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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복음의 핵심 요소들
1. 존 맥아더 목사의 견해
복음이란 기독교 진리의 가장 크고 타협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죄인인 인간이 거룩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는지를 전하는 신성한 말씀에 한 자라도 더할 수도 뺄 수도 없으며 혹은 그 말씀을 더 화려하게 꾸미거나 재해석해서도 안된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복음을 어지럽게 하려는 자들에게 엄중히 경고했던 이유이다.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갈라디아서 1장 9절).
이제 신실한 말씀 선포에 있어서 목회자에게는 하나의 선택지만 남는다. 그리고 그것은 학자들만이 발견할 수 있는 어려운 선택지도 아니다. 사도바울은 그의 청중들이 하나의 진실된 복음과 많은 다른 거짓 복음들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 기대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분명히 요구되는 바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우리는 존 맥아더 목사에게 구원을 얻는 믿음에 대한 가장 필수적인 진리가 무엇인지 알아보고 설명해 주기를 요청했다. 바로 복음의 핵심 요소들이다.
“사람들은 말씀 선포에 있어 어떤 접근법을 가져야 하는지 궁금해 한다. 기발한 주장을 펼쳐야 하는가? 어떤 정신 조작 같은 것을 해야 하는가? 혹은 죄나 심판, 영원한 지옥과 같은 어려운 사실들은 좀 숨기고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만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까? 이 모든 질문들은 쓸모없는 것들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죽은 자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에베소서 2장에서 말하고 있는 허물과 죄 가운데 죽은 자들, 진노의 자식들, 사탄의 자식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바울이 말한 타락에 눈이 먼, 복음의 영광스러운 빛이 그들에게 비추지 않게 하는 이 세상의 신에 의해 두 번 눈이 먼 자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주장이나 어떤 사람의 마음을 조작하는 것에는 그럴만한 힘이 없다. 영적인 죽음을 뚫고 그 안에 생명을 낳게 하는 능력은 오직 하나님의 기적일 뿐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생명을 주실 수 있으며 오직 하나님만이 죽은 죄인들을 일으켜 세우실 수 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것 한 가지는 죽은 죄인들을 깨우는 것이나 어떤 것을 믿도록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이는 로마서 1장에서도 말하고 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당신은 능력이 아니며, 당신의 주장도 능력이 아니다. 복음만이 능력이다. 복음이 바로 성령께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실 때 사용하시는 것이다. 복음만을 증거 하라. 염두에 두어야 할 한 가지는 오직 명백하고 완전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령님께서 그가 원하시는 대로 그의 일을 행하실 때 사용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운명은 전적으로 이러한 복음의 요소들이 지닌 불변성에 달려있다. 이 요소들 중 하나라도 변형이 생긴다면, 영원한 삶에 대한 소망은 완전히 무너질 것이다.
만약 당신이 사람들에게 성경에 쓰인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소개한다면 당신은 아주 효과적으로 그 사람들을 우상숭배로 인도하는 것이다. 당신이 다른 그리스도를 선포한다면 당신은 주님을 모시고 있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당신은 거짓말쟁이거나 미치광이나 마찬가지이다. 만약 오직 믿음을 통한 은혜의 구원이 조금이라도 의로운 행위로 인해 그 본질이 변질된다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을 것이다” (갈라디아서 5장 2절). 만일 우리가 우리의 이전 죄들로부터 돌이키지 아니하면 우리는 멸망할 것이다 (누가복음 13장 3,5절).앞으로 며칠 동안 우리는 복음을 증명하는 핵심 요소들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 것이다. 더 나아가 그 요소들이 어떻게 간단하고 명백하며 논리적이고 신실하게 쓰인 말씀, 즉 논리 정연한 성경 말씀과 딱 맞아떨어지는지도 알아볼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하나님 안에서 의롭게 되는 방법에 대해 올바로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2. 지나치게 단순화된 복음의 위험성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전해야 그들이 구원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게 만들 수 있을까?
복음전도의 요즘 추세는 위 질문에 대해 최소주의자적(minimalist) 접근을 하는 것으로 많이 바뀌었다. 안타깝게도 복음의 핵심을 명확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정당한 욕구는 덜 유익한 노력에 무너지고 말았다. 그것은 말씀의 핵심을 가장 가능성 있는 용어로만 증류(간소화)시키는 운동이다.
바울이 이야기한대로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그리스도의 이 영광스런 복음은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진리를 포함한다. 하지만 미국의 복음전도는 복음을 “구원의 계획”으로만 여기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할 수 있는 한 가장 적은 단어들로 설명한 사실 나열방식으로 축소시켜왔고 매번 그 수가 더 적어져 간다. “하나님 안에서 평안할 수 있는 6가지 단계”, “하나님께서 당신이 알기를 원하시는 5가지”, “사영리”, “이것 없이는 살 수 없는 3가지 진실”, “삶을 살아가는 두가지 방법”, 혹은 “천국으로 가는 하나의 길” (이 특정 전도법들을 비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우리가 복음을 “구원의 계획”으로 열거하고 통합시켜 만들어내고 사용하는데 얼마나 열의를 보이는지를 관찰해본 것이다.)
