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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하구 70리길은 행정구역상 창원시인 진해구 용원에서 시작한다. 예전에 ‘용원굴’하면 전국에서 손꼽는 자연산 굴이었다. 향이 좋고 맛이 좋아 비싼 값에 팔렸다. 이제 용원굴은 고사하고 갇힌 포구가 되어 바다로 향하는 뱃길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다만 여전히 인근바다의 고깃배들은 용원으로 들어와 싱싱한 해물을 풀어 놓는다. 오늘날 용원포구의 존재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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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지갯벌로 철새들이 날아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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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산공단과 부산신항 매립지에는 이런 아픔이 묻혀 있다. 그럼에도 용원이 기억되어야 할 이유는 망산도(望山島)가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우리나라 근대항로의 기원으로 기록되는 최초의 공간이다. 진해시 용원에서 김해로 들어오는 수로에 위치하며 AD 48년 수로왕이 허황후를 맞이하기 위해 붉은 깃발을 달고 오는 배를 발견하고 불을 피워 망산도로 인도했다는 그 대목이다. 허황옥이 타고 온 돌배는 망산도에서 약 230m 떨어진 곳에서 뒤집혀 유주암(維舟岩)이 되었다. 녹산산업도로 송정공원 못미처 (주)친구 앞 횡단보도 건너 해안가에서 볼 수 있다.
망산도로부터 30분 거리에 있는 녹승3호교를 건너면 갇혔던 바다가 열린다. 신항만을 위해 본디 바다가 갇혔다. 옛 해안선으로 치면 송정에 해당한다. 송정은 1950년대까지 염전이 활발했던 곳으로 요릿집과 여관, 5일장이 설 정도로 흥청거렸던 곳이지만 마을 앞바다가 메워지면서 뒤로 나앉아 파묻힌 형국이 됐다. JBS물류센터를 지나면 거가대로교가 머리 위로 지난다.
바다가 푸른 물옷을 벗고 있다. 하루 두 번 이 바다는 물때를 달리하며 옷을 벗었다 입었다가를 반복한다. 물속에 잠겨 있던 거대한 석화밭이 드러난다. 녹산 갯벌을 특징짓는 장면 중의 하나다. 참나무를 깎아 만든 목책에는 굴종패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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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낙동강하구둑 입구 사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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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가덕 앞바다와 신호 녹산 갯벌은 해면 전체가 석화밭으로 일종의 인큐베이터 같은 기능을 수행한다. 다시 말해 조가비 하나에 굴 종패를 부착한 뒤 일정한 크기가 될 때까지 키워 다른 지역으로 팔기도 하고 키우기도 한다. 그만큼 해수유통이 좋고 유기물의 유입이 활발해 생장이 월등히 뛰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이곳은 검은머리갈매기며 노랑부리백로 등 국제적 멸종위기종의 서식처로도 널리 알려진 곳이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갯벌의 상태는 나빠지고 있다. 인근 대규모 개발 때문이다.
독일의 경우 1988년부터 모든 갯벌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했다. 녹산이나 이웃한 신호 갯벌과 비교하면 생물상이나 경관 등에 한참 뒤진다. 대한민국의 갯벌은 전체 국토면적의 3%쯤 된다. 부산·경남은 제주도를 포함해 그중에 5%에 불과하며 또 그중 절반 이상이 낙동강 하구임을 고려할 때 갯벌자원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이 요구된다. 특히나 낙동강하구 갯벌은 성질이 다른 갯벌이 혼재하고 있어 그 관리나 보전은 특별해야 한다.
