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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의 의미
진주를 얻으려다
다이아몬드를 발견하다
이 글을 쓰기 전 나는 『고구려 9백 년의 자취소리』(2015년. 초판매진)라는 고구려 역사 에세이집을 냈다. 이는 느닷없는 행적은 아니다. 근무처(경주 양성자 가속기 사업)로 파견을 나갔다가 거듬거듬하다보니 신라 역사 에세이집 『신라 천 년의 자취소리』(2014년 세종도서 선정)를 내게 됐는데, 더불어 바듯하게 꼬아진 함수풀이 같은 고구려를 자연 추적하게도 된 것이었다.
범죄 망 좁히듯 고구려를 파헤치던 중에 우연히 연암을 만났으며, 그의 친구 유득공(사실 그는 연암을 선생님으로 모셨다.)을 비롯한 소위 북학파라 하는 대찬 사람들과도 조우하게 되었다. ‘발해고’를 쓴 유득공을 비롯한 그들 대부분은 옛 고구려 땅을 밟고 연경을 향한 사람들이다. 혹시 고구려에 대한 연결고리가 있을까 싶어 그들을 찾은 것인데 기실 기대만큼의 성과는 얻지 못했다. 그렇지만 실학파라는 그들 발자취 속에서 ‘이것이야말로 문학의 정수다.’라고 할 뜻밖의 것을 얻었다. 진주를 얻으려다 다이아몬드를 발견한 셈이다. 그들하면 배움의 한계로 실사구시에 이용후생이라는 한마디가 떠오르는 실용적인 느낌일 뿐, 정녕 열하일기의 문학적 소산은 꿈에도 생각 하지를 못했었다.
연암이 말로만 듣던 연경으로 떠날 때의 벅찬 감정과도 같이, 나 역시도 호기에 차 신열이 오르고, 면바른 재미가 솔솔 불어 고소하고, 진귀함에 놀라 가슴을 쓸어내리며 혹독한 여정이었지만 깨소금 맛을 느끼며 시종 그를 쫓았다. 결국, 나는 그가 파놓은 문학이란 정수로 채워진 함정에 대책 없이 빠져들고 만 셈이다.
주지하다시피 『열하일기』는 중국을 다녀온 여행기이다. 동시대의 다른 저작들은 ‘연행록(燕行錄)’이나 ‘연행기(燕行記)’등과 같이, 당시 중국 수도인 ‘연경(지금의 북경)을 다녀온 기록’이라는 의미의 제목을 붙이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그러나 이 책에는 특이하게도 『열하일기』라는 다소 이색적인 명칭이 붙어 있다. ‘열하(熱河)’는 당시 중국 청(淸)나라 황제의 피서지가 있던 곳을 뜻하는 지명이다. 당시 사행단(使行團)을 따라 청나라 수도인 연경을 방문했던 박지원은, 열하로 피서를 떠나있던 청 황제를 만나기 위한 일행들의 예정에도 없던 추가 일정에 동행한다. 그리하여 조선에서부터 청의 수도인 연경(燕京)까지, 그리고 다시 열하까지 여행하면서 그 과정과 견문한 내용을 위주로 『열하일기』를 저술하게 된다.
조선 시대까지 왕명으로 사신이 되어 외국을 방문하는 것을 ‘사행(使行)’이라 했다. 특히 청나라를 방문하는 것은, 당시 수도인 연경을 방문하는 것이기 때문에 ‘연행(燕行)’이라 불렀다. 지금도 북경에는 옛 이름 그대로 조금은 순한 맛인 연경 맥주가 있다. 중국과의 관계가 긴밀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 시대, 대규모 사행단을 꾸려 공식적
으로 중국을 방문하는 것은 매우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사행단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당시 ‘문화 선진국’인 중국을 여행하는 기회를 얻는 것은 당대의 많은 지식인이 바라던 바이기도 하였다. 박지원은 사행단의 공식적인 일원이 아니면서도 사행단과 함께 중국을 방문했다. 어쩌면 이러한 특별한 위치가 일정한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열하일기』를 탄생시키게 한 원동력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탄생한 『열하일기』에는 당대 문학사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수많은 작품이 수록되어 있어 그야말로 문학의 ‘보고(寶庫)’라고 할 만하다. 『열하일기』는 여행기이면서, 여행기가 아니다.’ 그것은 ‘여행이라는 장을 전혀 다른 배치로 바꾸고, 그 안에서 삶과 사유,말과 행동이 종횡무진 흘러다니고 종래는 마음속 큰 장막을 거두어 시대를 거슬러 갓맑게 한다.