또 다른 추세는, 똑같이 위험하지만, 복음전도를 대본 외우기로 바꾸는 것이다. 흔히 복음전도 훈련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일련의 문제들을 외우게 하는 것, 그리고 그 문제들이 미리 준비된 답변들이 있는 몇몇 카테고리 항목들로 이어질 수 있도록 예상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복음은 요약, 축약되거나 수축-포장 될 수 있는 메시지가 결코 아니며, 더욱이 이러한 축소화를 통해 모든 종류의 죄인들을 위한 전반적인 해결책으로 제시되어서는 안된다. 무지한 죄인에게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왜 그들의 순종을 요구할 권리가 있는 분인지를 설명해 줄 필요가 있다. 스스로 의롭다 여기는 죄인에게는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에 의해 그들의 죄가 드러나야 할 필요가 있다. 무심한 죄인에게는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의 현실성을 대면시켜줄 필요가 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죄인에게는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구제의 길을 예비하셨다는 것을 들려줄 필요가 있다. 모든 죄인은 하나님이 얼마나 완전히 거룩하신 분인지 이해해야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음과 그의 부활의 승리의 기본적인 진리를 이해해야만 한다. 또한 그리스도를 주인, 구원자로 받아들이기 위해 죄로부터 떠나야 한다는 하나님의 요구를 대면할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복음을 전했던 모든 상황에서도 – 개인사역이든 단체사역이든- 말씀을 꼭 정확하게 같은 말로 전했던 적은 없었다. 그들은 구원이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일하시는 것임을 알았다. 그들의 역할은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성령님께서 그가 선택하신 자들의 마음에 개인적으로 그 역할을 지원하신 것이다.
말씀의 형태는 경우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 내용은 항상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죄인들의 무력한 상태에 대한 현실을 납득시켜야 한다. 그러면 이는 죄인들에게 그리스도가 믿음으로 그에게 돌아오는 자들을 위해 모든 죗값을 치르신 자비로운 주권자 이심을 알려줄 것이다.
요즘 그리스도인들은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너무 많이 이야기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자주 경고를 받았다. 믿지 않는 자들과 이야기 할 때, 특정 영적인 이슈들은 금기시 되어버렸다. 하나님의 율법, 그리스도의 주인되심, 회개, 내려놓음, 순종, 심판 그리고 지옥과 같은 이슈들이 그렇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에 어떤 것도 더하지” 않도록 언급되지 않고 있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런 환원주의자적(reductionist) 복음전도를 극단으로 몰고 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Sola Fide (오직 믿음으로)라는 종교 개혁 교리를 잘못 적용시켜, 하나님 앞에 그들의 의무에 대해 비 기독교인들과 이야기 할 때는 오직 믿음만을 허용되는 주제로 내세운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추상적인 측면만 남겨두고 모든 것들을 벗겨내면서 믿음을 완전히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린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복음의 순도를 지키는 것이라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이 진짜 이룬 것은 구원의 말씀이 가지고 있는 힘을 약화시킨 것뿐이다.
이는 교회가 가짜 개종자들로 붐비게 만들었다. 그들의 믿음은 위조됐으며 그들의 희망은 거짓 약속에 달려있다. 그들은 생각 없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였다”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가 정당히 주인되심을 주장하는 것에는 뻔뻔하게 거절한다. 그들은 입에 발린 소리를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완전히 주님을 멸시한다 (마가복음 7:6). 아무 생각 없이 그들의 입으로 주를 단언하지만 그들의 행동을 통해 의도적으로 주님을 부인한다 (디도서 1:16). 그를 피상적으로 “주여, 주여”하고 부르지만, 그의 명령을 행하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한다 (누가복음 6:46). 이런 이들은 마태복음 7장 22-23절에 “많은 사람”이라 쓰인 이 비극적인 표현에 들어맞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언젠가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만약 복음전도를 위한 대화에 대한 간단한 서술이 없다면 복음전도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무엇을 말해야 하는 걸까? 가능한 정확하게 복음을 분명히 설명한다면, 어떤 부분들을 명확하게 짚어야 하는 걸까? 앞으로 우리는 죄인들에게 구원의 길에 대해 정확하게 이야기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필수적인 요소들을 살펴볼 것이다. 그 요소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 인간의 타락, 그리스도의 일하심, 그리고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요구하시는 것들이다. 이것들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받아들이고 그의 증인으로서 숙달해야 할 진리들이다.
3.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다- 전도도 마찬가지다
태초에 하나님이… (창1:1)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님 스스로에 대한 것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가장 먼저 다루어야 하는 부분이다.
이는 하나님의 성격이나 특성에 관한 완벽한 담론이나 하나님의 무한한 속성에 대해 360도로 연구하는 것이 복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의 전제조건이라는 말이 아니다. 성령님이 조명하시는 마음으로도 하나님의 그 충만함을 헤아릴 수 없는데, 죄로 어두워진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는 걸 얼마나 예측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먼저 이 세상에 전반적으로 지배된 하나님에 대한 거짓된 생각과 우상 숭배적인 생각들을 불식시키지 않고서는 복음을 정확하게 제시할 수 없다. 오늘날 사람들은 분별없이 자신의 감상에 젖은 상태 혹은 영적인 기호대로만 하나님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그런 대중적인 운동들은 중력의 법칙을 다시 쓰거나 중력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것과 같은 헛된 수고일 뿐이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사 57:15) 변치 않으시며 (말 3:6) 우리가 우리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숭배하길 원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성경 말씀에서 하나님 자신을 스스로 진리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시고 정의하신다. 그는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외에 신이 없느니라”(사 45:5)라고 말씀하셨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은 그 하나이신 진리의 하나님이 구별된 세 인격으로 영원히 존재하신다고 계시하고 있다.
삼위일체
삼위일체에 관한 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기는 불가능하지만 존 맥아더 목사는 성경 말씀은 이 주제에 대해 명확하고 타협 불가능한 모습을 보인다고 밝혔다:
비록 삼위일체의 충만함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자신 스스로를 성경 말씀에서 어떻게 밝히셨는지는 의심의 여지가 없이 분명하다. 세 인격으로 영원히 존재하시는 한 하나님이시다.
성경 말씀은 이 세 인격이 함께 하나이시며 오직 하나인 여호와이심을(신 6:4) 명확히 하고 있다. 요한복음 10장 30절과 33절은 성부와 성자가 하나이심을 설명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은 성부와 성령이 하나이심을 보여주고 있다. 로마서 8장 9절은 성부와 성령이 하나이심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리고 요한복음 14장 16, 18, 23절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임을 입증하고 있다. 다시 말해 성경은 하나님은 (세 분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시지만 그 한 하나님은 세 인격이심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1]
하나님이 신실하게 선포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삼위일체로 소개되어야 한다. 게다가 삼위일체는 복음 전도 영역에 있어서 아주 크고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왜냐하면 각 세 인격이 죄인 구원에 있어 각기 다른 역할을 하시기 때문이다. 성부는 택하시고 (엡 1:3-6) 성자는 구속하시고(엡 1:7-12) 그리고 성령은 책망하시고 (요 16:8) 새롭게 하시고 (딛 3:5) 믿는 자들 안에 거하시는 분 (엡 1:13-14)이시다.
