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과 김지하 그리고 박근혜의 6억
나는 79년 12.12 즉 12.12사태 때 바로 노태우가 사단장으로 있던 9사단 29연대 3대대 9중대의 하사로서 소총분대장이었다.
그 당시에 우리대대는 사단본부가 있던 후방에 있었고, 3개연대가 돌아가면서 GP근무를 하는 중이었다. 나는 그때 대대에서 대전차 훈련에 쓰일 사판(입체지도)를 제작하려고 파견되어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날 갑자기 원대 복귀 명령이 떨어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대대의 병력이 모두 이동했고, 대대 전체가 텅 비게 되었다. 우리중대는 군단탄약고를 지키는 임무를 하고 있었기에 우리 중대를 제외한 다른 중대들은 모두 그날 저녁 중앙청을 점령했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나는 이상한 삐라들을 보았다. 우리는 거의매일 순찰을 돌았는데 그때마다 북에서 보내온 삐라들을 한 웅큼씩 주워서 갔다. 그 삐라에는 ‘전두환 괴뢰’ ‘전두환 살인마’라고 써 있었다. 우리는 동료들에게 전두환이 도대체 누구냐고 물었지만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다음해인 80년 5월 우리 대대는 방카 공사하는 곳으로 이동했다. 저녁에 텔레비전을 볼 수 있었고, 텔레비전에서는 연일 광주에서 학생데모 현장이 보여지고 있었다.
당시에 나는 마지막 휴가 때가 되었는데 갑자기 휴가가 연기되었다. 그런데 그 누구도 광주에서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냥 학생대모가 좀 거칠었구나 하는 줄로 만 알았다. 그리고 다시 우리 부대는 사단본부 근처로 복귀했다. 우리부대의 연병장에는 삼청교육대가 설치되었고, 각 분대에서 고참 상병 한명씩을 차출하여 삼청교육을 시키는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우리분대에서도 고참 상병 한명을 보냈다. 그 친구는 군복에서 계급과 이름을 모두 가렸다. 연병장의 양끝에는 기관총을 설치하고 있었다. 매일 연병장에는 엄청 많은 삼청교육대에 끌려 온 사람들이 얼차려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아무 것도 모른 채 8월 말 경에 말년 휴가를 갔고, 10월말 일 경에 제대했다.
나는 고향은 광주광산구지만 돌도 되기 전에 광주시 계림동으로 이사가서 그곳에서 어린시절을 다 보냈기에 실제의 고향은 광주시 계림동이다. 계림동에는 오거리가 두 개가 있고 나의 고향은 윗 동네라 불리는 오거리였다.
그곳 바로 내가 살던 집 옆집에서 살던 친구가 나를 끌고는 자신의 집 옥상으로 올랐다. 그의 집은 2층 스라브집이었다. 그곳에는 기관단총의 총 자국이 수군데다 선명하게 나 있었다. 전두환 살인마가 민간인들의 집을 향해서 헬리콥터위에서 기관단총을 난사해 버린 것이다. 그 옆집 마당에도 헬기에서 쏜 기관단총의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우리 동네는 광주항쟁이 있었던 도청 앞 광장인 금남로까지 걸어서 약30분이 소용되는 거리에 있다.
우리동네 아저씨, 아주머니들은 광주사태 당시에 대모들에게 밥을 먹이기위하여 자신들의 다라이에 밥을 해서 머리에이고 금남로로 나갔었다. 그리고 매일 새끼니를 이런 식으로 해날랐다. 그래서 전두환 이 살인마가 우리 동네의 민가들을 향하여 헬기위에서 기관단총을 난사해 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 친구는 당시에 전남대학교 국문과에 다니고 있었는데 학교를 자퇴하고 말았다. 전두환 이 살인마에게 복수하기위해서는 정치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정치외교과를 가기위하여 자퇴를 해 버린 것이다.
다른 친한 친구의 친구는 죽음가까이 갔다가 살아났다. 그는 당시 26세였고, 무직이었다. 그는 전남도청 뒤쪽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날 츄리닝을 입고 조선대학교 뒷산으로 올라가서 운동을 하려고 가는 중이었다. 그래서 도청 앞에는 군인들과 대모대가 항상 대치하고 있었기에 그날도 그렇게 대치 중인 줄로만 알고 츄리닝을 입고 대치중인 그들 사이로 뛰어갔다. 갑자기 총소리가 났고 그는 바닥에 쓰러졌다.
총알이 옆구리를 뚫고 지나가버려서 창자가 몽창 바닥에 쏟아졌다. 눈을 아무리 뜨려고 해도 눈이 떠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 대모대에 속해있던 스님이 그를 엎고는 도청 옆에 있는 백병원 이층으로 올랐다. 그리고 곧 군인들이 추격해 와서 스님은 도망을 하고, 의사는 자신의병원에서는 수술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스님과 함께 왔던 대모대 학생들이 다시 그를 들쳐업고 도청 뒤에 있던 전남대학교 부속병원으로 뛰어갔다. 의사3명이 그의 눈꺼풀을 들쳐보더니 두 명은 살릴 가망이 없다고 하고 한명이 그래도 수술을 해보자고해서 결국 수술을 했다. 그리고 6개월의 긴 병원생활 끝에 아직도 잘 살고 있다.
