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47
2월27일[연중 제7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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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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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oa-RBYWt2-4
[성 골롬반외방선교회 성요섭 요셉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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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죄의 유혹 앞에서 있는 힘을 다해서 투쟁하십시오!>
평소 사랑과 자비, 용서와 인내를 목청껏 외쳐왔던 예수님께서 오늘은 왠지 말씀에 날이 서있습니다.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 발언의 강도나 수위가 꽤나 높습니다. 어떤 말씀은 너무나 섬뜩해서 듣기조차 거북스럽기까지 합니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마르 9,43-44)
너무나 강경한 예수님의 말씀,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참으로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마냥 오냐 오냐 하지만은 않습니다. 물론 때로는 칭찬과 격려도 아끼지 않습니다. 온 마음과 몸을 다 바쳐 자녀를 위해 헌신합니다.
그러나 때로 자녀가 그릇된 길을 갈 때, 그 길이 정말 가지 말아야 할 길이라 할 때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 길에서 되돌리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때로 타일러보기도 하고, 눈물로 호소도 하겠지만, 그게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면 준엄하게 꾸짖기도 하고 강하게 외쳐보기도 하고 정신 번쩍 들게 혼도 낼 것입니다.
이런 극진한 자녀 사랑을 배경으로 예수님께서는 손을 잘라버려라, 발을 잘라 버려라, 눈을 빼 던져버리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웃에게 죄를 짓게 하는 죄를 중히 여기셨습니다. 일시적인 쾌락으로 지옥을 얻기보다는 불구가 됨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는게 더 낫다고 역설하셨습니다.
죄를 짓게 되면 다른 무엇에 앞서 가장 가치 있고 고귀한 영혼의 구원, 하느님 나라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그토록 강조점을 두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사항이 한 가지 있습니다. 새삼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예수님께서는 글자 그대로 손발을 잘라버리고 눈을 뽑아버리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밥 먹듯이 일상적으로 죄를 짓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다들 불구자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죄의 유혹 앞에서 있는 힘을 다해서 투쟁하라는 권고 말씀입니다. 죄 앞에서 목숨 걸고 맞서 싸우라는 격려 말씀입니다.
돈보스코의 제자 가운데 도미니코 사비오란 성덕이 출중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돈보스코의 오라토리오에 들어와서 돈보스코가 제시한 성덕의 길을 충실히 걸어가고 있던 중 안타깝게도 중병을 얻어 1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오래가지 않아 교회는 도미니코 사비오를 성인 반열에 올려놓습니다. 여기 그가 짧은 생애 동안이지만 생명처럼 지켜왔던 모토가 있었습니다.
“죄보다는 죽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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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rytMMqWxU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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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다녀도 마음에 이것을 간직하지 않았다면?>
사람은 육체로 살 수 있고, 마음으로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마음으로 사는 법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육체로 살면 동물과 같습니다. 음란물을 보는 사람이라면 육체로 사는 사람입니다.
육체로 살면 구원될 수 없습니다. 타인을 죄짓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육체로 사는 이유는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마음에 소금이 없어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마르 9,4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을 변화시키고 싶은지에 따라 그 사람의 정체성과 심판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소금이 음식에 미치는 영향처럼, 우리의 마음은 우리가 주위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결정짓습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마르코 9,50)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이 타인을 변화시킬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이와 같은 마음의 변화를 우리는 고전 『비밀의 정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주인공인 메리 램지는 처음에는 냉정하고 외롭고 방치된 소녀였습니다. 부모를 잃고 고모의 집으로 오게 되지만, 고모부는 그녀를 차갑게 대하고, 그녀의 마음은 그 사람들의 차가운 태도에 의해 더욱 닫히게 됩니다.
화원은 그 당시 고모의 것이었고, 그녀의 고모부가 그 화원을 잠그기까지 했습니다. 고모가 죽었고 그로 인해 고모부가 큰 상처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메리는 그 화원을 가꾸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고, 이 마음이 그녀의 진정한 마음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그녀가 화원을 가꾸는 모습은 겉으로는 냉정하고 삭막한 소녀였던 그녀의 마음이 결국 얼마나 따뜻하고 변화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장면입니다.
그녀의 마음은 비밀의 화원처럼 변화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마음이었습니다.
메리의 변화된 마음은 곧 콜린이라는 고모부의 아들에게로 전달됩니다. 콜린은 병약하고, 몸이 쇠약해져서 외부 세계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자꾸만 자신의 질병을 핑계로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며, 그의 아버지마저도 그를 방치했습니다. 그러나 메리의 마음은 콜린에게 새롭게 변화된 환경을 제공했고, 그 마음에 합당한 변화를 끌어냈습니다. 콜린이 화원을 가꾸겠다는 마음으로 걸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메리는 콜린에게 새로운 마음을 심어주었고, 그 마음은 콜린의 아버지에게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고모부는 처음에는 메리의 변화된 모습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메리의 행동을 단순한 소녀의 취미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메리의 따뜻한 마음과 지속적인 노력은 결국 고모부의 마음도 변화시켰습니다. 아들을 방치한 것을 후회하고 콜린을 끌어안은 것입니다. 메리는 화원을 가꾸는 것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가꾸고 변화시켰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점은 마음이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메리가 화원을 가꾸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은 단순히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을 넘어서, 콜린과 고모부의 마음을 변화시킨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마음이 나쁜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하면, 그 사람은 아무리 많은 물리적인 환경을 주어도 그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메리의 마음엔 다른 사람의 마음에 없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소금’입니다. ‘선한 영향을 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다른 이들에게 에덴동산이 되어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킵니다. 누구나 각자의 환경으로 다른 이들을 맞아드립니다. 사람들은 그 사람의 마음 안에서 변화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또한 소금의 본질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마르코 9,50)라고 하셨습니다.
