댔지만 손실은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다. 경찰 관계자는 “유족들로부터 ㄱ씨가 ‘복권에 당첨된 뒤 지인들과 여러 사업을 반복하고, 주식 등에 투자한 것으로 안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ㄱ씨는 결국 당첨금 모두를 탕진했다. 그는 최근 친·인척으로부터 5000여만원을 빌려 재기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마침내 가정 불화까지 생기면서 아내와 별거하게 됐고, 그동안 월세방에서 홀로 지낸 것으로 전해졌다. 많은 사람들이 꿈꾸는 ‘일확천금’의 행운이 단란했던 이 가족에겐 상상할 수 없는 저주의 부메랑이 돼 돌아온 셈이다. ㄱ씨는 복권 1등에 당첨되었을 때 ‘내 생애의 최고의 순간’이라고 외쳤을 것입니다. 생애의 최고의 순간이 사실이라면 그것을 기점해서 인생이 점점 점점 좋아지고 달라져야 합니다.
영국 국민복권의 운영 대행사인 캐멀롯 그룹은 사상 최초로 복권 당첨자들의 생애를 조사해서 다음과 같은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 55%는 당첨 후 더욱 행복해졌다.
- 43%는 복권당첨이 행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밝혔다.
- 2%는 오히려 덜 행복했다.
다시 말하면, 복권에 당첨된 사람 중 거의 절반이 이전보다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살, 이혼, 마약, 알코올중독, 파산, 감옥행… 당첨 이후의 삶에는 갖가지 그늘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당첨자에게 닥쳐오기 쉬운 첫 번째 불행은, 평소 절친했던 친구나 가족들과 멀어지는 것입니다. 불신과 불만 속에서 관계는 점점 멀어지고, 급기야 당첨금을 둘러싼 재산 분쟁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주체할 수 없는 소비 욕구로 복권에 당첨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빚더미에 오르는 당첨자도 많습니다. 커다란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면서 술이나 마약에 빠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매일 돈을 펑펑 쓰는 것도 이제 지겹다." 복권 당첨으로 하루아침에 수십억 원을 거머쥔 영국의 한 50대 남성은 쉽게 얻은 인생의 시시함에 대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당첨 5년 만에 이런 말을 남기고 자살했다고 합니다. 복권 당첨보다 땀 흘려 얻는 행복이 더 오래가지 않겠습니까?
제가 왜 복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우리 신앙생활에도 복권신드롬이 자리를 잡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즉 대박신드롬입니다. 그냥 교회 나오기만 하면 대박이 터지고, 하나님 앞에서 철저한 믿음 생활, 헌신과 순종의 생활은 하지 않으면서도 그냥 한 순간에 나의 문제가 해결되고 기도가 응답되고 대박이 터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러다가 자기의 뜻대로 안되면 서서히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주변 사람들을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등을 돌리며 교회를 떠나고 세상의 어두운 생활도 돌아가는 사람들이 적지가 않는 실정입니다. 자기 인생의 최고의 순간들을 맛보고 싶어하지만 탐욕과 욕심, 이기주의와 게으름, 불순종과 불성실로 인해 하나님이 주시는 인생의 최고의 순간들을 맛보지 못하고 놓쳐 버린다면 그것처럼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마리아 수가라는 동네가 있습니다. 이 동네에 예수님이 들리셨습니다. 이 동네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습니다. 이 우물에 한 여인이 뜨거운 태양이 내리 쬐는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이 여자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고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남이 쉬고 있는 대낮에 아무도 우물에 물을 길으러 오지 않는 틈을 타서 물을 길으러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본문 3-8절을 읽습니다.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결국 이 여인은 자기 인생의 최고의 순간을 맛봅니다. 자기가 남몰래 우물에 와서 물을 길으러 왔는데 이제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물을 주시는 분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제 자기가 가져온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뛰어갑니다. 사람들을 만나기조차 꺼려하는 이 여인이 동네로 뛰어간 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그리고 와서 그분을 보라고 전도까지 합니다. 요한복음 4장 28-30을 읽어 봅시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분명 이 여인은 자기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인생 최고의 순간을 만난 것이 분명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여인이 만난 인생 최고의 순간이 무엇이었는가를 살려 보면서 우리도 진정으로 우리 인생 최고의 순간을 맛보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 여인이 과연 자기의 인생의 최고의 순간을 맛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 이 여인이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사막에서 물이 없어 목말라 고통을 받고 죽어가는 사람에게 그 사람에게 있어서 최고의 순간은 언제이겠습니까? 바로 물을 만나는 것입니다. 물 물 물이 그 사람의 생명을 살립니다. 그 사람이 가고자 하는 목적지까지 가도록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이 여인도 물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여섯 번째 남편과 살고 있는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싸늘한 비난의 눈총 때문에 물 길러 오기 싫지만 물이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에 남이 물 길으러 안 오는 한 낮에 물을 길으러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떠가는 물은 계속해서 떠서 마셔야 하는 물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이제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영생하는 샘물을 주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본문 13-14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그렇기 때문에 이 여인은 자기의 물동이를 버려고 마을로 뛰어간 것입니다. 이 여인에게 이것 이상의 자기 생애의 최고의 순간이 있겠습니끼?
돈이 있다고 우리의 빈 공간이 차지 않습니다. 건강하다고, 자식들이 잘되고 있다고, 내가 하는 일이 형통하다고 우리가 목마르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세상에 어떤 것으로 채울 수 없는 빈 공간이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우리의 목마름과 갈증을 해결할 수 없는 공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것을 채워주는 분을 우리가 인격적으로 만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은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채울 수 없는 빈 공간을 능히 채우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을 만난 자마다 이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둘째, 이 여인은 마음의 깊은 상처를 치유 받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남편이 여섯 번째 인 것만 보아도 이 여인의 상처가 얼마나 깊었나 하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과거의 남편과 사별을 했는지, 과거의 남편으로부터 쫓겨났는지, 아니면 이 여인이 불결한 여인인지 알 수 없지만 이 여인은 너무나 큰 고통과 아픔 속에서 살아온 것은 사실입니다.