창조주 그리고 심판자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인간을 포함한 모든 만물의 창조주(창세기 1장)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에 대한 주권을 정당하게 주장하시고(시 50:10-12) 우리와 그의 피조물로부터 예배받으시길 원한다(출 20:2-5; 마 4:10).
하지만 타락한 인간은 반항적으로 창조주를 예배하기를 거부해왔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열린 교제가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적개심으로 인해 막혀버렸다 (시 5:5). 하나님의 죄인들을 향한 타당한 분노는 현대 감성에는 불쾌한 주제일지 몰라도 우리 세대의 영적인 안주함을 깨우기 위한 꼭 필요한 진리이다.
하나님의 성격이나 특성이 무궁무진한 주제이긴 하지만 전도자는 죄인들의 가슴에 하나님 지상주의, 하나님의 통치하심에 대한 것들을 심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전도자는 반드시 왜 죄인들이 하나님의 재판장에 있는 그들의 미래의 모습을 생각하며 떨어야 하는지를 설명해 주어야 한다 (히 9:27). 존 맥아더 목사는 현 전도의 트렌드가 이와 반대로 흘러가는 것에 대해 애통해하고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 (시 111:10). 현대 복음 전도의 상당수는 죄인들의 마음에 다른 것들은 다 불러일으키려 하면서도 하나님의 경외하는 것만 하지 않고 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는 문장은 오늘날 많이 쓰이는 전형적인 복음 전도의 도입부이다. 이런 복음 전도는 경외 받으셔야만 하는 하나님의 이미지로부터 많이 떨어져 있다. 이런 생각에 대한 해결책은 바로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성경적인 진리이다.[2]
거룩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속성에 관련한 말씀 중 가장 강력한 최상의 속성은 “거룩, 거룩, 거룩” (사 6:3)이라고 말한다. 폴 워셔(Paul Washer)는 하나님의 거룩함은 “많은 속성 중 단지 한 속성일 뿐이 아니라 정의되고 이해되는 다른 모든 속성을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이다”라고 지목했다. [3] (주석 3) 우리가 복음 전도적인 측면에서 강조하는 하나님의 거룩함은 사랑, 자비, 은혜와 같은 그의 다른 속성들을 없앤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다른 속성들은 그 심오한 뜻을 하나님의 거룩함이라는 맥락을 통해 발견할 수 있다.
“거룩”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까도쉬(qadosh)에서 번역이 되었는데 이는 하나님의 색다름을 나타낸다. 창조주로서 그는 자기 피조물을 초월하며 그가 만든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히 구별된다. 크기나 화려함과 상관없이 그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의 완벽함에 아주 조금이라도 다가갈 수 없다.
이 우주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가 거룩하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죄성으로 인해 하나님의 모든 것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거룩한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의 병렬상태보다 우리의 필요를 입증하는 더 큰 이분법은 없다. 존 맥아더 목사는 이 깊은 격차의 심각한 결과에 대해 언급했다:
하나님은 완전하게 거룩하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은 완벽한 거룩함을 요구한다: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레 11:44-45)… 복음조차도 하나님의 거룩함을 요구한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벧전 1:16).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히 12:14).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는 죄를 싫어하신다. [4]
하나님을 그의 자리에 모시는 것
복음이라는 측면에서 믿는 자들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면 우리는 보통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강조한다. 사랑과 자비가 복음을 엮어내는데 아주 필수적인 속성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의 삼위일체 특성과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하심 그리고 그의 거룩함을 등한시하는 실수를 범해서는 절대 안 될 것이다. 그리하는 것은 인본주의 복음을 선포하는 결과를 주로 가져온다. 인본주의 복음이란 하나님을 그날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 순간에 갑자기 등장하는 영웅보다 조금 나은 존재 정도로만 묘사하는 것이다.
진실은 바로 죄인들은 하나님의 십자선(.(망원경 따위의 초점에 새겨진) 십자선(시선을 모으는 데 유용하다)에 서 있다는 것이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그들이 위반해온 것은 하나님의 율법이다. 하나님만이 구원자이시다. 왜냐하면 죄인들은 어떤 이로부터 구원받아야 하는데 “그는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는”(출 34:7) 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복음의 중심에 놓을 때 우리는 인간의 죄의 범법행위와 죄책감의 깊이에 관한 명확한 관점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다음 시간에 다룰 부분이다.
4. 인간에 대한 진실을 말하라
진화론에서 사람을 보는 시각은 근본적으로 두가지 측면에서 잘못되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박사는 1970년,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사람에 대한 현대 관점을 두가지 근거로 비판하고자 한다. 하나는 인간을 너무 과대평가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을 너무 과소 평가했다는 것이다.”
존스 박사의 논점은 진화론자들이 강력하게 부인하는 성경의 두가지 진리와 관련 되어 있다. 진화론자들은 인간을 “그저 동물”로만 인식하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역으로 일상 속 세상적인 지혜는 인간을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존재라 말하면서 아프지만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 즉 모든 사람들이 태생적으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짐 (Made in God’s Image)
성경은 인류를 생존싸움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동물의 한 종류로만 보지 않는다는 것을 명백하게 나타내고 있다. 말씀은 하나님이 사람을 그의 피조물 중 최고로 만드셨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1:26-28)
인간의 존재는 무의미하지도 않고, 무작위적이지도 않다. 우리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만드신 세상을 다스리도록 설계되었다. 사람, 즉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자로서 우리는 신성한 사명을 짊어지고 있다. 이는 바로 우리를 동물의 왕국에서 완벽하게 분리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이 정확히 무슨 뜻일까?