현재 일대의 해역은 문화재보호구역으로부터 시작해서 자연환경보전지역, 자연생태계보전지역, 습지보전지역 등 보호 장치만 해도 대여섯 개쯤 된다. 대한민국에서 이런 지위는 낙동강하구가 유일하다. 그러나 그간의 이런 저런 개발은 이런 보호구역을 우습게 만들었다. ‘환경이 밥 먹여 주냐’는 개발주의가 여전히 팽배한 세상이다. 기후변화로 전 지구가 몸살을 앓고, 그 영향을 몸소 겪고 있으면서도 개발이라면 환장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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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녹산 갯벌 너머 부산신항의 크레인들이 아치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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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산 갯벌 수변길 최근 개통
최근 녹산 갯벌 수변길이 개통했다. 신호리까지 약 4km 구간인데 민관의 협치가 처음으로 빛을 발한 곳이다. 2003년 태풍 매미가 녹산공단을 휩쓸었다. 마침 밀물 때라 피해는 심각했다.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갯벌 50m를 추가 매립하고 방파제를 설치하고자 했으나 환경단체의 반대와 소송 등으로 10m로 축소되었다. 그리고 사람의 출입을 막고자 했으나 생태산업단지조성사업단이 지역 환경단체와 문화재청 등 관계기관의 협의를 통해 생태탐방을 겸한 산책길을 새로이 선보이게 됐다. 보행로와 자전거길을 합쳐 폭 4m의 산책로가 열렸다.
길은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 있다. 테트라포트와 방파제의 높이를 초·중등생 눈높이로 하여 조망점은 어디서나 뛰어나다. 폐기물 매립장을 돌아서면 삼성자동차 후문 쪽으로 하여 부산환경공단 녹산사업소에서 다시 해안으로 나온다. 이른 아침 신호활어센터 선착장으로 새벽조업을 마치고 배 한가득 파래며 김을 싣고 들어오는 어선들이 속속 귀항한다. 향긋한 파래 내음이 진동한다. 계절의 변화를 감지한다. 이쯤에서 다리쉼을 하고 신호해안길로 접어든다.
송림이 해안을 따라 이어진다. 그 앞에 펼쳐진 풍경은 누구라도 발을 멈추게 한다. 신호 갯벌 뒤로 진우도가 길게 누웠고 가덕도의 연대봉 자락이 치마처럼 겹겹 바다에 잠긴 모습이다. 평화롭기 그지없다. 간간이 알락꼬리마도요들이 청아한 소리를 흘리며 수면을 날아갈 뿐이다.
아들이 김공장을 한다는 여든두 살의 손귀순 할머니를 만나 열여덟 살에 동래에서 시집와 이날까지 신호리에서 평생을 보낸 이야기를 듣는다. 모시조개를 캐기 위해 갯벌을 누비고 다녔고 땔감을 장만하기 위해 진우도까지 걸어 다녔다고 했다. 이 바다의 겨울 푸른빛이 너무 좋아 넋을 잃을 정도였다고 했다. 거기에 흰 빛깔의 고니 수천 마리가 내려앉았다고 했다. 안타깝게도 더 이상 신호 갯벌로 고니는 깃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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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지에서 을숙도 가는 수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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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전 성했던 신호리 해안선 2km 밀려나
이곳이 처음인 듯한 초행자가 “수평선에 걸쳐 있는 저 방파제는 언제 만들었냐”고 묻기에 모래사주라고 했더니 놀라워한다. 하긴 신자도며 진우도, 대마등 같은 모래사주가 없었다면 그 많은 태풍에 산업단지며 주거단지가 온전했을까 싶다. 뿐만 아니다.
저 광활한 갯벌은 말 그대로 자연하수처리장이다. 육지로부터 유입된 오폐수를 갯벌은 품안의 식구들인 게, 조개, 갯지렁이 같은 저서생물로 하여금 분해하게 하여 건강한 생태계로 변화시키는 장치를 1년 365일 하루도 빠짐없이 가동 중이다.
신호리는 196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염전이 성했던 곳이라 한다. 동남쪽의 막개염전과 북쪽의 북매염전이 유명했다. 1967년 간척사업이 있었고 그때 신도(新島)가 육지가 되면서 이어 주던 사암나루도 사라졌다. 옛 해안은 화전과 송정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신호녹산공단 조성을 위한 매립으로 해안선은 원래 있던 산자락으로부터 최대 2km 밖까지 밀려났다. 그 선이 오늘의 신호-녹산 해안이다.