남에 나서기가 싫고 남의 눈에 띄는 것이 싫고 남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싫은 여인입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멸시와 천대와 손가락질을 받는 다는 것처럼 마음에 상처가 되고 아픔이 되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또한 이 여인은 유대인들이 무시하고 천대하는 이방인입니다.
이런 여인에게 예수님은 물을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이방인인 자기에게 유대인이 물을 달라고 하는 것 차체가 놀라움이었고, 이렇게 사랑으로 이 여인에게 접근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벌써 이 여인의 상처과 아픔을 어루만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내면의 깊은 상처와 아픔이 치유되기 사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9절을 봅시다.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이 여인의 깊은 내면의 상처와 부끄러움을 말씀하십니다. 16-19절을 봅시다.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이 여인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여인이 여섯 번째의 남편과 사는 것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여인의 과거의 상처를 드러내시고 있다는 사실은 예수님이 이미 이 여인을 치유하시고, 회복시키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좋은 병원일수록, 좋은 의사일수도록 병의 정체가 무엇이며 병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드러냅니다. 그래야만 올바른 치료가 시작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인생의 의사십니다. 그 분 앞에 나아가고 그 분을 인격적으로 만나기만 한다면 우리들의 어떤 상처와 아픔과 고통도 치유되고 회복될 수가 있습니다.
영과 육과 마음이 치유받고 회복된 이 여인이 자기 인생의 최고의 순간을 맞았다는 사실을 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셋째, 이 여인은 전정한 예배를 회복했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상당히 중요합니다. 누구한테 어떻게 예배를 드리는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생애를 갈라놓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헛된 것을 예배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예배는 아무 소용이 없는 예배일뿐만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징벌을 받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는 이방인들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그들은 장소와 지역에 묶여 있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예배는 율법 즉 모세오경에 따른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진정한 예배는 희생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단번에 바쳐진 영원한 제물이신 예수님을 빼놓은 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시지를 않으십니다. 그래서 22절에 예수님은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참된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라고 이 여인을 깨우치시고 계십니다. 23-24절을 읽습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드디어 이 여인은 참된 예배를 알게 되었고 참된 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이 예배의 회복은 이 여인의 모든 생애 전체를 회복시키고도 남음이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이 여인은 자기 인생의 최고의 순간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내 인생의 최고의 순간을 진정으로 누리고 싶습니까? 무엇보다도 누가보다도 우선 주님을 만나십시오. 그리고 그 주님께 인생을 맡기십시오. 주님은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줄 수 없는 진정한 행복을 주실 것입니다. 금년에 주님으로 인해 내 인생의 최고의 순간을 만끽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마리아 여인
요 4:1-14 / 이동휘 목사
1. 본문의 예수를 만난 사마리아 여인은, 이 남자 저 남자에게 짓밟히면서 무정한 마음을 갖게 되고, 자신을 비참하게 만든 “부정한 사마리아” 여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심각한 심령의 갈증을 겪고 있는 파괴된 인간성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를 만나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고, 일시에 그녀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참 사랑이 없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참 만족이 없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그 여인은 실패한 인생이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그 어느 누구도 그 여인에게 참 생명을 줄 수가 없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그 여인은 목마른 인생이었습니다. 그녀는 다섯 번 결혼했고 거듭 이혼한 후, 현재는 결혼하지 않은 채 한 남자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추스르지 않았고, 그 결과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등장하셔서 그녀의 삶을 변화시키셨습니다. 이 이야기와 연관된 네 사람의 각기 다른 마음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의 마음을 보시겠습니다.
본문 4절을 보면, 예수께서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요4:4)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어떤 분명한 목적과 뜻을 가지고 그곳에 가야만 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유대와 갈릴리를 오갈 수 있는 두 개의 통행로가 있었고, 두 길 모두 사마리아를 피해 갈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이 두 길로 가게 되면 대략 6일 정도 걸립니다. 그러나 사마리아를 통과해서 가는 길로 가면 3일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지름길인 것입니다.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려면 이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지름길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입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이 이 지름길을 이용하지 않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한 이래 사마리아 지역에 살던 유대인들이 이방인 앗수르 사람들과 혼인함으로 신앙과 혈통의 순수성을 더럽혔다고 해서,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을 유대인이라 부르지 아니하고 사마리아인으로 부르며 상종하지 아니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 고 하시자, ‘당신은 보아하니 유대인인데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십니까?’ 라며 의아해 했던 것입니다.
(요4: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러한 관례를 깨고 유대인 금기(禁忌) 지역을 택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선택하신 길은 지형이나 민족적 편견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길이었습니다. 그 길은 예수님이 구원받아야 할 여인을 만나시도록 하나님이 선택하신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므로”(요 5:3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갈릴리가 목적지이지만, 그 길을 가는 도중에 하나님의 뜻이 기다리고 있다면, 그 지역과 길이 금기시될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야 했습니다. 어느 목사님을 교회에 초청한 교회 담임목사가 공항에서 초빙 목사님을 모시고 차를 타고 가다가, 연료 게이지의 바늘이 ‘0’에 아주 가까이 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목사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었지만 그는 “아직 괜찮아요.”라고 말했습니다. 두 사람은 도심지를 벗어나 시골 지역으로 접어들었고, 바늘은 점점 더 ‘0’에 가까워졌습니다. 드디어 그 담임목사는 “여기서 기름을 넣고 갈 거예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만큼 아주 낡고 허름한 주유소로 차를 몰고 들어갔습니다. 연료를 넣으러 나온 사람의 얼굴에는 커다란 종양이 자라고 있었는데, 바라보기가 애처로울 정도였습니다. 그 사람이 연료를 다 채우자, 목사는 그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그를 그리스도께 인도했습니다. 그때 초빙된 목사는 담임목사가 연료를 가까운데서 넣지 않고 왜 그렇게 먼 길을 돌아서 갔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죽어가는 한 영혼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어디서 자동차 연료를 채워야 할 것인지를 그에게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항상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어린 양을 향해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 사마리아 동네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그 부정한 그 여인’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를 피해 다녔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도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아니하는 대낮에 물을 길러 우물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를 만나시기 위해 적절한 때에 그곳에 도착하셨고, 그녀의 인생에 있어 가장 크게 필요한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문제를 놓고 이야기를 시작하셨습니다. 유대의 랍비들은 여자들과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그녀의 평판을 알고 있는 신중한 남자라면, 누구라도 그녀와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세상에 ”(눅 19:10)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길이 지름길이든, 아니면 멀리 돌아가는 길이든, 그리고 금기시되는 지역일지라도, “(눅19: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됩니다. 성도 여러분의 사는 길, 가는 길이 아무리 멀고 험해도, 그 길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그 길을 따라 사시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죄인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이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은,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요 20:31)이었습니다. 요한복음 4:1-42을 읽으면서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이 점차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가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 구세주로 믿으며, 그 예수 그리스도를 전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여인의 대화를 보면 ‘물’과 ‘추수’가 중요한 두 가지 은유(隱喩)로 사용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영혼을 구원하시는 영적 추수에 대한 은유의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13:1-9,18-23을 보겠습니다.