“이매고 다이 (imago Dei) –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매우 중요한 신학적 주제이다. 그것은 복음전도에 중요한 하나의 본질적인 진리를 포함하고 있는데 바로 사람은 도덕적 피조물이며 하나님께 그 도덕성을 해명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 (James Montgomery Boice)는 그 중대한 암시를 강조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음의 한 요소는 도덕성이다. 도덕성은 자유와 책임이라는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확실히 말해, 남자와 여자가 가지고 있는 자유는 절대적이지 않다. 태초에 처음 지어진 남자 아담과 여자 이브도 자율적이진 않았다. 그들은 피조물이었고 그들의 복종함으로 인해 그들의 지위를 인정할 책임이 있었다. [1]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중대한 책임을 깨닫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 안에 내재된 도덕성은 우리의 도덕을 보장하진 않는다. 오히려 그 도덕성은 도덕적으로 행동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유죄를 선고한다. 옳고 그름에 관한 우리의 지식과 우리가 계속적으로 그 도덕성을 위반한다는 사실은 아담의 타락이라는 역사적 실제성을 나타낸다.
타락 (Fallen)
우리는 우리가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인가, 아니면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가? 이 질문에 어찌 대답할 지에 대해 주의해야할 필요가 있다 – 말 장난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한가지 답이 성경적으로 맞는 답이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타락하였을 때 그의 죄가 그의 모든 후손들의 본성으로 전해져 내려오게 되었다. 우리의 죄가 우리를 죄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죄는 우리의 죄인 된 본성을 잘 보여준다. 존 맥아더 목사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죄 때문에 이 죄책감이 드는 상태로 추락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 같이” (롬 5:19). 이것은 원죄의 교리로서 바울이 로마서 5장 12-19절에서 상세하게 설명한 진리이다. 우리는 매순간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아담의 반란에 공모하고자하는 우리의 의지를 증명하곤 한다. 또한 예수님 외에 결백한 삶을 산 자가 없기에 원죄에 대해 의심을 하거나 그것이 공정하지 않다고 여길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2
원죄는 경험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성경적 진리이다. 성경은 모두가 죄인이라고 말하면서 (롬 3:23), 이미 우리가 삶속에서 경험한 것들의 집합이 이미 무엇을 증명하는 지를 강조한다. 원죄는 우리가 국제적인 전쟁을 치르는 것에서부터 마음의 문을 닫는 것까지 우리가 이 모든 것을 겪게 된 이유이다. 이것이 사람들이 병들고 죽는 이유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죽는 이유인 것이다! 더 이상 이러한 현실과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처음으로 반항한 결과로부터 도망칠 곳은 없다. 또한 우리가 우리 스스로 그 이후에 공모한 죄로부터 피할 방법은 없다.
죄책감 그리고 변명의 여지 없음 (Guilty and Without Excuse)
인간이 창조주에게 영광을 돌리고 그에게 순종하는 데 실패한 것은 인간의 측면에서 봤을 때 절대 인간의 무지함 때문이 아니다. 혹은 하나님의 측면에서 보아도 그의 증거의 부족함 때문도 아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인간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롬 1:20).
우리가 죄인들에게 성경의 하나님을 선포할 때, 우리는 그들의 신학적 지식의 부족함을 대상으로 사역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이 본능적으로 이미 알고있는 것으로 가득한 진리를 전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죄인들이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모르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그들은 “불의로” 진리를 막는다(롬 1:18)고 말하고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사람의 첫번째 문제는 교육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항상 죄를 사랑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롬 1:21). 하나님은 죄인 된 인간이 하나님께 올바로 예배하지 않는 것에 대해 책임을 물으신다.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을 실패한 것에 대해 심판에 날에 그 책임을 물을 것이다 (히 9:27).
그 심판은 우리의 모든 행위와 (계 20:11-12) 언행과 (마 12:36-37) 생각 까지 (마 5:27-28; 고전 4:5) 그 대상이 될 것이다. 심판에 날에는 그 어디에도 도망칠 곳이 없을 것이며 그 어떤 것도 숨겨질 것이 없을 것이다.
경고 vs 구애 (Warning vs Wooing)
신실한 전도자는 절대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을 위로하지 않는다. 대신에 우리는 그들에게 경고하는 존재이다. 우리는 반드시 죄인들이 객관적인 의의 기준을 마주하게 함으로써 죄의 순전한 지독함과 무례함을 폭로해야 한다. 죄는 성경적으로 불법으로 정의되기 때문에 존 맥아더 목사는 죄를 드러낼 때 하나님의 율법을 사용하는 것을 지지한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복음 선포에 있어 율법 사용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은 율법이 우리의 죄를 드러낸다는 것(롬 3:20)을 알았고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임(갈 3:24)을 알았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이 그들의 무력함을 보도록 사용하신 방법이다. 명백하게 바울은 복음전도라는 측면에서 율법의 역할을 잘 찾아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율법을 거룩과 순종에 대해 융통성이 없는 부분에 있어서 이는 한편으로 복음과 대조적이며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고 여긴다.
우리는 성경에서도 하지 않는 이런 구별을 왜 하고 있는 것인가? 만약 성경이 회개, 순종, 의로움 혹은 심판을 믿지않는 자들에게 전하는 것을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면 그것이 바르게 구별한 것일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경고를 담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만약 우리가 성경적인 모델을 따르고 싶다면 우리는 죄, 의로움, 심판을 무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들이 성령께서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책망하시는 중요한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요 16:8). 이것들을 뺀 메시지를 우리는 과연 복음이라 부를 수 있을까?[3]
어떤 사람들은 사람의 죄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어쩌면 더 듣기 좋고 구미에 맞는 생각일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죄성에서 그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8). 죄를 선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 없게 만들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목적없이 만드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신실하게 복음을 선포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영광의 빛이 인간의 죄로 인한 어둠에 밝게 빛나도록 해야 한다. 무엇이 문제인지가 먼저 설명되지 않으면 십자가는 결코 그 해결책으로 이해될 수 없다. 그리고 궁극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인간의 죄성 사이에서 아주 극명한 차이로 생생하게 존재한다. 우리가 이 두 진실을 양극화시킬수록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더 잘 알수 있을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 다음 장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5. 십자가가 답이다?