산업단지길을 통해 삼성르노에서 신호대교 쪽으로 방향을 튼다. 삼성르노공장이 입지한 곳은 화전 사암지역으로 예전에 신도에서 배로 오가던 지역이다. 현재 화전산업단지가 조성 중인 곳으로 사암이란 지명의 유래가 흥미롭다. 사암은 ‘너 바위(汝岩)’가 본래 이름인데 네 개의 바위가 각기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임진왜란 때 옥포해전에 크게 패한 왜의 수군들이 가덕 수로 사이로 빠져 나오다 이곳에 서 있는 사암이 마치 조선 수군의 장군들처럼 보여 뒤돌아 가려다 조선 수군에게 혼이 났다고 한다. 이후 이것이 바위인 줄 알고 “네가 바위였구나” 했다는 데서 너 바위라고 부른 사연이 전한다.
신호대교는 1997년 개통했다. 강서구 명지동과 신호동을 잇는 교량으로 길이 840m의 아치와 강상형 합성교 형식이다. 낚시꾼들이 만원이다. 새끼농어를 비롯해 숭어와 도다리가 잡힌다고 한다. 기수역 어종들이다. 다리 중간쯤에서 바다 쪽을 조망하면 일대의 변화를 보여주는 지표 같은 아파트들이 서낙동강 양안에 서 있다. 수평선 우측 인공생태계와 맞물려 있는 진우도와 가덕도는 아직 원형을 간직하고 있어 경관이 자연스럽다.
진우도는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04년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서낙동강이 실어 나른 토사가 쌓이고 쌓이기를 거듭하다 마침내 대기 중으로 드러난 진우도는 당시 ‘왜선등’으로 기록된 모래섬이었다. 1956년 방모 목사가 전쟁고아들을 데리고 진우원이란 고아원을 세우고 한동안 기거했지만 1959년 추석 전날 한반도를 피습한 태풍 ‘사라호’에 의해 인명이 사상한 이후 진우원은 경남 진영으로 이전하고 이름만 남아 진우도로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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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새들의 터전인 명지갯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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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로, 왜가리, 도요새 등 거의 텃새화한 조류 많아
신호대교 끝에서 90도 꺾어 명지오션타워 산책길로 내려선다. 해안산책로가 끝나는 명호사거리까지는 한 시간 정도 걸린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풍광에 사로잡혀 두 시간을 넘을 때가 많다. 더욱이 이제 겨울철새들의 도래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11월은 그 절정기다. 하여 혹이나 이 길을 걸을 때는 소리치거나 소란을 떨어선 곤란하다. 이곳은 새들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야생의 새들에게 있어 인간은 도움이 안 된다. 늘 그들의 영역을 넘보다 못해 침범한다.
낙동강하구에서 기록된 조류는 15목 43과 209종이다. 이 중 도요목 58종(27.8%), 참새목 49종(23.4%), 기러기목 33종(15.8%), 황새목 18종(8.6%), 매목 18종(8.6%), 두루미목 11종(5.3%)이며 나머지 목은 5종 이하다.
갈대밭 너머 대마등이 펼쳐져 있다. V자를 그리며 기러기들이 비행한다. 갯벌에는 청둥오리며 혹부리오리, 큰고니들이 떼지어 웅성거리고 있다. 도요들은 종종걸음으로 갯벌을 돌아다니며 갯지렁이를 뽑아 올린다. 도요는 어부지리(漁父之利)라는 고사성어에 등장하는 새다. 민물도요 수천 마리가 떼를 지어 날다 선회비행을 한다. 순간 그 날갯짓이 보석처럼 빛나 절로 감탄사를 남발한다. 낙동강하구에서 이 친구들은 거의 텃새화되었다. 여름철새인 백로류나 왜가리는 이미 오래 전에 정착했다.