(마13:1-9) 그 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서 있더니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마13:18-23)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이 비유에서 사람의 마음이 ‘길 가’, ‘돌밭’, ‘가시떨기’, 그리고 ‘좋은 땅’ 등 네 가지 밭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시작하셨을 때, 그녀의 마음은 ‘길 가’와 같이 굳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그저 유대인의 한 사람으로 보고 있었고, 왜 그런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인 자신과 이야기하려는 것인지 의아해했습니다(요 4:7-9). 그러나 예수님은 계속 그녀와 이야기하시며, 그녀의 갈증을 해소시켜줄 ‘생수’를 제시하셨습니다. 물을 길러온 그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 고 하십니다. 여인이 ‘당신은 보아하니 유대인인데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십니까?’ 라며 마치 ‘길 가’에 떨어진 씨앗처럼 튀는 소리를 합니다. 그 때 예수께서 “(요4:10)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은혜와 내가 누구인가를 알았더라면 네게 물을 달라했던 내가 도리어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라는 말씀이십니다. 사실 이 말씀은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생수같은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는 뜻으로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여인이 ‘선생님은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그같은 생수를 구해주시겠습니까? 이 우물을 우리에게 준 우리 조상 야곱과 그의 아들들과 가축이 다 이 물을 마셨습니다. 선생님은 야곱보다도 위대하십니까?’ 라고 반문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본격적으로 영적인 말씀하십니다. 본문 13-14입니다.
(요4:13-14)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의 이 말씀에 그 여인이 “(요4:15) 선생님,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라며 반응하기 시작합니다. 그 여인은 간절하게 반응하지만, 아직도 말씀의 ‘씨앗’을 받을 준비는 되지 않은 피상적인 마음, ‘길 가’, 또는 ‘돌밭’과 같은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요 4:10-15). 아직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죄를 깨닫지 못하면 참된 회심(悔心)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인에게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고 말씀하심으로써 그 여인의 마음의 밭을 갈기 시작하셨습니다. 남편을 불러오라는 말씀에 여인은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과 그녀가 지은 죄들을 다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드러내셨습니다.
(요4:17-18)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그제서야 그 여인은 예수님을 참된 선지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요4:19-20)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이 여인은 사실상 자신의 죄를 인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신앙에 관한 논쟁으로 대화의 주제를 바꾸려 노력하는 복잡한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예배할 곳을 찾은 것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분명하고 확실하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요한복음4:21-24을 보겠습니다.
(요4:21-2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이같은 예수님의 말씀에 그 여인은 메시아, 그리스도가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리셨고, 그녀는 예수님을 메시아, 그리스도로 믿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즉시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마을로 달려갔습니다(요4:21-30). 이제 그녀는 자신이 다시 태어났음을 입증하는 열매맺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길 가’와 ‘돌밭’, 그리고 ‘가시떨기’ 같은 마음의 밭을 갈아엎고, 돌과 가시들을 제거하고 말씀의 씨를 뿌리자 100배, 60배, 30배의 결실을 맺게 된 것입니다. 그 ‘부정한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유대인”이라고 부르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을 메시아, “그리스도”라 고백하고 그 놀라운 진리를 마을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죄인의 마음이 아무리 완고하다 할지라도, 우리가 인내하므로 전도한다면 하나님은 그의 마음을 변화시키시고, 그가 구원받는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리며,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생명의 씨앗을 받을 수 있도록 마음을 준비시키시는 성령을 의지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일단 밭에 뿌려지고 자양분을 섭취하게 되면 씨앗은 생명을 갖게 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열매를 맺게 되는 법입니다. 말씀의 씨, 복음을 전하다보면 길가와 돌밭에 떨어지기도 하고, 가시밭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말고, 씨를 뿌리다 보면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역사로 ‘좋은 땅’에 떨어지는 씨앗처럼 많은 결실을 맺게 되기도 합니다. 성도 여러분에게 주어진 사명은 열심히 생명의 씨, 말씀의 씨를 뿌리는 것, 즉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갈아엎도록 성령의 역사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의 기도는 사람들의 마음의 밭을 갈아엎어 좋은 밭으로 변화시키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전도의 열매를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3. 일꾼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물가에서 계실 동안 점심을 구하러 갔던 제자들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식사하시라고 말씀드리자 예수께서 “(요4:32)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며 뜻밖의 말씀을 하시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사이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4:34-3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제자들은 육신의 양식만을 양식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적 양식’을 ‘참된 양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적 양식은, 그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인류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음으로도 육신이 생명력을 얻음과 같이,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일을 참되이 할 때에 영적 생명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일을 하는 자에게 한하여 이런 귀한 은혜를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이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29에 말하기를,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금보다 귀한 것입니다.
(엡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벧전1: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예수 믿는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살후 3:2) 또한 우리를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시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이처럼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풀어 주신 귀한 믿음은 우리가 전쟁하듯이 힘쓰지 않으면 그 믿음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딤전 6:12에 말하기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히 12:4에서는, “피 흘리기까지 죄를 대적하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예수 믿는 믿음은 자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예수 믿는 성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래서 복음 전도를 영적 삶의 양식으로 삼아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실상 죽은 믿음입니다.