“Jesus Is the Answer (예수가 답이다.)”라는 노래는 예전부터 항상 나를 거스르게 하는 한 가지가 있었다. 바로 그 해답에 대한 문제가 무엇인지는 전혀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양한 방면에서,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안드레 크라우치 (Andrae Crouch)의 성가는 현대 복음 전략의 상징이기도 하다. 하지만 동시에 복음을 전하는 이가 십자가를 전하는 데 급급한 나머지 세부 전제조건들을 도외시하고 넘어가는 지점이기도 하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이 접근법은 믿지 않는 이들이 왜 예수가 살고, 죽고, 부활해야만 했는지를 스스로 알아내도록 내버려 둔다는 점에서 헷갈리게만 만드는 접근법이다. 나쁘게 생각해보자면 이것은 굉장히 위험하다. 특히 믿지 않는 자들이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가 불행, 어려움, 피해 의식이라고 생각할 때 그러하다. 만약 죄인들이 십자가를 그저 한시적인 문제들의 해결책으로만 이해한다면 그들은 복음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그리스도’를 성경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복음의 가장 근본적인 것이지만 복음을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하나님의 완전하신 거룩함과 죄성을 가진 인간의 완전한 타락을 먼저 이해하지 않고는 인간과 예수님의 구속사는 말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지금까지 이 시리즈가 진행되면서 이 신념이 어떻게 확증되어왔는지를 봤을 것이다. 죄인이 하나님의 거룩함과 인간의 죄 사이의 깊고 무한한 골을 인정하지 않는 한, 그는 그리스도를 통해 얻는 구원이 그에게 정말 필요한 것인지 제대로 알 수 없다. 힘 있는 복음 전도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 그들을 깨우는 엄청난 무게의 진실을 알려주고 구원자를 목놓아 부르도록 만든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본인의 죄를 이해하지 못하는 죄인에게는 의미가 없다. 한시적인 재판에 대한 해결책이나 이 세상을 돌보는 분으로 예수님을 너무 빨리 소개하는 것보다 그가 그의 죄와 반항의 영원한 죗값을 발견하고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라고 고백했던 예수님 옆 십자가에 못 박혀있던 강도가 가졌던 믿음을 알려 줄 필요가 있다.
십자가 강도와 같은 사람이 바로 예수님과 그의 삶, 죽음, 부활에 대한 영원한 가치에 대해 들을 준비가 된 영혼이다.
대신 사는 삶 (A Substitutionary Life)
당신은 왜 우리의 구세주께서 우리의 죄를 속죄하시기 전 33년의 시간 동안 이 세상에서 살아가셨는지 궁금해한 적이 있는가? 왜 이 땅에 오시자마자 십자가로 직행하지 않으셨던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갈라디아서 4장 3~5절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어린아이일 동안에 세상의 기본적인 것들에 속박당하게 된다. 하지만 때가 이르러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시면서 그를 여자를 통해 나게 하셨고 율법에 속하여 태어나게 하셨다. 그래서 그가 율법에 속한 자들을 구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가 “율법 아래에 태어난 것”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존 맥아더 목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인간으로만 온 것일 뿐만 아니라 “율법에 속한 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율법에 속한 자로 태어나셨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설명한 것처럼 말이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의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3-4).
다른 모든 인간들처럼, 예수님께서도 율법 아래에서 태어나셨다. 다른 모든 유대인처럼, 예수님도 구약에 쓰여진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판단 받고 율법을 순종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유대인들과는 다르게 율법에 순종하며 완전한 삶을 사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셨다. 그리고 그가 완벽한 순종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율법 아래에 있지만 율법을 따르지 않던 다른 모든 사람들(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을 구원할 수 있게 되었다.[1]
신약 성경은 구약의 언약의 율법을 실패하고 방치된 것으로 두지 않는다. 하나님의 율법 – 그의 의로운 기준과 명령들 – 은 우리의 죄책감을 드러내고 동시에 우리에게 무언가 특별한 새로운 의로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아담의 죄가 그의 모든 후손들의 죄를 대표했듯이 그리스도의 의로운 삶도 그가 선택한 모든 이들의 삶을 대표하는 것이다 (마 5:17).
갈보리 언덕을 오르기까지 그리스도의 일생의 사명은 그의 죄 많은 사람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셨고 (마 3:15)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러 왔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로운 인생은 그가 대변하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적용된다. 죄의 대가를 완전하게 지불하는 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범한 엄청난 죄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고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일어난 것이다.
대신 죽는 죽음 (A Substitutionary Death)
갈보리 언덕에서 이루어진 거래를 가장 잘 압축한 말씀 구절은 고린도전서 5장 21절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존 맥아더 목사는 이 말씀구절에서 심오하고 풍성한 가치들을 도출해 냈다.
하나님이 믿는 자들의 죄를 그리스도에게 덮어씌우고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그들에게 덮어씌우는 것의 이점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진다는 점이다. 그들은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그들이]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빌 3:9).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받아들이시기 위해 죄인들에게 요구하신 최고의 의로움(the very righteousness)은 바로 하나님 스스로 우리들에게 제공하신 최고의 의로움이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마치 우리 모두의 죄를 예수님께서 범한 것처럼 대하셨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마치 우리가 순전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산 것 같이 대하실 수 있게 되었다.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을 사신 것처럼, 우리의 지극히 부당한 삶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합법적으로 책임을 지셨고, 마치 우리가 그의 삶을 산 것처럼, 그의 의로운 삶은 우리에게 씌어졌다. 이것이 바로 의의 전가(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가 주님의 의로 덧입혀짐)를 통한 ‘칭의’이며 복음의 핵심이다. 이 말씀 구절(고후 5:21)에 쓰인 가장 간결하고 가장 힘 있는 이 진리야말로 죄의 전염병으로부터 우리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치료법이다. [2]
속죄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은 타협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죄인들을 향한 그 넘치는 인자하심이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었다. 갈보리 사건은 절대로 하나님이 첫 번째 실패 후에 한 번 해보는 두 번째 시도 같은 것(a mulligan)이 아니다. 하나님은 절대 우리의 죄를 모른 척하거나 혹은 너그러이 관대하게 용서하시지 않으신다. 죄에 대한 대가를 마땅히 치루여야만 하나님께서는 그 노여움을 푸신다.