시대를 살펴보면 조선의 후기, 영·정조 시대를 문예가 부흥된 시대라고 평가한다. 획기적인 문예 창조가 이루어진 시대이다. 조선의 학문적 두 거두라 한다면, 한 분은 지성적이며 정갈하고 일목요연한 선비로서의 정약용이고 또 다른 한 분은 걸쭉한 막걸리 타입으로 능변입심에 술술 거침없이 세상을 말하고 사색적 촌철살인을 논하는 그 시대 최대 자유인 박지원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그런 그들이 바로 동시대에 모두 출현한다. 정약용을 IQ 150이 넘는 천재로 추정하듯이 박지원 또한 이에 버금가지 않는다. 정조가 정약용더러 박지원을 만나보라고 한 말이 예사말은 아니다. 그 시기 정조는 과감히 서얼도 등용했으며 많은 창작물이 쏟아졌다. 하지만 문예 창조와 더불어 개성 뚜렷한 이들을 등용한 정조라 하여도 절대군주로서의 한계는 있다.
정조(正祖)에 의해 1792년 시작된 ‘문체반정(文體反正)’. 이는 ‘불온한 문체를 올바른 것으로 되돌려 놓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왕명에 의해 진행된 이 반정은 일종의 ‘지적 검열’에 해당한다. 이러한 정치적 소용돌이 와중에서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늘 ‘문체반정의 바람을 일으킨 진앙’으로 평가를 받았다. 그리하여 당대의 지식인들에게도 ‘열렬한 탄사와 저주 어린 비난을 동시에 받은’ 박지원의 글들을 모은 문집은 그가 죽은 지 한참 뒤인 1900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공식적으로 출간된다. 하지만 그의 글은 범람이 아니다. 물 흐르듯 흘러 경계에 넘실댈 뿐 넘어서지 않으며 넘치지 않는다. 깊은 사색 속에 절대로 편협하지 않은 내공이 묻어난다. 그가 어린 시절 겪었다는 우울증이 바로 그 범실의 우려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경계’가 아닌 ‘사이’에 주목하는 박지원의 글들은 그리하여 ‘어떤 대상이든 입체적으로, 다층적으로 사유할 것’을 요구한다. 이는 박지원이그만큼 열린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기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파악된다.
『열하일기』는 어느 날 갑자기 불쑥 솟아난 글이 아니다. 시대적 조명과 그의 생애를 바탕으로 한 시계가 마음속에 자리해야 열하를 제대로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글의 정체다. 조선 대문호답게 그의 글은 서정적, 서사적, 서경적, 지적 요소를 모두 겸비하고 있으면서도 모두 규연하다.
문학적 측면에서 보자면 예술 지향적인 측면과 현실 참여적인 실체가 모두 출현해서는 천의무봉 재질에 신출귀몰을 연상시키고도 모자랄 정도로 일껏 붓을 가누어 힘차게 획을 그었다. 고봉준령을 넘는 산길, 나는 그러한 그의 특색 있는 글을 낱낱이 파헤치는 심정으로서의 안내를 선택했다. 특히 그의 ‘사이론’과 감정의 창출력은 아
주 특색이 있다. 이를 경계한 그의 곡예는 마치 안성 바우덕이 축제에 남사당패 줄타기를 보는 듯 놀이공원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 아슬아슬하기 그지없다. 그러면서 남다른 후련함이 있다. 이럴 때 통쾌 상쾌 유쾌라고 하지 않던가.
백성과 군주, 권문세가와 백성 그 사이에 그가 존재한다고 그는 늘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열하를 집필할 무렵 그의 나이 마흔넷, 한창 중년에 접어든 나이다. “길은 저 강과 언덕 사이에 있다.” ‘사이’는 경계를 또한 말한다. 이것과 저것, 중화와 조선, 옛날과 지금, 삶을 분절하는 수많은 이분법을 격파하면서 제3의 새로운 길을 창안하는 길, 그것이 곧 연암이 말하는 ‘사이’이고 도가 아니었을까. 이를 알자면 자연 그가 누구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의 글은 다행히 상상의 나래나 미래에 대한 기대감보다는 현실속의 진솔한 귀감으로 글 행장을 꾸렸다. 이는 나에게는 행운이다. 그에 익숙한 나 같은 수필가가 접근하기는 보다 용이하다. 더욱이내 경우 기행수필을 너덧 번 써 본 경험이 있다. 마침 『열하일기』가 다녀간 행로는 『고구려 9백 년의 자취소리』라는 글집을 꾸리며
이미 스쳐 지나간 행로이기도 하다.