(약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사도 바울은 성도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신 목적을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엡1:3-6)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이어서 에베소서 2:10에서,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라고 했습니다. 육체적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양식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영적인 생명력을 가지려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을 자신의 양식으로 삼아 하늘의 생명력이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간단한 교훈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씨앗과 추수의 비유”를 드셔서 추수하는 밭에 많은 일꾼들이 있으며, 각각의 일꾼들에게는 각기 주어진 일이 있다는 것을 열두 제자에게 상기시켜주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밭을 갈고, 어떤 사람들은 씨를 뿌리며, 어떤 사람들은 가라지 뽑는 일을 돕고, 또 어떤 사람들은 추수를 합니다. 그러나 각각의 일꾼은 영혼 구원을 위한 “팀”(Team)의 일원이며, 각각 자기 일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추수하는 밭에는 경쟁이 없습니다. 신실한 일꾼들은 모두 함께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3:5-9을 보겠습니다.
(고전3:5-9)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교회 일꾼들이 아무리 유명하고 아무리 재능이 있다 해도,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종이고.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열매를 거두기까지에는 심는 사람이 있고, 물을 주는 사람이 있으며. 추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동역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를 위해 각각 자기가 일한대로 자기 상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일꾼들은 하나님의 일꾼들입니다. 그러므로 일꾼들은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두고, 각자에게 주어진 믿음의 분량에 따라 그 뜻을 행해야 합니다. 영적 추수하는 일, 복음 전도에 쓰임받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 되셔서 영광과 의의 면류관을 받으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5.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통해 회개하고 구원받은 그 ‘부정한 사마리아 여인’의 마음의 행로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예수께서 메시아,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예수님을 믿게 된 ‘사마리아 여인’은 곧장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자신에게 행하신 일들을 전하며, 바로 그 분이 우리가 기다리고 기다렸던 메시아이심을 전했습니다.
(요4:28-29)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 여인은 동네 사람들이 만나기를 꺼려하는 ‘부정한 여인’이었지만, 이제 예수님을 만나고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은 이제 담대하게 동네로 돌아가 예수님이 누구시며, 자신을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 거침없이 증거했습니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은 그 ‘부정한 여인’이 증거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우물가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그 중에는 그녀, 그 ‘부정한 여인’의 증거 때문에 믿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믿게 된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요4:39-42)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사마리아 여인’이 사는 사마리아는 유대들이 상종하지 아니하는 아주 척박한 땅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척박한 곳에서 많은 추수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갈릴리로 가는 발걸음을 사마리아로 돌려 한 여인을 만나게 하시고, 그 여인을 통해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게 하여 많은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상상할 수 없었던 복음 전도의 열매를 맺게 된 것이었습니다. 누가 그 부정한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 복음이 전해지라고 생각을 했겠습니까? 우리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잃어버린 사람들의 마음을 여시기 위해 놀라운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그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 ‘부정한 여인’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았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들었기 때문에 구원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세상의 구주”(요 4:42)시라고 말했습니다. 유대인이나 사마리아인이나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에 대해 상당히 배타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예수님이 유대인만이 아니라, 그 ‘부정한 사마리아 여인’을 포함한 모든 사마리아 사람들, 더 나아가 모든 사람들의 구세주, ‘메시아’되심을 자신들만 알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들의 죄를 걸머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 사실을 모든 족속에게 증거하며 그들을 제자 삼으라고 명령하십니다. 복음 전도 사역의 수학 공식은 아주 간단한 것입니다. 한 여인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고, 그녀의 증거는 한 마을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그리스도께 인도했고, 그 사람의 삶 속에서 일어난 변화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천 명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행4: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믿음으로 씨를 뿌리는 것, 믿음으로 복음의 씨를 뿌리는 것이 영적 추수를 거두게 되는 한 방식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셨습니다.
(요2:23)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그리고 이어 유대 땅을 향해 떠나셨습니다.
(요3:22)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
다음으로, 유대로부터 사마리아로 가셨습니다.
(요4:4)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을 기록한 요한복음 4장은 예수님을 “세상의 구주”(42절)로 선포하며 끝이 납니다.
(요4: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유대’에서 ‘사마리아’로, 그리고 ‘사마리아’에서 ‘세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 구주이심이 전파된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 전도의 행로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예언하시고 그 예언하신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사도행전1:8입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렇게 복음 전도의 본을 보이시고 명하셨습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시는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하시어 100배, 60배, 혹 30배의 결실을 맺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단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입니다. 예수는 과거나 미래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에 완전하게 순종하는 유일하신 분이셨습니다. 예수는 자기가 원하는 바는 결코 행하지 아니하고, 언제나 하나님께서 원하신 바를 행한 유일한 분이십니다. 바로 예수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말이 요한복음에서는 무려 44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하늘 아버지에 의해 세상으로 보내심 받은 자임을 늘 자각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7:28-29)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하시니
‘하나님의 사람’은 “보냄 받은 대로 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환경이 어디든지, 만나야 할 대상이 누구이든지, 전해야 할 내용이 무엇이든지 순종하면서 가는 사람입니다. 기독교인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보냄 받은 자, 곧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살아야 할 삶의 전형은 바로 주님 자신의 삶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로 부름을 받은 자이며, 동시에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다.
(요17: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요20: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일에 살고, 하나님의 일에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람과 항상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8:29-30을 보겠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성도들의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 세상에서의 지위나 부귀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므로 그 뜻을 성취해 나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자신의 삶을 두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롬14:8)
사도 바울처럼, 자신은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부름받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죽으나 주님의 것으로 사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소서!