소금은 음식의 맛을 변화시키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도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질 수 있습니다.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고 음식을 보존하는 역할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이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면, 우리는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그들을 하느님께로 이끌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헬렌 켈러는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가지고 있었고, 그로 인해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설리반 선생님은 단순히 가르치는 것을 넘어서, 헬렌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데 집중했습니다. 설리반 선생님의 사랑과 헌신은 헬렌을 변화시켰고, 헬렌은 사랑이 무엇이냐는 설리반 선생님의 질문에 “선생님이 처음 저를 보았을 때 저를 꼭 안아준 것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포옹이 곧 마음이고 그 마음 안에 상대를 초대하는 일입니다.
우리 에덴동산에 많은 이들을 품어 그들 또한 에덴동산을 마음으로 가진 구원하는 존재들이 되게 합시다. 이렇게 볼 때 에덴동산은 본래 소금을 간직하신 하느님의 마음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마음으로 산다는 것은 다른 이에게 에덴동산이 되어주어 나의 곁에 있는 이들을 좋게 변화되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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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 성서 말씀에서 저는 두 가지를 묵상해 보았습니다. 하나는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입니다.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라는 단순한 보장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라고 약속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무조건적인 성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삶의 태도를 가지느냐에 따라서, 그 삶이 형통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의 선택과 행동이 중요한 조건이 됩니다. 만약 우리가 정의롭지 못하게 살거나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다면, 형통은 보장되지 않습니다. 학생 때 배운 ‘가정법’이 생각납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예문이 있습니다. ‘이 몸이 새라면 날아가리.’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고, 하는 일마다 잘 될 수 있으려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조건을 잘 따르고 지켜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필요한 조건만 채워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충분한 조건까지 채워져야 합니다. 세례는 구원의 필요조건이지만 그것만으로 구원이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례받은 신앙인으로서 주어지는 책임과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절대로 잃지 않을 것이다.”입니다. 우리가 작은 행동 하나라도 선택할 때 그것이 결과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마실 물 한 잔’의 의미는 단순한 물 한 잔을 넘어섭니다. 이는 작은 사랑의 실천, 작은 친절이 큰 축복을 가져온다는 뜻입니다. 누군가가 힘들어할 때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는 것이 마실 물 한 잔이 될 수 있습니다.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 작은 선행이 될 수 있습니다. 단순한 미소 하나, 관심을 두는 태도도 우리의 삶을 형통하게 만드는 씨앗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부자는 좋은 옷과 큰 집에 살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었지만, 집 앞에 있는 라자로라는 거지를 외면했습니다. 부자에게 라자로를 도와주는 것은 아주 작은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부자는 그걸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물어보는 율법 학자에게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길에 강도당해서 피를 흘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레위는 강도당한 사람이 이방인이라면서 외면했습니다. 사제는 예배 시간이 급하다면서 외면했습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 주었고, 여관에까지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여관 주인에게 잘 치료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주겠다고 했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의 친척도, 친구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에게 묻습니다.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입니까?’ 율법학자는 이렇게 답합니다. ‘강도당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당신도 가서 그렇게 하십시오.’ 그렇습니다. 구원은 사제나 레위라는 직책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이웃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현재의 선택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지금 당장 작은 행동을 통해 미래의 축복을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작은 행동이라도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형통이 따르고, 우리가 베푸는 선행 하나하나가 하늘에서 기록되고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최후의 심판’을 들려주셨습니다. 지금 가난하고, 굶주리고, 외롭고, 아픈 사람에게 해 준 것이 예수님께 해 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사람은 천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가난하고, 굶주리고, 외롭고, 아픈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예수님께 해 주지 않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사람은 천상의 잔치에 초대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두 발을 가지고 지옥으로 가느니 한 발이라도 가지고 천국으로 가야 합니다. 두 눈을 가지고 지옥으로 가느니, 한 눈이라도 가지고 천국으로 가야 합니다.” 나에게 소중한 것을 이웃에게 나누라는 말씀입니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서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절대로 잃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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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삼의딸들수녀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오늘 복음에서는 작은 이에 대한 예수님의 각별한 관심이 두드러집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에게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은 큰 사랑으로 보상을 받을 것이며 작은 이를 죄짓게 한 사람은 혹독한 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복음서의 이 내용을 글자 그대로 이해하였다가는 세상에 성한 육신을 가진 사람이 남아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뜻은 그만큼 죄를 두려워하라는 것이고 육신의 지체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죄를 부추기는 원인들, 곧 탐욕, 허영, 교만, 이기심 등을 잘라 내라는 뜻일 것입니다.