우리는 십자가가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절대 잊으면 안 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노여움은 대속제물로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매달리시고 고난을 겪으심으로 해결되었다 .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 3:26). 이로써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는 죄인들에게 그의 공의로우심을 어기지 않으면서도 그의 자비를 베풀 수 있게 되셨다.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는 그의 대속제물로 인해 풀렸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신 분이시며 동시에 자비로운 분이시다.
약속된 부활 (A Guaranteed Ressurrection)
구원의 역사가 십자가에서 그 절정을 달했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선포되지 않은 복음 전도는 빈 껍데기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며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고전 15:12-14)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전하는 것도 다 헛것이며 우리의 영생도 이미 끝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미래의 부활도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 사실 여부에 달린 것이기 때문이다.
부활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은 회개하고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모든 이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롬 4:25)라고 설명하면서 믿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이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의 죗값을 치른 것으로 만족하셨다는 증거라고 다시 한번 깨닫게 하였다. 부활은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그 사람이라는 것을 압축하여 나타낸 하나님의 선포이다. (롬 1:4). 이 선포, 즉,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가 훗날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고전 15:20-23)
존 맥아더 목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는 말씀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아담이 사망하는 모든 이들 곧 죽음의 조상이 된 것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죽음에서 부활하여 영생을 얻는 부활의 조상이 되신 것이다. 두 사건 모두, 한 사람이 행한 한 행동으로 인해 그와 밀접한 관계를 맺은 다른 모든 사람에게 그 행동으로 인한 결과가 적용되었다. 그리스도와 밀접한 관계를 맺은 모든 이들은 그리스도의 의로운 행동으로 인하여 영생을 얻는 부활의 대상이다.[3]
그리스도 전파 (Preaching Christ)
안드레 크라우치(Andrae Crouch)가 말한 ‘예수가 답이다’라는 말은 정말 맞는 말이다. 하지만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 죄인들에게 이 해결책을 제시하기 전에 먼저 알맞은 질문을 통해 그들을 도와야 한다. 그리스도는 죄인들이 하나님의 분노가 어떤 것인지 알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고 그 구원자를 찾을 때 전해져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과 이 땅에서 행하신 그의 사역을 전할 때 세가지 모든 측면을 다 전해야 한다. 첫째, 죄인들이 범한 율법을 대속제물로서 완성하신 것. 둘째, 죄인들에게 합당한 벌을 대신 받으신 것. 셋째, 부활, 그 문자 그대로 살아나심으로써 우리의 육신의 부활을 확증하신 것.
하지만 그리스도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 이 깊은 영생의 비밀을 모든 죄인들이 다 경험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이루신 이 모든 일은 전해진 것을 들은 모든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바라시는 것은 무엇일까? 죄인들은 어떻게 이 복음에 반응해야 할까? 짧게 말하자면 죄로부터 돌이키는 회개와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필요하다. 다음 글에서는 복음의 요구사항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6. 회개와 믿음
믿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완전한 거룩하심 앞에서 떨려야 한다. 그들의 죄의 실상은 그들을 두렵고 아프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그들의 마음의 중심을 찔러야 한다.
성경의 진리는 죄인들의 마음에 절망적인 질문들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오순절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괴로워했던 사람들을 괴롭혔던 질문들과도 같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 2:37).
복음의 진리는 죄인들의 응답을 요구한다. 수동적으로 무관심하게 반응은 선택 사항이 아니다. 불신자들의 반응은 복음의 진리를 부인하고 반항적인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거나 그리스도안에서 발견한 구원 진리를 간절한 마음으로 필사적으로 바라는 것, 둘 중 하나이다.
그리고 복음의 진리를 아는 것만큼이나 필수적인 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대로 복음의 진리에 반응해야 한다는 것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복음의 진리 안에 있는 다른 여러 부분들의 세부적인 사항들에 대해 헷갈려하는 것은 이 시대에 교회가 전도 활동에 아주 커다란 방해물이 된다.
성경 말씀은 통로를 걷어 나와 예수님을 믿겠다고 헌신하는 방법이라던가, 전도자가 기도하는 대로 따라하는 기도문이라던가 새신자 카드에 세례를 받겠다고 사인을 해야하는 가 등의 방법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독립적인 일에 대한 것이나 하물며 구원의 확신에 대한 감정적인 결단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거듭나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결정하고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내용은 성경이 말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죄인들이 자신을 받아들이기를 바라고 기다리며 죄인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게 아니다. 그분은 죄 속에 갇혀 있는 인간의 허락이 필요하신 분이 아니다 – 사실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그리스도의 허락이다.
사실, 복음이 성경말씀을 통해 죄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아주 단순하고 간단 명료한 명령이다 – 바로 회개하고 믿는 것. 만일 우리가 신실하고 명확하게 복음을 전파한다면, 죄인들을 향한 우리의 메시지는 그리스도를 믿고 그들의 죄를 회개하라는 것에서 끝날 것이다.