좀도요들이 스친다. 여리디 여린 이 친구들은 험난한 파도 너머 대양을 가로질러 날아온다. 참새만 한 크기니 그야말로 주먹만 하다. 중간기착지인 우리나라 갯벌에서 보름 정도 쉬면서 영양분을 섭취하는데 봄과 가을 두 번의 고단한 여행을 한다. 시베리아에서 겨울을 날 호주까지 쉼 없이 비행한다. 얼마나 경이로운가. 그런데 그들이 머물 갯벌은 시나브로 사라지고 있다.
명지 남단 갯벌은 이들의 군무를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이다. 도심에서 30분 거리에 이렇듯 새를 마음껏 볼 수 있는 곳은 세계적으로도 낙동강하구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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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새들의 터전인 명지갯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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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조대에서 을숙도대교를 따라 1km 가다 횡단보도를 건넌다. 파밭길을 가기 위해서다. 고랑을 두고 둑을 따라 대파는 명지들을 녹색으로 물들이고 있다. 하지만 이 장면도 조만간 사라질 터이다. 명지경제자유구역이 들어서기 때문이다.
광복 후 각처 영세노무자들이 정착해 부락을 형성했다는 전등(田嶝)마을을 지난다. 길바닥에는 재첩 부스러기가 수북이 쌓여 있다. 우리가 늘 접하던 먹을거리 중의 하나지만 이제 낙동강 재첩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전에 낙동강 재첩은 어른 엄지크기만 인정했다. 체로 걸러 낼 때 작은 것은 다 버렸다. 그렇게 가려낸 알맹이를 오랜 시간 고아서 만든 것이 곧 재첩국이다. 이 재첩국을 아지매들이 양철동이에 담아서 새벽이면 머리에 이고 시내로 나왔다. 엄궁 사람들은 구덕고개를 넘고, 하단 사람들은 대티고개를 넘어 부산거리에서 “재첩국 사이소, 재첩국!” 하고 외치면서 골목길을 누비며 팔았다. 그 소리가 아련하다. 낙동강하구에 다시 재첩이 돌아오는 날을 기대해 본다.
명지(鳴旨)는 하구에서 홍수피해가 없었던 곳이었다. 일명 물에 떠 있는 섬으로 사다리 높이만 올라도 동 전체를 어림해 볼 수 있었다. 사람의 거주는 500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특산물은 소금으로 영남 일원에 공급되었다. 제염방법은 천일제염(天日製鹽) 방법과 전통적인 전오제염(煎敖製鹽) 방식을 절충한 것이다. 생산된 소금은 현재의 대동면 마산(산산) 부근에 소금창고가 있어 선박으로 이곳으로 운반했고 이 소금을 실은 황포돛배가 낙동강을 따라 의령 박진(泊津), 초계-가무창(加茂倉), 밤마리, 현풍-세암(洗巖), 고령-개포, 대구-사문진, 상주-명덕진, 칠곡-석전 등을 오르내렸다.
명지의 소금생산 기록은 ‘승정원일기’(영조 7년.1731년)에 “왕과 신하가 명지에서 소금 만드는 일로 의논을 했다”는 대목이 있다. 한 해 3,000섬을 생산했는데 광복 뒤 124정보에 4,000명의 일꾼이 연간 20만 가마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후 전국적으로 염전이 늘어나 경제성을 상실한 뒤 소금밭은 채소밭으로 대체되었다. 명지의 특산물은 소금에서 1960~1970년대 ‘낙동김’으로 명성을 날리다 현재 파로 전환되었다. 명지파의 특징은 ‘하부’ 뿌리에서 줄기까지 흰 부분이 많아 인기가 좋다. 원산지는 명지 내 조동마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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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낙동강하구의 저물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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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숙도는 잃어버린 것에 대한 처절한 반성의 공간
영강선착장으로 향한다. 영강(永康)은 중리의 동편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어 바다로 나가는 길목이다. 이 마을은 옛날에는 동문이라고도 하였고 광복 후에는 영구히 평안하게 해달라는 뜻에서 영강마을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마을의 형성 역사는 250년쯤으로 짐작되며 동사무소, 명지초등학교, 파출소 등 각 기관이 마을에 위치하고 있어 명지의 행정 중심 마을이다.