어떤 교부는 시각(視覺)의 마차에 올라탄 우리의 생각을 하느님 사랑을 향하여 몰고 가야 한다고, 육적인 시선을 마음의 판단에 복종시키라고 권고합니다. 다른 모든 감각보다도 특히 시각은 범죄 영상물까지 포함하여 온갖 종류의 영상이 지배하는 우리 시대에 각별히 절제해야 할 감각입니다. 절제의 덕은 우리에게 죄에 대한 식별력을 길러 줍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절제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시궁창과 그 얼룩을 잘 알지만 죄악에 빠진 사람은 자기 병세의 심각성조차 깨닫지 못하고 시궁창에서도 향유 냄새가 나는 것으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오늘 독서인 집회서가 경고하듯 눈앞의 현실에 몰두하여 주님의 자비와 인내를 과신하거나 남용하지 말고 죄의 무서움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지켜 주는 절제 안에서 서로 평화롭게 지내려면 마음에 소금을 간직해야 하는데, 대 그레고리오 성인은 이 소금이 바로 하느님 말씀의 지혜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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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9,41-50: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은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41절) 자선을 베푸는 데는 누구를 막론하고 다 그 몫이 있다. 인간은 누구도 남과 나눌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는 아무도 없다. 목말라 하는 사람에게 냉수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것 자체가 자선이라고 하셨다. 다른 사람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42절). 이 말은 인간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게 버려지는 모습이다. 땅에는 그가 묻힐 곳이 없어서 돌을 달아 바다에 수장시키는 것이다. 남을 죄짓게 하는 사람이 얼마나 불행한 사람인지 알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45절) 하셨다고 지체를 잘라 버리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분이 잘라내라고 하신 것은 지체가 아니라, 욕망이다. 하느님의 뜻을 향해 나아가는데, 반대 방향으로 가려고 하는 우리 육의 욕망을 끊어내야 한다는 말씀이다.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47절) 눈은 우리 마음의 창과 같고 온갖 더러운 욕망이 눈을 통해 우리에게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결국은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 하느님의 뜻을 놓고 갈등하는 나!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달려있다. 죽지 않는 구더기나 꺼지지 않는 불은 고통을 의미하는데, 이 세상에서 겪는 어떠한 감각의 고통도 죄인들이 받을 벌에 비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구제할 길 없는 탄식과 후회가 있는 그곳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으며, 죽고 싶어도 죽음조차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말씀들은 미래의 삶에 대한 희망을 주고 자유의지로써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에 대한 합당한 삶을 살아가게 해준다.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50절) 소금은 말씀의 지혜를 뜻한다. 지혜롭게 말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자기 말이 청중의 일치를 뒤흔들어 놓는 일이 없도록 매우 두려워해야 한다. 하느님의 뜻을 잘 선택하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데 나 자신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지나 않을까 나 자신을 두려워하며 더욱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살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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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구원의 길’에서 중요한 것은 ‘구원받는 것’뿐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모두 불 소금에 절여질 것이다.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마르 9,41-50)
1) ‘물 한 잔’에 관한 말씀에서, 요한복음에 있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자의 대화’가 연상됩니다. “마침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으러 왔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고을에 가 있었다.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 사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대답하셨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요한 4,7-10)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요한 4,13-15)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물’을 주시는 분, 즉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세주이신 분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면, “구원받기를 원하고 노력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받을 수 있다.”라는 약속입니다. <아무도 구원에서 배제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 구원받기를 거부하지 않는 한.>
‘물 한 잔’에 초점을 맞추면,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아무리 작은 선행과 사랑이라도 다 기억하시고 상을 주신다.”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세례를 받을 기회가 없어서 신앙인이 되지 못했더라도, 구원받기를 원하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한 사람들, 또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선행과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았던 사람은, 하느님께서 어떻게든 구원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2) 손(발, 눈)을 잘라 버리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엄하게 꾸짖으신 일에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마르 8,31-33)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오른 팔’ 같은 사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그렇게 아끼고 사랑하는 제자였지만, 그가 당신이 가시는 길을 막으려고 하자, 아주 단호하고 엄하게 그를 잘라 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를 아끼다가 구원사업을 망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은, 그를 완전히 잘라낸 것은 아니고, 그가 떨어져 나가기 전에 바로잡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손, 발, 눈’은, 사람이든지 물건이든지 간에 ‘내가 정말로 아끼고 사랑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또는 그 물건이 내가 ‘구원의 길’을 가는 것을 방해한다면, 그 사람을, 또는 그 물건을 과감하게 잘라 버리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어떤 사람이나 물건에 대한 애착심과 미련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이고, ‘나의 구원’을 위해서 그 사람을, 또는 그 물건을 끊어내는 것은 지혜입니다.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을 그렇게 끊어내는 것은, ‘그의 구원’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죄 짓게 하는 마음을 잘라 버려라.”라는 가르침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마음’을 잘라내는 방법은 ‘기도’뿐입니다.
3)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을 온 삶으로 실천해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라는 가르침으로 해석됩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라는 말씀은, 신앙인이 신앙인답게 살지 않으면 아무 쓸모가 없다는 산상설교의 가르침에 연결됩니다.(마태 5,13) 쓸모가 없다는 말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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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벗>
마르코 9,41-5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지지하는 사람이다, 죄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쳐라, 소금)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모두 불 소금에 절여질 것이다.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벗>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르 9,41)
그리스도의 사람을
품으니
그리스도의 사람이지요
참된 사람에게
참되니
참된 사람이지요
착한 사람에게
착하니
착한 사람이지요
바른 사람에게
바르니
바른 사람이지요
고운 사람에게
고우니
고운 사람이지요
따뜻한 사람에게
따뜻하니
따뜻한 사람이지요
부드러운 사람에게
부드러우니
부드러운 사람이지요
깨끗한 사람에게
깨끗하니
깨끗한 사람이지요
믿는 사람을
믿으니
믿는 사람이지요
희망하는 사람을
희망하니
희망하는 사람이지요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니
사랑하는 사람이지요
그리스도의 사람을
품으니
그리스도의 사람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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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단호한 결단>
“행동을 통해서 수확하는 것은 습관이고, 습관을 심어 수확하는 것은 성격이며 성격을 심어 수확하는 것은 운명입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습관을 만들지만, 그다음에는 습관이 우리를 만듭니다.”그러니 좋은 습관을 지닐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좋은 습관은 덕이 되고, 좋지 않은 습관은 그야말로 악습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악한 모습으로 남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마르9,42).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릇된 말과 행동으로 신앙이 약한 사람을 죄짓게 하여 신앙을 저버리게 한다면 그 책임이 막중하다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네 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네 발이 너를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마르9,45-47). 이렇게 섬뜩한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사람의‘신앙에 걸림돌이 되는 악한 행동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서 섬김의 자세로 살지 않고 오히려 잘못된 행동으로 다른 이들을 신앙에서 멀어지게 한다면, 짠맛을 잃은 소금과 같이 되어서 버려질 뿐입니다.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는 옛말을 흘려들어서는 안 되지요. '세 살 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고 합니다. 매 순간 단호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도 말씀하십니다. '교회가 권력과 돈과 허영을 쫓기도 하지만,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이끄시는 그리스도인의 길은 봉사와 겸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분열시키는 ‘세속적인 유혹’을 이겨내고 출세와 출세를 위해 타인을 망가트리고 싶은 유혹에 잘 맞서야 한다.'
