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묵주이야기 신앙 유산으로 물려줄 묵주 모든 것이 낮선 타국땅. 미국인들이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한다는 땅이라고는 하지만, 알래스카의 겨울은 길고 혹독했고, 추웠다.
모든 게 힘겨웠지만, 가족이 함께 살게 됐다는 기쁨에 난 참 행복했다. 월남전이 한창이던 1960년대 후반 7년간 남편은 기술자로 베트남에 파견돼 있었고,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남편은 사업이 어려워지자 또 다시 홀로 미국으로 떠나 알래스카에 살면서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기쁨 속에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찾아간 곳이 미국 성당이었다. 피부색과 언어는 달랐지만, 주님을 향한 전례는 똑같았다. 그때부터 난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머나먼 타국 땅에서 가장 의지가 되는 것은 주님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 주보에 한국 신부가 부임한다는 내용이 공지됐다. 그때가 1981년이었다. 알래스카에 첫 한국인 사제로 대구대교구에서 김창문 신부가 부임, 사목회와 성모회를 구성했다. 20명 남짓한 공동체였지만, 열심히 기도하면서 신자들도 차츰 늘었고, 나도 열심한 신자로 살겠다는 다짐도 했다.
미국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면서 나도 사업을 시작했다. 알래스카 최초 한인 슈퍼마켓이었다. 부지런히 모아야지, 하는 생각에 난 교만에 빠졌다. 세상일에만 매달리며 하느님 은혜에 감사하지도 못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엄청난 빚더미에 싸여 허우적대고 있었다.
어느 날 미 동부 LA에서 재속 프란치스칸 한 사람이 알래스카를 찾았다. 그와의 만남이 나를 묵주기도로 이끌었다. 내가 운영하는 가게에 찾아온 그는 내가 신자라는 걸 알아보고는 성모께 전구하라는 말과 함께 묵주기도를 권했다. 그렇지만 그 때도 난 당장 내가 처한 현실이 어려워 삶에 급급했다. 결국 며칠 가지 않아 문제가 터졌다. 먼 타국에서 아침, 저녁으로 잠을 설쳐가며 힘겹게 일군 가게를 한꺼번에 날려버릴 처지에 놓였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 난 LA에서 재속 프란치스칸 피정이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2박 3일간 피정. 그곳에서 난 하느님께 무릎을 꿇고 밤새 묵주를 들고 기도를 바쳤다. "살려주세요" 하며 성모께 매달렸다. 신앙인으로서의 성숙된 삶보다 세속적 삶에 매달려 무엇이 참된 삶인지 모르고 산 지난날을 밤새 울며 뉘우쳤다.
묵주기도 안에서 성모님은 내게 무엇이 진정성 있는 삶인지를 깨우쳐 주셨다. 돌이켜 보면 그때 죽을 만큼 어려운 처지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절실하게 기도도 바치지 않았을 것이고, 그런 깨우침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날 밤 묵주기도 이후 난 지금까지 어떠한 상황에서도 묵주기도와 시간전례(성무일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자식과 손자, 손녀들에게도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줘야겠다고 결심했다. 지금은 모든 게 안정됐고, 날마다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바친다.
하느님께는 결코 공짜가 없다. 우리가 기도하는 만큼 주신다. 특히 성당 자매님들은 성모께 의탁하라고, 성모님께선 우리 묵주기도를 기다리고 계신다고 꼭 말씀 드리고 싶다. 묵주기도에는 예수님 생애가 있다. 간곡히 권한다. 성모님을 생각하면 어떤 고통과 슬픔도 견딜수 있다.
권영숙(엘리사벳, 미국 앵커리지 진보백화점 대표)
Whispering Hope (희망의 속삭임) - Phil Coul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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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성모님을 생각하면 어떤 고통과 슬픔도 견딜수 있다. 묵상해 보면서.....