요 4:1~15 / 송기성 목사
“아 하나님의 은혜로”
최근에 베스트셀러 작가 장 샤오헝의 <느리게 더 느리게>라는 책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단테가 <신곡>에서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필요는 없다’라고 한 말을 인용하면서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고 싶다는 것은 욕심이며 그 자체가 재앙이다’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기란 사실상 불가능 하며,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려고 애쓰다 보면 정작 자신은 불행해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불행해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불행해지곤 합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욕심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기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오늘 본문의 사마리아 여자가 바로 그 한 예라고 하겠습니다. 그 여자는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는 커녕 자기 자신도 만족하지 못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여자의 삶이 역전되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서 그 인생을 전격적으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1.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었습니다. 실은 예수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요한의 제자가 늘어가고 있다는 것에 질투와 적개심을 품고 있었는데 요한이 증거한 예수님의 제자까지 늘어가고 있다는 것을 듣고 더욱 분노와 적대감을 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아시고 그들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바리새인’이란 <분리된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엄수하였으며(행26:5), 금식을 중히 여겼고(눅5:33), 십일조를 드렸습니다(눅11:42), 그리고 그들은 죄인들과 한 자리에 앉지도 않았습니다(마 9:11), 그런데 그들은 예수께로부터 ‘독사의 자식’(마12:34), ‘맹인’(마15:14), ‘외식하는 자’(마23:13)라는 책망을 들었습니다. 이는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는 것이 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한 때 자기 자신에 대하여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3:5-6)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후에 자기 자신을 가리켜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고전15:8)자라고 하였으며, ‘죄인 중에 내가 괴수’(딤전1:15)라고 실토하였습니다. 자기 자신이 완벽하지 못한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완벽을 기대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대신 그는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실 줄 믿습니다.
■ 멕시코 고원에서 사과 과수원을 운영하는 제임스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매년 사과를 수확하면 배달 형식으로 고객들과 직거래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 겨울, 멕시코 고원에서는 보기 드문 우박이 한바탕 쏟아졌습니다. 그 탓에 곧 수확을 앞둔 사과가 몽땅 상처투성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는 고민을 하며 과수원을 서성이다가 무심코 사과 하나를 따서 깨물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상처투성이 사과는 이전의 그 어떤 사과보다도 달고 아삭했습니다. 다음 날, 그는 사과를 모두 수확해서 상자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상자에 이런 쪽지를 붙여서 고객들에게 보냈습니다. “이번에 보내드리는 사과는 비록 못생겼지만 우박의 시련을 이겨낸 덕에 더욱 달고 맛있습니다. 한번 믿고 드셔보십시오.” 다행히 못생긴 사과는 고객들로부터 호평을 얻었고, 그는 파산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마리아 여자,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습니다. 지금 있는 자도 그녀의 남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상처투성이 사과, 못생긴 사과와 같은 인간이었습니다. 그녀는 결코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다만 우박의 시련을 견디어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우물 곁에서 전혀 예기치 않았던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그녀의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그녀는 사마리아에 예수님을 전한 최초의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세상은 완벽한 사람을 기대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눈에 완벽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애를 씁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상대적 의미로서의 완전을 추구하며 성장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완벽하고자 하는 욕심은 그 자체가 독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완벽하지 못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만족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완벽하지 못한 사람을 들어 쓰십니다.
고린도전서 1:26-29의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로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각각 그 기대와 기준이 다릅니다. 완벽하지 않은 사람이 각각 기준과 기대가 다른 사람들을 다 만족시킬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완벽하지 않은 사람을 들어 쓰십니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지금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와 같은 사람, 죄인 중에 괴수 같은 사람, 세상의 약하고 미련한 자, 천하고 멸시받는 자, 가진 것도 없는 사람을 택하여 보배롭게 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세상에 영원한 생수는 없습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는 동네에 이르사 낮 12시쯤 길을 가시다가 피곤하여 야곱의 우물 곁에 앉으셨습니다. 마침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그녀는 당시 사회적으로 신분이 천한 여자였습니다. 그녀는 유대인이 멸시하는 사마리아인이었으며, 귀부인들은 물을 길으러 나오지 않는 정오에 나온 것은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없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그녀에게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으며 지금 살고 있는 사람도 그녀의 남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자, 그녀는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물을 좀 달라 하셨을 때 선뜻 물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대신 “당신은 유대인으로써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고 반문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녀는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하고 재차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그녀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하고 구하였습니다. 사실 야곱의 우물로서는 그녀의 목마름을 영원히 해갈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인생의 갈증도 면치 못한 상태에서 모든 사람을 만족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에게 구하는 사람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주시는 줄 믿습니다.
■ 한은정 성도의 이야기입니다. 모태신앙으로 자란 그녀는 성경공부를 하며 그동안의 신앙생활이 종교생활일 뿐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새벽기도 중에 예수님을 진정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인정하였습니다. 그녀는 매일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만나 기도하면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 영혼을 향한, 교회를 향한,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애통함이 어떤 것인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녀에게 한 가지 숙제가 생겼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아들 녀석이 말을 안 듣고 자기주장을 고집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 아들에 대해 참지 못하는 자기 모습을 보며, 자기 자신에게 변화가 필요함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그 변화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자기 모습에 좌절하며, 다시는 화내지 않고 대화로 풀겠다고 결심하지만 번번이 실패할 뿐이었습니다. ‘하나님, 저는 왜 이렇게 변하지 않지요? 저는 왜 주님처럼 인내할 수 없는 건가요?’ 한 차례 아들과 다툰 그 날도 마음이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QT의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놀라웁게도 하나님께서 메마른 사막 같은 그녀의 마음을 이사야 41:18-19의 말씀으로 위로해 주셨습니다. “내가 헐벗은 산에 강을 내며 골짜기 가운데에 샘이 나게 하며 광야가 못이 되게 하며 마른 땅이 샘 근원이 되게 할 것이며 내가 광야에는 백향목과 싯딤 나무와 화석류와 들감람나무를 심고 사막에는 잣나무와 소나무와 황양목을 함께 두리라” 하나님의 말씀은 그녀에게 영원한 생수가 되었습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심을 더욱 민감하게 느끼게 되었다면서 그녀는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비록 메마르고 보잘 것 없는 땅이지만, 하나님이 새로운 창조를 일으켜 샘 근원이 되게 하시겠다는 말씀 앞에 눈물로 기도할 수 밖에 없었다. 내게 언제나 사랑을 부어 주시고, 귀한 것으로 채우길 원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니 마음이 풍족해졌다.” 아멘!