날이 갈수록 신앙이 여려지고 있다고 합니다. 참된 신앙인의 삶보다는 무늬만 신앙인이 늘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환경은 좋아졌는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정도는 부족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예전에는 모든 환경과 여건, 처지가 어려웠지만 믿음의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세상 안에서 나를 유혹하는 것이 너무도 많기에 마음이 흔들리고 심지어 신앙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도 늘어만 갑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은 한순간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에 눈길을 돌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에 눈길을 돌립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2코린 4,18). 그러므로 영원한 것을 잡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마르9,41-50). 사람이 하느님의 나라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소금은 보존하기 위한 소금이 아니라 주기 위한 소금입니다. 소금은 자기 맛을 느껴지지 않게 하고 오히려 각 음식의 맛이 좋아지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그렇듯이 우리의 신앙생활도 자신의 풍요로움을 가지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야 합니다.
지옥불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마르9,48). 지옥은 엄연한 실재입니다. 우리가 아직 볼 수 없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하느님과 멀어져 마음의 불안을 느낄 때를 생각하면 지옥이 따로 없다는 의미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지옥불의 뜨거움은 현세에서 불의 뜨거움을 통해서 비유적으로 체험할 수 있겠지만 원한에 사로잡힐 때 영혼의 뜨거움을 체험하게 됩니다. 천국은 사랑으로 채워져 있지만, 지옥은 온갖 증오와 원한, 분노, 미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불이 꺼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자비가 허락되는 이 지상의 삶에서 천국을 희망하고 지옥의 삶을 피해야 합니다. 천국은 이미 지상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매 순간 사랑으로 천국을 완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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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김봉진 안드레아 신부님]
한창 교리를 받고 있는 예비신자가 물었어요. “신부님, 하늘나라에는 장애우들이 많겠군요”. “아 그건 말이죠. 장애우들이 장애로 인해 세상에서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에서 보상을 받아서겠지요” “신부님, 그런 뜻이 아니고요, 손이나 발이나 눈이 죄짓게 하거든 잘라버리라는 예수님 말씀이 계셔서요. 하늘나라는 죄를 피해 신체의 일부를 잘라버린 사람들이 많이 왔을 거 아닙니까?”
여러분들은 오늘 복음에서의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셔요? 죄 짓게 하는 손발과 눈을 자르고 빼어버리라는데, 글자그대로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아이쿠, 오늘 말씀을 글자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하늘나라에 정상의 몸으로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 같군요. 예수님의 말씀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게 오늘복음의 핵심이 될 수 있겠습니다.
보잘 것 없는 이에 대한 친절을 베푼 것에 대한 보상의 말씀이 먼저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당신을 믿는 보잘 것 없는 이의 길에 장애를 놓고, 죄짓게 하는 것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굉장히 강렬한 이미지를 갖습니다. ‘누구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그 목에 연자 맷돌을 달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 손 맷돌이 아닙니다. 맷돌을 돌리는데 당나귀나 말이 필요한 당나귀 연자 맷돌을 매고 바다에 던져진다고요.
또 죄 짓게하는 손발과 눈을 잘라 버려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 시대의 과장법이고, 강조법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과장된 표현으로서 무엇을 강조하시려고 하는 걸까요? 보잘것없는 이라 할지라도 다른 이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고 구원을 위태롭게 하는 죄는 하느님 심판에서 가장 엄한 벌에 처해진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즉, 다른 사람의 신앙을 빼앗는 것보다는 죽고 잘려지는 편이 더 나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신앙인은 인생의 목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과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는 것인데, 이 초월적 목표를 상실하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두려운 것이 됩니다. 그것은 육신의 죽음과 더불어 영원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예수께서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죄의 유혹을 주거나 받는 것에 대하여 단호하게 끊어버릴 수 있고, 또한 다른 이들을 죄로 물들게 함이 아니라 자기와 같은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짠맛을 잃어버리지 않은 소금, 자기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는 자신의 존재, 언제나 자신이 신앙인임을 잊어버리지 말고, 신앙을 잘 간직하고 있을 것을 권고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다른 이를 죄로 이끌거나 혹은 신앙을 잃어버리게 함으로 궁극적 삶의 목표를 잊게 하거나 잊어버리는 것은 결국 신앙인의 존재를 잊고 사는 것일 겁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그 소금을 짜게 하겠느냐?” 언제나 신앙인으로서의 제자리를 지킬 수 있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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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선을 행하고 욕망을 끊어버리는 소금이 되어>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 받고 살아가면서도, 서로 서열다툼을 하며 자기만 인정받고 남을 지배하고 싶어 하는 자기중심적인 욕망에 빠져서는 안 됨을 가르칩니다. 제자공동체는 제아무리 보잘것없다 하여도 서로 선을 행하고, 죄에 떨어지지 않도록 함으로써 하느님의 선과 사랑을 보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9,41)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당연한 듯 보이고 사소한 것처럼 보여도, 하느님께서 내 마음에 심어주시는 거룩한 애정으로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선을 행하는 것은 하느님과 무관하게 내가 소유한 것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선이신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나누고, 공유하고, 되돌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재물이나 권력, 재능을 많이 지니지 않아도, 나의 처지에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나눠야겠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도록 불린 사람들끼리 경쟁하고 차별하면서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겠습니까?