포구 위로 명호교가 지난다. 명호교를 경계로 중리는 안쪽에 바깥쪽은 진목이다. 굴다리를 벗어나면 선착장이다. 새동네까지는 10분 남짓한 거리다. 명지IC에서 을숙도 방향으로 가는 길은 하굿둑 서편 수문 증설공사로 어수선하다. 서둘러 이동한다.
에코센터를 지나 곧장 을숙도 남단으로 향한다. ‘새(乙)가 많이 살고 물이 맑은(淑)섬’이라는 을숙도는 낙동강 하구의 상징이다. 허나 너무도 많은 시달림이 있었다. 원래 을숙도는 일웅도를 비롯해 3~4개의 모래섬이었으나 하굿둑을 만들면서 하나가 되었다.
강 건너 승학산이 우뚝하다. 변함없음이다. 하지만 아파트로 가득한 자락과 강변은 또 한번 세월의 무상함을 생각하게 한다. 야속한 일이다. 그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을숙도 남단까지는 왕복 6.4km 거리다. 비록 을숙도대교가 관통하긴 하나 철새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눈부시다. 한때 이 다리의 건설 여부를 두고 지역사회가 첨예한 갈등을 겪은 바 있다. 다리 건설이 철새서식에 크나 큰 영향을 주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다리는 놓였지만 직선이 아니고 선형으로 만들어졌다.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을숙도는 잃어버린 것에 대한 처절한 반성의 공간이자 재생의 공간으로, 공존의 실험이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기억되어야 한다. 겨울이면 이곳은 고니들의 울음이 구슬픈 퉁소 소리처럼 귀를 적시고 가덕도로 넘어가는 선홍빛 해가 피를 토하듯 온통 붉은빛으로 물든다.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면 갈밭을 돌아다니는 방게며 말똥게들이 보이는 듯하다. 잘려나간 십리등의 갈밭 위로 민물가마우지들이 다대포 방향으로 날아오른다.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낙동강하구는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돌아 나오는 길, 을숙도 파출소를 지나 하구둑 위로 난 도로를 따라 걷는다. 바람이 쌩쌩 분다. 강물은 여전히 갇혀 있다. 더불어 흐르지 못하는 나는 어찌해야 하나. 우두커니 서서 하구 쪽을 본다. 남해가 지척인데 오도 가도 못하는 강물은 벌써부터 몸을 뒤척인다. 그 신음소리 저녁놀에 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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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을숙도 남단의 고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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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 28㎞ 시간 8시간
찾아가는 길 부산역에서 도시철도 1호선을 타고 하단역에서 하차 후 버스 환승한다. 부산역에서 용원 망산도까지는 약 1시간 소요된다.
버스노선은 일반버스 520, 58-2, 좌석버스 58-1,
마을버스 강서구 1, 9-1, 17, 21 등이 있다.
특징 하구70리 갈맷길은 두 줄기의 낙동강이 남해와 만나면서 두 팔을 벌린 듯한 형상을 볼 수 있는 길이다. 해안사주와 철새도래지로서 전국적 명성을 가진 곳이다. 기종점을 하단이나 용원 어디로 하든 무방하나 귀가를 고려할 경우 진해 용원 망산도에서의 출발이 좋다. 두 번에 나누어 걷는 것이 바람직하며, 시간적 여유가 없다면 신호에서 하단까지도 좋다.
망산도는 가야제국의 상징공간으로 수로왕과 아유타국 허황후의 국제적 만남이 시작된 곳이다. 길은 국가공단과 신호공단, 명지주거단지로 이어지는 해안수변길이다. 최근 녹산길이 개통되며 부산해안 갈맷길 700리가 완성되었다. 시각적으로 개방된 수역인 데다 철새도래지로서의 사주와 갈대, 철새들의 군무를 수시로 볼 수 있다.
출발지 용원시장과 종착지를 앞두고 명지시장 등에서 갓 잡아 올린 싱싱한 횟감을 비롯해 맛조개로 끓인 맛탕과 갈매조개탕 등을 맛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