사마리아 여자, 목마른 인생이었습니다. 야곱의 우물이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우물로서는 영혼의 목마름을 해갈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사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몰랐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주시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라고 하신 말씀에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소서!’ (Sir, give me that water!)라며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생수를 구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예수님을 ‘선지자’(요4:19)라고 고백하였으며,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요4:29)하고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그녀가 믿고 전한 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목마름으로 구하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수를 주십니다.
요한복음 7:37-39의 말씀입니다.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치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아멘
세상에 영원한 생수는 없습니다. 생수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렘 2:13).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만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주십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 뱃속 심령에서 성령 생수의 강이 흘러 나오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헐벗은 산에 강을 내시며 골짜기 가운데에 샘이 나게 하시며 광야가 못이 되게 하며 마른 땅이 샘 근원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헤밍웨이는 “남보다 뛰어난 것은 자랑거리가 되지 못한다. 진정한 자랑거리는 과거의 자신보다 뛰어난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남보다 뛰어난 것이 아니라 과거의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으며, 세상에 영원한 생수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소서! 주여,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내게 주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완벽하지 못한 자를 상종해 주시고, 목마른 자를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생수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마리아 여자처럼 과거의 자신보다 뛰어난 현재의 자신, 현재의 자신보다 뛰어난 미래의 자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사마리아로 가신 예수님
요 4:1-10 / 임덕순 목사
이스라엘의 지도를 보면 지중해의 동쪽 끝에 남북으로 길쭉하게 이스라엘 나라가 자리 잡고 있는데, 남쪽 지방을 유대라고 하고 북쪽 지방을 갈릴리라고 하고, 그 중간에 사마리아라는 지역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는 같은 이스라엘 나라이기는 한데 이전에 앗수르 라는 나라가 이스라엘을 점령했을 때 앗수르 사람들이 사마리아에 집단적으로 거주했기 때문에 혼혈족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유대사람들은 중간인 사마리아 사람들을 유대인으로 쳐주지 않고 따돌렸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유월절이나 종교적 행사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갈 때 사마리아를 가로질러 가면 쉽고 빠른데도 사마리아 사람들을 너무나 미워하기 때문에 그리로 가지 않고 험한 요단강 협곡을 두 번이나 건너면서 삥삥 둘러서 다녔습니다.
남쪽 유대 사람들도 북쪽 갈릴리에 가려면 역시 같은 코스로 돌아갔지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길로 가지 않았습니다.
유대나 사마리아나 다 이스라엘의 핏줄이요 모두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국경검문소나 철조망 같은 것은 없었지만 거기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철조망이 있었고 돌아올 수 없는 다리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당시의 사마리아의 사정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면서 남들이 가지 않는 사마리아를 통과하기로 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빠르고 편한 길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본문의 핵심은 사마리아 수가성에서 한 여인을 만나 그를 구원하시고 전도자로 만드시는 기록인데, 바로 그 여인을 만나 구원하시기 위해서 일부러 그리로 가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유대 민족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 모든 영혼을 위해서 오셨기 때문이며, 한 사람의 영혼이 귀하기 때문에 그를 만나기 위해서 일부러 찾아가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배운 요한복음 3장에서 주님은 니고데모라는 사람을 만나셨고, 그에게 구원을 받으려면 거듭나야 한다고 가르치신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 4장에서는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을 만나서 그에게도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시고 구원하시는 기록이 이어집니다.
3장의 니고데모는 유대인이고 남자이며 출세한 고관입니다. 그러나 4장의 여인은 유대인에게 멸시받는 사마리아 사람이고 이름도 기록되지 않은 여자이고, 더구나 자기 동네 사람들에게도 미움 받는 천한 여인이었습니다.
주님은 출세한 니고데모도 만나주셨고, 수가성의 추한 여인도 만나주셨습니다. 한 사람은 밤중에 남몰래 찾아와서 만나주셨고, 한 사람은 일부러 찾아가서 만나주셨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예수님이 사역을 원만하게 하려면 니고데모 같은 출세한 사람은 어떻게 하든지 그를 찾아가서 설득하여 제자로 삼았어야 보다 큰 영향력을 끼칠 것 같고, 사마리아 여인 같은 추한 여인은 예수님의 이미지를 고려해서 만나지 않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영 다른 행보를 하십니다. 우리의 상식과는 영 다른 모습입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행동입니다.
만약에 우리교회에 어느 주일날 두 사람이 새로 등록했다고 합시다. 한 사람은 아주 유명한 교수이며 현직 장관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이혼한 여자입니다. 이혼을 한번만 한 것이 아니라 여러 번 했고, 평판이 아주 좋지 못한 동네 여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에게 주목할까요? 물어볼 것도 없이 훌륭한 교수출신 장관에게 쏠릴 것입니다.
‘저렇게 훌륭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우리교회 성도가 되었으니 앞으로 얼마나 우리교회에 힘이 될까? 지금까지 우리교회에는 변변한 고위공무원 한명도 없었고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우리교회를 우습게보았는데 앞으로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 앞에서 조심할 것이고, 저 훌륭한 분을 존경하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인데 저분이 우리 목사님 설교를 듣게 되었으니 이제 자기 제자들이나 아는 사람들에게 전도 많이 할 거야’ 라고 생각 할 것입니다.
거기에 비하여 평판이 좋지 못한 여자에게는 ‘왜 하필 우리교회에 나와서 우리교회 이미지 손해나게 할까? 꼭 예수 믿고 싶다면 저 옆에 교회를 가든지 하지, 왜 우리교회로 와서 창피하게 할까? 저런 사람은 문제나 일으키지 교회에 아무 이익이 없을 거야’ 하고 무시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의 생각은 너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는 교수출신 장관과 같은 사람입니다. 당시 유대사회의 거물이 밤중에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만약 이 사람이 낮에 왔더라면 기자들의 눈에 띄어 당장 빅뉴스가 되었을 사람입니다.