이어서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9,42) 여기서 작은 이는 보잘것없지만 예수님께 믿음을 두는 사람, 하느님 앞에서 낮아지는 사람을 말합니다. 선을 행하기는커녕 하느님의 사람을 죄짓게 하는 것은 그분을 모독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나아가 남을 죄짓게 하는 손과 발, 눈은 제거해 버리라고 하시며, 그들은 지옥에서 모두 소금에 절여질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9,43-49 참조) 이 충격적인 말씀들은 심판에 대한 불안감과 공포심을 조장하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 강력한 구원의 초대이지요. 신체 훼손을 명하신 것이 아니라 죄를 부추기는 욕망을 철저히 끊어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이요, 모두가 하느님의 선과 사랑을 호흡하며 살아가는 고귀하고 존엄한 형제자매들입니다. 따라서 부족하고 못 배우고 가진 것이 없고 별 능력이 없다고 해도 서로를 업신여기지 말고 죄짓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이 안에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소금의 짠맛을 잃어버린 채, 형제를 업신여기고 경쟁 대상으로 삼으며, 시기 질투로 형제자매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혀서는 안 되겠지요. 나아가 육체적 감각과 눈길이 제멋대로 날뛰지 않도록 함으로써 형제자매를 죄에 떨어지게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얼굴을 보여주며, 이 세상에서 정의의 강물이 넘쳐흐르게 해야 할 소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참 제자로 살아가기 위하여 “재산을 믿지 말고, 자신과 자신의 힘을 붙좇지 말며, 마음의 욕망을 따르지 말아야겠습니다.”(집회 5,1-2) 세속의 정신으로 자리다툼을 하고 정치권력과 야합하며, 사업을 통한 이윤 추구에 눈이 멀어, 노동자들에게 고통을 주고 가난한 이들을 멸시한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오늘도 거룩한 애정으로 선을 나누고 되돌리는 선행의 소금, 경쟁과 시기 질투를 버린 순수한 상호간의 사랑의 소금, 희생의 소금을 간직하고 평화롭게 지내는 아름다운 제자공동체를 이루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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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이정은 요한 보스꼬 신부님]
하느님의 말씀과 그분의 자비는 놀랍고 신비롭습니다.
생각할 거리가 있는 짧은 이야기를 한 편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 수사 둘이서 냇가에서 채소를 씻고 있었다. 한 수사가 다른 수사에게, "어때, 오늘 아침 원장수사님 강론 말씀이 기억나나?"하였더니, 그 다른 수사가, "글쎄, 무슨 말씀이었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데..."라고 답했다.
물었던 수사가 계속 말하기를, "그렇게 기억도 못할 말씀을 뭐 하러 날마다 듣나?"하니까, 친구 수사는 "이것 봐, 이 냇물에 내가 채소를 씻는 걸 보게나. 결국엔 물기 하나 남지 않지만, 그래도 채소는 깨끗해졌지 않는가?"라고 대답하였다. (R. KERN 모음, '사막 교부들의 재치와 웃음', 돈보스코미디어, 살레시오회 김건중신부 번역')
** 하느님의 말씀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정말 신비롭습니다 비록 미사 중에 듣는 독서와 복음 말씀이 기억이 나지 않아도, 일상 안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전해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느끼지 못하더라도, 가족과 이웃을 통해 전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할 때가 있더라도, 하느님의 말씀은 생명의 힘을 전해 주시고, 하느님의 은총은 나를 움직이며, 하느님의 사랑은 나를 성장시켜 주십니다. 주님께서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야 49,15>
그렇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잊을 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잊지 않으십니다. 당신께서 창조하신 놀라운 피조물인 인간을 어찌 가엾게 여기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나약함이 죄를 짓게 하고, 그 죄가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등지게 만들고 그분의 은총을 잊게 하여 그분 곁을 멀리 떠난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기다리시고 한없는 사랑을 베푸시며, 끝없는 은총으로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인간이 저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하십니다. 두려워말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분의 은총과 사랑은 언제 어디서나 영원히 우리를 감싸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고 힘이 되어 주십니다. 비록 우리가 바쁜 일상 안에서 지치고 힘들 때가 많고, 위기가 닥치고 시련이 몰려와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지 못할 때가 많다고 할 지라도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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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체중이 쥐의 10,000배 큰 코끼리는 쥐보다 몇 배 많은 먹이가 필요할까요? 당연히 10,000배, 아니면 그 이상의 먹이가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1,000배 정도 많이 먹을 뿐이라고 합니다. 인간을 봐도 그렇습니다. 자기보다 훨씬 체중이 많이 나가는 사람이 그 체중만큼 더 많이 먹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크기가 두 배가 되었을 때, 에너지 요구량은 100%가 아니라 75% 증가할 뿐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체중이 많이 나가면서 에너지 요구량이 그만큼 늘어나서 더 많이 먹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냥 적당량을 먹어야 했습니다.
만약 적당량을 넘어서는 양의 음식을 섭취한다면 어떨까요? 건강에 좋지 않게 됩니다. 체중이 늘어나 비만이 될 수 있으며, 이런 상태는 심장병, 당뇨병, 특정 유형의 암과 같은 만성 질환을 유발할 수도 있습니다.