믿음 (Faith)
진정한 구원의 믿음은 죄인이 그의 가망없는 상태를 깨닫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분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그리스도를 자신의 의로 믿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의 희생이 자신을 죄를 대신한 대속제물인 된 것을 믿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복음에 대하여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롬 1:16)이라고 언급했다. 이 말씀구절에 대하여 존 맥아더 목사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구원은 단순히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공언한다거나 세례를 받는 것, 도덕적인 교화, 교회에 출석하는 것, 성찬에 참여하는 것, 자기 절제나 자기 희생적인 삶을 사는 것뿐만이 아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 구원자로 믿는 것이다. 구원은 자기 자신의 선함과 행함과 지식과 지혜를 포기하고 온전하고 완벽하신 그리스도의 행함을 믿음으로 얻는 것이다.[1]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 죄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 8-9절에서 이를 아주 분명히 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하나님은 구원의 방법을 제공하셨을 뿐 아니라 구원을 얻는 능력을 그의 아들을 믿는 믿음을 통해 얻을 수 있도록 하셨다.
대속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부르심은 신약에 기록된 사도들의 선포를 통해 잘 나타난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의 고위 지도자이자 선생이었던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실 때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라고 하셨다. 빌립보 간수가 바울과 실라에게 떨며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물었을 때, 그들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0-31)고 답하였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를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 3:26)고 기록하였다. 요한이 그의 복음서를 기록한 이유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요 20:31)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하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없이는 구원은 불가능하다. 베드로와 요한이 산헤드린 공회에서 선포했듯이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
회개 (Repentance)
복음서적인 측면에서 진정한 구원의 믿음과 단순히 머리로 찬성하는 것을 구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믿음은 단순히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의존하는 것인데 이는 성도의 삶속에서 회개의 형태로 증거된다.
성경말씀은 종종 믿음과 회개를 나란히 언급한다. 그리고 믿음과 회개는 성도의 삶속에서 서로 일치되어 나타난다. 회개를 통해 죄로부터 돌이키는 것은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돌아올 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동시에 믿음과 회개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존재한다. 존 맥아더 목사는 그의 저서 ‘주님 없는 복음 (The Gospel According to Jesus)’에서 회개를 단순히 믿음의 다른 말로 치부해버리면 안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회개”는 그리스어로 메타노이아(metanoia)이다. 문자 그대로는 “나중에 생각한 것” 혹은 “마음을 바꾼 것”이라는 뜻이지만 성경적으로는 거기서 끝이 아니다. 메타노이아라는 말은 신약에 쓰여있는데 이는 항상 목적의 변화, 특히 죄로부터 돌이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에 따르면 회개는 이전 생활을 부인하고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요구한다.
목적의 변화라고 하는 것은 바울이 데살로니아 교인들에게 회개에 대해 설명할 때 가지고 있었던생각과 동일하다: “너희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살전 1:9).[2]
성경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죄로부터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부르심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죄로 가득한 반항의 영원한 결과에 대해 이렇게 경고 하셨다.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13:5). 바울은 아레오바고에서 서서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회개할 것을 경고하며 그의 설교를 마쳤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행 17:30-31).
어떤 사람들은 죄인들에게 회개하라고 하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에 부가적인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하다. 진정한 회개는 돌이키지 않은 영혼이 스스로 발휘할 수 없다. 믿음과 마찬가지로 회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참조, 행 11:18, 딤후 2:25)
회개하는 믿음(Repentant Faith)
성경적인 복음전도자들에게 믿음과 회개의 필수적인 관계를 이해하고 분명하게 전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특히 현 시대의 신학적인 배경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복음을 쉬운 믿음과 값싼 은혜로 전하는 사람들이 있어왔다. 이들은 개종의 한 부분으로 회개를 요구하지 않는다. 요즘 교회에는 이 가짜 복음이 판을 치고 있다. 이 가짜 복음은 순종, 거룩, 성화에 대해 관심도 없는 사람들에게 거짓된 믿음의 확신만 심어주고 있다. 회개를 분리시킨 이런 비성경적인 믿음의 개념은 이런 거짓된 믿음을 믿음으로써 기만당한 남녀모두를 지옥으로 처참히 이끄는 아주 터무니 없는 것이다.
존 맥아더 목사는 그의 저서 ‘주님 없는 복음 (The Gospel According to Jesus)’에서 참된 믿음과 회개의 상호작용적인 특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아주 분명하게도 믿음에 대한 성경적인 개념은 반드시 순종으로 이어진다. 요한복음 3장 36절을살펴보면 “아들은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라고 되어있는데 여기서 “믿음”은 “순종”과 동의어로 취급됨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정 6장 7절을 살펴보면 초대교회에서 구원이 어떻게 이해되었는지 알 수 있다. “허다한…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순종은 히브리서 5장 9절에도 나타나듯이 구원하는 믿음과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어있다: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순종은 참된 믿음의 불가피한 징표이다. 바울은 디도에게 편지를 쓸 때 이를 깨달았다.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딛 1:15-16). 바울에게는 그들의 지속적인 불순종이 그들의 믿음 없음을 증거하는 바가 되었다. 그들이 하나님을 선포하는 말보다 그들이 하나님을 부인하는 행동들이 더 크게 나타났다. 이것이 바로 불신앙, 믿음 없음의 특징이다. 왜냐하면 참된 믿음은 항상 의로운 행위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자들이 좋아했던 말처럼 우리는 오직 믿음의 의해 의롭다함을 얻지만 의로운 믿음은 절대 믿음 한가지로만 나타나지 않는다.[3]
성경적인 증거는 매우 분명하다. 복음의 부르심은 회개와 믿음의 부르심이다. 당신은 다른 한가지 없이 한 쪽만 가질 수 없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께서 힘을 주시지 않고는 회개와 믿음 이 두가지 반응을 당신 스스로 행할 수 없다.
우리가 구원의 메시지를 신실하게 전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대조되는 인간의 타락에 대한 문제를 확고히 해야한다. 우리는 인간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의 부활을 전함으로써 그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소개해야한다. 여기서 포인트는 우리는 회개하고 믿을 것을 권할 뿐 나머지 기적과도 같은 회심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에 맡기는 것이다.