그런 인물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왔으니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예수님께도 얼마나 힘이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얼마나 힘이 났겠습니까?
그런데 그 뒤에 니고데모가 어떻게 되었지요? 성경에 아무런 기록이 없습니다. 단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후에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한 것 밖에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 사역의 초창기에 정말 커다란 기여를 할 수 있었는데도, 그는 성령을 받고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을 듣고 돌아가서는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고 숨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4장에서 주님이 만나시는 여인은 달랐습니다. 그녀는 유대인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고 멸시하는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그는 남자도 아니고 여자입니다. 더구나 이 여자는 결혼에 여러 번 실패한 사람이어서 자기 동네에서도 평판이 나쁜 사람입니다. 같은 동네 사람들도 이 여자와 상종하기를 싫어해서 대인기피증에 걸린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를 찾아가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절대로 가지 않는 사마리아 동네로 일부러 통과하면서 그를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인생의 갈증을 해결하는 생수인 성령을 말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이 여인은 대인기피증도 잊고 부끄러움도 잊고 물 길러 왔던 것도 잊고 동네로 뛰어 들어가 동네 사람 전부를 주님께로 데리고 왔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전에 이 여자처럼 놀랍게 전도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엄청난 추수꾼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유대사회에서 아주 영향력 있는 유명인인데 그가 주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주님을 위하여 한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학식도 없고 평판도 아주 나쁜 밑바닥 인생이었지만 놀라운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볼 때 그 사람이 어떻게 사용되어지느냐 하는 것은 그의 학식이나 환경에 달린 것이 아니라 주님과 얼마나 깊은 대화가 이루어졌고, 주님을 얼마나 의지하느냐 하는 데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에 속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니고데모는 주님의 얼굴은 한번 보고는 자기의 얼굴은 두 번 세 번 보았습니다. 주님을 한번 만나고 온 후에 자기 체면을 생각해서 숨어버렸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아예 자기 얼굴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동네에 뛰어 들어가 사람들을 불러서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고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주님을 봅니다. 그러나 설교가 끝난 즉시 자기 얼굴을 봅니다. 그리고는 자기체면, 자기 형편, 자기 습관을 생각해서 슬그머니 숨어버립니다. 설교시간만 주님을 바라보지 그 다음에는 자기만 바라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한심하고 실망스러운 모습입니다.
주님은 왜 사마리아 길을 통과하여 갈릴리로 가셨을까요?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1-4)
예수님이 유대를 떠나시는 이유가 먼저 나옵니다. 그것은 세례요한이 세례를 준 사람보다 예수님이 세례 준 사람이 많다는 소문이 났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줄 때에는 가만히 있었고 함께 세례를 받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세례 받은 사람들이 많아지자 돌연 긴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세례요한은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타작마당을 키질 하듯이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똑같이 회개하라고 하셨지만, 내 뒤에 누가 오시니까 회개하라고 하지 않고, 당장 회개하라고 하시어 자기가 세례요한이 예고하였던 그분이라는 것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그동안 관례가 되었던 제물 매매를 중지시키고 그 상을 뒤엎으시며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호통을 치셨으니 예수님에 대한 반감과 거부가 점점 강해졌고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를 밀어내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도시 예루살렘이 집단적으로 복음을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복음을 전하는 너희를 거절하거든 발에 먼지도 떨어버리고 나와 다른 동네로 가라.’고 하신 분입니다.
주님은 복음을 거절하는 사람들에게서 떠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거기를 떠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거절하자 주님은 복음을 가지고 유대인들이 미워하는 사마리아와 갈릴리로 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3장에는 니고데모와의 접촉과 그 결과를 기록하였고, 4장에는 그들이 가장 미워하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접촉과 그 결과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6-7).
주님은 사마리아에 접어든 예수님 일행은 행로에 몹시 지쳤고 목이 말라서 수가 성의 한 우물가를 찾아 가셨습니다. 그때 마침 한 여인이 물을 길러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그 여자에게 먼저 말을 거셨습니다. “나에게 물을 좀 달라.” 그랬더니 그 여자는 냉소적인 태도로 “아니 그 잘난 유대인 양반께서 왜 당신들이 그렇게 미워하는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고 사정하십니까? 양반도 물은 마셔야 삽니까?”라고 비웃듯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영광의 하나님이시고 부족한 것이 전혀 없는 분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사마리아에 사는 죄인이요 아무 소망도 없는 사람입니다. 무슨 공통점이 있어서 대화가 이어지겠습니까? 예수님과 이 여인 사이에는 물이 필요하다는 것 외에는 공통점이 전혀 없는 사이입니다.
더구나 이 여자에게는 대인기피증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시간이 여섯시라고 되어 있는데, 유대나라 시간에 여섯 시간을 보태면 대충 우리나라 시간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거기 여섯시면 우리나라 시간으로 낮 열두시입니다. 중동지방에서 낮 열두시는 너무 더워서 아무것도 못하는 시간이고 그늘에서 낮잠을 자는 시간입니다.
대인기피증 때문에 아무도 없는 시간을 타서 물을 길러 온 여자가 우물가에서 유대인 남자를 만난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꼭 닫아 걸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주 쉬운 이야기로 그 여자와 시작하셨습니다. “나에게 물을 좀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온 천지의 주인이신 그분께서 가난한 사마리아 여자에게 도움을 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도움을 주실 분이 도움을 청하시고 계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부정한 여자에게 도움을 청하는 모습입니다. 체면 생각하는 사람들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연스럽게 말을 거셨습니다. 물을 얻어 잡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에게 필요한 생수를 그에게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어려움은 어려움을 주기위한 것만이 아니라 다른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내가 당하는 여러 종류의 어려움은 위대한 만남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몸이 병이 들었습니까? 주님도 아픔을 겪으신 분입니다.
마음을 짓누르는 답답한 문제가 있습니까?