먹는 것도 그렇지만, 소유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적당량을 소유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지금보다 더’를 외칩니다. 지금 소유하고 있는 것이 적당량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는 어떠할까요? 약간의 풍요하고 넉넉한 삶을 주기도 하지만, 욕심과 이기심으로 정신적인 건강을 유지할 수 없게 됩니다. 더군다나 욕심을 멀리하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정반대의 삶을 살기에, 주님과도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기 위해 힘든 희생도 주저하지 말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손이 죄짓게 하면 잘라 버리라고 하시고, 발이 죄짓게 하면 이 역시 잘라 버리라고 하십니다. 눈이 죄짓게 하면 빼 던져 버리라고 하시지요. 이만큼 강한 어조로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가 과감히 결정해서 구원의 여정에서 마주하는 모든 걸림돌을 없애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회개의 삶은 거창한 곳에서 이루어지지 않음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르 9,41)
물 한 잔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하늘에서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더 많은 것을 갖고 더 많은 것을 먹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물 한 잔이라도 줄 수 있는 작은 사랑의 실천만이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실천하는 삶은 소금이 짠맛을 잃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짠맛을 잃으면 소금으로서 가치가 없어지는 것처럼,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치가 없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받은 주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는 것이야말로 참소금이 되는 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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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무엇인가를 얻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혹은 그에 걸맞은 비용을 지급해야 합니다. 그 비용은 비단 돈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비용은 시간일 수도 있고 노력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자격증을 취득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기회비용으로 학원등록을 위한 등록금과 그곳에서 공부하기 위한 시간과 우리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런 기회비용이 합쳐져서 자격증을 취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작은 것을 들여서 큰 것을 얻는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하늘나라의 중요성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사실 오늘 말씀은 조금 무섭게 들립니다. 손이 죄를 짓게 하면 그것을 잘라버리고, 발이 죄를 짓게 하면 발도 잘라버리고 눈이 죄를 짓게 하면 그것을 빼버리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위에서 말한 기회비용과 다른 문제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꼭 주님 말씀처럼 해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솔직한 마음으로…. 손이 잘리기를 원하지 않고 발이 잘리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눈을 빼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냥, 온전히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만약 그대도 저와 같은 마음이라면 우리는 하늘나라로 들어가기 위한 기회비용을 이런 것이라고 여겨야 합니다.
우선 내 손과 발을 예의주시하세요. 죄짓지 않게 말입니다. 내 눈을 주시하세요. 눈에서 독이 나가지 않게... 입도 주시하세요. 입에서 화살이 나가지 않게….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기회비용은 내가 나를 잘 돌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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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마르코.9,50)
“어떤 사람이 독수리 알을 주워서 닭장에 놓았다. 독수리 새끼는 알에서 깨어나 그곳의 병아리들과 함께 자랐다. 독수리는 닭과 똑같이 지내왔기 때문에 자신이 닭이라고 여겼다. 몇 년 후 그 독수리는 하늘을 날아가는 황금빛 독수리를 보고 옆에 있는 닭에게 ‘저건 뭐지?’ 하고 물었다.
옆에 있던 닭이 ‘저건 독수리야, 새 중의 새지. 독수리는 하늘에 속하지. 우리들 닭이 땅에 속하는 것처럼 말이야.’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그 독수리는 닭으로 살다가 닭으로 죽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바로 닭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안토니 드 멜로 신부)
소금의 정체성은 짠 맛입니다. 본질인 짠 맛을 잃어버리면 소금이 세상에 있어야 하는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자신의 고유한 맛을 잃어버리면 우리 또한 세상에 있어야 하는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는 사람과 세상과 맺는 관계나 자율성을 통해서 자신이 누구인지 그 정체성을 확립해 나갑니다. 학생 시기에는 높은 점수가 자신처럼 여겨지고,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좋은 직장이나 직위가 자신처럼 되고, 부모로서는 훌륭한 자녀가 자신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성취한 모습이나 가지고 있는 것을 자신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진 것이나 조건으로 규정되어 있는 자신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위대합니다. 우리 모두의 삶은 의미가 있고 소중한 그리스도인의 소명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살지만 하늘에 속합니다. 닭장에 살지만 하늘에 속하는 독수리입니다. 하늘의 속성인 진실과 사랑, 정의와 평화를 위한 봉사의 삶을 이 땅에서 살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늘의 맛을 내는 소금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독수리처럼 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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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은 앞 장면에서 보여주듯이,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고서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기에, 그가 하는 일을 막아 보려고 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마르 9,42)
우리가 자주 빠지는 일이기에 가슴이 섬찟합니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무서운 말씀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자신을 죄짓게 하는 도구 세 가지, 곧 자신의 ‘손’과 ‘발’과 ‘눈’을 잘라버리고 빼버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지옥구더기와 지옥 불과 지옥 불 소금을 피하라고 경고하십니다. ‘손’과 ‘발’과 ‘눈’을 잘라내라는 말씀이 아니라, 죄를 짓게 하는 그 단초가 되는 ‘죄의 뿌리’, 곧 ‘죄를 불러들인 마음의 뿌리를 절단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마르 9,50)
곧 죄를 불러들이는 단초가 되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소금’으로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고 하십니다.
사실, 소금은 성경에서, 곡물(레위 2,13)이나 향료(탈출 30,35)에 뿌려져 성별의 도구가 되기도 하고, 제물(민수 18,19)에 뿌려져 하느님과의 계약 관계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부패를 막고 거룩하게 하며, 거룩한 관계 안에 머물게 합니다. 그리고 산상설교에서 보여주듯이 ‘소금’은 자신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세상의 소금”(마태 5,13) 입니다. 곧 ‘소금’은 ‘다른 이 속으로’ 혹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 녹아서 자신이 사라지면서 부패를 막고 맛을 내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을 새겨 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하느님에게 참여하는 모든 것, 곧 세상 전체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타인과 함께’, ‘타인과의 관계’에서 ‘평화’를 이루라고 하십니다. 당신이 주시는 평화 안에서 사랑의 올바른 관계를 맺으라고 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을 되새겨봅니다.