7. 당신의 믿음을 전하지 마라
우리의 포스트모더니즘 문화는 성경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에 이를 갈고 있다. 그들의 주권주의와 상대주의에 대한 열정과 헌신은 배타적이고, 편협하고, 타협불가능한 진리를 주장하는 종교를 수용할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 예수님께서는 그와 동일하게 미움 받을 것을 알고 있으라고 말씀하셨다 (요 15:18).
더 나아가서 성경은 세상과 벗 되는 것(약 4:4) 혹은 이 세대를 본받는 것(롬 12:2)에 대해서도 경고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말하기는 쉬워도 실제로 지켜 행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수도승처럼 되지는 않으면서도 구별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 세상 가운데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는 않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우리에 사역지에서 살아갈 때 비기독교적인 문화와 연결되지 않고 살아갈 수가 없다.
대부분 우리들에게 우리의 친구들이나 가족들, 동료들에 대해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생각에 빠져있는 것을 피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영역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 우리들에게 우리의 친구들이나 가족들, 동료들에 대해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생각에 빠져있는 것을 피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영역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당신의 믿음을 전하라”는 말은 이제 전도와 관련해서 토착어처럼 아주 뿌리 박힌 표현이 되었다. 필자를 포함한 우리 대부분은 이 말을 우리 전도 대상(시합)의 동의어처럼 쓰고 있다. 하지만 이 세 단어 “당신의 믿음을 전하라”는 말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주권주의 냄새가 너무 강하게 난다 – 존 맥아더 목사가 놓치지 않은 한가지 부분이다:
당신의 믿음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나누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 ‘내 믿음은 내 믿음 일뿐 그냥 당신과 한번 나눠보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사고방식에 대처하는 영리한 접근법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것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믿음, 기독교의 믿음, 진리를 설명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가장 좋은 예시는 바로 그의 사역을 통해 진리를 나타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께서는 가차없이 끈질기게 진리에 전념하셨다. 그분께서는 모든 상황에서 완벽하게 진리를 말씀하셨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진리를 받아들이고 본인의 실수들을 거부하거나 아니면 그 실수들을 버리지 않고 단단히 붙잡고 예수님을 증오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들은 그들을 향한 공격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그들이 생각한 것과 같이 그것은 공격이었다.
우리는 나누는 것이 아니라 “선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의 믿음이 아니라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유 1:3)이다. 바로 하나님의 복음이다.
필자는 기독교 복음이 필자 개인의 경험을 초월하여 실재하는 역사적인 사실에 기초한다는 것, 또한 하나님의 창조, 인간의 타락,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 유효하다는 것이 참 감사하고 기쁘다. 필자는 그리스도인들이 본인의 개인적인 경험에 의존하여 다른 종교나 다른 세계관과 헛되이 싸우는 고통 가운에 있는 것을 보아왔다. 결국 그런 것들은 끝이 없이 자신의 이기적인 생각에 고립되어 상황이 빠르게 악화시키고 만다.
성경적인 복음의 진리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기록하신 간증을 통해 인간들이 만들어낸 모든 장벽을 무너뜨린다. 이는 우리의 개인적인 설득 기술이나 힘에 달린 것이 아니다. 이는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롬 1:16).
너무 많은 사기꾼들 (Imposters Abound)
“하나님의 권능”을 자신들의 생각이나 안건들로 대체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적지 않게 남아있다. 번영 복음은 사람들에게 물질적인 풍성함을 제공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로 유혹한다. 로마 카톨릭의 복음도 구원을 종교적인 테두리와 인간의 노력을 통해 얻는 것으로 제시한다. 구도자에게 너무 초점이 맞춰진 복음은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들 – 하나님을 찾는 자(롬3:11)의 시선을 끌기 위한 자신들의 능력에 좌지우지된다.
한편, 사회적 복음의 지지자들은 세상에 창궐하고 있는 죄를 구제하는 해결책으로 자선사업이나 사회적인 명분들을 제시하고 이를 옹호한다.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필자는 최근 영향력 있는 교단이 한 정치적인 부분에 대한 글을 올렸다는 트위터 알람을 받았다. 그 글은 이렇게 쓰여있었다: “우리가 다른 나라에서 우리 나라로 온 사람들을 환영해줄 때 우리는 지상명령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것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는 아주 뻔뻔스러운 거짓말이다! 지상명령은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마태복음 28장19절) 라고 명령하신 것이지, 국경 근처에다가 ‘어서오십시오’ 하는 발판을 깔아 놓으라는 것이 아니다.
자선 사업은 복음을 좀더 꾸며주는 일이지 자선 사업 자체가 복음을 대체할 수 는 없다. 다른 형용사들이 복음을 침해할 때 (예- 사회적 복음, 번영 복음, 등), 이는 제대로 된 복음이 없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성공 측정하기 (Measuring Success)
전도자로서의 우리의 가치는 우리가 전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메시지를 얼마나 성실하게 전하는 가에 의해 측정될 수 있다. 우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가 전하는 것을 거부 할 때 우리 스스로가 성경적으로 훌륭한 무리와 함께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노아, 예레미아,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 자신까지도 지상에서 그들의 사역을 끝낼 때까지 몇 안되는 회심자들 밖에 만날 수 없었다. 물론 그들은 전도자로서 성공을 거둘 수 있는 유일한 방법에 굉장히 탁월했다 – 그들은 전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메시지로부터 벗어난 적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시는 만큼 전도자적인 성공을 거두기 위해 우리가 벤치마킹 해야 할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딤후 4:2) 복음을 전하도록 부르셨다. 우리는 하나님을 소개하고, 죄인들을 고발하고,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고 복음을 믿도록 간청해야한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선택한 자들을 이끄실 것이고 (요 6:44) 그리스도는 계속해서 교회를 세워가실 것이다(마 16:18).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전하는 것이다. 회심하도록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 단순한 원리를 헷갈려 한다면 우리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원문을 보시려면 -> https://www.gty.org/library/blog/B180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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