나의 남동생은 당시 충장중학교 1학년이었다. 우리집은 당시에 계림동에서 광주천변 양동으로 옮긴 상태였다. 그래서 학교에서 돌아오다가 금남로대로를 건너기위해서 횡단보도에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그런데 동생과 함께 서 있던 친구가 갑자기 땅에 쓰러졌다. 다리하나가 순식간에 없어져 버린 것이었다. 총알이 무릅 위를 관통하여 다리가 통째로 날아가 버린 것이다.
우리아버지는 6.25때 전차병으로 참전했던 용사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증언에 따르면 6.25보다도 더 무서웠다고 한다.
나의 큰 고모의 아들은 나하고 한 살 차이가 나는 동생이다. 그는 그 당시 광주31사단에서 방위근무를 하고 있었다. 시민군들은 광주 교도소를 점령하기위하여 총을 들고 갔고, 광주31사단에 소속된 방위병들은 광주교도소를 방어하기위해서 출동했다. 당시 광주교도소에는 유신헌법을 반대하던 많은 사람들이 정치범으로 잡히어서 투옥 중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을 구출하기위하여 시민군들이 광주 교도소로 출동한 것이었다. 그래서 한 동네 고향친구들이 서로 적이 되어 총질을 한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내가 제대를 할 당시에는 1980년은 전 세계적으로 제2차 오일쇼크가 있었던 해로 세계적인 불황이었다. 나는 하루종일 막 노동 일감을 찾으려고 돌아다녔으나 찾지 못했다.
당시 광주에는 ‘고전’이라는 이름의 고전음악실이 있었다. 우리집은 너무나도 가난했기에 나는 점심값도 교통비도 없었다. 하루에 500원 그게 내가 쓸 수 있는 돈의 전부였다. 바로 이시기에 박근혜가 전두환에게 돈 6억을 받았다는 것이다. 내가 정신병자가 아니고서야 이시기에 돈 6억원을 살인마 전두환에게 받았다는 말을 듣고 제정신 일 수가 있겠는가? 당시 500원은 고전음악실 입장료였다. 500원만내면 그곳에서 커피도 주고, 하루종일 마음대로 드나들면서 음악 감상과 잡담을 할 수가 있는 돈이었다. 당시 6억이면 은마아파트 30채를 살수 있는 돈이었다고 하니 얼마나 큰돈이었는가?! 그런데 그 돈을 살인마 전두환에게 받았다.!?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되겠습니까?
어떻게 자기국민 그것도 아무런 무장도 안한 민간인에게 헬기에서 기관총을 쏘고, 아무것도 모르는 중학교 1학년 짜리에게 총격을 가한 이런 파렴치한 인간의 탈을 쓴 악마에게 어마어마한 돈을 받은 그 사람이 대통령으로 출마할 수가 있습니까?
나는 하루에 쓸 수 있는 나의 전재산 500원을 내고 고전음악실에 들어가서 음악을 들으며 보냈다. 점심도 저녁도 굶었다.
그곳에는 나와 비슷한 젊은이들의 아지트였다. 거의 모두가 광주항쟁의 피해자들이었다. 그런데 그 중에는 광주에서 갑부의 아들이 한명 있었다. 지금은 유명한 작가가 되었으니 그 친구의 이름은 밝힐 수가 없다. 나는 어려서부터 그림과 글을 몹시 좋아했고 그래서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만화라고 생각해서 만화에 미친 적이 있었고, 그 당시에는 그림을 그려서 는 먹고 살 수가 없다고 판단해서 소설가가 되기로 하고 문학에 미쳐있는 상태였다. 바로 광주의 고전음악실에서 만난 친구들의 대부분은 음악가, 문학 지망생들이었다. 그리고 부자 친구의 덕택에 저녁마다 술과 밥을 얻어먹으면서 함께 전두환 살인마에 대하여 울분을 토로했으며 우리의 영웅은 당시 광주 중앙여고의 국어선생이며 시인이었던 김지하 씨 였다. 그들은 대체적으로 유신헌법 반대 대모를 하다가 학교에서 제적을 당한 학생들이었고, 아직도 국가 수배자 명단에 있었던 친구들이었다. 단 하루도 술에 취하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는 날이었다. 그리고 그 친구 중 하나는 술에 취해서 자신의 2층집으로 올라 가다가 떨어져서 계단에 머리를 박아서 뇌수술을 했다.
나는 87년대선 때 김대중 선생님의 유세장을 갔었다. 단 한번 나는 밥 먹고 살기에 너무나 바빳기에. 유세장마다 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감동을 그림으로 그렸다. 그러나 그때 노태우가 당선되고 말았다. 다시한번 김대중 선생님에게 기회가 왔고, 그때 나는 나의 그림을 대통령 당선되기 몇일 전에 당시 의원이던 김한길 의원을 통해서 김대중선생님에게 전달했다.
당시 우리들의 영웅이었던 김지하씨가 변심했다. 노망한 것인가? 완전히 돌아 버린 것인가?
내 친구는 김지하를 너무나 숭배했기에 그의 아들 이름을 ‘지하’라고 지었다.
그리고 그 친구의 시가 바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다.
"여종업원구함.
당일취업가능.
월수300보장."
세상이 돌아 버린 것인가?
세상이 미쳐 버린 것인가?
우리국민 모두가 미쳐 버린 것인가?
내가 미친 건가?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