“여러분의 말은 언제나 정답고 언제나 소금으로 맛을 낸 것과 같아야 합니다.”(콜로 4,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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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마르 9,50)
주님!
제 마음을 사랑의 소금에 절이소서.
하여, 제 마음이 부패하지 말게 하소서!
제 마음이 깨끗해지고 당신 마음 되게 하소서!
사랑의 소금으로 형제들에게 녹여 들어가
당신의 평화를 이루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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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 중심의 지혜로운 삶>
-“재산을 믿지 마라, 자만하지 마라, 죄를 단호히 물리치라”-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다시 한 번 불러보는 만세칠창중 하나에 애국가 1절입니다. 새삼 대한민국이 하느님의 각별한 보호속에, 강대국들의 무수한 침략중에도 이렇게 융성한 발전을 이루고 있음은 천운의 기적임을 감사로이 깨닫습니다. <병자호란> 책을 독료하면서 조선이 참혹하게 멸망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생존할수 있었음은 홍타이지의 호의와 더불어 마침 시작된 마마(천연두) 덕분이었음을 알았습니다. 대한민국은 지금의 난국도 슬기롭게 타개해 나가리라 믿습니다.
조선의 마마에 쫓기어 홍타이지가 삼전도 의례로 전쟁의 막을 내리고 서둘러 귀국했다는 사실을 어제의 독서를 통해 알았습니다. 조선의 천연두가 조선을 구한 것이니 이 또한 천운입니다. 만주의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는 중국의 한족에 흡수되어 흔적없이 사라졌지만 대한민국은 여전히 유구한 역사를 누리고 있습니다. 여기에 결정적 불후의 도움이 된 세종대왕의 한글창제 역시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임을 새삼 깨닫습니다.
이런 자각이 주님의 참된 제자이자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주님 중심의 겸손과 지혜, 감사의 삶을 살도록 우리를 북돋웁니다. 재산을 믿지 말고 자만하지 말고 겸손히, 또 죄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치며 살게 합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도 주님의 참된 제자들에게 해당된다 싶습니다.
“나무가 열매로 사람을 모으듯 어른은 성품으로 사람을 따르게 한다.”<다산>
“복숭아와 오얏나무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나무 밑에 저절로 길이 생긴다.”<맹자>
성령의 열매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주님의 참된 제자들을 지칭한다 싶습니다. 봄의 꽃향기도 좋지만 가을의 둥글게 익어가는 원숙(圓熟)한 열매들의 깊고 그윽한 향기는 비교불가합니다. 이건 가을 열매 익어가는 배밭사이를 걸으며 매해 실감하는 진리입니다.
오늘 제1독서 집회서는 우리가 추구할바 지혜로운 삶의 방법을 알려줍니다. 주님 중심의 재산을 믿지 않는 초연한 이탈의 삶이, 자만하지 않고 겸손한 삶이 참된 제자의 삶임을 가르쳐 줍니다. 가르침이 실제적이며 직접적이고 공감이 가는 내용이라 공부하는 자세로 마음에 새기며 전문 그대로 인용합니다.
“재산을 믿지 말고, ‘넉넉하다.’고 말하지 마라.
너 자신과 네 힘을 붙좇지 말고, 마음의 욕망을 따르지 마라.
‘누가 나를 억누르리오?’ 말하지 마라.
주님께서 기필코 징벌하시리라.
‘죄를 지었어도 내게 아무 일도 없었지 않는가?’하지 마라.
주님께서는 분노에 더디시기 때문이다.
속죄를 과신하지 마라.
죄에 죄를 쌓을 뿐이다.
‘그분의 인자하심이 크시니 수많은 내 죄악이 속죄받으리라.’고 말하지 마라.
정녕 자비도 분노도 다 그분께 있고, 그분의 진노가 죄인들 위에 머무르리라.
주님께 돌아가기를 미루지 말고, 하루하루 늦추지 마라.
정녕 주님의 분노가 갑자기 들이닥쳐 너는 징벌의 날에 완전히 망하리라.
부정한 재산을 믿지 마라.
정녕 재난의 날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리라.”
모두가 재산을 믿지 말고 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 중심의 회개의 본질적 삶에, 주님을 경외하는 삶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무욕의 지혜요 무욕의 겸손입니다. 무욕의 다른 이름은 주님을 사랑하는 청정욕입니다. 청정욕을 발휘하여 순수와 열정, 희망과 기쁨, 감사와 평화, 온유와 겸손, 자비와 지혜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소금이 상징하는바 이런 청정욕입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짯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바로 청정욕의 내용을 이루는 참 좋은 덕목들이 마음의 소금입니다. 또 소금은 주님을 상징합니다. 마음에 주님을 모시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 중심의 회개의 삶에 충실할 때 선물처럼 주어지는 청정욕에 참 좋은 덕목들입니다. 오늘 복음 역시 죄의 엄중함을 통감하고 죄의 유혹을 단호히 끊어버리라는 주님의 충격요법적 충고입니다.
죄도 보고 배웁니다. 주님을 믿는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를 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낫다 하시니, 이웃을 죄짓게 하는 걸림돌이 되어선 결코 안된다는 것입니다. 손이 죄짓게 하거든 그 손을 잘라 버리고, 발이 죄짓게 하거든 그 발을 잘라 버리며, 눈이 죄짓게 하거든 그 눈을 빼 던져 버리라는 격렬한 말씀은 바로 죄의 결과가 얼마나 치명적인지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결코 문자그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니 그러하다면 천국은 온통, 한 손, 한 발, 한 눈의 애꾸눈 사람들로 가득할 것입니다. 이처럼 죄의 결과는 치명적이니 철저한 회개를 통해 차단하라는 것입니다. 몸이나 사회에 암세포같은 죄의 암세포입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로 암세포같은 죄가 번지지 않도록 차단해야 할 것입니다. 또 개인이나 사회를 부패케 하는 죄입니다.