이 글 집을 내는 데는 많은 분의 도움이 뒤따랐다. 인터넷의 효능이 아니었다면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이다. 제일 먼저 『열하일기』를 번역한 김혈조 교수님, 번역도 고마운데 글을 인용해도 좋다는 허락까지 쉬이 해주시니…… 그리고 『백두에서 열하까지』의 저자 이보근 선생님, 발로 뛴 노고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나는 그의 블로그의 지정 단골이었다. 그가 본 것이 곧 내 것이었다. 안방에 들어앉아 마우스를 콕콕 찍어 눌러 본다는 것이 그만 송구스러울 뿐이다. 그분은 수천 장의 사진을 언제든지 가져다가 쓰라고 했다. 아울러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연암집』과 『연행록』, 『연행일기』 등 다수의 고문서적을 번역해 주신 분들께 정말 감사의 마음 전한다. 지금도 나는 그곳의 고전 산책을 일과 중 커피 타임 때 더불어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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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부의 표해록 글을 펼치며 (추후 발간 예정)
처음부터 최부의 표해록을 쓰자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그의 행적을 보고 다음 중국여행 때 어디를 갈지 참고나 해보자하는 정도였다. 심심풀이 눈요기라 할까. 이에는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여파가 크다. 나는 이번 글 바로 전에 "조선의 꽃 열하일기"라는 책을 냈다. 연암도 열하를 다녀온 후 청나라 풍이 들었다고 한때 곤욕을 치루는데 나 역시 글이 끝났는데도 여진이 남아 후유증을 앓고 있었다.
열하일기에서 라마승을 만나보라는 황제 말을 거역하여 연행 사절이 자칫하다가는 본국으로의 귀향은 커녕 바로 귀양을 가는 것 아니냐 하는 우려를 나을 때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연암은 이왕이면 운남이나 귀주로의 귀양살이 아니면 서촉과 강남 땅을 밟는 것이라면 하는 달콤한 상상을 하는 데 나 역시도 그런 달보드레한 꿈결을 헤매고 싶었을 뿐이다. 최부가 강남을 돌았다는 정보는 익히 입수한 터라 혹여 연암이 소망하던 귀주가 껴 있는가 하는 호기심도 작용했다.
나로서는 어찌 표류를 하다가 어찌 구출된 것인지에 대해서 보다는 '어디를 거쳐서 돌아온거야.'가 더 궁금했다. 그런데 그것은 정녕 아니었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기며 어느새 나는 그의 표해의 바다속에 깊이 풍덩 빠지고 말았다. 사실 그의 글은 성종의 전지를 받고 급히 쓴 글이라 최대한 감정을 억제하고 참에 근거하여 짧게 쓴 글이라 느끼기에 따라서는 재미가 없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기에 표류를 한 과정등은 뭉뚱그려 쉬이 넘기게도 된다. 그렇지만 그는 짧지만 명확하게 사실을 표현했고 처한 상황의 한 끄트머리도 놓치지 않았다.
절제된 글로서 격을 갖추면서도 표현 정확하고 분명하기 때문 사태를 파악하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었으며 오히려 글 한자에도 음미의 가치는 수북했다. 험난한 최부와 42인 그들의 여정, 어느 한 사람도 낙오되지 않았다. 그 시대 이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표류가 되면 겁에 질려서도 억울해서도 사람은 누구나 달라진다. 죽는 게 더 쉬운 상황이다. 극단으로 치닫던 마구잡이 식 중구난방인 42인은 그로써 일치단결 하여 꿈에 그리던 조선 땅을 다시 밟았다.
글의 표해, 모음과 자음 그리고 받침이 마구 흩어져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것과도 같이 그들 42인도 아전, 곁군, 호송꾼등으로 나뉘어 표류를 거듭한다. 그런 그들은 . 모음과 자음 그리고 받침을 채워 낱말의 의미를 찾듯 종래에는 오합지졸에서 '우리는 하나다.'하는 의미를 얻으며 소생한다. 최부는 그런 과정을 짧은 단어 연결로 찬찬히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나타내었다. 진실이기 때문 과정은 눈에 바로 보이듯 선명하였고 결국은 모두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그들로부터 내가 얻은 것은 인간 삶의 소중한 가치 그리고 삶의 신뢰에 대한 것이었다.