주님도 밤새워 고민하신 분입니다. 어떤 문제이든지 그 문제는 단지 나에게 고통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위대한 기회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러 와서는 내가 당하는 어려운 문제만 말하고 해결 받으려 하지 그 이상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물을 달라고 하신 것은 한 모금 얻어 잡수고 가시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 여자의 마음에 쌓인 영원한 갈증을 풀어주시기 위해서였는데, 예수님과 물로 대화를 시작해서 끝까지 물만 이야기하면 되겠습니까?
이 여인은 지금까지는 자기에게 필요한 것은 물이고 남몰래 물을 길어다 항아리에 채우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자기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남이 보지 않게 물을 길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죄를 용서받고 당당해지는 것이 더 중요함을 깨달았습니다.
자기에게 중요한 것은 죄를 용서받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물 길러 왔던 그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둔 채로 만나지 않으려던 사람들에게 뛰어가서 ‘내가 만난 예수님을 와서 보라’고 전도하였습니다.
이 여인이 이렇게 변화된 것은, 자기 생각만 하지 않고 마음을 열고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마음에 담아 들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낫지 않는 질병이나 돈 문제나 자식문제로 주님과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곤경이나 답답한 문제를 가지고 오는 사람을 만나서 대화를 시작하십니다.
우리의 질병문제, 돈 문제, 자식문제를 시시하다고 외면하지 않고 들어주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문제로 시작해서 그 문제로 끝나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 정말로 도움이 되는 것을 주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끝까지 우리의 돈 건강 자식 문제 등 현실문제에만 집착합니다. 자기가 원하는 말이 나오지 않으면 아예 귀를 닫아버립니다. 겉으로는 듣는 것 같은데 속으로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떠들면서도 다 듣지만 어른들은 가만히 앉아서 설교를 듣는 것 같으면서 온 시장바닥 다 더듬고 옵니다.’ 그러니 주님과 우리사이의 대화는 진도가 나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겪고 있는 어려운 문제들은 무엇이든지 예수님과 만날 수 있는 접촉점들입니다. 직장 때문에 고민하십니까? 집이 문제입니까? 아이가 건강하지 못해서 걱정입니까?
그것으로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그 문제로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야 합니다.
지금 나를 답답하게 하는 그것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분께서 나의 근본적인 문제와 비참한 모습을 보여주실 때, 눈을 감지 말고 귀를 막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이 내 문제를 알려주실 때 반발하지 말아야합니다. 주님이 제시하시는 근본적인 치료법에 가슴을 열고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은 그 여인에게 물 한 컵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에게는 아예 두레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예수님과 대화하다가 갑자기 가슴이 시원해졌습니다.
그녀는 자기가 물 길러 왔었다는 것마저 잊어버리고 동네에 뛰어 들어갔습니다. 근본적인 해결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주시지 않아도 우리 자신이 변하게 하심으로서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방법입니다. 주님이 그 여인에게 아무것도 주시지 않았는데도 그 여인은 변하여 있었습니다.
내 건강상태가 바뀌고 집이 바뀌고 차를 바꾸고 옷을 바꾸어 입고 머리를 바꾸어야 새로워 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잘못 아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바꾸지 않아도 됩니다.
주님과 단 한 번의 만남만 있으면 됩니다. 그것은 죄 문제입니다. 죄가 해결되지 않는 한 아무리 생활을 바꾸고 환경을 바꾸어도 근심과 불만과 고통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죄가 주는 열등감과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는 한 행복은 없습니다.
주님은 이 여인에게 계속해서 물에 대한 이야기만 하지 않았습니다.
물로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곧이어 진리 한 가운데로 그를 이끌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을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10)
조금 전까지 피곤한 기색으로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시던 주님은, 금세 그 여인의 마음을 자기에게 주목하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여인에게 두 가지에 주목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어떤 선물을 주실 수 있는가하는 것과, 또 하나는 자기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한 사람이 누군가 하는 것입니다.
“네가 만일 이것 이것을 알았더라면 네가 나에게 그것을 달라고 했을 것이다.
” 예수님은 이 여인의 눈을 덮고 있는 무지가 벗겨져서 두 눈으로 하나님이 무엇을 주시려는지, 그리고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바로 알기를 바라셨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주시려는 선물은 생수라고 표현하셨는데 이것은 성령을 말합니다. 니고데모에게 네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신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표현 방법만 달랐지 내용은 같았습니다. 이 두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같습니다.
모든 인간의 공통적인 필요사항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누구는 집 한 채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누구는 좋은 직장만 있으면 하고, 누구는 몸만 건강하면 하고, 누구는 존경받기를 원하지만, 니고데모 같은
유명한 고관이나 사마리아 여인 같은 밑바닥 인생이나 할 것 없이 공통적으로 필요한 것은 ‘성령의 도움으로 믿어 죄를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사죄로 영혼의 두려움과 갈증이 사라지고, 하나님이 나의 오늘과 영원한 내일을 보장해 주신다면, 우리는 어떤 환경, 어떤 형편에서도 기쁨과 만족이 가득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물과 그것을 주시는 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단두가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아는 것이고, 성령을 받아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주님께 구하면 주님은 주십니다. 다른 누구도 이것을 주실 수 없고 예수님만 주십니다.
“네가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는 말씀은 구하면 주님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환경을 바꾸거나 형편이 달라진다고 우리의 갈증과 불행이 해결되는 것이 아님을 아시기 바랍니다. 내가 지금 당한 문제를 가지고 주님을 만나되, 그것의 해결방안만 들으려고 하지 말고, 주님이 무엇이라 하시는지 주님의 말씀을 깊이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주님의 뜻을 더 알기를 구하고, 성령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여전히 나의 문제에만 관심을 갖고 주님의 말씀에 무관심한다면, 하나님은 이 복음을 내게서 거두어 내가 가장 경멸하는 사람에게 주시어 그들이 복을 받게 할 것이고, 결국 나는 그에게 무릎을 꿇고 간청해야 겨우 복음을 들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동안 말씀에 대하여 보인 무관심과 교만을 회개하고, 아직 말씀이 있을 때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가슴 열고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불행의 뿌리를 제거해 주시고 복된 도구로 우리를 써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