기도도 회개도 때가 있습니다. 너무 죄가 만연되어 죄의 암세포가 마음이나 사회에 퍼지면, 또 부패가 만연되어 마음이나, 사회가 너무 썩으면 기도도 회개도 소용없습니다. 과일도 조금 썩으면 발라내고 먹지만 많이 썩으면 통채로버려야 합니다. 이런 상태의 현대인들은, 나라나 사회는 아닌지 우려되는 총체적 난국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희망은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은 하느님 중심 방향을 향한 철저한 회개를 통해 초발심의 자세로 주님의 참된 제자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 중심의 회개와 청정욕의 삶에 항구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시편40,5ㄱ).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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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가혹함에서 사랑을 읽는>
오늘 주님께서는 눈이 죄짓게 하면 눈을 빼버리라고 심한 말씀을 하십니다.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그런데 우리 눈이 죄짓게 하면 주님께서 제 눈을 빼버리실까요? 우리는 주님께서 그러실 리 없다고 믿고 싶고 그래서 실제로 믿고 싶은 대로 믿고는 합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면 노자가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고 말했듯 인간이 하느님의 뜻에 어긋날 때 그때도 인자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오늘 독서 집회서도 그렇게 얘기합니다.
“‘죄를 지었어도 내게 아무 일도 없었지 않은가?’ 하지 마라. 주님께서는 분노에 더디시기 때문이다. 그분의 인자함이 크시니 수많은 내 죄악이 속죄받으리라.’ 하고 말하지 마라. 정녕 자비도 분노도 다 그분께 있고 그분의 진노가 죄인 위에 머무르리라.”
이 말씀을 뜯어보면 하느님은 마냥 인자하신 분이 아니시고, 죄를 지어도 언제까지나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시고 다만 분노에 더디실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도 복음 다른 곳에서 비유를 드신 바 있지요.
어떤 사람이 포도밭에 무화과나무를 나무를 심었는데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포도 재배인에게 그 나무를 베어 버리라고 하는데 포도 재배인은 주인에게 한 해 더 말미를 주면 공들여 키워보겠다고, 그랬는데도 열매 맺지 않으면 그때 가서 베어 버려도 되지 않겠냐고 하지요.
여기서 포도 재배인은 예수 그리스도시고 밭의 주인은 하느님 아버지이신데, 주님께서 그리 애쓰셔도 끝내 회개의 열매 맺지 않는 자는 하느님 아버지께 단죄받는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오늘 주님 말씀은 지엄하고 가혹하지만 사랑이고 그 사랑은 구원의 사랑이요 이 악물고 하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구원의 사랑이요 이 악물고 하는 사랑이라니 뭔 뜻입니까?
그것은 눈을 빼고 다리를 자르는 것이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당뇨 합병증으로 다리가 썩어들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를 살리기 위해 의사가 이 악물고 다리를 자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하느님께서 이렇게 가혹하게 하시기 전에 구원을 위해 스스로 가혹하게 자기 죄를 끊어버리라는 말씀이고 다리를 끊어버리기 전에 죄를 먼저 끊어버리라는 간절한 호소입니다.
어쨌거나 가혹함과 단호함에서 사랑을 읽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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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마르 9,43ㄱ)
<내가 사는 길!>
오늘 복음(마르9,41-50)은 '죄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치라는 말씀과 소금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에 대해 매우 단호한 말씀을 하시면서 죄에서 멀어질 것을, 죄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칠 것을 강하게 권고하십니다.
먼저 '남을 죄짓게 하는 자는 무거운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손과 발과 눈이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버리고, 빼 던져 버리라고 하십니다. 성한 몸으로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 던져지고, 불소금에 절여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소금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마르 9,50)
'죄'는 '구원의 큰 걸림돌'입니다.
'죄'는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입니다.
'죄'는 '해야 할 것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은 것'이며,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유는 나의 나약함 때문이고, 악의 세력들이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종종 죄를 범하게 되고, 죄의 유혹에 빠져들곤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주신 성소에 맞는 삶을, 보다 더 살아내지 못하는 죄를 짓기도 합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굳게 믿고 하느님께로 돌아가 자비와 용서를 청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죽지 않고 사는 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이 곧 '소금'입니다.
"주님께 돌아가기를 미루지 말고, 하루하루 늦추려 하지 마라. 정녕 주님의 분노가 갑자기 들이닥쳐, 너는 징벌의 날에 완전히 망하리라."(집회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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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마르 9, 50)
지키고
간직해야할
짠맛의
신앙입니다.
흩어지는
모래같은
신앙이
아니라
짠맛으로
정화하는
소금같은
신앙입니다.
신앙의 길은
단맛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가는
짠맛입니다.
짠맛으로
시련과
유혹을
이겨냅니다.
소금의 노래가
하느님께 드리는
오늘의 참된
노래입니다.
내어주는
짠맛이며
녹아내리는
우리
나날들의
짠맛입니다.
우리의 오늘은
어떠합니까.
빛과 소금이며
십자가와
짠맛으로
우리가
성장합니다.
거품이 아니라
녹아 스며드는
짠맛의
결단이며
서로를 구원으로
이끄는 소금의
실천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삶을
맛나게 하는
예수님이라는
소금이 있습니다.
신앙의 정체성은
예수님의
길을 가는
소금의 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생명의 길은
소금처럼
하나되는
짠맛의
길입니다.
짠맛을 되찾는
소중한
오늘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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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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