굳센 절의, 밝은 예절, 높은 인격은 어디서부터 발원하는 것인지 이에 대해 스스로 자득할 좋은 기회가 바로 이 책이 아닐까 싶다. 최부가 돌아와서 청파역 근처에 머물며 단 8일 만에 쓴 글이라는데 나는 솔직히 믿기지가 않는다. 그는 조선문화뿐만이 아니라 중국문화에도 매우 박식하였다. 조선 선비로서 과거 급제자의 위치가 이 정도라면 하며 다시 또 놀랬다.
그는 남북의 문화적 차이, 즉 남방은 번창하고 문명적이고 북방은 가난하고 거친 시대상을 또한 정확하게 기록했다.마치 1488년 조선과 중국의 정 중앙을 관통한 화살처럼 시대를 확연하게 드러내어 실 모습을 실감나게 느낄 수 있었으며 , 때가 또 정권교체 시기 인지라 섭렵이 가능했던 많은 것들, 특히 관료들과 중국의 실상에 대한 이해는 생각지도 못한 큰 수확이었다. 그의 글을 읽다가 보니 사실 항주도 소주도 다 다녀온 곳인데 내가 본 것은 본 것이 아니라는 아득한 생각도 들었다.
왕에게 올리는 글인데다가 그가 상중이라 최대한 감정을 참고 기술한 것이라 사실 글이 딱딱하고 수필가가 접근 하기는 용이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껴들 소지가 있다는 역발상이 생겨났다. 어디까지나 상상은 자유니까 그의 빈공간을 내가 대신 채운다는 그런, 아무튼 매끄럽지는 않지만 올 곧고 정확한 그의 기술 덕분에 여정의 주제 키를 바로 찾고 그의 남겨 놓은 여지를 찾고 쫓아 나름 재미도 본 셈이다.
그런데 이 글을 쓰다 보니 참 세상 희한한 일도 다 있다. 일일이 독수리 타법으로 좌판을 구타하듯 하면서 쓰려니 갈증이 꽤 일었었다, 떠오르는 착상이 순식간에 망가지기도 하고 손도 아프고 짜증도 나고 누가 읽겠나 싶어 포기할까 생각도 했었다. 나의 아주 고약한 성미, 하나에 빠져 들면 헤어 나오지를 못한다는 조급증내지 자폐증은 나를 늘 억누르며 괴롭힌다.
이것저것 다 챙겨하려니 글 내용이 어떠하든 힘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던 차에 이글을 모처에 잘 번역해 놓은 기관이 있어서 기대할 수는 없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화를 해서 내가 이 글을 가져다 역사수필로 엮어 책을 만드는 데 이용을 하고 싶은데 복사가 안되어 그러니 도와줄 수 없겠냐고 했더니 자기네들도 그 파일을 만든 업체가 도산을 해서 없는데 뜻이 그러하다니 이번 만은 타이프를 쳐서 무료로 제공을 해주겠다고 했다.
원 세상에나. 처음에는 비싼 값을 달라고 할까 봐 '그냥 보기만 되어 있는 거군요.'하면서 끊으려 했던 것인데....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것도 2`3일내 해 준다니...와우! 그들은 타이프가 밥 먹는 것보다 쉬운가 했다. 그런데 단 이용을 한 결과물을 내야 한다고 하기에 그런다고 했다. 그 바람에 어쩔 수없이 '1488년 명과 조선을 관통한 최부의 표해' 란 의미를 담은 책을 내지 않으면 안 되는 족쇄가 채워지고 말았다.
중간에 포기할 수도 없고 일이 커졌다. 아무튼 독수리 타법이 그때부터선 한 숨 돌려 2월4일부터 시작한 글이 두 달도 채 안되어 초안을 만들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최부 선생이 내게 마술을 부린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우연히 들여다보다 필연이 되었고 이제는 운명처럼 그의 글에 매달려 미소를 짓고 있다. 왜 이렇게 좋은 글을 여직 몰랐을까 하는 미안함도 곁에 있다. 여러분들도 어느 날 우연히 이 책을 마주하기 바란다. 그러다보면 삶은 왜 성실하여야 하고 공자의 인과 예가 우리의 삶 속에서 어찌 진득하니 살아서 번성하며 삶의 신뢰는 어디서 발원하여 또 어떻게 꽃을 피우는지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와우! 고전 책이 밥 먹는 것보다 훨씬 쉽네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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